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5.9.수 | CGV강변 | 멜랑콜리아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출처://
http://jicskan.blog.me/90143299779
<멜랑콜리아>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작품이라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있죠. 이제야 개봉하네요.
심영섭 평론가 역시 감독을 좋아하는 터라 이날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오프 더 레코더도 많았답니다. :)
이 영화는 자매가 각각 안고 있는 우울과 불안이라는 심리를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데 대단히 아름다운 작품이에요.
심영섭 평론가
안녕하십니까? 오늘 영화는 생기가 넘치는 지금 이 5월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듯한 <멜랑콜리아>입니다. (웃음) 저는 이 영화 보면서 개인적인 경험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최근에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에 갔었습니다. 거기엔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2층은 청년기 때의 그림, 1층은 그가 왕실에서 그린 초상화, 지하에는 말년에 그린 그림이 있어요. 2층에서는 색깔이 푸르고 화사한 사실주의적 화풍을 볼 수 있고, 1층에서는 왕의 초상화를 약간 얼간이처럼 그린 터라 우습습니다. 지하로 가면 그 유명한 '검은 그림'을 볼 수가 있는데, 굉장히 무겁고 어두워요. 그걸 보다가 저는 스탕달 신드롬, 즉 그림 때문에 어떤 쇼크를 받아서 정신을 잃는 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림을 보고 그렇게 오싹하고 무서운 적이 없었어요. 한 인간이 그곳에서는 어떤 행운이나 낙관이 없다는 전망을 남기면서 죽어 갔다는 걸 그대로 느낄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거길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이 영화 역시 완벽하게 죽음에 관한 영화입니다. 프로이트적으로 얘기하면, 인간에겐 두 가지 에너지가 있죠. 리비도라는 삶과 관능의 에너지와 타나토스라는 죽음과 파괴의 에너지. 이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면 저는 '두 행성이 벌이는 죽음의 키스를 통한 타나토스의 교향곡'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있음(有)에서 없음(無)으로 가는 영화. 피할 수 없는 파국과 멸망에 관한 이야기. 그러나 다행히 그 이미지는 매우 아름답기 때문에 미학적인 죽음이라고 볼 수가 있죠. 이러한 실존적 무기력감을 안고 있는 감독은 어떤 사람일까? 제가 트위터에도 썼지만, 혹시 자살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들 정도로 라스 폰 트레이는 아주 극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안티 크라이스트> 만들 때부터 극심했다고 해요. 예전에는 고소공포증이 심해서 깐느에 출품이 되면 2박 3일 동안 덴마크에서 파리까지 기차를 타고 오갔죠. 각종 신경증과 쇠약증에 걸려서 이제는 정말 미쳐 가는 감독이 만든 광기의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상 최초로 개인적인 정신병을 이렇게 영화라는 캔버스 위에 펼쳐 놓았습니다. 행운아인지 불행아인지 모르겠어요. 읽을거리가 많은 영화입니다. 쉬운 독해를 접근케 하는 영화는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질문을 받으면서 얘기하겠습니다.
