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누가복음 16:16) 2013. 8. 18.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초대교회 당시 아시아 일곱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어떠한 책망을 받았는지를 아실 것입니다. 계3:15-16절이지요.“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당시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주변에 골로새와 히에라볼리와 함께 삼 사십리 거리를 두고 삼각형으로 가깝게 모여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골로새에는 차고 순수하고 상쾌한 샘물이 있고, 히에라볼리에는 병을 고쳐주는 뜨거운 광천수가 있지만, 라오디게아에는 항상 물이 부족하여 양쪽 도시로부터 수도관을 통해 공급받다보니 오는 동안에 미지근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주님께서 라오디게아의 이같은 배경을 감안하시어 말씀하셨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주님은 이같이 신앙상태가 미지근해진 당시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물을 비유로 들어“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정치 뿐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모든 것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 피차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실상은 참된 보수와 참된 진보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보수와 진보는 마치 손바닥과 손등과 같이 결국 하나입니다. 동전의 앞뒤와 같이 말입니다. 이를 신앙적으로 설명드린다면,‘보수’라함은 참된 진리를 철저히 파수하고 있어야 참된 보수일 것이며, 또한‘진보’라함은 참된 진리를 맹렬히 추구하고 있어야 참된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얼치기는 무늬만 보수요 무늬만 진보일 뿐이기에 결국은 입으로 토하여 버리고 말 것들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즉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이 그랬습니다. 저들은 스스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진리의 말씀인‘율법과 선지자’의 자리를 독차지한 채 자기들은 지키지도 못하면서 겉으로는 외식하며 백성들 앞에서 보수의 원조라고 자부하며 높임을 받으며 살았지만, 실상은 편견과 고집과 외식으로 살았던 무늬만 보수인 형식주의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당시의 세대를 다음과 같이 비유하신 적이 있습니다.“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11:16-19)”
이는 바로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과 사고방식이 편견과 고집으로 똘똘 뭉쳐있고 매사에 부정적이고 부조화와 무관심으로 꼬여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저들은, 세례요한이 금욕 생활하면서 회개를 선포하니 귀신 들렸다고 비난하더니만, 예수님이 죄인들을 회개키 위해 저들을 영접하는 것을 보고는 죄인과 다름없는 부류라고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계속적인 진리에 대한 추구는 없이 그저 모세와 선지자의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참된 보수 신앙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의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하여 입으로 토하여 버리고픈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의 세대를 비유한 또 하나의 예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이는 천국복음이 바햐흐로 이방인 세계로 전파될 당시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당시의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진리를 맹렬히 추구하는 진보주의의 모습을 보이지만, 그저 표적이나 지혜를 구함은 무늬만 진보이지 참된 진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진보는“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데 저들 당시의 사람들은 핀트가 틀렸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누가복음 16:16)은 이같은 복음 진리의 양면성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내용적으로는 이미 그 앞장인 15장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15:1-2)”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비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선 목자와, 잃은 드라크마 은전 하나를 찾고자 애쓰는 여인과, 집나간 탕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비유 이야기를 통하여 저들에게 대답하여 주신 것입니다. 병행하는 마가복음의 말씀에서“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6-17)”고 대답하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사실 저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들(마23:13)”이었고, 또“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자들(마23:28)”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마23:29-31)”라고 질책을 당하였던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은 저들에게“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나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36-40)”라고 탄식하기도 하셨습니다.
즉 저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리도 애지중지하는“율법과 선지자”에 대한 저들의 오해와“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무지를 오늘 본문말씀으로 요약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다시 말씀드려, 성경 즉“율법과 선지자”는 하나같이“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그림자일 뿐이며, 오직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집중하여 대변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과 로마서 3:20-24절의 말씀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0-24)”
율법과 선지자는 오직 죄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일 뿐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나아가도록 안내 역할을 할 뿐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오심으로 율법과 선지자의 역할이 종식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값 없이, 선물로,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여 믿으면 누구나 차별없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 놀라운 생명의 복음인 것입니다.
여기 특별히 구원을 얻는 대목에서‘값없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말씀과‘마음에 믿고 영접한다’라는 말씀이 있음을 다시 한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이해함에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약속의 가나안 땅에 어찌 들어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홍해 바다를 통과함과 요단 강을 건너는 사건을 살펴보시면, 모두 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바다와 강을 건너지만, 홍해는 하나님이 열어주시기까지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열어주신 길로 건넜고, 후에 요단 강은 열어주시기 전에 믿음으로 법궤를 앞세우고 그냥 강물 속으로 앞으로 전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라는 표현은 마치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열어주신 홍해 바다를 건너는 모습을 생각게 하고,“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는 말씀과 또 병행하는 마태복음의“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라는 표현은 마치 요단 강을 향해 믿음으로 담대하게 전진하는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전에 어느 집사님과 대화 중에‘믿음이란 무조건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라는 집사님의 대답에 순간 제가 속으로 멈칫하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예를 들어 홍해 바다가 말씀대로 갈라졌다 하면 그냥 믿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괜스레 의심하고 따지고 할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입니다. 이 말씀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하는 천사의 말이었지요.
연예인 교회에 처음으로 나온 어떤 연예인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목사님의 말에 그걸 어찌 믿을 수 있냐고 계속 딴지를 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보다못한 구봉서 장로가 소리를 꽥 지르면서‘야 임마!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도 잠자코 있는데 네가 웬 잔말이 많어? 믿으라면 무조건 믿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확인은 못했습니다만 있을법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니 우리가 무조건 믿게 되는 차원이 있습니다.“중생”입니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는 이치입니다.
그런가하면 아기가 태어난 후에는 어른이 될 때까지 성장하는 것과 같이, 믿음도 한번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감에는 요단 강을 건너듯 담대함과 결단이 요구되듯이 말입니다.
어느 사람이 정신과 의사를 찾아 왔습니다.“선생님 저는 도저히 두려워서 침대에 누울 수가 없습니다. 침대에 누우면 침대 밑에 누가 들어가 누어 있는것 같아 무섭고, 침대 밑에 들어가면 이제는 침대 위에 누가 누워 있는것 같아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그러자 의사 진단과 처방을 줍니다.“아주 중증이군요 한 일년간 치료받아야 겠군요. 일 주일에 두 번 나오세요.”이 환자가 한 번 올 때 치료비는 얼마나 되느냐고 하자 30만원이라는 말에 좀 많다고 생각했던지 다른 치료 방법을 없을까 생각하고 동네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톱으로 침대 네 다리를 싹뚝 잘라버려 단번에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믿음이란 이처럼 단순하고도 단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예는 어떨까요? 세상에서 제일 어마어마한 폭포가 남미에 있는 이과수 폭포입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쏟아지는 폭포 안쪽에 사는 작은 새들이 있습니다. 이곳은 천적으로부터 안전한 곳입니다. 그런데 새끼를 위한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새들은 하나같이 이 엄청난 폭포를 뚫고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요단 강으로 뛰어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동중정(動中靜)하고 정중동(靜中動)하는,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한 양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그러므로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단번에 얻은 이 큰 구원에 대하여 소흘히 여긴다거나 무관심할 정도로 미지근한 신앙이어서는 절대로 아니 되는 것입니다. 담대하고 단호한 믿음을 지니고 살면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천국백성이 마땅히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담대한 신앙인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시는 모든 성도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