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律藏(규제집)에 쓰인 ‘상기’와 그 일상적인 쓰임새
그런데 규제집[律藏]은 일상적인 문제들을 다룬 것이어서 단어들의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뜻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다.
특히 정법 시대의 출가자는 처음 5년간은 규제집을 중점적으로 익히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규제집에 나오는 단어가 기본 뜻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사실은 필자 또한 출가 초기에 율원에서 규제집을 수학한 이력이 있었기에 ‘상기’라는 단어가 각인된 후에 ‘부류들’(니까야)을 열람하게 되었고
상기Sati라는 단어로 대입했을 때 모든 문맥에서 형통하다는 것을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2000년대 초 당시는 『사분율』에 나오는 ‘憶念’에 해당하는 원어가 ‘sati’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던 시기였다.)
이제야 본 미주에 해당하는 본문의 상기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본문의 ‘일곱 가지로 문제를 멈춤들’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상기시키는 규제’(sati vinaya, 憶念毘尼. 전재성 박사는 ‘기억에 입각한 조정’이라고 번역했다.)는 답바 존자가 음행을 저질렀다는 중상을 당해서 제정된 규제다. 이 규제는 당사자를 불러 세우는 ‘대면하는 규제’(現前毘尼)가 기본으로 적용된다.
대중 앞에 불려 나온 답바 존자에게 지난 행적을 꼬치꼬치 캐물어서 답바 존자가 지난 행적을 상기하며 진술하는 내용에서 음행한 사실이 없었다는 것을 밝히는 작업을 했다.
그래서 ‘SATI상기시키는 규제’라고 명명한 것이다. 요샛말로 알리바이를 통한 수사를 했다는 말이다. 물론 정법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수행자의 양심을 믿어주는 ‘자백으로 처리하기’를 범행 결정의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요즘처럼 뻔뻔한 거짓말이 범람하는 대중의 풍토에서는 신뢰가 안 가는 재판법일 수는 있다.
정법 시대에도 말법이 있기에 부처님 재세 시에 범행을 저질렀으면서도 참회하지 않고 재계의식에 앉아 있는 최초의 비구가 있었다. 동격자가 우글거리는 대중에서 참으로 간 큰 비구라 하겠다. 대승교도들처럼 동격자들을 우습게 봤는지도 모르겠다.
이 간 큰 비구의 일을 부처님은 “목갈라나여, ‘희유한 일입니다’(acchariyaṁ). 목갈라나여, ‘생기지 않았던 일입니다’(abbhutaṁ).”라고 평했다.(앙5-136) 부처님 당대의 비구들이 성자에서 범부들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거짓 없이 청정했는지를 반증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말법에서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수준일 수도 있다.
‘상기시키는 규제’(sati vinaya)에 대한 한역은 한역된 대표적인 5부율에서 모두 ‘憶念毘尼’(억념비니, ‘비니’는 ‘vinaya’의 음역이며, 한역으로 ‘律’이고 ‘규제’라는 뜻이다.)라고 번역되었다.
이렇게 한역된 규제집律藏들 모두가 일치된 번역을 하는 경우를 찾기란 쉽지 않다. 한역한 삼장 법사들 모두가 ‘sati’는 ‘억념’이라고 만장일치를 보일 만큼 ‘sati’의 뜻은 일반적으로 분명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sati’를 ‘念’이라고 한 단어로 한역한 경우에도 ‘憶念’을 한 단어로 줄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좋다. 다만 ‘억념’이라는 단어는 현재 국어사전에 ‘상기’와 동의어라고 등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현실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단어가 되었다.
어감도 좋지 않은 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상기’라고 번역하는 것이 마땅하다. ‘상기’는 ‘sati’와 발음까지 비슷해서 현재로서는 상기보다 더 일치율이 높은 번역어를 찾아낸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sati’의 일반적이고도 일상적인 뜻은 ‘상기’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부처님은 이러한 일상적인 뜻을 규제집이든 가닥들이든 일상의 문맥이든 수행의 문맥이든 한결같이 똑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격의법으로써 원대한 일관성과 정합성을 펼쳐낸다.
