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 시대의 노아”(창4:19-24, 5:28-31) 2012. 4.22.
지난주 교계신문를 여기저기 젖히다가,“시골목사의 서울 나들이”라는 독자투고의 글에 눈이 갔습니다.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공적인 일로 어쩌다 1년에 한번 서울에 올라가다보니 지하철 표끊는 일도 달라져 승차권 단말기 앞에서 지폐가 안 들어가 쩔쩔맸다는 것이며, 갈아타기 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보니 반대편 쪽에 서 있음을 뒤늦게 알고 당황했다는 것이며, 또 1시간여 지하에 있다가 지상으로 올라오니 실바람이 그렇게 상큼할 수가 없었다면서 지하에서는 생명력 있는 바람을 맞을 수 없으니 호흡에 얼마나 지장이 되겠느냐면서 시골 농촌을 예찬하고 있었습니다. 시골은 문 열고 나오면 들이고 산이고 널따란 들판이 철따라 수를 놓는데, 봄이면 어린 새싹들이 온 들을 덮고 여름에는 식물들이 파릇파릇 자라 너울너울 춤을 추며 가을에는 제가끔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겨울이면 온 천지를 은세계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저녁이 되면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들과 상현달과 보름달과 하현달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면서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솜씨를 찬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글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전원생활 하시는 사람들이 도시생활하는 사람들을 볼때 그리 볼 수 있을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도시사람들이 볼때는 하루가 멀다하고 무섭게 변하는 세상에서 앞으로 어찌 살려고 초야에서 농촌예찬만 하고 산다는 말인가 하며 걱정되기도 합니다. 더 넓게 보면 불신자들과 우리 그리스도인들과의 사이에도 서로 다르게 보는 관점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시골목사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옛날 창세기에 나오는 라멕과 노아가 살던 시대를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노아는 모두가 잘 알지만 라멕은 좀 생소할 것입니다. 창세기에 라멕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로 노아의 아버지이며, 다른 한 사람은 가인의 후손으로 당 시대에 살던 동명이인입니다. 그 시대는 홍수심판 바로 직전의 시대이기에, 불 심판을 앞두고 사는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특별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 심판에 대해서는 특별히 베드로후서 3:10절에 기록되어 있지요.“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말입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없이 그 당시의 시대를 성경 창세기에서는‘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24:38-39절에서,“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심판의 날이 덫과 같이 생각지 않던 때에 갑자기 임함을 설명키 위하다보니 심판의 이유에 대한 표현이 다소 완화된 듯 보이지만 결국은 같습니다. 즉 저들이 육적이고 현세적인 일에만 마음을 쏟고 영적이고 내세적인 문제에는 별로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다가 돌연히 홍수심판을 만난 것이니 말입니다. 이번에 창세기를 세밀히 들여다보니 당시“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갔던” 저들 시대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저는‘라멕 시대’라고 해 보았습니다.
요즘 세상에서도 악인들을 지칭해서 보통‘가인의 자식’이라고 합니다만, 이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육적으로는 노아 홍수때 가인의 후손은 심판으로 이미 사라졌습니다. 창세기4:16절부터 가인의 자손에 관한 일이 나오는데 라멕 시대의 일까지만 나오는 것으로 보아 라멕시대가 노아홍수 전의 가인 계통으로는 마지막 시대로 생각됩니다. 라멕의 네 자녀중 야발은 가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었고, 누이 나아마는 이름만 나왔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면, 경제적인 번영과 문화 예술의 창달과 철기문화를 비롯한 군수산업이 번영한 시대였음을 생각게 합니다. 또 특별히 누이 나아마의 이름까지 나오는 것이 혹 그 뜻이‘유쾌한,사랑스러운’이니 향락적인 삶과 관련을 짓게도 합니다. 왜냐면 저들의 아버지 라멕은 인류 최초로 일부일처 창조의 원리를 위배하여 아다와 씰라라는 두 아내를 둔 최초의 간음자였기 때문입니다. 또 이같은 그의 방종한 삶이 살인과도 연관되었을지 모릅니다만, 라멕은 두 아내 앞에서‘칼의 노래, 살인의 노래’를 불러 자신의 폭력성과 잔인성까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북한이 우리를 위협할때‘백배 천배로 갚아주겠다’고 하듯이, 라멕은 누가 자기를 해치면 77배로 되갚아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가인에게 누가 해를 가하면 하나님께서 7배로 갚아주리라는 말에다가 더 보태어서, 자기는 누가 자기를 해치면 자신의 칼과 무기와 완력으로 77배의 대량보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는 조상 가인보다 위대하다고 기고만장하였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의 악한 모습을 라멕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다른 라멕이 있습니다. 그는 가인의 후손이 아닌 셋의 후손이며 또한 노아의 아버지입니다. 홍수 5년전에 돌아가셨습니다만 창세기 5:30절에 보면“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595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라고 하였으니, 라멕의 자녀들 즉 노아의 형제가 여럿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홍수 때에도 노아의 다른 형제들하며 그 자식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뿐 아니라 저들 외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셋의 후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결코 한 두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홍수 당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성경을 보니 노아의 직계 8식구들 뿐이니 말입니다. 