관객 A
포스터를 보면서 초록색이 단연 눈에 들어왔어요. 오늘 평론가님 귀걸이도 초록색이고. (웃음)
심영섭 평론가
그렇습니다. 분위기에 맞췄어요. (웃음) 포스터 장면이 대단히 중요하죠. 아시다시피 포스터는 회화를 차용한 겁니다. 이 영화 안에는 회화가 인용되는 경우가 있고 그게 재구성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일단 포스터와 관련된 그림부터 설명하면요. 영국에 라파엘 전파라는 유파가 있습니다. 그중에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린 '오필리아'가 있어요. 서재에서 볼 수가 있죠. 물속에 죽은 여자가 떠가는 그림이요. 거기서 가져온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의 녹색은 오히려 죽음의 색이죠. 황홀한 죽음, 막을 수 없는 죽음, 자연과 합일된 죽음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 Ophelia (John Everett Millais, 1851~1852)
심영섭 평론가
감독은 공공연히 영화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바친다고 얘기합니다. 존경심과 숭배심이 있어요. 저는 이 영화가 <솔라리스>와 <희생>을 합쳐 놓은 듯한 느낌이 들어요. 지구의 멸망을 암시하는 징조를 받고 서서히 죽음에 이르는 게 <희생>과 닮았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회화마저 불타 없어지는 무시무시한 비관론을 영화 안에서 느낄 수가 있죠. 그러나 라스 폰 트리에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다릅니다. 똑같이 롱테이크의 영화라고 해도 타르코프스키는 시간이라는 물질성을 그대로 느끼게 하면서 영화 안에 봉인하고 각인하려는 지난한 시도를 합니다. 또한 마지막에 희생적 구원의 이미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희생>을 보면 이 영화와 달리 마지막에 죽어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심거든요. 그리고 아버지가 얘기해요. 그 나무에 삼 년간 매일 물을 주면 살아날 수 있다고. 희망의 시지푸스적인 반복, 헛된 것 같지만 구원의 몸짓을 멈추면 안된다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어요. 근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죠. 그것마저도 다 뭉개거든요. 라스 폰 트리에는 점점 더 염세적이고 비관적이예요. 영화에서 그러잖아요. "지구는 사악해." "생명체는 무용해." 두 명의 자본가에 해당하는 형부와 사장이 나오는데, 둘 다 우둔하고 잔인하죠. 과학과 이성에 대한 맹신이 엿보이잖아요. 합리주의에 관한 화신이라고 할 수가 있죠. 사장한테 저스틴이 뭐라고 그래요? "너한테는 '무'조차도 아깝다." 거기서 자본주의에 대한 지독한 혐오가 드러나죠. 그런 의미에서 타르코프스키와는 궤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관객 B
전작에서는 헨델 음악이 나오잖아요.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근데 여기선 음악이 뭔가 좀 낯설었어요.
심영섭 평론가
<안티크라이스트>와 이 작품은 형식상 매우 동질적입니다. 저 전작 보고 놀랐어요. 부부가 성관계를 하는 동안 아이가 떨어져서 죽습니다. 그게 슬로우 모션으로 진행되는데, 서양의 역사와 기독교 문화에 대한 그보다 더 통렬한 비판이 없거든요. 거칠지만 아름답고. 개인적으로 그 작품 좋아합니다. 이 작품도 똑같아요. 극단적인 슬로우 모션, 에필로그, 챕터 분할,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기 인장을 찍어가는 듯해요. 전작에서 등장한 헨델의 '울게 하소서'는 굉장히 장중하죠. 마치 에덴 동산에서 최초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의 원죄를 재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근데 여기선 다르죠. 이 영화는 시작하면서 일종의 스토리 포기 선언을 합니다. 어떻습니까? 초반에 다 나와요. 스토리를 거의 다 알려주거든요. 이야기에 대한 기대는 전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학적인 장면의 집합예요. 그래서 회화적인 영화를 찍겠다는 선언으로 보이거든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깔리는데, 여기선 오페라 서곡이죠. 이졸데라는 여자가 트리스탄이라는 남자를 사랑했는데, 여러 오해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다른 남자한테 시집을 가야하는 내용이잖아요. 결혼하기 싫어하는 모습, 죽음을 통해서 사랑을 성취하는 모습, 밤에 대한 강조 등이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겠어요. 그 곡의 화음은 음악사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트리스탄 코드'라고 불리는 화음이 있어요. 바그너 이전의 작곡가들은 온음계적인 생각만 했어요. 근데 그걸 파괴하기 시작한 곡이 바로 이 곡예요. 어찌 보면 기존에 있는 영화를 파괴하고 싶어하는 라스 폰 트리에 모습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죠. 저도 바그너 전문가가 쓴 글을 찾아서 읽은 겁니다.
