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혼魂이) 백魄을 싣고 꾀해 하나로 품어 안은 채, (서로) 떨어지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할 수 있는가?
載, 謂魂之載魄也. 營, 謂魂之營魄也. 盖魄, 陰, 而二. 主乎體質. 魂, 陽, 而一. 主乎營爲. 然魂, 無形體. 必附麗於魂.
“재載”는 이른바 혼魂이 백魄을 “싣는다”는 말이다. “영營”은 이른바 혼魂이 “백魄”을 “꾀한다”는 말이다. 이른바, “백魄”은 음陰이고, 2이다. 바탕(質; 本體)의 모양과 모습을 갖추는 일을 주로 한다. 혼魂은 양陽이고, 1이다. 일삼음(爲; 作用)(의 모양과 모습)을 “꾀하는 일”을 주로 한다. 따라서 혼魂은 (바탕으로서의) 모양과 모습을 가지는 바가 없다. (따라서) 반드시 (바탕으로서의 모양을 모습을 가지는 바가 있는) “백魄”을 기대야 하고, 짝해야 한다.
故至人, 魂卽魄, 魄卽魂. 混合. 無間. 其次, 或魂多魄少, 或魄多魂少. 以及下品, 魂魄, 不能交涉.
따라서 (도道에 다다른 정도와 수준이 가장) 지극한 사람은 혼魂이 곧 “백魄”이고, “백魄”이 곧 혼魂이다. 혼魂과 “백魄”이 서로) 어우러지고 아우러져 있다. 혼魂과 “백魄”이 (서로) 틈을 가지는 바가 없다. 그 다음 (정도와 수준의 사람)은 어떤 경우에는 (“싣고” “꾀할”) 혼魂은 많지만, (“실려지고” “꾀해지는”) “백魄”이 적으며, 어떤 경우에는 (“실려지고” “꾀해질”) “백魄”은 많지만, (싣고 “꾀하는”) 혼魂이 적다. (가장) 아래의 정도와 수준(인 사람)에 이르면, 혼魂과 “백魄”이 서로 어우러지고 아우러지지 못한다.
盖不惟機事踈密. 於此焉分. 亦壽夭之所由基. 故魂升魄降, 則死亡, 魄煉魂旺, 則延年.
따라서 (사람이 일을 일삼는) 모양과 모습, (일삼은) 일의 드물고 성긴 모양과 촘촘하고 빽빽한 모습이 (서로) 나란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도道에 다다른 정도와 수준이 지극한 사람, 그 다음인 사람, 가장 아래인 사람) 그것이 (서로 갈라지고)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혼魂과 “백魄”이 서로 어우러지고 아우러지는 정도와 수준은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오래 사는 바와 (그렇지 못한 채) 일찍 죽는 바가 말미암고 바탕으로 삼는 바이다. 따라서 혼魂이 (“백魄”을 “싣고” “꾀함”으로써, “백魄”과 서로 어우러지지 못한 채, 하늘 위로) 올라가고, “백魄”이 (혼魂에 “실리고” “꾀해짐”으로써, 혼魂과 서로 아우러지지 못한 채, 땅 아래로) 내려가면, (사람이) 죽게 되고 사라지게 되지만, “백魄”이 (“실려지고” “꾀해지는” 정도가 불려짐으로써, “백魄”이 혼魂과 서로 어우러지는 수준이) 불려지고, 혼魂이 (“싣고” “꾀하는” 정도가 늘려짐으로써, 혼魂이 “백魄”과 서로 아우러지는 수준이) 늘려지면, (사람이 본래 저절로 그러한 명命 대로) 살아가는 바(年; 命)(와 자리하는 바)를 이끌게 된다.
此, 盖言以魂載魄. 凡厥營爲, 必於魄. 而使魄, 恒抱之. 陽一, 無少暫離也. 能無離乎, 難其事而戒之也.
