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망우당 묘소-봉분들이 대채로 낮다.
의병 창의할 때 본가에 들러 고유하고 선대묘소의 봉분을 없애고 망우당선생도 자신의 장례를 예장을 하지말라는 유언을 남겨 선생의 유언대로 한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선왕의 두 능은 무너지고 다섯廟宇가 불타버렸음은 신하된 자의 부끄러움 이로다.나의 장례는 상례를 갖추지도 말고 묘의 봉분은 겨우 흙이 덮힐 정도에서 그치도록 하라"
망우당 사후(광해군8년 별세) 114년이 지난 영조7년(1731) 한음 이덕형의 후예 현풍현감 이우인이 묘소를 참배한 후 실묘를 우려하여 사람들을 설득하여 봉분을 아주 낮게 만들었다.당시 경상도 관찰사 귀록 조현명이 대제학 이덕수로 부터 비문을 좌의정 조문명으로 부터 글씨를 받아 충익공 망우당의 뜻을 받들어 소박한 장식의 조그마한 비를 세웠다(1732).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에 있는 예연서원의 사당 충현사
망우당 사후 다음해 광해군9년(1617) 솔례마을에 충현사를 건립하였고 숙종원년(1674)
현풍현감 유천지가 서원을 창건하여 존재 곽준선생도 함께 봉안 하였다.1677년 예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고 1715년(숙종41년)가태리 구례마을로 이전하였고 6.25사변때 불따없어진 것을 1977년 강당과 삼문,1986년 사당을 복원하였다.1987년 5월 13일 대구광역시 기념물 11호로 지정되었다.
예연서원 앞에 있는 곽재우 나무와 신도비
신도비는 대제학 권유가 찬하였다
"중국에서는 과거시험에까지 공에 관한 내용을 출제하였으며 왜적들은 공의 지혜와 용기를 두려워하고 감복하여 일본역사에도 공의 공적을 기록하였으니 공은 실로 천하에 명성을 떨친것이다"-본문의 일부분이다.
땀나는 신도비로 유명하다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이 있던 해에 땀을 흘렸고 6.25때 폭격을 맞아 다시 건립 하였는데도 5.16과 4.19의거가 있던해에 땀을 흘렸다고 한다
신도비와 묘소 앞에 서면 어떻게 살아야 값진 인생인가를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