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마가복음 14:3-9) 2013. 1.27.
본문은 사랑의 헌신의 실천에 관한 고귀한 이야기여서 달리 무슨 설명을 하거나 설교를 한다는 것이 쓸데없는 사족을 붙이는 것 같은 송구한 마음이 들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본문 마지막절(9절)을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하셨으니 우리는 이 내용에 대하여 자주 읽고 묵상을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같은 내용의 말씀이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 외에도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도 나옵니다(마26:6-13,요12:1-8). 이처럼 세 복음서에 다 기록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이는 너무나 소중하고 유명한 사건의 이야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세 복음서의 내용을 종합하면, 본문에 나오는 한 여자란 바로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입니다. 또 식사를 한 집은 같은 동네 베다니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으로서, 며칠 전 병으로 죽었던 나사로를 나흘만에 예수님께서 살려주신 일이 너무나 놀랍고 감사 감격하여 동네 잔치가 바로 그 집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니“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잔치 자리에서 마리아가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는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붓고는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아드린 것입니다(요12:3). 그러니 자연히 고귀한 향유 냄새가 온 집에 가득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구요. 그런데 본문 4절에 보니“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였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을 보면,“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함으로서, 이같이 말한 당사자가 바로 가룟 유다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 자신을 한번 되돌아 보게 됩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도둑놈의 마음은 물론 아니라해도 최소한 겉으로 나타난 그 말은 제법 일리 있다는 생각이 안 들더냐는 것입니다. 행여 우리 주변의 어떤 사람이 규모없이 돈을 펑펑 쓰는 것을 보게 되면 자기 돈 주는 것 아니면서도 괜히 아까와 하고 비난하게 되지 않더냐는 것입니다. 돈이나 많으면서 그리 한다고 할지라도 낭비가 심하다고 비난할 터인데, 여유가 없어 보이는 빈궁한 사람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심지어 어느 교회에서는 특별 목적헌금을 하면서 그와 비슷한 사단이 벌어진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우리가 믿음 없이 맥놓고 읽을 경우에, 얼마든지 우리 마음이 향유를 붓는 마리아를 책망하며 화를 냈다는 사람들이 일정부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다행히 성령께서 우리 자신의 불신앙과 영적인 무지를 깨우쳐 주시니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다시 한번 신앙을 조율하게도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후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분명하게 마리아의 신앙를 옹호하여 주셨으며 가룟 유다를 비롯한 일부 제자들의 영적인 몰지각을 나무라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정해 주신 마리아의 신앙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통해서 비록 간접적이나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같은 믿음과 사랑은 자기가 지닌 최고의 것인 옥합을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깨뜨려 주님의 몸에 부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 옥합의 가치가 삼백 데나리온이 되었든 삼천 데나리온이 되었든 마리아에게는 전혀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옥합에 있지 않고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향유 옥합 뿐아니라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주님을 위하여서라면 아낌없이 헌신할 수 있는데, 이를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르며 사랑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소위 믿음장이라고 알려진 히브리서 11장과, 사랑장이라고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이 이것을 잘 가르쳐 줍니다.
