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리앗을 죽이지 마십시오.(사무엘상 17:41~47)
26.06.07.주일설교
한국 현대소설 중에 이인성 작가가 쓴 『당신에 대해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첫 문장이 이렇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려는 분은 잠깐 동안 눈을 감으세요.”
소설을 읽으려면 눈을 떠야 하는데, 작가는 도리어 눈을 감으라고 말합니다. 철학에서는 이를 ‘판단중지’라고 부릅니다. 나의지식, 나의 경험, 나의 감정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너무 크게 뜨고 상대를 쉽게 심판합니다.
"저 사람은 원래 성격이 저래."
"저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야.”
'눈을 감는다'는 것은 내 안의 편견을 없애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내 기준대로 심판하려는 '내 안의 교만함과 조급함'에 눈을 감는 것입니다.
오늘 누군가를 오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 사람을 쳐다보기를 멈추고 잠시 눈을 감으십시오.
내 판단을 멈추고 하나님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은 주일학교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성경에서 가장 유명하고 익숙한 이야기,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늘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골리앗 같은 문제들을 소년 다윗처럼 믿음의 물맷돌로 쳐서 무너뜨리자! 박살을 내자! 승리하자!"
그런데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가진 성경적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선포되는 설교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골리앗을 죽이지 마십시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내 손으로 저 골리앗을 죽이겠다고 몸부림치고 버둥거리는 바로 그 처절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리학에 ‘백곰 효과’ 라는 아주 유명한 마음의 법칙이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자 다니엘 웨그너 교수가 인간의 통제 유연성을 실험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단순한 과제를 주었습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5분 동안 자유롭게 아무 생각이나 하셔도 좋습니다. 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얀 백곰’ 만은 절대 생각하지 마십시오.
머릿속에 백곰이 떠오르면 이 종을 치십시오.”
결과가 어땠을까요? 째깍째깍 5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실험실 안은 종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사람들은,
5분 내내 머릿속에 온통 하얀 백곰이 얼음판을 걸어 다니고 춤을 추는 통에 미칠 지경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뇌는 그 생각에 완벽하게 중독되어 버리는 현상, 이것이 바로 백곰 효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삶에 거대한 위기가 찾아옵니다.
의사에게 청천벽력처럼 듣게 된 건강의 적신호,
물질의 고통,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의 문제,
남모를 눈물과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앓이가
‘거대한 거인 골리앗’이 되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 부르짖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골리앗을 죽여주십시오!
저 원수 같은 인간 좀 치워주십시오!
저 문제만 없어지면 내가 살겠습니다!
저 부도 위기만 넘어가면 내가 숨을 쉬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솔직해집시다.
그렇게 뜨겁게 기도하고 나면 마음이 평안합니까?
온통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온통 문제만 생각납니다. 골리앗 생각뿐입니다.
‘그 돈을 어떻게 메꿔야 하나?
병원 정밀 검사 결과가 암으로 나오면 어쩌나?
내 자식의 인생은 어떻게 되나?’
여러분,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골리앗을 이기게 해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실상은 24시간 내내 주님이 아닌 골리앗을 깊이 ‘묵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속한 사무엘상 17장의 영적 배경을 보면,
사울 왕을 비롯한 이스라엘 군대 전체가 골리앗이라는 장수 앞에서 무려 40일 동안이나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단 한 사람도 그 거인 앞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 즉 현대 수치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2미터 90센티미터에 달하는 괴물 같은 거구였습니다.
머리에는 번쩍이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무려 57킬로그램이 넘는 청동 비늘 갑옷을 입었으며, 그가 손에 쥔 창날의 무게만 해도 7킬로그램이 넘었다고
성경은 세밀하게 받아 적고 있습니다.
왜 성경이 이렇게 골리앗의 스펙을 자세히 기록했을까요?
당시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대의 시선이 온통 골리앗의
‘크기’와 그가 가진 ‘무기’, 그리고 그가 내뿜는 ‘위협적인 말’에 완전히 압도되어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스라엘 군대가 벌벌 떨며 숨어 있을 때, 만군의 여호와를 바라본 소년 다윗의 시선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군대에게 골리앗은 ‘내가 목숨을 걸고 싸워도 절대 이길 수 없는 거대한 통곡의 벽’이었지만, 다윗의 눈에 비친 골리앗은 그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겁 없이 모욕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처참하게 쓰러질 하찮은 할례 없는 이방인’에 불과했습니다.
