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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의 음성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마태복음 22:1-14) 2012. 10. 21.

작성자강수봉|작성시간12.10.21|조회수1,194 목록 댓글 0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마태복음 22:1-14)          2012. 10. 21.


  언젠가 우리나라 전통음식 축제때 먹는 김 페스티발이 열렸다고 합니다. 새카만 검정색 김들이 참기름에 발라 맛있게 구워져 상에 오릅니다. 양반김, 사조김, 광천 어머니김 등 재래김 돌김 파래김 등이 저마다 위용을 뽐내면서 상에 올랐는데, 유독 한 장의 하얀 김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의아해하며 하는 말 "야  저건 뭐야 응? 색깔이 왜 하얘?", 그러자 하얀 김은 "나 앙드레 김이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앙드레김은 유독 흰색 의상을 즐겨 입었던 국민 패션디자이너로서 유명하였으며, 2년전에 작고하셨는데‘나는 앙드레 김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회고록도 나온 줄 압니다. 흰색하면 순결, 순수, 불멸, 최고의 기품 등을 상징하는 색으로 여겨 사랑받아 온 색으로서, 결혼식 신부의 예복이 흰색이고, 성경에도 천국 성도들의 옷이 흰 세마포 옷(계19:8)이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복이 어떤 색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흰 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왕이 베푼 잔치에 참석키 위해서는 최소한 예복을 입고 나와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에게 천국을 비유로 많이 가르치셨습니다만,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을 불신하며 끝내 뉘우치지 않고 적대하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시는 가운데 책망과 심판의 선고와 더불어 주신 천국비유 말씀입니다. 바로 본문의 말씀에 앞서 주신 말씀(마21:42-44)에도,“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하심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또 하나의 천국비유를 대적하는 저들에게 주셨는데 오늘 본문말씀 즉 천국을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느 임금으로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의 전반부 3-8절 까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길 유대인들을 비유하여, 임금의 초청을 무시하고 싫어한 자들과 임금의 종들을 도리어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다가 진멸 당한 자들로 표현하였고, 본문의 중반부 8-10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얻게 될 열매 맺는 다른 백성들을 비유하여, 어부지리로 뒤늦게 잔치에 초청되어 들어온 기타 손님들로 표현하였습니다. 8-10절말씀입니다.“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오늘 특별히 묵상하고자 하는 대목은 본문의 후반부 11-14절 말씀입니다. 어부지리로 초청받아 잔치자리를 가득 메운 손님들 가운데 유독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인가 국회의원에 당선된 어느 초선 의원이 국회 개회식에 첫 등원하면서 의원선서를 하는데 그저 면바지에 평상복을 걸치고 나섰다가 큰 혼란을 야기하였던 일이 생각납니다만, 왕자의 혼인잔치 자리에 들어온 손님을 보러 온 임금이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고는“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고 하였고, 그가 아무 말도 못하자 임금이 지시하여“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유의 결론으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절)”고 하였습니다.


  첫째로, 천국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본문 비유의 말씀에서는 잔치에 청함을 받았지만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오므로 임금에게 택함을 입지 못한 자가 비록 한 사람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택함을 입지 못한 자가 많다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결론의 말씀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고 하심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다가 한 사람인 특별한 별종이 아니라, 우리같이 평범한 많은 사람이 얼마든지 해당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설마 나는 아니겠지’하는 안이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해서는 아니 되겠다는 경종인 줄 믿습니다.


