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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의 음성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모세”(출애굽기 34:29-35) 2012. 6. 3.

작성자강수봉|작성시간12.06.05|조회수3,513 목록 댓글 0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모세”(출애굽기 34:29-35)     2012. 6. 3.


  미켈란제로의 작품 가운데 유명한 모세 조각상이 있는데 머리에 뿔이 나온 모습입니다. 두가지 설이 있는데 옛날부터 뿔은 권위의 상징이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영도자인 모세를 그리 조각했다는 설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있는 설은 당시 라틴어 성경(불가타)의 잘못된 번역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29절의“광채가 나다”라는 히브리어‘카란’에는‘뿔이 나다,빛나다’라는 두가지 뜻이 있는데, 당시 성경에‘뿔이 나다’로 오역되었기에 그리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뿔을 보고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음을 생각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1.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말하기를 얼굴은‘마음의 창’이라 합니다. 그러기에 얼굴이 밝다니 어둡다니 말을 하는 것은 얼굴 자체의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당사자의 마음 상태를 짐작하고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사랑을 하면 예뻐져요!’라는 노래말도 이를 뜻하는줄 압니다. 옛날 미국 서부 개척시대 많은 동부의 이민자들이 서부로 서부로 달려간 중요한 이유는 금이 많다는 소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금을 찾아 천신만고 끝에 서부에 다다른 일단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어느 골짜기를 지나다가 돌뿌리에 걸려 나동그라졌는데 일어서면서 누런 황금노두를 발견한 것입니다. 저들은 너무나 좋아서 얼싸안고 소리치며 뛰다 울다 춤추며 노래하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저들은 이내 냉정을 되찾고는 오늘 발견한 금 이야기를 우리 5명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함구키로 굳게 약속하고 흩어진후 금 캐기로 약속한 날짜에 채굴 장비를 갖추어 모였답니다. 그런데 이 비밀을 어찌 알았는지 자기들 말고도 50여명이나 더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확인결과 철저히 함구한 것은 사실이나 저들은 그만 입만 작크 채우면 되는줄 알았지 표정관리를 놓친 것입니다. 그들을 본 주위사람들이 눈치를 챈것입니다.‘저 친구들 얼굴을 보니 금을 찾았구나!’하고 그들 몰래 뒤따라온 것입니다. 이처럼 금맥을 보고도 얼굴이 빛났다면 하물며 영생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을 뵙고 시내산을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이 광채를 발하였음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봅니다. 모세는 홀로 두 번씩이나 사십일 금식하며 하나님과의 깊은 기도의 만남을 통해 말씀을 받고 하나님께서 친히 써주신 십계명 돌판을 들고 내려올때 그 얼굴에 광채가 났지만 정작 본인은 몰랐는데 백성들이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기에 알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그리스도인된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는 공회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거할 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하였는데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리스도인된 우리의 변화된 생활과 얼굴을 보고서 무언가 감화를 받아 불신자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다가오는 계기가 되도록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2. 모세는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고 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 두 돌판을 들고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고 하였습니다. 왜 가렸을까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자기의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 하지 않던가요? 즉 할머니가 업은 아기에게 손가락으로 달을 보라고 가리켰지만 아기는 달은 안 보고 할머니의 손가락만 보더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지난 주일이 성령강림절이었습니다만, 초대교회 성령강림의 사건 내용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며 이어서 3장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치는 이적이 나옵니다. 당시 이적이 일어난 예루살렘 성전 주변에서 이를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이 크게 놀라 모여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모여드는 백성들에게 말하기를,“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면서 최근의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또 계속하여“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3:15-16)라고 외칩니다. 즉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친 것은 자기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우리를 주목하지 말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에도 보면 루스드라에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서도 이와 유사한 이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도 이를 목격한 군중들이 크게 놀라 자기들만의 방언으로 소리 지르며‘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강림하셨다’면서 소동을 일으켰으며 실제 그곳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 지내겠다고 소와 화환들을 준비하여 무리와 함께 바울과 바나바에게 모여든 것입니다. 뒤늦게 상황 판단을 한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고 저들에게 뛰어 들어가 소리쳐 이를 제지합니다. 우리 역시 당신들과 똑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에 지나지 않으며 또 지금 당신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바로 이같은 헛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한 것이었다며 겨우 막은 것입니다. 이 사건의 내용 역시 사람을 주목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사람들은 사람을 영웅으로 떠받들기를 좋아하고 심지어을 신격화하고 싶어 합니다. 요즘은 TV 예능 프로에서까지도 여배우를 보고는 툭하면‘여신이다, 여신같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역사 가운데 나오는 많은 독재자들이나 이방종교의 교주들에게서 그러합니다. 이는 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죄된 모습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려하며, 하나님 대신에 다른 그 어떤 것으로 대치하여 섬기고 싶어하는 것이 우상 신앙입니다. 앞서 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주목하지 않은채, 단지 베드로와 요한의 얼굴만을 주목하고, 바울과 바나바를 주목하는가 하면 또 모세의 얼굴만을 주목하듯 우리 역시 이같은 견지망월의 우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목하라고 하였습니다. 히12;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3:1“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딤후2:8“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갈3:1“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등의 많은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주목함이 바로 올바른 우리의 신앙자세인줄 믿습니다. 모세가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3. 모세의 수건이 벗어지는 진리가 신약에 나타납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모세의 사건에 대하여 후에 신약 고린도후서 4장에서 그 의미를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7-9절과 13-16절입니다.“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우선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난 이유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직분자가 그만큼 영광스럽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세의 얼굴의 영광은 결국은 없어질 영광이기에 주목하지 못하도록 모세는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얼굴을 주목하지 말고 하나님의 율법 말씀을 주목하라는 의미로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고 생각되기도 하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은 결국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사라질 율법을 주목하지 말라는 의미로서 수건을 가린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율법은 죄인을 향하여 정죄하는 심판의 기능이 있을 뿐이지, 율법이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죄인으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향해 요구해 오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율법에 정죄받지 않을 정도의 완전한 의인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말하기를,“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든 성경은 예언하기를,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같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킬 것이라 하였습니다. 바로 이같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언약이 이르는 날에는, 모세 시대의 돌에 기록한 옛 언약 율법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심비에 영으로 이 새 언약 복음 말씀을 기록하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바로 그 날이 비로서 모세의 얼굴을 가렸던 수건이 벗어지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진리가 율법행위로 우리가 의로와 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로워지는‘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 진리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예수님의 두가지 비유말씀으로 다시 정리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비유 하나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인데, 바리새인보다 도리어 죄인 세리가 의롭다는 여김을 받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즉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깨닫고 이를 처절하게 뉘우치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 스스로는 결코 의(義)로와질 수 없다고 자각한 자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는 누가복음 17장의 종의 자세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명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9-10절). 즉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섬기며 살기 시작한 후에는, 매사에 오직 주님께만 영광 돌리며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모세, 베드로, 바울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만을 시인하는 신앙자세 말입니다. 행여나 우리 입에서‘참 재수 좋았다. 운이 좋았다’라는 말이 나와서는 결코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늘‘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께 감사할 따름이지요’라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며 감사하는 자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같이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 주시는 은혜만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향내가 발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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