이런 점에서도 부처님의 자칭인 ‘한결같은 이’(tathāgatha, 如來)라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그렇다면 가닥들 속의 일상적인 문맥에서 상기가 어떻게 쓰였는지를 살펴보면 상기라는 단어에 대한 부처님의 한결같은 사용을 좀 더 확연히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나무 아래로 가거나 노지로 가서 ‘이것은 소들이다.’라고 ‘상기하기만 하면’(sati-karaṇīyam eva) 됩니다.”(맛1-503)
“비구들이여, 그 비구가 떠올림들의 위험을 면밀하게 파악했더라도 사악하고 안 좋은 떠올림들이 욕구에 결부되기도 하고 화에 결부되기도 하고 어리석음에 결부되기도 한다면 그러한 비구는 그 떠올림들을 ‘상기하지 말고’(a-sati) 정신을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맛1-510)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기억된 것이 주도하게’(sata-adhipateyyaṁ) 됩니까?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확연한-행위’(abhisam-ācārikaṁ)의 공부를 완성시키고, 이미 완성된 확연한 행위의 공부를 알아차림으로써 잇따라 파악할 것이다.’라고 안으로 ‘상기가’(sati) 잘 현전된 것으로 됩니다.”(앙2-552)
이러한 상기의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쓰임새를 보면서 ‘기억’(saraṇa)과의 차이를 좀 더 가늠해 볼 수 있다. 전술했듯이 기억은 저장과 상기 중에 저장에 우선적인 중심이 놓인 단어였다. 이에 반해 상기는 저장과 떠올림 중에 떠올림(vitakka, 떠오름과 떠올리기), 즉 ‘떠올리기’에 핵심적인 무게중심이 잡혀 있는 단어다.
그래서 상기를 굳이 기억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면 ‘기억해냄’ 혹은 ‘기억나게 함’이라고 할 수 있다.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SATI상기’가 현전하게 됩니다.”(맛4-194)라는 말씀에서도 기억이라는 기능이 우선적으로 있어야 상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어로 말하자면 기억은 ‘remember’라고 할 수 있고 SATI상기는 ‘recollection’ 혹은 ‘recall’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은 저장(memory)이 중심이고 상기는 떠올림(occur to)에 중심이 있다는 차별이 있지만 둘 다 저장과 떠올림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구분이 쉽지는 않다. 다음의 예문에서도 확인된다.
“그 ‘기억된 것을 따라오는 식별이’(sata-anusāri viññāṇaṁ)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맛2-180)
“쭌다여, 또한 한결같은 이에게는 과거 시간대를 상대하여 ‘기억된 것을 따라오는 식별이’(sata-anusāri viññāṇaṁ) 있게 됩니다. ‘그는’(so, 본인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표현하고 있다.) 원하는 만큼 잇따라-기억합니다.”(디3-244)
‘기억된 것’(sata, ‘기억하다’sarati의 과거수동분사형)은 저장된 기억이 중심이지만 상기의 뜻도 결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 예문에서도 ‘잇따라-기억합니다’(anu-ssarati)란 연이은 상기를 말하고 있다.
기억이라는 말만으로는 떠올림을 충분히 나타낼 수 없어서 ‘잇따라’(anu-)를 붙여 주어 확실히 표현했다. 예문은 숙명통(宿命通)을 주되게 말하고 있는데 숙명통의 원어는 ‘pubbenivāsa anu-sati ñāṇa’(전생을 잇따라-상기하는 앎)이다.
이 원어는 “전생은 SATI상기함으로 실현해야 한다.”(디3-401)에서 상기한다는 말은 잇따라-상기한다는 뜻이라고 알려준다.
이러한 문맥에서 ‘잇따라-상기한다’는 것은 ‘잇따라-기억한다’는 말과 같다. 북방 대승불교에서 염불(念佛) 혹은 불수념(佛隨念)이라고 한역된 원어는 ‘Buddha anu-sati’인데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如來十號)를 잇따라 상기하라는 수행이다.
이 경우의 ‘잇따라 상기하기’도 자꾸자꾸 계속해서 기억하며 되새긴다는 의미다. 이렇게 기억과 상기는 저장과 떠올림에 대한 무게중심만 다를 뿐 거의 같은 의미로 호환하며 쓰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