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을 반석 위에”(마태복음 7:24-27) 2012. 3.18.
구약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을‘반석’이라 표현한 곳이 여러군데 나옵니다. 일반적으로‘넓고 평평한 바위’를 일컬어 반석이라고 말합니다만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모암’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우리 사는 이 땅이 겉으로 보기에는 흙이지만 조금만 파 들어가면 전체가 온통 생 돌로 되어있습니다. 이 생 돌을 모암이라고 하며 반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수 일을 하셨기에 집을 지을 때에 주초를 반석위에 두어야 든든하다는 것을 경험으로도 잘 아시고 계셨을 것입니다. 요즘의 우리로서는 치과에서 말하는 임플란트를 생각하시면 될것입니다. 사복음서에서 반석이라는 말이 딱 두군데 나오는데 모두 예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과 마태복음 16장18절의“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하신 두 군데입니다. 어찌보면 하나는 개인적인 신앙과 관계가 있다면, 다른 하나는 교회적인 신앙을 관계 지어서 든든한 반석 위에 놓여진 신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이 두 경우를 상고하려고 합니다.
먼저는 마태복음 7:24-27절 말씀으로서 그 내용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일컫지요. 그 주옥같은 말씀을 다 하신후 결론으로서 하신 말씀이니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말에도‘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듯이 주님의 이 모든 말씀을 감명 깊게 듣고 공감하였다 하여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고 도리혀 큰 화를 입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실천궁행이지요. 옛날 구라파 어느 작은 마을의 교회에 새로 목사님이 부임하셨는데 내리 3주간 주일설교 말씀을 똑같은 설교를 하셨답니다. 참다못한 한 젊은 집사님이 찾아와 항의조로 물었답니다.‘왜 계속 같은 설교를 하십니까?’그러자 목사님 대답하기를,‘네 잘 알았습니다. 단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교인들중 단 한 사람이라도 설교를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생기면 다음부터는 다른 설교를 하리다“ 라고 대답하더랍니다. 덴마크의 유명한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키에케골은 당시의 교회다니는 교인들을‘집거위’에 비유하였다고 합니다. 집거위가 뒤뚱거리며 교회에 와서는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설교자는 외칩니다.‘저와 여러분은 더 이상 뒤뚱거리며 걸어다니는 집거위가 아닙니다. 답답하게 이같은 좁은 공간에 더 이상 머물러 지낼 것이 아니라 저 공중의 새와 같이 창공을 훨훨 날읍시다’그러자 아멘 아멘 꽥꽥하고는 여전히 모두들 뒤뚱거리며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경우라 할찌라도‘실천’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고 봅니다. 전에 이북에서 피난 나와 자수성가 하신 어느 집사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자기는 하나를 배워 열을 써먹는데, 어떤 사람은 죽어라고 열을 배워 하나 밖에 못 써먹는 사람을 많이 보았노라’고요. 이 말도 실천에 관한 경구라고 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와는 또 다른 심각한 면을 성경에서 볼 수 있어야 됩니다. 24절의“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의“나의 이 말”이라는 대목입니다. 율법이나 세상의 다른 위인 성현이 아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앞의 산상수훈에서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같이 말씀합니다. 너희는 지금까지 율법에서 이리 이리 하라고 들었으나“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요. 유대인들이 최고의 권위로 떠받드는 모세의 율법보다 우위에 놓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 말입니다. 당시 아직 아무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셨던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나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심판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권세있는 말씀이지요. 따라서“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는 말씀은 결코 예사스러운 말씀이 아닌 줄 압니다. 작년 이맘때 일본의 갑작스러운 쓰나미를 통해서 최후심판의 한 모습을 보는듯 하였습니다만 우리 주님의 말씀을 대충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며 살때의 결과를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나의 이 말”입니다. 우리가 늘상 회개한다고 하지만 또 고치지 못한채 반복하여 또다시 회개하는 습관적인 그 어떤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그 당사자가 될 것입니다. 어느 부분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다 아는데 자기 자신만 죄로 깨닫지 못한채 자기 잘난줄로만 알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남도 모르고 자기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내는 쓴 뿌리같은 악이 있을때도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우리 다 알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2:478절 이하에,“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그를 심판하리라 ---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우리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마태복음 16장의 반석입니다. 요즘이 사순절 기간 아닙니까? 어떤 면에선 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이후부터 진정한 예수님의 고난의 사순절이 시작되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는데 당신 혼자서만 십자가를 지신다면 우리 생각에는 그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알아주는 단 한 사람, 십자가의 구원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성취되는 것 아닐까요? 바로 베드로가 최초로 주님을 주님으로 바로 믿고 바로 알고 바로 신앙고백하였습니다.“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요. 그전까지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 속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그저 예수님을 셰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 정도로 밖에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바른 신앙고백을 한 것이지요. 그때 우리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요.“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21절을 보면,“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서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하여 왔고 요한복음 1장에서도 밝혔듯이“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셨습니다.‘성육신’이 바로 말씀의 실천이며 약속의 성취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고 순종할 때, 반석위에 세워진 집과 같이 구원의 열매가 우리에게 이뤄지며, 그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바로 깨닫는 그곳이 바로 천국의 지점이 세워지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준, 깨달은, 바로 믿은 첫 번째 열매이며 기초 반석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교회 즉 지상 천국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하심을 통해 오시는 성령으로 지상의 교회는 시작됩니다만 어쩌면 그 씨는 이때 뿌려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붙을 쏘시개 장작이 이때 마련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12:49-50절에“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는데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할 때에 심판을 피할 수 있듯이, 성육신하여 구세주로 임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로 고백하는 교회는 결코 사단의 세력이 범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여름 수련회 도중 한 학생이 물에 빠져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온 교회가 비상이 걸리고, 담임목사와 장로 등 중직자들은 사고 당한 학생의 부모를 만나 눈물로 위로하며 백배 사죄하였으나 어찌 자식 잃은 슬픔을 씻어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장례를 마친 유가족들이 담임목사에게 설교 전 교인들 앞에 설 수 있는 시간을 달라는 요청했습니다.‘교회와 주님을 원망하는 말을 쏟아 내겠구나!’라고 모두들 예상하며 긴장하였습니다. 주일날, 유가족들이 교인들 앞에 섰고,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가족 대표가 입을 열었습니다.“우리 가정을 위해 애써주신 담임목사님과 온 교우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와 함께 이 슬픔을 견디어 주신 그 사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에게 미안한 마음을 거두어 주십시오. 아이 잃은 슬픔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희생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고백을 들은 온 교회는 눈물바다를 이뤘다고 합니다. 참으로 가정이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질 위기의 순간에 신앙을 붙잡고 기적같이 일어선 그 가족으로 인해 교회는 큰 감사와 감동을 선물받은 것이지요. 어려운 환경에 처할수록 더욱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온전히 실천할 때 하나님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로가 임하는 것이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개인을 향해서도(산상수훈)“원수를 사랑하라”셨으며, 교회를 향하여서도(최후의 만찬)“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셨지요. 최소한도 반석위에 세운 집과 같은 신앙이 되며,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바른 교회를 세움에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기본인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세상에서 만나볼 수없는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사랑을 믿음으로 받았기에,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믿음으로 실천할 수 있게 되는 줄 압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결심으로? 아니지요!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질때 가능한 것입니다. 갈라디아 4:6절에도“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셨고, 로마서 5:3-6절에“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의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모두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성령충만을 누리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