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한 자, 요셉”(창세기 39:1-6) 2012. 10. 14.
구약성경에 신앙의 위인들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요셉의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그렇게 흥미진진하면서도 감격스러울 수가 없어요. 요셉의 이야기는 50장으로 되어있는 창세기에서 거의 13개장을 차지하고 있는데, 창세기를 읽다가 일단 요셉 이름이 나오기 시작하면 끝까지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어찌보면 요셉이야말로 우리 주 예수님을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신앙의 위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의 말씀 중에“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118:22-2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요셉의 일생이 꼭 그런것 같습니다.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던 이복 형들이 기회가 오자 요셉이 짐승에 찟겨 죽은 것처럼 아버지 야곱을 속이고는 동생 요셉을 멀리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렸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시며 형통케 하시니, 그가 팔려간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의 집에서 충성된 자로 신임을 받더니 마침내 친위대장 보디발의 모든 소유를 위탁 관리하는 가정 총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버려져 나뒹굴던 돌맹이가 고귀한 머릿돌로 변한것 아니고 뭐겠습니까? 어디 그뿐인가요. 주인 집에서 뜻하지 않게도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갇히는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도 요셉과 함께 하시어 형통케 하시니 간수장에게 신임을 받아 옥중 죄수에 관한 제반 사무를 맡게 되었고 후에 그 유명한 꿈 해몽 사건으로 일약 애굽 온 땅을 호령하는 총리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야말로 건축자가 쓸모 없다고 버린 돌과 같은 비참한 신세의 죄수 요셉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애굽이라는 큰 집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일생을 보면‘전화위복’‘칠전팔기’의 형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28절의 말씀대로입니다.“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오해하는 것은‘만사형통’이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흔히들 세속적인 기복신앙으로 변질시켜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형통의 축복이 어떠한 것인가 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주 안에서의 형통’입니다. 본문 2절에“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는 보통‘만사형통’하면, 운이 따르고 재수가 좋아 매사에 항상 일이 저절로 잘 풀리고, 하는 일마다 잘 되고, 관운이 따라 남보다 먼저 입신출세하고 거기다 만수무강까지 누리는 일생을 만사형통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요셉의 형통을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요셉의 인생은 어떤 면에서 보면 오히려 형통한 자가 아니라 매사에 일이 꼬이고 꼬여가기만 하는 인생이거나, 아니면 그저 좋았다 말았다 하는 식의 운명론적이고 순환논리적인‘새옹지마’의 인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젊은 연인이 식당에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식당 벽에 식당 사장님이 좋아하시는 글인지,‘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한자로 쓴 액자가 걸려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를 본 아가씨가 남자에게 묻습니다.‘오빠 저게 무슨 글자야?’남자가 한참을 쳐다 봅니다만 뒤의 두 글자는 쉬운‘지마’여서 읽겠는데 앞에 있는 두 글자가 도저히 모르겠는지라 명색이 남자라고 이렇게 대답했답니다‘남기지마!’하기야 음식점에서 음식을 남기지마라는 경구는 좋은 경구이겠습니다만 이리저리 되는대로 읽어서야 되겠습니까? 옛날 중국 새옹의 말 이야기를 통해서 인생이란 변화가 많아서 행운이 불행이 되고, 어느새 불행은 행운이 되는 그야말로 예측하기 어렵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주 안에서의 형통’은 그와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운이 좋아서 또는 우연히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의 형통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자체가 이미 우리에게는‘만사형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말씀은 요셉이 바로의 친위대장 집의 가정총무가 될 때만 같이 하신 것이 아니며,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실 때만 함께 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형들에게 노예로 팔려 나갈 때도,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때에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요셉의 전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던 것이며, 동시에 요셉의 전 일생을 통하여 형통케 하셨던 것입니다. 선별적으로 때를 봐가면서 잠시 잠시 형통케 하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주 안에서”우리의 모든 삶은, 원천적으로‘형통의 삶’이라고 단호히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통을, 민수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8:14하-16)”
또한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형통을, 로마서는 이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1하-35)”
그러므로‘주 안에서의 형통’이란,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고난에 동참하고, 함께 죽고, 함께 일으킴을 받고, 함께 하늘 보좌에 앉힘을 받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생을 얻기까지의 전 구원의 여정을 다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형통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분명코 모두 다‘형통한 자’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형통의 특징은 그 형통이‘이타적인 형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나의 모든 일이 형통되어야 만사형통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형통’은 분명 이타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 2절과 5절에,“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45장에 나옵니다만 요셉 본인도 자기의 형통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님을 형들에게 말합니다.“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4-5,8)”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올 당시에는 주로 천민들이 많이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어느 마부 한 사람이 예수를 믿은 후, 자기의 상전인 대감님에게 복음을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평상시에는 감히 뭔가 여쭐만한 입장이 못되다보니 기회만을 엿보는데, 모처럼 지방에 모시고 내려 가면서 기회를 얻었습니다.‘대감님! 대감님도 예수를 믿으셔야죠!’라고 용감하게 입을 뗐습니다. 그러자 대감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야 이놈아, 네깟 놈이 예수 잘 믿으면 누가 양반이라도 시켜 준다더냐?’라고 되레 비아냥조로 호통치더랍니다. 이 말을 들은 마부가, 평생 잊을 수없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나으리, 예수를 믿는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인이 예수를 더 잘 믿으면 마부 노릇을 더 잘 해야 합죠!’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마부가 양반이 되고, 양반이 대감이 되어야 형통한 자라고 할지 모르나, 예수님을 믿는 자가 누리는 형통은 마부 노릇을 더 잘하고, 남을 더 잘 섬기며 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모든 것을 다 얻은 자가 되었고,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미 형통한 자가 되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후부터는 그저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여 주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물론 필요한 특별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면서 기도로 구하면 될 것이며, 웬만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있어야 할 것을 미리 다 아시고 주신다 하셨으니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4-7)”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즉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닮은 자이기에, 주님께서 세상을 섬기기 위해 오셨듯이 우리도 이웃을 역시 섬기는 자로 살아야 마땅한 줄 압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을 거듭나게 변화시키시니 섬기는 삶이 어렵지도 않으며 오히려 즐겁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이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이타적인 존재로 변한 인생을 주 안에서 거듭난 인생이라고 칭하지요.
요셉은 결코 가정 총무가 되려 한 것도 아니며, 감옥 안에서도 총무를 하고 싶어 한 것도 물론 아니며, 더더구나 온 애굽 땅의 총리가 되고자 주여 주여! 하면서 기도한 것 역시 아닙니다. 그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섬기듯 충성되고 진실하게 살려고 힘썼을 뿐이었습니다.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졌다고 절망하지 않았으며 깊은 감옥에 억울하게 갇혔어도 원망치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된 다음에도 여전히 요셉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주어진 일에 충성된 요셉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형통한 자, 요셉’을 신앙의 사표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요셉과 같은 자로 사는 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