절망적일 때(열왕기하 7:3-10)26.05.31.주일설교
정신의학 교수인 스턴은 진정 희망이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참가자들에게 집에서 작성해오라고 나눠준 설문지에는 희망에 대한 간단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미래를 희망적으로 생각합니까?"
응답자의 91퍼센트에 달하는 722명이 "예"라고 답했으며,
9퍼센트인 73명이 "아니오"라고 답했습니다.
연구를 마친 뒤 두 그룹에 속한 사람들에게 모두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놔두었습니다.
연구진은 두 그룹의 대상자들을 멀리서 관찰했습니다.
10년 후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절망 그룹에서는 29퍼센트가 사망했고,
희망 그룹에서는 11퍼센트가 사망했습니다.
자살자는 없었고, 암으로 사망한 사람은 25명, 심장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은 25명이었는데, 이 두 질환의 사망자를 전체 대상자 대비 비율로 살펴보면 희망 그룹의 경우 2.8퍼센트,
절망 그룹의 경우 7.2퍼센트였습니다.
즉 모든 차이점을 통계적으로 통제하면, 미래가 희망적이라고 말한 사람들에 비해 절망적이라고 답한 사람들이 추적 관찰 기간 동안 사망한 확률은 2배 이상 높았습니다.
[희망과 함께 가라(셰인 J. 로페즈 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희망은 기분을 고양시켜주고, 에너지를 충전해주며,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고 말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희망은 우리의 인생을 빠꿀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병환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에게는 소망이 없는 상황입니다.
사마리아 성은 아람군대에 둘려 쌓여서 전쟁 중입니다.
모든 양식이 끊어집니다. 먹을 것 마실 것 모든 것이 끊어져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앞장인 6장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 자녀들을 잡아먹었다고 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절망의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도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절망적인 문제가운데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절망적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소망을 품고 일어나야 합니다.
당시 사마리아 성은 아람 군대에게 포위당해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성문 어기에 있던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은 사회적으로 격리된 자들이었고, 구걸할 양식마저 끊어진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3절입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4절...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성 안에 들어가도 굶어 죽고, 여기 가만히 있어도 죽는다.”
나병 환자들은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그들이 선택한 길은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을 확률이 더 높아 보이는 무모한 선택 같았지만,
'살려 두면 살고, 죽이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움직일 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일어나 걸을 때, 기적이 시작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절망상태에서 결국 죽을 뿐입니다.
그러나 비록 약하고 부족한 발걸음일지라도 소망을 품고 일어설 때, 하나님은 그 작은 발자국을 승리의 군대 소리로 바꾸어 주십니다. 5,6,7절을 읽겠습니다.
“5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6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7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나병환자들이 아람진영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하나님은 아람 군대에 큰 군대의 말소리와 병거 소리를 듣게 하셔서 그들을 도망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절망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소망의 땅으로 걸어야 합니다.
미국의 한 해양생물 연구소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아주 큰 대형 수족관 중간에 투명한 유리 가림막을 설치한 뒤, 한쪽에는 굶주린 상어를 넣고 다른 한쪽에는 상어가 좋아하는 물고기들을 넣었습니다.
상어는 물고기들을 보자마자 거침없이 돌진했습니다.
하지만 쾅! 하고 투명 유리 벽에 부딪혔습니다.
상어는 포기하지 않고 수십 번을 더 부딪혔습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유리 벽에 부딪혀 코가 헐고 상처가 나자, 상어는 마침내 돌진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저쪽으로 가면 아프다', '저 물고기들은 내가 먹을 수 없다'는 절망과 한계를 스스로 학습한 것입니다.
일주일 후, 연구원들이 중간의 투명 유리 가림막을 슬그머니 치워버렸습니다. 이제 상어는 조금만 헤엄쳐 가면 물고기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어는 어떻게 했을까요?
상어는 유리 벽이 있던 그 경계선 근처까지만 갔다가,
스스로 돌아서서 수족관 바닥을 무기력하게 맴돌 뿐이었습니다. 눈앞에 진짜 먹이가 가득하고, 장벽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안 돼, 해봤자 상처만 입을 뿐이야"는 생각에 갇혀 결국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나병 환자들을 보십시오.
