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여성평론가로 산다는 말에는 세 가지 층위의 의미가 겹쳐 있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과 평론가로 산다는 것, 그리고 여성평론가로 산다는 것. 에세이집인 『대한민국에서 여성평론가로 산다는 것』에서는 의미의 층위들이 구분 없이 섞여 있지만 영화평론가도 아니고 여성평론가라는 용어를 선택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여성평론가라니, 평론가인 여성을 말하는가 아니면 여성을 평론하는 사람을 말하는가.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여성평론가는 언제나 둘 다의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이성복 시인을 좋아한다는 여성평론가 심영섭은 작가 친필 사인이 적힌 시집 『남해금산』을 자랑스레 펼치며 표제시의 첫 구절을 낭송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져 결국 돌이 사람으로 변한다는 피그말리온신화와 이성복의 사랑은 얼마나 다르냐고 묻는다. 말하자면 열망을 통해 얻어내느냐, 상대의 쓸쓸함에 함께 젖어드느냐 하는 사랑에 대한 감각의 차이. 상대의 높은 곳보다 낮은 곳을 먼저 응시하는 그녀는 말할 것도 없이 후자에 속한다.
그녀의 연애편지를 들춰보면(책의 마지막에 연애시절 주고받은 편지들이 수록돼 있다) 그녀가 남편에게 붙여준 별명은 ‘한쪽 눈이 건조하여 슬픈 짐승’이다. 이 표현은 자신의 글이 심영섭의 것만큼 끈끈하지 못하고 건조하기만 하다는 남편의 자기반성에 대해 연민과 재치를 뒤섞은 화답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돌 속에 갇혀 있던 남편의 곁으로 그렇게 한 발을 내밀었다. 자신을 낮추어 천천히 함께 젖어가는,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바로 여성적 사랑. 심영섭이 이성복의 「남해금산」을 좋아하는 이유, 동시에 영화평론가 이전에 심리학자가 된 이유가 아닐까.
또 다른 사랑에 대해 말해보자. 칼 마르크스는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사랑을 하게 되더라도 그 사랑에 화답하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너의 생활표현에 의해 너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 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하고 불행한 것이다.’
인터뷰를 마쳤을 때 그녀의 연구실이 있는 암사동에도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비 그칠 때까지 조금 더 있다 가라며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주겠단다. 우디 알랜의 1979년작 <맨하탄>이다. 이 영화는 맨하탄 거리 자체가 주인공이라며 그녀는 설명을 시작한다. 뉴욕의 밤, 젊은 남녀가 어느 다리를 배경으로 벤치에 앉아 있는 장면에서 그녀는 그만, 소녀적 감수성을 감추지 못한다. 그 목소리가 영화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듯하다. 맨하탄 거리가, 조지 거쉰의 재즈가, 고든 윌리스의 카메라가, 우디 알랜의 영화가 그녀의 사랑에 화답하는 그런 순간이다.
이름난 영퀴스트에서 시작해 ‘영화평을 쓰시는 분’이 되기까지 단한번의 망설임도 후회도 없었다는 심영섭. 그녀의 영화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남해금산」보다는 피그말리온신화에 가까운, 다시 말하면 쓸쓸함보다는 열망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로 인해 영화로부터 화답하는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경우가 아닐까.
스스로를 심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여러 인격이 혼재돼 있다는 그녀의 말을 인터뷰 한 번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평론집이 아닌 에세이집 『대한민국에서 여성평론가로 산다는 것』을 읽다보면 그녀의 사랑이 대상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만은 확실히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들의 다름이 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치열함 아래로 묶인다는 것까지. 영화와 가족에게 모든 것을 내주는 사랑이 바로 대한민국에서 여성평론가로 살아가고 있는 심영섭의 힘이 아닐까. 영화의 톤에 맞추어 평론을 쓴다는 그, 심영섭은 어떤 톤으로 쓸 수 있을까? 명사와 동사만으로 단단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명사와 동사의 틈새에 무수한 형용사를 넣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그, 심영섭일 것이다.
- 교수신문. 2006년 9월. <이재훈>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이성복 시인을 좋아한다는 여성평론가 심영섭은 작가 친필 사인이 적힌 시집 『남해금산』을 자랑스레 펼치며 표제시의 첫 구절을 낭송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져 결국 돌이 사람으로 변한다는 피그말리온신화와 이성복의 사랑은 얼마나 다르냐고 묻는다. 말하자면 열망을 통해 얻어내느냐, 상대의 쓸쓸함에 함께 젖어드느냐 하는 사랑에 대한 감각의 차이. 상대의 높은 곳보다 낮은 곳을 먼저 응시하는 그녀는 말할 것도 없이 후자에 속한다.
그녀의 연애편지를 들춰보면(책의 마지막에 연애시절 주고받은 편지들이 수록돼 있다) 그녀가 남편에게 붙여준 별명은 ‘한쪽 눈이 건조하여 슬픈 짐승’이다. 이 표현은 자신의 글이 심영섭의 것만큼 끈끈하지 못하고 건조하기만 하다는 남편의 자기반성에 대해 연민과 재치를 뒤섞은 화답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돌 속에 갇혀 있던 남편의 곁으로 그렇게 한 발을 내밀었다. 자신을 낮추어 천천히 함께 젖어가는,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바로 여성적 사랑. 심영섭이 이성복의 「남해금산」을 좋아하는 이유, 동시에 영화평론가 이전에 심리학자가 된 이유가 아닐까.
또 다른 사랑에 대해 말해보자. 칼 마르크스는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사랑을 하게 되더라도 그 사랑에 화답하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너의 생활표현에 의해 너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 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하고 불행한 것이다.’
인터뷰를 마쳤을 때 그녀의 연구실이 있는 암사동에도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비 그칠 때까지 조금 더 있다 가라며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주겠단다. 우디 알랜의 1979년작 <맨하탄>이다. 이 영화는 맨하탄 거리 자체가 주인공이라며 그녀는 설명을 시작한다. 뉴욕의 밤, 젊은 남녀가 어느 다리를 배경으로 벤치에 앉아 있는 장면에서 그녀는 그만, 소녀적 감수성을 감추지 못한다. 그 목소리가 영화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듯하다. 맨하탄 거리가, 조지 거쉰의 재즈가, 고든 윌리스의 카메라가, 우디 알랜의 영화가 그녀의 사랑에 화답하는 그런 순간이다.
이름난 영퀴스트에서 시작해 ‘영화평을 쓰시는 분’이 되기까지 단한번의 망설임도 후회도 없었다는 심영섭. 그녀의 영화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남해금산」보다는 피그말리온신화에 가까운, 다시 말하면 쓸쓸함보다는 열망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로 인해 영화로부터 화답하는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경우가 아닐까.
스스로를 심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여러 인격이 혼재돼 있다는 그녀의 말을 인터뷰 한 번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평론집이 아닌 에세이집 『대한민국에서 여성평론가로 산다는 것』을 읽다보면 그녀의 사랑이 대상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만은 확실히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들의 다름이 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치열함 아래로 묶인다는 것까지. 영화와 가족에게 모든 것을 내주는 사랑이 바로 대한민국에서 여성평론가로 살아가고 있는 심영섭의 힘이 아닐까. 영화의 톤에 맞추어 평론을 쓴다는 그, 심영섭은 어떤 톤으로 쓸 수 있을까? 명사와 동사만으로 단단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명사와 동사의 틈새에 무수한 형용사를 넣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그, 심영섭일 것이다.
- 교수신문. 2006년 9월.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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