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삼십복三十輻
三十輻章所以次前者, 前章, 雖顯自利利他, 內外二行, 其於空有兩慧猶自未圓. 故次此章. 具明資導之義. 就此一章義, 分爲兩. 第一, 汎擧三事, 以况有無. 第二, 的辨有無, 顯明資導.
삼십복三十輻 장이 앞 (장)의 다음에 놓인 까닭은 앞 장이 스스로 이롭게 되고 백성을 이롭게 함, (다시 말해) ‘안’과 ‘밖’의 2가지 닦음과 익힘에 대해 설명했지만, 그것에는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없이) ‘텅 빔’과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있음’의 2가지 앎慧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 장) 다음에 이 장이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이 장은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있는’ 앎에 대한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텅 비어 ‘없는’ 앎의) 거울됨과 법칙됨의 의미를 보충하여 설명한다. 이 한 장의 문단은 2개로 나뉜다. 첫 번째 문단, 3가지 사례를 들어서 (앎慧에 있어서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있음’과 ‘없음’에 대해 설명한다. 두 번째 문단, (앎慧에 있어서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있음’과 ‘없음’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그것이 ‘있음’에 대한 ‘없음’의) ‘거울됨’과 ‘법칙됨’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第一, 汎擧三事, 以况有無.
첫 번째 문단, 3가지 사례를 들어서 (앎慧에 있어서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있음’과 ‘없음’에 대해 설명한다.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삼십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여 있고, (바퀴통) 그것이 (가운데가 텅 빈 채 가득 찬 바가) 없기 때문에, 수레로서의 쓰임새를 가지게 된다.
周禮考工記云, 三十輻, 象三十日, 以成一月也. 當其無者, 箱轂, 內空也. 只爲空, 能容物. 故有車用. 以况學人心空. 故能運載蒼生也. 又車, 是假名. 諸, 緣和合, 而成. 此, 車. 細析推尋, 徧體, 虛幻. 况一切諸法, 亦復如是.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는 일컬었다. “삼십 개의 바퀴살은 삼십 일을 상징하는데, 따라서 한 달이 이루어진다.” “당기무當其無”에서 “기其”는 수레칸과 “바퀴살”을 뜻하고, “무無”는 (그것의) 안쪽이 텅 비어 있다는 뜻이다. (수레칸은) 텅 빈 바가 되어야 사람과 물건을 실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수레칸은 텅 빈 바가 되어야) “수레로서의 쓰임새를 가지게 된다.” (비유컨대) 따라서 (도道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의 마음은 텅 비어야 한다. (따라서 마음에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없는’ 앎慧을 품어 안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마음에 그것이 ‘있는’ 앎慧을 품어 안은) 백성을 (그것이 ‘없는’ 앎慧의 상태로) 실어 나를 수 있게 된다. 덧붙여, “수레”는 헛된 이름이다. (“수레”는 바퀴살, 바퀴통, 수레칸 등의) 여러 가지가 관계되고 조화되고 결합되어 이루어진 바이다. 그것이 (이름으로서의) “수레”이다. (따라서 “수레”를 바퀴살, 바퀴통, 수레칸 등으로) 하나씩 쪼개서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관계되고 조화되고 결합된) 전체(로서의 “수레”)의 본체體는 텅 비어 있으며, (따라서 이름으로서의 “수레”는) 헛되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있는’ 앎慧의) 모든 것이 또한 이와 같다.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점토가 섞여서 그릇이 되는데, 그것이 (가운데가 텅 빈 채 가득 찬 바가) 없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쓰임새를 가지게 된다.
考工記云, 埏, 和也. 埴, 粘土也. 和粘水土, 燒以成器, 其中空無, 故得盛受. 以况學人心空. 故能容物.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는 일컬었다. “연埏은 섞는다는 뜻이다. 식埴은 점토이다. 점토에 물을 붓고, 섞고, 구워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것의 가운데가 텅 비고 (가득 찬 바가) 없어야, (물건을) 담기가 용이해진다.” (비유컨대) 따라서 (도道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의 마음은 텅 비어야 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있는’ 앎慧을 가진) 백성을 품어 안을 수 있게 된다.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문과 창이 뚫려서 방이 되는데, 따라서 그것이 (가운데가 텅 빈 채 가득 찬 바가) 없기 때문에, 방으로서의 쓰임새를 가지게 된다.
穿鑿戶牖以爲室屋, 室中空無, 故得居處. 况學人心空. 故能覆物. 又穿鑿戶牖, 通人往來. 况根竅虛通. 故能用而無滯. 車等三物, 其義相類, 所以重出者, 車則動而不靜, 室則靜而不動, 器則亦動亦靜. 有此三異, 故重出之.
“문”과 “창”이 “뚫려서” “방”이 되는데, 방의 가운데가 텅 비고 (가득 찬 바가) “없어야”, (사람이) 들어가 살거나 머무르게 된다. (비유컨대) 따라서 (도道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의 마음은 텅 비어야 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있는’ 앎慧을 가진) 백성을 (그것이 ‘없는’ 앎慧의 상태로) 자라나게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비유컨대) “문”과 “창”을 “뚫어야” 사람의 오고 감이 용이해진다. 따라서 (도道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의) 마음은 텅 비고 (오고 감이) 용이해야 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있는’ 앎慧을 가진 백성을) 일삼지만, 집착하는 바가 없게 된다. (덧붙여) “수레” 등의 3가지 사물(의 사례), 그것이 (비유하는) 의미가 부류를 같이 하는데, 거듭하여 이야기한 까닭, “수레”는 움직이는 바로서 가만히 있는 바가 아니고, “방”은 가만히 있는 바로서 움직이는 바가 아니며, “그릇”은 움직이는 바이자 가만히 있는 바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3가지는 차이를 가진다. 따라서 거듭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第二, 的辨有無, 顯明資導.
두 번째 문단, (앎慧에 있어서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있음’과 ‘없음’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그것이 ‘있음’에 대한 ‘없음’의) ‘거울됨’과 ‘법칙됨’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있는’ 앎慧은 그것이 ‘없음’을 거울로 삼고 법칙으로 삼음이) ‘있음’으로써 이로움을 일삼게 되는데, (다시 말해 앎慧에 있어서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없음’으로써 쓰임새를 일삼게 된다.
無, 賴有, 以爲利. 有, 藉無. 以爲用. 二法, 相假. 故成車等也. 言學人, 必須以有資空. 以空導有. 有, 無資導. 心, 不偏溺. 故成學人之利用也.
“없음”은 “있음”을 의지함으로써, “이로움을 일삼게 된다.” “있음”은 “없음”을 의지함으로써, “쓰임새를 일삼게 된다.” (그런데 “이로움”과 “쓰임새”의) 2가지 모습은 모두 (본체가) 헛되다. 따라서 (바퀴살, 바퀴통, 수레칸 등이 관계되고 조화되고 결함됨으로써) “수레”(와 “그릇”과 “방”) 등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도道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없음”으로서의) ‘텅 빔’을 (그것이) “있음”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없음”으로서의) ‘텅 빔’을 (그것이) “있음”의 법칙으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해, 도道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은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있음”을 바로잡기 위해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있지만”, (그러한 때조차 그것이) “없음”이 거울이 되게 하고 법칙이 되게 해야 한다.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있음”을 바로 잡기 위해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바가 “있음”에) 마음을 쓰지만, (그러한 때조차 그것에) 치우치거나 휩쓸리지 않게 해야 한다. 따라서 (도道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으로서의 “이로움”과 “쓰임새”를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