현실은 상어보다 더 참혹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체념의 유리 벽을 깨부수고 일어났습니다.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하고
발을 내디뎠을 때,
아람 군대는 이미 도망치고 장벽은 사라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절망의 잘리에서 일어아야 합니다.
소망을 품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9월 8일부터 1944년 1월 27일까지, 나치 독일군이 소련 제2의 도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사방으로 포위하고 완전히 고립시킨 사건이 있습니다. 무려 872일 (2년 5개월) 동안 이어졌습니다.
나치 군대는 레닌그라드의 동서남북을 완전히 에워쌌습니다. 땅의 모든 길, 인간적인 모든 도움의 줄이 끊어졌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이 도시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겠다"며 식량, 전기, 수도, 가스를 모두 끊고 말려 죽이는 '굶주림 전략’ 을 택했습니다.
겨울에는 영하 30~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 속에서 배급된 식량은 하루 고작 빵 125g(심지어 톱밥 섞인 빵)이 전부였습니다. 새, 쥐, 반려동물은 물론 가죽 구두를 끓여 먹을 정도로 참혹했으며, 약 100만 명 이상의 시민이 굶주림과 추위, 포격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유일한 보급로는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Lake Ladoga) 빙판길뿐이었습니다. 얼음이 깨져 차가 물에 빠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길을 통해 아주 최소한의 식량이 들어왔고, 아이들을 대피시켰습니다.
시민들은 혹독한 절망 속에서도 공장을 가동해 무기를 만들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서로를 격려하며 끝까지 버텨냈습니다. 결국 1944년 1월, 소련군의 반격으로 봉쇄가 완전히 풀리며 승리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질병으로, 재정으로, 인간관계로
사방이 꽉 막혀 숨조차 쉬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게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연결된 '하늘의 생명 길'이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의 줄만 붙잡고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적인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의 저서《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곳은 인간의 존엄성이 완전히 말살되고, 언제 가스실로 끌려갈지 모르는 극도의 '절망'만이 존재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수용소의 의사였던 저자는 한 가지 흥미롭고도 가슴 아픈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수용소에서 가장 먼저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몸이 약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책에는 크리스마스부터 새해 사이에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질병이나 굶주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막연하게 ‘크리스마스가 되면 해방되어 가족을 만날 수 있겠지’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 막연한 낙관론이 거대한 절망으로 바뀌면서 하루아침에 면역력이 떨어지고 스스로 삶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이 절망의 지옥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그들은 ‘살아야 할 이유와 사명’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향에 남겨진 아이를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사명,
나가서 이 비극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사람들은 유리 조각으로 면역력을 유지하기 위해 면도를 하고, 썩은 국물 한 모금도 감사히 삼키며 버텨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Why)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How)도 견뎌낼 수 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절망은 우리에게 "이제 끝났다"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도우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이 문제 해결 자가 되신다는 소망을 두고 나아갈 때
놀라운 기적이 여러분 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시편 146: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는 조금만 환경이 어려워져도 불평하고,
눈앞에 문제가 생기면 원망의 말을 쏟아내곤 합니다.
평생을 보이지 않는 어둠과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살았지만, 그 누구보다 찬란한 감사의 삶을 살았던 한 믿음의 여성이 있습니다. 바로 헬렌 켈러입니다.
그녀는 생후 19개월 만에 심한 앓음을 겪고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니,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삼중고(三重苦)의 감옥에 갇힌 채 어린 시절을 분노와 좌절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설리번 선생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후 그녀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고, 들리지 않는 귀로 세밀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노년에 이르렀을 때,
한 신문 기자가 그녀를 찾아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헬렌 켈러 여사님, 당신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혹독한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솔직히 그것 때문에 불평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해 본 적은 없으십니까?"
그때 헬렌 켈러가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내 생애에 행복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과분한 은혜에 감사하느라 불평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어떻게 평생을 암흑 속에서 산 사람이 단 하루도 불행한 날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헬렌 켈러는 육신의 눈이 닫힌 대신 영원의 눈,
즉 ‘믿음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비록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은 볼 수 없었지만,
믿음의 눈으로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생전에 맹인 찬송 작가였던 패니 크로스비 여사를 만나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두 사람은 육신의 눈은 어두웠지만,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소리 높여 불렀던 고백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288장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무엇 때문에 절망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불가능이 가능하게 하십니다.
절망이 희망이 되게 하십니다.
죽음의 자리가 생명의 자리가 되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