관객 C
초반에 알짜배기 장면을 모아 놓은 것 같다고 하셨는데, 그때 19번 홀을 비추잖아요. 근데 그 집을 보면 18번 홀까지만 있어요. 마지막에 클레어가 우박 맞는 곳은 19번 홀이고. 여기에 어떤 의도가 있을까요?
심영섭 평론가
의도가 있죠. 세상에 없는 홀이죠. '13층'과 비슷한 겁니다. 우리로 치면, '4층'이죠. 그런 걸 철학적으로 보면 현실계에 없는 실재계라고 할 수 있어요. 근데 언니(클레어)는 그곳에 가려고 노력합니다. 동생(저스틴)과 달리 현실적이거든요. '저스틴'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또 다른 자아이자 염세적인 동시에 탐미적인 예술가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멜랑콜리아'를 경험하는 담즙질이 있는 예술가 그 자체거든요. 그러니까 저스틴은 이미 그게 묵시록적인 공간이라는 걸 알아요. 우박이 내린다는 건 대단히 묵시록적인 거죠. <매그놀리아>에서는 개구리 우박이 내립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죠. 구원도 없고 희망도 없고 아무 것도 통하지 않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의 비극적 무기력이 드러나요. 라스 폰 트리에가 경험하는 그와 같은 비극적 무기력은 내부와 외부에서 옵니다. 내부에서는 인간의 우울이라는 정서적 늪, 외부에서는 사건이나 사고 등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사건.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실존적 무기력을 준다는 것이거든요. 여러분이 건강하다고 해도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운명의 날을 맞게 될 수도 있는 거고, 운이 좋아서 그런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느 날 내면의 우울이 사람을 잡아먹을 수도 있는 거죠. 19번 홀은 바로 그런 무기력감을 드러내는 곳이죠. 라깡 식으로 말하면, '변기 너머의 세상'입니다. 이게 지금 무슨 말인지 아시려나. (웃음)
관객 D
자매의 부모가 하는 행동이 이상해요. 어떻게 보세요?
심영섭 평론가
이 작품 안에 있는 결혼식 장면은 라스 폰 트리에와 도그마 선언을 함께했던 토머스 빈터버그 감독이 만든 <셀레브레이션>을 연상케 합니다. 거기서도 아버지 생일이라 자식들이 모여서 축하를 하는데, 알고 보면 아버지가 아이들을 성폭행한 집안이에요. 근데 첫 장면은 너무나도 화사하고 그지없이 다정하거든요. 이 영화도 마찬가지죠. 불길한 암시가 있습니다. 좁은 길에 리무진이 오도 가도 못해요. 리무진은 화려하지만 길은 그걸 받아들일 수 없어요. 결혼식이 시작되면서 부모가 등장하죠. 처음엔 다정스러워 보여요. 근데 아버지는 모든 여자를 '배티'로 알고 있는, 그러니까 여자에 대한 개별성이 없는 퇴행적인 사람입니다. 융 식으로 말하면, '광대자아'죠. 광대적인 속성을 지닌 아버지입니다. 어머니는 쌀쌀맞고 냉정해요. 딸의 결혼식에 와서 축하는커녕 욕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죠. 저스틴은 부모에게 기대고 싶어합니다. 어머니한테는 "할 말이 있어요.", "할 말이 있어요" 그러잖아요. 아버지한테는 "오늘 여기서 묵고 가세요." 어머니는 남아 있지만 자기중심적이고 딸에게 관심 없고, 아버지는 그냥 도망가 버리죠. 최악의 부모입니다. 최악의 부모.
