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기업가의 관점에서, “경영자로서의 예수”로 변모시켜 소개한, 미국의 존스그룹 창업자이자 사장인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라고 합니다. 본문 7절인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를, 새 번역으로 보시면, “어디를 가든지, 주님께서 그와 같이 계시므로, 그는 늘 성공하였다”라고 합니다. 또, 한글 킹제임스역으로 보시면, “주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 그가 어디로 나가든지 번영하였더라”고 합니다. 곧, “형통”을 “성공”이나 “번영”이라 했습니다. “형통”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는 “사칼”입니다. 이는, “지혜롭다, 슬기롭다는 말로서, 실제적이고, 기술적인 면에서, 노련미가 있어서, 번창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나는 장면에서 언급되며, 다음이 요셉의 이야기에서 언급됩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면, 요셉이 애굽의 보디발에게 종으로 팔려갔을 때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형통”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리브가의 경우를 보면, “형통”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만, 요셉의 경우를 보았을 때는, “형통”이라는 말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훗날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과정을 볼 때, 비로소, 요셉에 대한 “형통”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곧, 리브가의 경우나 요셉의 경우에서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그들과 임마누엘하셨다는 것입니다.
영화배우 신현준 씨는, 그의 저서, “고백, 그리고 나의 달라진 길”에서 말하길, “형통이란, 사람이 보기에는 안 되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친히 이끄셔서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멋지게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유태영 박사님은, “형통”에 대해 말하기를, “하나님을 경외하고 꿈을 가지고 기도에 힘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한강이 꽁꽁 어는 추운 겨울에, 내의도 입지 못해, 추위 속에서 잠을 못 자고, 밤새도록 방안을 돌아다니다가, 새벽에는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햇볕나면, 교회 담 밑에서 몸을 녹였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의지하자, 비록 과정은 힘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미국, 이스라엘, 덴마크로 유학을 보내어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우리가 행하는 일에 있어서 형통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계획하고,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이렇게, 형통한 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 본문에 나옵니다.
본문 3 - 4절을 보시면,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해야 합니다.
본문의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정직한 사람이 성공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경영을 함에 있어서, 정직하게 하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생각과 하나님의 행하심이 다르며, 결국, 하나님의 행하심이, 정의임을 세상에 증명하였습니다. 또, 본문의 배경이 되는 남 왕국 유다의 왕족에는 많은 선한 왕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선한 왕이라고 불린다 해도, 하나님이 아신 바 되고, 후대에 본보기로 내세우는 다윗같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은 했지만, 우상숭배의 산실이 되는 산당을 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달랐습니다. 먼저, 그의 이름 자체가, “하나님은 나의 힘”이라는 의미를 갖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대로, 그는 굳은 믿음으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우상숭배를 하던, 여러 산당들을 파괴시키고, 그 안의 우상들을 깨뜨렸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이 섬겼던, 모세의 놋뱀까지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찮은 놋 조각”이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인 아하스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전선에 대항하기 위해, 앗수르의 원조를 구하고자, 우상 숭배에 전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의 권세가나 권력가들은 대부분, 우상숭배자였습니다. 그런데, 25세의 청년이, 왕 위에 오르면서,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강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과거 대통령 가운데 한 분이, 자신은 나름대로 국정에 책임을 지고, 자신의 이념 및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열심으로 했건만, 자신의 우군이자 강력한 지지세력으로 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몰아붙임을 당하자, 야속한 마음에,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고 하였습니다. 대통령도 소신만 가지고 행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듯, 본문의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단행하는 것에는, 많은 난관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 분의 뜻대로 행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더 중요시 되거나, 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에 있어서 방해되는 것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살전 5: 21 - 22을 보시면,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이것을 실천했습니다. 또, 벧전 2: 9을 보시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향해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죄악의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선포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곧,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가득 채워진 세상을, 다시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택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고,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또, 루터나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도,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것을 바로 잡았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이와 같이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과 신앙에도,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말로만, 형통을 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형통하길 원한다면, 우리가 뜻하는 바가 진실로 이루어지길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한 것은, 첫째, 하나님의 전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전을 수리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을 돌아보고, 그 전을 사랑했습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회개함으로, 백성을 성켤케 했습니다. 시 51: 17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은, 우리를 정결케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회개한다며,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사해짐을 믿는 다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의 시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 다음이 감사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셋째,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마음의 빗장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몰두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은, 성경의 말씀과 바울이 전하는 것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또, 그들이 살아가는 상황에서 성경의 말씀이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세세하고 조밀조밀하게 살폈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행 17: 11 - 12을 보시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함으로, 우리의 삶이 형통으로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을 행함으로, 형통했던 그에게,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그것은, 그가 왕 위에 오른 지, 14년이 되던 해에,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의 일부를 점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성전과 왕궁의 곳간에 있는 모든 보물을 내어주고, 협상을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유다 전체를 탐내었기에, 대군을 보내어 예루살렘을 치게 합니다. 이때, 앗수르의 장군이었던 랍사게가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고 회유시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의뢰한다고 하지만, 현재 포위된 상황에서 앗수르와 싸울 수 있는 자가 너희에게 있느냐? 또, 랍사게 자신과 군사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야, 예루살렘을 포위했겠느냐”며, 예루살렘의 거민들을 향해 위협도 합니다. 이 때의 예루살렘 거민들과 히스기야의 마음은, 마치, 고라자손이 시 42: 3에서,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랬을 것입니다.