  둘째로, 예복이 무엇를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인들의 옳은 행실을 옷으로 비유하였으니 바로 이 옷이 그 예복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는 말씀과“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19:8)”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확고히 지니고 있으면서, 믿음에 입각한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분명 천국의 백성으로 영접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는 임금의 질문에 유구무언,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은 분명 예복이 없어서 못 입은 것 같지도 않으며, 아무리 애써 예복을 구해 보았어도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못 입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임금 앞에서 이유와 핑계라도 한마디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 주석가들의 설명과 같이 옛날 임금들은 초청자들에게 왕궁에서 예복을 미리 내 주어 당일 착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이렇다면 더더욱 입이 열 개라도 이유와 핑계를 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회를 허락하셨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눅1619-31) 속에서와 같이 이 세상에는 늘 접할 수 있는‘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이며, 좁은 문 이야기(눅13:22-30) 속에서와 같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자가 많았다고 하니 분명 복음을 충분히 접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충분한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복음을 거부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으므로 취후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만, 어쩌저고 예복을 착용치 않은 자가 왕궁 안 잔치 자리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의아한 것입니다. 임금의 종들에게 예복에 관한 특별한 별도의 지시가 없었는지, 아니면 임금의 종의 눈을 속여 초청받은 사람인체 하였는지 말입니다. 아마도 속였다면 예를 들어 적국의 간첩같은 자가 정탐하려고 궁에서 주어진 예복 비슷한 것을 착용하고 문지기의 눈을 속이고 왕궁을 통과하였지 싶습니다. 그러나 종들의 눈은 속일 수 있었을지 모르나 임금의 불꽃같은 눈은 결코 속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네 가지 경우의 사건(마22:15-46)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바리새인, 헤롯 당원, 사두개인, 율법사가 번갈아 가며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마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중의 한 사람인체 혹은 평범한 구도자인체하면서 접근합니다. 예수님께 곤란한 질문을 던져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가이시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 부활후 결혼문제, 율법중 최고의 계명 문제, 올바른 그리스도 지위 문제 등을 질문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만 결국 저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놀라서 자리를 떠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22장은 이렇게 끝나지요.“한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22:46)” 이같은 후속의 사건 이야기들은 우리 임금되시는 하나님의 눈을 결코 속일 수가 없으며, 그 앞에서는 모든 것이 적나나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말씀의 예증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예복의 의미를 확대하여 거시적으로 한번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두 경우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상고하여 보았습니다만, 관점을 바꾸어 본문의 내용을 우리같은 기성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여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예복을 입지 않은 당사자의 마음 자세를 여러 각도로 헤아려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 사람은 임금의 잔치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고, 초청을 받았으며, 잔치날에 와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을 우리같은 교인인 기성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찌보면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열 처녀를 통한 천국의 비유(마25:1-13)와도 맥을 같이 하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로 시작되는 비유 속에서 분명 열 처녀는 일단 교인된 기성 그리스도인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열 처녀 중 미련한 다섯은 등을 가지되 별도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한고로 신랑이 더디 오자 정작 필요할 때 등불이 가물가물 꺼져가니 기름 마련하느라 우왕좌왕하였지만, 그 중 슬기로운 다섯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 갔기에 밤늦게 들이닥친 신랑과 함께 무사히 혼인 잔치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문은 안으로 잠긴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기름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예복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를 생각하듯 너무 근시안적으로 집착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당사자의 마음의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천국을 소 닭 쳐다보듯 등한히 생각해서는 결코 아니 되겠다는 말씀입니다.“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성을 빼앗고자 쳐 들어가는 군사가, 마치 소 닭 쳐다보듯 대충 공략해서야 될 법이나 하겠습니까? 사생결단입니다. 사도행전 2장21절 말씀에“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하셨지만, 사생결단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함이지 되는대로‘아니면 말고’식으로 부르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요? 성경을 읽어보면 다 그래요! 마태복음 13장44절 말씀“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에서도 그러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자기가 차려진 밥상에 당겨 앉아 밥을 맛있게 먹는 것이지, 먹기 싫어 하는데 억지로 숟갈로 떠 먹여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릴 때나 중병이 들었을 때야 그렇게 할 것입니다만 말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누가 다 팔라 말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모하며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자기 소유를 팔고 기름을 준비하고 예복을 준비하고 또 무엇 무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은 아마도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를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원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신분의 사람이 왕의 초청을 받았으니,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겨 잔치날을 간절히 사모하며 열열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준비하는 가운데 혹시 자기로 인하여 왕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까, 그 영광스러운 왕자님의 결혼잔치를 어찌하면 조금이라도 빛낼 수 있을까를 여러 가지로 당연히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예복 준비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며, 그것 말고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이것 저것 준비하였을진대 준비가 어찌 예복 뿐이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를 통한 천국 비유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어린 양 혼인 잔치(계19:9)에 참예하게 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신앙과 마음의 자세를 지니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계시하여 주시는 말씀인줄 믿습니다.

  복음서를 보시면 우리 주님께서는 시종일관하여 천국에 관하여 여러 경우의 예를 들어가며 복음을 들려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능력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보여 주셨으며, 그리하여 당신이 바로 약속대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마음에 받아들여 믿게 하셨던 것입니다. 직접적인 천국 비유의 말씀만 해도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미련한 마음을 아시기에 생각의 지평을 넓혀 주시려고 그리 하신 줄 믿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높은 산을 오른다 할 경우에도 등산 코스가 여러 코스가 있듯이, 산도 보는 시선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보이듯이, 주님은 이같은 가르침으로 마침내 우리를 진리와 생명의 길로 바로 인도하여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주님은 이 세상 언저리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우리를 한시도 쉬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물론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신앙생활이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 믿음이란 천국을 소유하고자 간절히 사모하며 자발적인 열심으로 사랑과 소망을 겸비한 생명력 넘치는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복은 주님을 향한 우리 마음과 영혼의 예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소망의 예복, 사랑의 예복, 겸손과 회개의 예복, 믿음의 예복, 존경의 예복입니다. 우리 모두 예복을 준비하듯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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