이 문장은 이른바 가르친다. “따라서 (사람의) 혼魂은 (반드시) 백魄을 (꾀하고) 실어야 한다.” 이른바, (사람은 혼魂으로 하여금) 반드시 “백魄”에 대한 “꾀하고” 일삼는 바를 (끝점까지) 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魄”으로 하여금 (반드시) 늘 그러하게 (혼魂) 그것을 “품어 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陽이고 1인 바(인 혼魂으로 하여금, 반드시 “백魄”을 “싣고” “꾀함”이) 적은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하고”, (“백魄”을 “싣고” “꾀함”이 많은 바와) 잠시라도 “떨어지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능무리호能無離乎”는 (반드시 혼魂이 “백魄”을 “싣고” “꾀하지” 못한 채, 혼魂과 “백魄”이 서로 “떨어지는”) 그러한 일을 어렵게 여겨야 하며,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或曰, 老子, 於身退之後, 卽繼之以抱一者, 其意, 抱一之道, 惟歛退之後, 可以易成. 正如一陽來, 復至靜之中也. 漢之張良, 謝病辟穀, 深得老子微旨.
덧붙여, 노자가 이른바 “(공功이 이루어지고 이름이 따르게 되면) 몸이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제9장의 마지막 문장) 다음, 곧바로 이른바 “(혼魂과 백魄이) 하나로 품어 안아지게 해야 한다”는 이 문장을 이어 쓴 것, 그 까닭은 (비유컨대 양陽이고 1인 혼魂과 음陰이고 2인 “백魄”이) “하나”가 된 이치(道; 自然·無極·陰·陽·性·命)를 “품어 안아야지”, 이른바 (“몸”의) “물러남”을 바랄 수 있으며, (그것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비유컨대, (시끄러운 가운데이고) 1인 양陽이 (떠나)가야지, (2인 음陰의) 조용한 가운데가 되돌켜지고 다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漢나라의 장량(張良, BC.250~186)은 (공功이 이루어지고 이름이 따르게 되자) 몸을 물리고, 병病을 핑계 댄 채, (유留 땅으로 내려가) 곡식을 심어 먹었는데, 노자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요지要旨를 깊이 있게 알아차려 일삼았던 사람이다.
專氣致柔, 能嬰兒乎.
(본래 저절로 그러한) 기氣를 오롯하게 지키고, (본래 저절로 그러한) 부드러운 바(의 끝점)에 이른 채, 어린아이처럼 할 수 있는가?
朱子曰, 專氣致柔, 看他這箇, 是甚麽樣工夫, 專, 是專一, 無間斷. 致柔, 是到柔之極處. 才, 有一毫發露, 便是剛. 這氣, 便麤了.
주자朱子는 일컬었다. “전기치유專氣致柔, (서로) 다른 이 문장의 (두) 부분을 (각각) 살펴보면, 이 문장이 뜻하는 공부 모양과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아차리게 된다. ‘전專’, 이것은 (도道의 본체인) 하나(一; 自然·氣)를 오롯하게 지킨다는 말로서, (하나와 떨어진) 틈새와 끊어진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하라는 뜻이다. ‘치유致柔’는 (본래 저절로 그러한) ‘부드러운 바(柔; 氣·一)’의 끝점이 머무는 바에 ‘이르게 하라’는 뜻이다. (비유컨대,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탕(才; 柔·氣·一·自然)이 한 올의 털(毫; 有爲)이 생겨나고 자라나는 바를 가지게 되면, 이른바 그것은 단단해지게 되기 때문이다. (본래 저절로 그러한) 기(氣; 才·柔·性·命)가 이른바 (그 일부러 일삼아 생겨나고 자라난 한 올의 털과) 짝하게 되기 때문이다.”
滌除玄覽, 能無疵乎.
(도道의 본체인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어렴풋한 거울을 닦아서 깨끗하게 한 채, 티끌을 가지는 바가 없게 할 수 있는가?
滌, 洗也. 除, 除道之除, 修治也. 滌除, 與易所謂潔淨, 同意. 玄覽, 言玄玄, 衆妙之門, 究極觀覽是. 盖道之本原, 於此見得. 一, 有疵焉, 則其爲道, 亦隨, 而差矣. 此, 以上道之體也.
