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사무엘하 7:8-13) 2013. 3. 10.
세상에도‘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는‘지성이면 감천하는’하눌님 그 이상의 분이신 줄 믿습니다. 지성은커녕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머물러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으니 말입니다. 성경말씀에,“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께 지성을 드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지성을 드리어 우리를 감동하여 회개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지성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이제나 저제나 문이 열리기를 문 밖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이십니다.“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뿐만아니라 이렇게 주님과 더불어 사는 자가 될 때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지성으로 섬기게 될 것이며, 이러한 섬김의 온전한 예배가 될 때 하나님께 상달되는 줄 압니다. 그러기에 성경은“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 아버지는 소극적으로는 기다리시며, 적극적으로는 찾아오시는 분으로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문 밖에서‘기다리시는’하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모습으로는, 집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보게 되며(눅15:11-32), 또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를‘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잘 나타나는 대목으로는, 솔로몬 왕이 하나님께 지극정성을 다하여 일천 번제를 드리자 솔로몬을 찾아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에서 보게 됩니다(왕상3:4-14). 특별히 솔로몬의 경우를 보시면, 솔로몬이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겸손하게 주님의 백성의 송사를 듣고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자, 이를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전무후무한 지혜 뿐아니라, 구하지 않은 부귀영화까지 놀랍도록 쏟아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이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잘 드러내어 주고 있습니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임금으로서 성경에서는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인물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행13:22-23)”고 하였기 때문이지요.‘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는 대목을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드디어 찾아낸 듯이 흡족해 하시고 있습니다. 본문 8절에는“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찾아낸 곳이‘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중동 지역에서 양 치는 일은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하는 일로 여기듯이, 그 옛날에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싶습니다. 원래 구약성경에 나오는 족장 시대 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가축과 함께 목초지를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며 사는 유목민이었는데, 당시 애굽과 같은 선진 농업정착민의 눈에는 이같은 유목 생활을 천한 생활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창46:34).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 이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 지파별로 분배 할당된 땅에 정착하면서부터는 생업이 주로 밀농사와 과수농사로 전환되어갔으며 목축은 단지 보조적인 역할 정도로 바뀌어간 것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을 예선키 위해 사무엘 선지자를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집으로 보내셔서 이새의 아들들을 면접할 때의 상황에서도 드러납니다. 당시 다윗은 면접 대상에도 없었지 않습니까? 사무엘상16장10-11절을 보시면“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기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라는 대목에서 당시 한 집안에서도 양 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로서 우선순위로 끝 순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웬만하면 막내이기에 귀여움의 대상이었을 터인데도 다윗은 이상하게도 양치기 일을 시켰으며, 아버지 이새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다윗의 집안이 왕년에는 룻기에서 보듯이 베들레헴에서 부유하고 유력한 보아스의 집안이었는데, 그후 보아스의 증손자인 다윗 대에 이르러서는 가세가 많이 기운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소년 다윗이 사울 왕의 신하들 앞에서 자신을,“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삼상18:23) 보아 그같은 짐작이 가는 것입니다.
결국 이를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이름도 없는 집안에서 그것도 이리저리 양 치기로 뛰어다니는 소년 다윗을 찾아내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았다는”의미는, 마치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았다고나 할까요 아니면 진흙같은 인생을 진주와 같은 고귀한 인생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어디 다윗 뿐이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인생도 마찬가지인 줄 믿습니다. 성경말씀에,“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3-6),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4)”고 하신대로, 본래 멸망의 자식이었던 죄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상승이 되었으며, 영생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또한 하늘의 기업을 상속할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받은 구원은, 양치기에서 왕으로의 신분 상승된 다윗보다도 더 놀라운 신분상승인 줄 압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시는 모든 말씀은 또한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인 줄 압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수많은 우여곡절과 난관을 헤쳐가 드디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며, 나라는 점점 강성해져 갔으며, 근거지도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 새로이 다윗 성을 쌓고 왕궁을 건축을 하였으며, 또한 주변의 블레셋을 비롯한 모든 원수들을 무찔렀던 것입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으로 천도하면서는 그동안 잊혀진 것이나 다름없이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20년이나 방치되었던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 다윗 성으로 옮겨옴으로서 비로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한 신정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 사무엘하 7장1-2절의 배경입니다.
여기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다윗의 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다윗의 이 말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쩌자고 자기와 같이 가난하고 비천한 양치기의 자리에서 이끌어 내시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시고, 더욱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을 제압시켜 주시고는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면서 오히려 송구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18절 말씀인“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에서 다윗의 마음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다윗의 마음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기뻐하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심지어 좋은 구경을 한다고 할때에, 집에 계신 노부모를 생각하는 자녀라고 하면 그가 효자가 아니냐 말입니다. 단순히 우리를 낳으시고 키워주신 부모의 은혜를 감사해 하는 것은 어린 아이도 할 수 있지만, 그같은 부모의 은혜를 보답하고 싶어하며 섬기고 싶어하는 것은 철들고 효성을 지닌 장성한 자녀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전건축을 생각하는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하십니다.“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5-7절)”고 하시면서, 도리어 축복 위에 축복을 막 쏟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축복 하나(9절),“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축복 둘(11절),“전에 내가 사사들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축복 셋(11하-12절),“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이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거꾸로 다윗의 집을 견고히 세워 주시겠다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전건축은 너를 이어 왕이 될 솔로몬이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역대상22장에 나오는데 그것은 다윗이 크게 전쟁하느라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평화를 희구하는 하나님의 성전은 이름 그대로 평화의 왕 솔로몬이 건축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죽기 전에 엄청난 각종 건축자재를 넘치도록 준비한 것이며, 성전의 설계도를 비롯하여 심지어 성가대를 비롯한 모든 예식을 위한 준비와 같은 일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죽기 전에 왕위를 이은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건축을 부탁한 것입니다. 즉 다윗의 한계는 여기까지였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역시 이 점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땅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넘치도록 주시지만, 이 땅에서 하고 싶은 일에 관해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두에게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지만, 다윗이 할 일과 할 수 있었던 일이 있었다면, 솔로몬이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겸손이며 신앙일 것입니다.
시편말씀에도,“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이라 하였고, 또“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 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4-7)”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가난하고 비천한 양을 따르던 데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시며 그의 일생에 큰 축복을 주셨지만 성전건축은 막으시고 대신 아들 솔로몬에게로 넘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듯이, 우리도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깨달아 그 뜻에 순종하는 자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또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하였듯이 말입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