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한복음 7:1-10) 2013. 3. 24.
오늘의 말씀을 대하면서 요한복음1장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9-13)”는 말씀인데, 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에 있어서는 유대인의 혈통을 타고났든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가 되었든 육적인 혈통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별도의 특권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본문5절에“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하였으니 말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긴 합니다만 어찌 이럴수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난주간에 제가 이 말씀을 읽는데 그 형제들의 입장이 얼핏 수긍이 가는 것입니다. 수긍이 가면 안되는 것인데 얼핏이나마 수긍이 갔다면 이는 틀림없이 내 믿음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니겠냐 싶은 마음이 들어, 이내 본문을 한참을 묵상을 하고 연구를 했습니다.
요즘의 우리 신앙수준에서 생각할 때, 본문에서 보는 예수님의 형제들 정도면 보통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이 말은 형님되는 예수님이 지금껏 갈릴리에서 행하는 놀라운 능력의 사역을 잘 알고 있으며 이를 인정하는 동생들로서는 나름대로 형을 위해 조언을 한 것입니다. 형의 유명세에 덕좀 보고자 형을 부추기는 저의가 있긴 해도 일단 선의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말에도 망아지는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한양으로 보내라는 말과 같이 뭔가 일을 하려면 갈릴리 촌구석에 묻혀 있어선 아니되며, 이번같은 대명절인 초막절에는 좀 위험이 있어도 큰 결단을 내려 유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본격적으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함은‘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이상하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대하여 어떠한 태도와 또 어떻게 믿어야 참된 믿음이란 말인가? 이는 아마도 동생들이 예수님을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 인정은 하고 있었다고 해도 당시의 일반적인 유대인들처럼 잘못된 메시야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에 이른 것입니다. 이는 보통‘정치적인 메시야관’이라고 하여, 메시야가 나타나면 로마제국을 철장권세로 제압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옛날 다윗시대의 영광을 회복하는 나라로 만들 것이라는 소박한 민족주의적인 신앙입니다. 그러하기에 유대인들은 메시야하면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메시야관의 문제점은 영적인 참된 메시야는 도외시한채 단지 육적인 메시야만을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마태복음1장의“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는 말씀과 같이, 메시야의 사역은 인류를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회복하는 영적인 사역이 주된 사역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역은 구약의 수많은 희생제사 제도에서 예표되었듯이, 인류의 속죄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최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회복은 그 다음이지요.
마태복음16장에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잘 하여 예수님을 기쁘시게 한 대목이 나오지요.“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요.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시는 중에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이르자, 베드로가 막아서지 않던가요?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즉 육적인 사람의 일보다 영적인 하나님의 일이 우선인 것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지 않던가요? 한번은 예수님께 형제간의 억울한 유산상속 문제의 해결을 요청해 온 사람에게“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시며 문제해결은 커녕 책망하셨던 적이 있습니다(눅12:13-15). 그러시면서“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시어 물질적이고 육적인 것보다 참된 생명의 소중함을 교훈하셨던 것입니다.