셋의 후손까지 타락한 것은 아닐까요? 이를 암시하는 내용의 말씀이 창세기 6장2-4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라고 하였으니 이는 분명 하나님의 백성된 경건한 사람들이 타락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결혼으로 셋 계통의 아들들과 가인 계통과의 딸들과의 섞여져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떠나 부패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홍수심판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것이 아닌지 싶습니다. 3절에“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하심으로 심판이 예고된 것입니다. 먼 훗날 모세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1세들이 40년 광야생활 중에서 망한 일에 대하여서도 성경은 이같이 말씀하고 있지 않던가요? 히브리서 4:2절에“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고 하였으니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는 우리 역시 끊임없이 자신을 스스로 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이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21:34)고 하셨고, 또 성경 다른 데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고(삼상16:7),“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라멕 시대때 타락하고 죄악이 관영하여 홍수 심판을 받는 중에 유일하게 구원을 얻은 노아의 가족을 다시 생각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 때 구원얻은 롯의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믿지않던 두 사위와 또 나중 말씀 불순종으로 죽은 아내를 생각하면 노아의 식구들의 믿음은 돋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역시 노아의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7절에서 노아의 믿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고요. 방주를 물가나 바닷가에서 건조한 것도 아니요 보통 땅 위에서 건조하고 있었으니 그 자체가 모든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각적인 전도이며 경종이 되었을 것인데, 당시의 사람들은 홍수심판의 경고를 무시하였으며 조롱하였으리라 충분히 짐작됩니다. 방주는 오늘에 비유하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방주 안에 들어가야 구원을 받았듯이 오늘날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노아가 오로지 방주 건조에 온 인생의 삶을 걸고 그 일만을 하였듯이 우리 역시 구원을 이루는 일에 우리의 인생 전체 삶을 헌신해야 함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에 일치합니다. 믿음과 생활이 일치하는 삶을 참된 신앙이라 합니다. 노아의 신앙에 대하여 창세기6:9절은“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중“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이것이야말로 노아의 전천후 신앙을 말해줍니다. 어찌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인지는 그 역으로‘세상과 짝해 동행치 않는 삶’이 아닐까요? 물론 우리가 시골에 내려가 살아야만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또 서울에 살면 무조건 세상과 동행하며 사는 삶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죄악이 만연하고 물질만능의 시대 속에서 어찌 사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인지는 심각하게 끊임없이 돌이켜보며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마음을 세상에 빼앗기고 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홍수전 라멕 시대를 살고 있던 노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당시 노아만 방주 건조한 것은 절대 아니지요. 노아의 모든 식구가 전적으로 이에 헌신하였을 줄 압니다. 그렇다고 밥도 안 먹고 일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 노아의 식구들은 밥을 먹든 다른 그 무엇을 하든 오직 방주 건조를 위한 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믿음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로마서14:6-9절에 쓰여 있습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이같은 신앙관과 인생관이 이해 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야말로 두 종류의 삶이 평행선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여기에 전도의 방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선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로마서10:13-15절에서“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도하니 듣게 되고, 듣게 되니 믿게 되고, 믿게되니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얻게 되는데, 아무리 전도하여도 믿지 않으면 그때는 주님 말씀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4:37-42절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요즘처럼 춥지 않고 덥지 않고 포근하고 평안한 봄 날에는 특히 졸지 말고 영적으로 깨어있으면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바로‘라멕 시대의 노아’가 되는 길인 줄 믿습니다. 이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