여러분,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대면한 상황은,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산헤립이 사자를 보내어,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전달합니다. 히스기야는 이것을 가지고, 그대로 성전으로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하룻밤에 앗수르 군사 185,000명이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산헤립은 본국으로 돌아가 궁에 거하면서, 자신들의 신인 니스록의 신전에 들어가서 경배할 때, 아들들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행위를, 간과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히스기야는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우리도, 한 주간, 한 주간을 보내는 가운데, 이러한 앗수르의 군사들을 만나는 일이 없습니까? 많을 겁니다. 때로는,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는 것을 통해서, 믿음에 대해, 기도에 대한, 회의감이 들지는 않습니까? 그럴수록,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정말, 나의 구세주가 맞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셨습니까?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당당하게 서서, 그와 싸워 승리한 것이, 어찌, 다윗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까? 어찌, 우연이라고 생각합니까? 어찌, 가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입니다. 자기를 의지하는 자를 보호하며,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행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 앗수르의 군사를 만나거나, 골리앗을 만날 때는, 그 순간을 살아계신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기회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때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신앙의 고백이고, 하나님은 지금도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증거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하이든은 독일의 음악가이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하루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삶의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증오와 경제적인 궁핍, 창작활동에 대한 무력감을 느낄 때, 어떤 방법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나름대로의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이 때, 어떤 이는, 술을 통해 잊는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친구를 만나 호소한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참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시킨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은, “우리 집에는 골방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은 나의 기도실입니다. 나는 고통이 닥치면, 조용히 그 골방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골방에서 나올 때는, 희망의 빛을 발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 7: 7을 보시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합니다. 또, 마 18: 20을 보시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 21: 22을 보시면,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렘 33: 2 - 3을 보시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이 모든 말씀이 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히스기야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위험에 처했을 때, 그 해결을 하나님에게서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언제든지 하나님을 의지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들이 형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연합한다”는 말은, 히브리어의 “다바크”로서, 그 의미는, “착 달라붙다”는 뜻으로, 밀착되었음을 말합니다. 우리말에 “찰 거머리같다”는 표현이 있죠? 그겁니다. 히스기야는, 찰 거머리같이 하나님께 착 달라붙어서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가득했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응답을 받거나, 우상을 모두 제거시키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청년의 나이로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얼마만큼 연합한 상태냐는 것입니다. 요 15: 4 - 5을 보시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그의 어머니의 생일 파티에 지인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워싱턴의 어머니에게 축하인사를 하며, “어떻게 해서, 아드님을 이렇게 훌륭하게 잘 키우셨는지 그 비결이 있나요? 있으면,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비결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늘 순종하라고 강조했을 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주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레오나드 우드가 왕의 초청을 받고, 입궁했습니다. 우드를 본 왕은, 의외라는 듯, “오! 우드 경! 나는 경으로부터 아무런 회신이 없기에, 오지 못하는 줄 알고 있었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우드는, “왕께서 오라는 데, 어찌 오지 않겠습니까? 오라고 하시면, 오는 것이 신하의 도리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예배하는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입니다. 만물의 주관자입니다. 왕의 부름에 순종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나 노아나 모세나 다윗등 모든 신앙의 위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순종할 수 있는 상황에서만 순종한 것이 아니라, 순종할 수 없는 상황에서까지도 순종했습니다. 바라기는, 이 한 주간도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형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