또 한번은 오병이어의 기적의 떡을 먹어본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도“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5-27)”라고 대답하시므로 영적인 양식을 앞세우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기껏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단지 사람의 일, 육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기에 성경은 이를 불신앙으로 치부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부터“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라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정죄하고 회개를 촉구하니 세상의 악인들은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였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오늘 7절 말씀에도“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하심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미움의 십자가를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속죄와 사랑의 십자가로 바꾸어 주셨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죄에서 돌이키고 회개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모든 죄를 씻어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 곧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정치적인 메시야관이나 또는 복과 기적만을 구하는 기복신앙이나 표적신앙은 십자가가 빠진 신앙이기에 잘못된 신앙이며 거짓된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같은 것에 대하여는 항상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영원한 구원이냐 멸망이냐의 심각한 생사의 영적문제이지 한낱 세상적이며 물질적인 것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마케도냐의 알렉산더 대왕이 선물로 받은 사냥개 두 마리를 이끌고 모처럼 토끼와 노루사냥을 나갔는데, 도대체가 사냥개가 전혀 뛰어주지를 않아 사냥을 망치고서는 화가 치밀어 사냥개를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후에 사냥개 선물한 왕을 만나 불평을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러자“대왕이시여 토끼 노루 사냥이라고 하셨나요? 아-! 그 사냥개들은 사자 호랑이를 사냥할 때 데리고 나가는 사냥개입니다”라고 탄식하더랍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신앙 역시 그러한 줄 믿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야관에 입각한 신앙이거나 한낱 기복신앙이거나 이적만을 추구하는 표적신앙을 어찌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은 또 예수님께서“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6절), 내 때는 아직 차지 아니하였다(8절)”라는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6절과 8절말씀이 그렇습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입니다. 10절 말씀과 같이 주님은 명절 중간이 될 때까지 상경을 지연시키셨으며 섭리의 때를 따라 은밀하고 고독하게 당신만의 길을 걸으셨던 것입니다. 그 모든 길은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의 길이셨던 것입니다. 형제들이 조언하였기 때문에 서둘러 나선다거나, 제자들이 막아선다고 머뭇거리실 주님이 아니셨습니다. 주님은 시종일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최선의 시간에 최적의 기회를 포착하시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의 경우에서도(요2:1-11) 모친 마리아가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예수님께 와서 말할때에도“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심으로, 주님의 모든 때와 사역은 항상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른 십자가의 길을 향해 초점이 맞추어졌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도 어느 면에서는 그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날 때 물론 주안에서 형제 자매된 성도들에게 묻고 의논도 하곤 합니다만, 어느 때는 고독하고 은밀하게 하나님께만 기도하고 결단하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할 때가 그러했습니다.“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1:15-1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독하게 하나님과의 은밀한 독대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번 부활절에 주기도문 사도신경 암송대회를 하려고 합니다만, 어느 교회에선가 가족대항 찬송가 부르기 대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김집사님가족이 나와 찬송을 하는데 그 집사님이 중간에 엉뚱하게 틀리면서 모든 교인들이 깔깔대고 웃자 당사자인 집사님이 당황한 것은 물론 함께 부르던 가족들도 부끄러워 어쩔줄 몰라했다는 것입니다. 뒤 순서에서 목사님 가족들 차례가 되어 부르는데 이번에는 창피스럽게도 목사님이 중간에 가사를 틀렸다는 것입니다. 옆에 서있던 사모님이 눈을 흘기고 함께 찬송 부르던 가족들은 물론 다른 교인들까지 어이없어하며 목사님을 쳐다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고서 얼마간 세월이 흘러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교회 당회실에서 장로님들이 목사님의 유품을 정리하는데 목사님의 일기장이 발견되어 잠시 들쳐보는데, 전에 가족 찬송가 대회하던 날의 일기가 있더랍니다.‘오늘 김집사 어이없게 가사를 틀려 교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기에, 나도 일부러 틀리게 불렀더니 김집사가 웃음을 띄며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주님 오늘도 한 영혼을 위로하는 목회를 한 것이 되나요?’ 이를 함께 읽은 장로님들,‘아-! 주여!’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고 합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3-4)”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아니한채 단지 인간의 생각과 뜻대로 처신하는 신앙이라면 이 역시 불신앙임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3:35)”라고 말씀하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하셨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하나님의 뜻”과 결부시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 뜻을 앞세우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으로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이며 넓은 길이기에 결국은“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고 천국문 앞에서 쫓겨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신앙은 참됨 신앙이기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이며 협착한 길이지만 마침내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큰 문과 넓은 길이 예수 안 믿는 불신자가 가는 길이라고만 도외시할 것이 아니라, 엉터리 믿음과 형식적인 신앙생활하는 자들을 다 포함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생각하며 본받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 신앙의 회복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같이 기도하셨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1하-42,44)”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