다윗의 눈에는 골리앗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골리앗보다 수천만 배,
수억 배 더 크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에 나가겠다는 소년 다윗을 보며 사울 왕은 기가 막혔습니다. 군복도 입지 않은 아이가 나가겠다고 하니 안쓰러웠던 사울 왕은 자기의 놋 투구를 다윗의 머리에 씌워줍니다. 그리고 왕이 입는 무거운 청동 갑옷을 입혀주고,
손에는 조선 제일검 같은 서슬 퍼런 칼을 쥐여주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방법입니다. 인간의 계산입니다.
"최소한 이 정도 무기는 쥐고 나가야 골리앗과 싸워 명함이라도 내밀지 않겠느냐"는 인간의 경험과 합리주의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왕의 갑옷을 입고 몇 발자국 걸어보더니
"왕에게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는 거추장스러운 세상의 갑옷과 투구와 칼을 미련 없이 다 벗어던졌습니다. 맨몸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골리앗 같은 문제가 터지면,
어떻게든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내 인맥’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사방팔방으로 버둥거립니다.
사울이 입혀준 세상의 계산법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껴입고 싸우려 하니, 영적으로 숨이 막히고 지쳐서 공황장애가 오고 우울증이 오며 낙망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수영 선수들에게 물어보면, 초보자들이 물속에서 자꾸 가라앉고 물을 잔뜩 먹으며 죽을 고생을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고 합니다.
바로 ‘물에 뜨려고 온몸에 힘을 주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물에 빠져 죽지 않으려고, 살아남으려고 어깨와 다리에 힘을 잔뜩 주면, 근육이 돌멩이처럼 굳어지면서 물의 부력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물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구조대원들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기절을 시켜서라도 힘을 빼게 만드는 것입니다.
힘이 들어가 있으면 같이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수영의 시작은 화려한 영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서 힘을 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정확히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내 힘을 빼야 합니다.
내 계산, 내 경험, 내 인맥, 심지어 “내 열심과 내 능력으로 이 영적 전쟁을 치러서 골리앗을 박살 내리라!”는 영적 자만과 의지까지 다 벗어버려야 은혜의 바다에 뜨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7절에서 다윗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신앙의 대선포를 던집니다.
47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아멘!
다윗은 지금 자신의 물맷돌 실력이 올림픽 금메달 수준이었기 때문에 골리앗을 향해 호기롭게 달려간 것이 아닙니다. “이 전쟁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이 전쟁의 사령관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라는 사실을 100% 완벽하게 신뢰했기에, 다윗은 모든 인간적인 힘을 빼고 깃털처럼 가볍게 달려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큰 문제인 골리앗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큰 문제인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에 모세가 열두명의 정탐군을 여리고성으로 보내면서 땅을 탐지하라고 했습니다.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10명의 정탐꾼은 "우리는 메뚜기일 뿐이다" 라고 했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의 눈은 철저히 눈앞의 '장벽'과 '문제'에 고정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눈앞의 거인들을 더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묵상의 결과는 절망적인 악평이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수기 13:32-33)
그들은 거인을 보며 자신들을 '메뚜기'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밤새도록 하나님을 원망하고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본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했습니다.
모든 백성이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 새로운 지휘관을 세우자"며 소리 높여 울 때,
옷을 찢으며 일어선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그들의 눈 역시 거대한 아낙 자손을 보았고,
성벽이 하늘에 닿을 듯 높은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문제 뒤에 계신,
그 문제보다 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민수기 14:9)
세상은 그 거인들을 보며 "우리는 그들의 먹잇감이다"라며 도망쳤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아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밥(먹이)이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했을까요?
그들의 계산법 속에는 늘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문제인 골리앗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거센 풍랑을 만나 사투를 벌이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 찾아오셨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 사이에서 오직 한 사람, 베드로만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태복음 14:28-29)
예수님의 입에서 떨어진 "오라"라는 단 한 마디 말씀.
베드로는 그 말씀만 믿고 거친 바다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자연의 법칙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철썩이는 파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시퍼런 바다가 베드로의 발 밑에서 단단한 대지처럼 굳어졌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이신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동안, 그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기적 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을 보았을 때 찾아온 침몰했습니다.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한 걸음 잘 걸어가던 베드로의 눈에 순간적으로 다른 것이 들어왔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태복음 14:30)
성경은 베드로가 바다에 빠진 이유를
"바람을 보고 무서워..." 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바라보면 빠집니다. 침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골리앗은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어려운 문제는 내가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신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골리앗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