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디모데후서 2:20-21) 2013. 5. 5.
성경에는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는 말씀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우선 로마서 9장의 말씀에 보시면,“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9:21-24)”고 하였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4장에도,“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고 하였고, 또 베드로전서 3장에서는,“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라는 말씀으로도 기록되어 나옵니다.
그런가하면 특정 개인을 지목하시어 그릇으로 비유한 곳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시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 아나니아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시어 다메섹에 들어온 핍박자 사울을 찾아 받아들이라고 하시면서, 사울을 그릇으로 언급하셨습니다.“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즉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쓰시기 위하여 택하신 당신의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사람을 그릇 말고도 여러 가지로 다르게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만, 특별히 그릇으로 비유될 경우에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과 강조점이 남다르다고 봅니다.
우선‘그릇’이라고 하면 무엇인가 담아내야 하는 존재임을 생각게 합니다. 따라서 그릇과 같은 존재인 사람은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에 따라 사람의 귀천이 달라지는 특징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 안에 하나님을 담고 있다면 한없이 귀한 존재이지만, 세상의 세속적인 것을 담고 있으면 한없이 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 안에 하나님에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을 함께 담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또 요한일서 2장에도,“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5-16)”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역시 사람을 그릇에 비유한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그릇이란 우리 생활에 필요한 음식물이나 물건들을 담고 보관하고 옮기는데 쓰는 필수적인 소중한 생활용기입니다. 따라서 생활의 용도를 따라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성경 본문에도“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20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그릇 이야기는 이내 다음 절에서 사람 이야기로 바뀌어 집니다.“그러므로 누구든지”입니다.“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21절)”고 하였습니다.
유럽의 어느 가정에 10년 넘게 우산꽂이로 사용하던 항아리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우연히 놀러왔던 학자의 눈에 띄어 그 우산꽂이 항아리를 감정해 보았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백만 달러가 넘는 고대 중국의 국보급 문화재였던 것입니다. 이 항아리는 집주인이 오래 전에 지인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었는데 처치 곤란이어서 그냥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창고를 정리하면서 한 구석에 처박아 두는 것 보다는 이를 꺼내어 우산꽂이로라도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현관 한 켠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항아리 하나라도 이를 누가 지니고 있으며 또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와 쓰임새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재능과 잠재력이 있어도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끝내‘처치곤란’의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어린이 주일로서 어린이들의 교육을 생각하게 되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어느 한 어린이의 좋은 재능과 잠재력을 발견하여 이를 키워주는 훌륭한 스승이나 은인이나 멘토를 만날 수 있다면, 당사자된 이 어린 아이에겐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아이들의 부모들은 자기의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서 만져주시기를 바라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것 같습니다(막10:13-16). 그런데 당시 예수님 주변의 제자들은 이를 모르고 아이들을 제지하다가 주님에게서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런 후에 일일이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어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어린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쳐 줘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고요.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의 어린 아이들이 물론 세상의 스승이나 은인이나 멘토의 택함을 받는 일도 귀한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야 하는 줄 압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울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태생부터 특권을 부여받은 귀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물론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곧 유대인중 베냐민 지파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며, 더군다나 법적으로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또 성장하면서는 유명한 스승이며 멘토인 가말리엘의 택함을 받아 그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장성하여서는 정통 바리새파의 지도급 공회원이 된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단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알지 못한채 막무가내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핍박하는 악질적인 괴수가 되어 동분서주 하였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처치곤란한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그는 주님의 손에 요긴하게 쓰이는 그릇으로 택함을 받았으니 곧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큰 집’인 우리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며 또한 일꾼으로 부름 받은 그릇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맡은 바 역할은 다를 수 있습니다. 금 그릇, 은 그릇, 나무 그릇 그리고 질그릇입니다. 마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으로 설명하면서 누구는 눈이고, 누구는 입이고, 누구는 귀이고, 누구는 각각의 다른 지체이듯 말입니다(고전12:14-27). 문제는 금 그릇이냐 질그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그릇이 귀하게 쓰이냐 혹은 천하게 쓰이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금 그릇이라도 천하게 쓰일 수가 있으며 질그릇이라도 귀히 쓰일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고귀한 항아리라 할지라도 아무렇게나 놓여져 우산꽂이로 쓰인다면 그것이 바로 천하게 쓰이는 것이지만, 비록 한낱 질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인의 상에 오르는 그릇으로 쓰인다면 귀하게 쓰이는 것이 아닐까요?
여기서 우리는 본문을 따라 귀히 쓰임을 받는 그릇에 대하여 좀 더 살필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21절 상반절입니다.“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에서’란 의미는, 특별히 본문 전후를 살피면 진리의 말씀에서 벗어난 이단자들의 망령되고 헛된 말과 불경건과 불의임을 알 수 있습니다(딤후2:14-19). 예를 들어 당시 이단들은 심지어‘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주장하여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단들은 그야말로 퍼져나가는 악성 종양과 다를 바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된 귀히 쓰는 그릇’이란 말은, 본문 바로 앞 단락중 15절의 말씀에 나오듯이,“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딤후2:15)”라고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는, 21절 하반절입니다.“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입니다.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을 세 가지로 풀어 설명하였습니다.
1)‘거룩하고“입니다.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은 거룩함을 말합니다. 원래 거룩함이란 악하고 더러운 것에서 철저히 분리되어 따로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은혜로 값없이 죄 씻음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거룩한 무리 즉 성도(聖徒)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손에 붙잡힌 바 되려면 당연히 우리도 거룩한 자가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2)‘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입니다.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은 주인의 쓰심에 합당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쓰심에 합당하다’는 말은‘유크레스토스’라고 하여‘쉽고 유용하게’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쓰기 쉽고 유익한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보통 일꾼을 쓸 때 보면 대충 그렇습니다. 유능은 하지만 까탈스럽거나 혹은 부리기는 만만하지만 유능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귀히 쓰는 자는 유크레스토스한 일꾼 즉 유능하면서 잘 순종하는 일꾼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나 사도 바울 같은 일꾼일 것입니다.
3)‘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즉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은 준비된 자입니다. 얼마전에 그릇을 깨끗하게 씻어 선반에 얹어 두었다고 해도 오늘 쓸려고 할 때까지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주님이 찾으실 때“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준비된 일꾼일 것이며, 사도 요한과 같이 주님께서 속히 재림하겠다고 할 때“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준비하고 있는 일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모세, 사도 바울, 이사야 및 사도 요한도 어느 날 갑자기 주인되신 주님의 쓰심에 합당한 귀한 그릇이 된 것은 아님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바로 보혜사 성령께서 오늘 우리를 동일하게 그같이 인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6-30)”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