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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의 음성

“열두 살 시절의 예수님”(누가복음 2:41-52) 2012.12.23.

작성자강수봉|작성시간12.12.23|조회수1,320 목록 댓글 0

         “열두 살 시절의 예수님”(누가복음 2:41-52)         2012.12.23.


  어느날 한 노인이 지하철 4호선 막차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옆에 앉은 젊은이에게 묻습니다.“젊은이 이 지하철 기름(길음)으로 가나?”그러자 젊은이는 노인을 힐끗 쳐다보더니“아닙니다. 전기로 갑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노인은 급히 다음 역에서 내렸고 지하철은 떠났습니다. 막차 지하철이 떠난 후 주변을 둘러보니 바로 다음 역이 길음(기름)역이었다고 합니다. 이 노인은 지하철을 제대로 타고 가는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기에 물었던 것이었지만 결국은 지하철을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내용이 바로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마치고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던 중에 나이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건입니다. 유대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이면 일주일여 기간 동안을 전국 아니 전 로마제국에서 수십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 절기를 지킨다고 하니, 예루살렘은 물론 주변 마을까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절기를 맞아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절기를 마치고 귀향할 때 역시 온 동네사람이며 집안의 친척들은 함께 행동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으나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원래 율법에 의하면 성인들만 예루살렘에서 절기를 지키도록 되어 있으며 아이들은 동행하지 않는 법이지만, 아이가 12살이 되면‘율법의 아들’로 인정받는 성인식을 거쳐 성인이 되기에 율법을 지킬 의무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 예수님이 12살 때 부모를 따라 올라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이 예수님을 잃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부모의 책임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다보면 방심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룻길의 방심이라고 할까요. 히말라야 등반에도 산에 오를 때보다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할 때 조난 당하는 경우가 많다지 않던가요. 지금 저들은 감격스러운 예루살렘에서의 유월절 축제를 보내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을 것이며 또한 모처럼 만나게 된 친지들도 많을 터이니 어른은 어른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삶의 기쁨을 맛보며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모든 절기를 마치고 모두들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요셉과 마리아도 아이 예수님은 그저 또래 친구들이나 형들이나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당시 여행길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하였을 것이니, 여행의 안전이나 숙박문제 등으로 보통 젊은이들이랑 어울려 앞서 가고 이어서 여인네들이 가고 이어서 남자들은 뒤 마무리하며 걷다보니 아이 예수님은 어딘가 동행 중에 당연히 있으려니 생각할 수가 있었겠습니다. 나사렛까지는 요단강 쪽으로의 우회길로 4백리되는 거리이니 중도에 여러번의 숙박장소가 정해져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들은 하룻길을 간 후 첫 숙박예정지에서 모였을 것이며 이때 아이 예수님이 일행 중에 없다는 것을 비로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평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하여도, 수시로 우리가 주 안에 있는지, 믿음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하룻길의 방심이라 할지라도 위험하기에 히브리서에도“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히3:13). 그뿐만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에도“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하였으며(고전10:12), 고린도후서에는“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고후13:5). 뿐만 아닙니다. 생전에 우리의 신앙이 어떠한지를 심각하게 확인 한번 하지않고 살다가, 마지막날 주님 앞에서 우리의 형식적이며 잘못된 신앙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룻길의 방심도 있지만 한평생 길의 방심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경고하셨습니다.“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산상수훈 마지막에서 말씀하셨습니다(마7:21-24). 여기서 불법을 행하였다 함은 주의 사랑의 법대로 살지 않았음을 뜻함일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법, 사랑의 뜻을 도외시한채 자기 자신의 뜻과 유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그것이 불법일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한가지 살펴볼 일이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은 드디어 사흘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당시 예수님은 선생들 중에 앉아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는데,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고 하였습니다. 마침 그의 부모가 이를 발견하여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가 이르기를,“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절)”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태가 이에 이른 것이 전적으로 예수님께 책임이 있다고 책망하는 듯한 말씀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 짐작으로는 아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였을 것 같았습니다.‘예 어머니 죄송합니다. 그동안 어디 계셨댔습니까? 저도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성전의 선생님들이 잠시 부모님 만날 때까지 먹으며 잠 잘 곳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저를 찾아 오실 줄 알았어요’라고요.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라고 하셨으니, 어찌 들으면 그럴듯한 어른스러운 대답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불효스러운 대답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어른스럽다는 의미는,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정신적으로 부모의 슬하에서 벗어나 독립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미의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부모들은 자식이 장성하여 늙어도 부모 눈에는 어린 아이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합니다만 어린 아이들일 지라도 모든 것을 자기가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도와주려는 어른들의 손을 뿌리치곤 하지 않던가요.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도 그러는데 하물며 성인식을 마친 성인이니 당연히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당시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선생들과의 성경 대담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무언가 성인식과 관련되는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오늘날도 성지순례자들은 예루살렘의‘통곡의 벽’ 앞에서 성인식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다는데, 성인식의 가장 중요한 대목은 성경 율법을 암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명기의‘쉐마’는 물론이고 토라와 시편, 에언서 등을 줄줄 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기할 수 있어야 이로써 율법의 아들이 되며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불효스럽다는 의미는,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 앞에서“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한 점일 것입니다. 비록 이때 그는 선천적이며 직관적인 자의식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됨을 선포한 것이지만, 결코 육신의 아버지께 대한 효도를 절대로 소흘히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일 직후 예수님은 즉시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내려갔으며 그곳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공생애에 이르기까지 이십년 가까이 순종하며 사셨던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네 아버지”라는 말에 대하여, 예수님의“내 아버지”라고 응답하심은 물론 육신의 아버지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신 것은 분명합니다. 또 여기‘내 아버지 집’을 다른 번역본(KJV)에는“내 아버지의 일”이라고 하기도 한 점을 감안한다면 예수님의 대답은‘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나의 아버지의 일에 관여해야 함을 알지 못하셨습니까?’의 의미일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계시며 또 그 아버지의 일이 자신의 최대 관심사였다는 사실 즉 다시 말하면 자신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 이 땅에 온 목적 역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간 오래동안 잊고 사신 어머니에게 일종의 일깨워주려는 의도가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과 이제 더 이상 조용히 나사렛 동네에 머물러 살기만을 기대해선 안된다는 점을 어머니 마리아에게 인식시키려는 암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모는 이 말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지만 그 어머니 마리아는 그 말을 흘러듣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여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 마지막 52절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메시야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지니고 태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같이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거친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지닌 사람이셨음을 다시 한번 확인케 됩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는 주님을 잊은채 자기 뜻만 앞세우는 자가 아니라 항상 이웃을 배려하고 더 나아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는 신앙인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또한 비록 우리 모두는 신앙의 성장이 필요한 과도기의 미성숙 단계의 신앙인이지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스러운 존재로 성장해가는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도록 함께 힘쓰는 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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