가족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다룰 수 있는 식(式)은 딱 3가지입니다. 결혼식, 장례식, 세례식. <대부>에선 다 다룹니다. 영화에서 결혼식이 나오면 대개 좋은 의미가 있어요. 결혼식은 생산, 삶의 풍성함, 번식욕 등이 어우러진 가족의 잔치라고 할 수가 있잖아요. 삶의 리비도가 충만한 순간입니다. 근데 이 결혼식은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하면서 성스러움이 빠지고 점차 난장판이 되어 가죠. 그러면서 감독은 가족 간의 불화, 인간의 치졸함, 자본주의의 잔악함과 같은 사회를 향한 아주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을 담습니다. 그게 결혼식이 거행되는 1부죠. 그리고 구제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든 너희들은 '죽어 마땅해', '죽게 돼있어' 이런 식으로 예언하는 게 2부입니다. 라스 폰 트리에는 세상을 그렇게 본다는 거죠.
관객 E
자매가 말을 타고 어딘가를 갈 때 저스틴은 계속 지나가지 못하잖아요. 말을 때리면서 화를 내는데, 왜 그런 건가요?
심영섭 평론가
이 영화는 심리주의적인 설명을 거부합니다. 아무리 우울하다고 해도 결혼하는 날 남편 될 사람을 두고 다른 남자랑 정사를 벌이진 않잖아요. 그것도 아주 일방적이고 배설하는 듯한 느낌으로. 왜 그런다고 생각하세요? 거기엔 설명이 없습니다. 설명이 무의미합니다. 무의식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는데, 현실적인 설명은 부질없어요. 어쩌면 현실과 담을 쌓고 있는 세계입니다. 그 안에서 죽음의 욕망이 넘실거리는 거죠. 왜 못 가는지 말하자면, 신비주의적인 관점에서 두 사람은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말은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는 영묘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남편이 누구 앞에 죽어 마땅합니까? 말 앞이죠. 그 말의 이름은 의미심장하게도 '아브라함'입니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번 작품에서 타나토스를 그렸으니까 다음 작품에서는 아마 리비도를 다룰 겁니다.
관객 F
아까 이 영화는 스토리가 없다고 얘기하셨는데, 그래도 스토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자세히 설명 좀 해주세요.
심영섭 평론가
스토리를 언급하자면, 일단 내용은 인간의 내면을 다루고 있어요. 하나는 우울, 하나는 불안. 불안은 현실이 있어야 되는 거죠. 내가 뭔가 잘못할까봐 두려워하는 거잖아요. 우울은 그게 아니죠. 잘못이 자신한테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거거든요. 인간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정서 가운데 그 두 가지가 자매로 대변된다고 봐요. 따라서 이 영화는 감독이 말하는 메시지도 분명합니다. 근데 제가 스토리가 없다고 말한 건 스토리 자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논리적으로 연결된 스토리텔링 구조가 없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보죠. 이 영화는 숏과 숏이 전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습니다. 안에서 밖을 바라봐요. 그럼 안에 있는 사람의 시점샷이 나오기 마련인데, 그냥 뚝 뚝 뚝 뚝 다른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 누구 있고, 저기 누구 있고. 이 영화에서 컷은 그냥 상황에 관한 설명이에요. 보여주기만 하거든요. 그래서 구문론적인 편집술 혹은 컷을 연결하는 방식 같은 게 별로 쓰이지 않습니다. 이미지가 아주 느슨하게 그냥 나열되고 있죠. 사이즈도 전혀 고려하지 않아요. 클로즈업, 롱샷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렇지만 아주 시적으로 느껴지죠. 뭐랄까, 극단적으로 연출을 밀어부친다고나 할까요? 그런 특징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끝이 너무 무겁고 우울하긴 하지만 아주 아름다워요. 그 방식은 전작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봅니다. 아, 이 얘기가 안 나왔네요. 달빛에 옷을 벗고 목욕을 하는 저스틴의 모습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멜랑콜리아'의 빛이라고 해야 하나. 마치 자연과 하나 되어 '멜랑콜리아'와 정사를 벌이는 그 여성이야말로 낭만적인 예술가의 상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라스 폰 트리에가 이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병증과 철학, 세계관을 펼쳐냈다고 봐요. 상당히 나르시스적인 방식으로 그걸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이 낭만적인 예술가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을진 몰라도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데는 성공하지 않았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