물론 마리아는 전부터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어왔으며, 이번에는 죽은 오라비 나사로를 나흘 만에 살려주시는 엄청난 신적인 표적을 보면서, 표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믿게 되었고 깨닫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가룟 유다를 비롯한 주위의 어떤 제자들은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깨어지는 옥합과 몽땅 쏟아지고 있는 너무나도 값비싼 향유를 주목한 것입니다. 그 고귀한 향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부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보지 못한채, 단지 매우 값진 향유가 허비되고 있는 사실만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누구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여부에 따라 믿음있는 사람이냐 아니냐가 판가름 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보고 있으면 이는 믿음이지만, 예수님을 단지 선지자나 랍비로 보고 있다면 이는 아직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영생하시는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사랑하니까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게 되고 자기 머리털로 닦게 되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그렇게 믿지 않고 그같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같은 행동은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 머리털로 남의 발을 닦는다는 것은 노예도 할 수 없는 수치스럽고 천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신앙을 더듬어 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다시한번 영생하시며 전능하시며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한낱 티끌에 지나지 않으며 먼지에 지나지 않으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영원한 멸망에 처할 추악한 죄인에 지나지 않는 존재일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아는데까지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이를 바로 알고 깨달으며 행하는 것을 온전한 믿음이라고 해야 하지 않겟습니까?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이같은 마리아의 헌신의 섬김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받으시고 계십니다. 또한 이를 얼마나 크게 기뻐하시며 칭찬하셨는지 모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만일 믿음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채 또 이 대목을 읽으면, 예수님의 이 모든 처신과 답변이 이기적이고, 과대 망상적이지 않냐고 오해하고 헷갈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한낱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으로나 아니 더 나아가 선지자나 랍비로 보고 있는한 우리는 본문을 이해할 수 없고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고귀한 헌신에 대한 저들의 천박한 비난과 불신앙에 대하여, 네 가지로 자세하고 친절하며 분명하게 답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로(6절),“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리아가 내게“좋은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진정한 사랑과 감사에서 우러나온 헌신의 행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보다 더 큰 이유는 마리아는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예수님의 속죄의 죽으심과 장례를 미리 준비해 주는 헌신의 행위로 높이 평가하여 받으시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으로 마리아를 옹호하며 제자들을 나무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7절),“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신명기 15:11절의“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의 말씀의 반영으로서 이 역시 구제란 아무 때라도 마음만 있으면 도울 수 있지만, 지금 십자가를 눈 앞에 둔 예수님의 대속의 사역은 인류역사의 단 한번의 사건으로서, 마리아의 헌신은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 이상으로, 결정적인 시기에 가장 적절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교회 역시 그러합니다. 교회는 구제사업에 물론 힘써야 하지만 교회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는 구령사업임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8절),“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힘을 다하여”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과 감사의 헌신이 얼마나 깊고 진실한 것인가를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몇 방울의 향을 뿌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고로 동양에서는 지체 높은 분이 죽으면 그 죽은 사람의 시신을 깨끗이 씻은 후에 향유를 바르는 관습이 있어왔는데, 향유를 바른 후에는 그 향유가 들어있던 항아리를 깨뜨려서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그 파편을 그대로 놓아 두었다고 합니다. 귀한 향유를 남기지 않고 다 사용하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네 번째로(9절),“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이 한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헌신을 얼마나 기뻐하셨으며, 얼마나 높이 평가해 주시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부활의 승리가 있을 것이며, 이어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의 큰 기쁜 소식이 온 세계에 전파될 터인데, 아울러 이같은 마리아의 아름다운 이야기도 함께 전해 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향유 옥합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세상사람 어느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신만의 옥합은 있습니다. 그 모든 세상사람들의 소중한 자신의 옥합은 영원히 깨어지지 않은채 애지중지 껴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신앙이 들어오면, 자신만의 유익을 위한 옥합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옥합, 주님의 옥합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한 이 일은 예수님을 예표적으로 나타내 보인 사건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복음전파에 동행시키신 것입니다. 요즘 세상말로‘강남 스타일이 바로 내 스타일이야!’식으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한 일이 곧 예수님 자신의 행할 일로 여겨주시면서 앞으로 복음전파시에 마치 한 셋트로 전해질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은 향유 옥합과 같으신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로 깨뜨리시어, 향유보다 귀한 보혈을 흘려 우리 위에 쏟아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2절에서 말씀하시기를,“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향유 옥합의 아름다운 헌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설명해 주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이 십자가의 복음 진리를 믿어 구원받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을 사표적인 사건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시간 주님 앞에 향유 옥합과 같은 우리 자신을 깨어 내놓읍시다. 마치 구약시대 하나님께 제단에 제물을 죽여 각을 떠서 올리듯이 말입니다. 이에 성령으로 말미암는 주님의 불의 응답이 임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