“척滌”은 씻어낸다는 말이다. “제除”는 길을 쓸어낸다고 할 때의 “제除”로서, 닦아서 (다스려서 처음처럼)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척제滌除”는 『역경易經』이 일컬은 “맑게 하고, 깨끗하게 한다”는 말과 뜻을 같이 하는 것이다. “현람玄覽”은 (비유컨대 노자가 제1장에서 일컬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어렴풋한 바이자, (가장) 어렴풋한 바”이며, “모든 어렴풋한 바가 생겨나는 문”으로서,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세상 사람들이) 찾아서 밝혀야 할 끝점이자, 비추어 살펴야 할 “거울”, 그것이다. 이른바, 도道의 본체(本原; 自然·玄覽·性), (그것을) 이 문장에서 (다시) 알아차리고 깨닫게 된다. (노자가 “티끌을 가지는 바가 없게 할 수 있는가?”라고 물은 까닭, 그것은 비유컨대 도道의 본체인) 하나(一; 玄覽·自然·命)가 “티끌(疵; 有爲)”을 가지게 되면, 그 하나가 일삼은 도道 또한 (그 “티끌”을 이어받아) 말미암게 되고, 따라서 (그 하나와) 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문장은 앞 (“전기치유專氣致柔”) 문장이 일컬은 도道의 본체(體; 玄覽·一·自然·性·命)에 관한 문장이다.
愛民治國, 能無爲乎.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아주 먼 옛날의 임금처럼)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할 수 있는가?
涑水司馬氏曰, 善愛民者, 任其自生, 遂而勿傷. 善治國者, 任物以能, 不勞而成.
(중국 송宋나라 때)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일컬었다. “(아주 먼 옛날) 백성을 잘 아꼈던 임금은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性를 가진) 백성을 말미암았는데, (따라서 백성은) 스스로 살아갔으며,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性를 가진 백성을) 뒤쫓았는데, 따라서 (백성을 일부러 일삼아) 다치게 하지 않았다. 나라를 잘 다스렸던 임금은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命를 가진) 백성을 말미암았는데, 따라서 (백성은 저절로 그러하게) 다스려졌으며, (백성을 일부러 일삼아) 수고롭게 하지 않았는데, (따라서 자신의 그러한 다스림이 저절로 그러하게) 이루어졌다.”
天門開闔, 能爲雌乎.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듯, (만물을 말미암고, 만물과 더불어 움직이는 데 있어서, 비유컨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암컷의 모양과 모습을 일삼을 수 있는가?
天門, 玄牝之門, 所以爲天地根者也. 開者, 陽之動. 闔者, 陰之靜. 盖言應物之際, 法天地造化, 靜本於動, 而常守其靜也.
“하늘의 문天門”은 (노자가 제6장에서 일컬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조용한 바와 텅 빈 바의 문”이자,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하늘과 땅의 뿌리”이다. “열린다開”는 말은 (비유컨대 시끄럽게) 움직이는 양陽(의 모양과 모습)이 된다는 뜻이다. “닫힌다闔”는 말은 (비유컨대 움직임이) 조용한 음陰(의 모양과 모습)이 된다는 뜻이다. 이른바, (이 문장은) 일컫는다. “만물을 말미암는 데 있어서, 하늘과 땅이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이 만물을) 일삼고 (만물과 더불어) 아우러지는 모양과 모습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고, (만물과 더불어) 움직이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조용한 바가 근본이 되게 해야 하며, 그러한 조용한 바를 늘 그러하게 지켜야 한다.”
明白四達, 能無知乎.
(자신의 앎이) 밝고 밝아서 사방에 (두루) 미치지만, (자신이 가진) 앎이 없는 듯이 할 수 있는가?
天下事物之理, 無論常變, 明白周知, 四通八達. 堯, 明知鯀之不可用.
(이 문장은 일컫는다) “천하의 사안과 사물의 이치는 (일부러 일삼아) 옳고 그름을 따질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늘 그러하게 (달라지고) 바뀌는 바, 밝고 밝아서 두루 알아차려지는 바, 사방으로 어우러지고 팔방으로 다다르는 바이다. 따라서 (천하의 사안과 사물의 치를 알아차린 사람은) 마땅히 알아차린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사람인 듯하(게 스스로 자신을 천하에 나타내)고, 스스로 (자신을 천하에 알아차린 바가) 투박하고 (알아차린 바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인 듯하게 드러내며,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자신이 알아차린 바를 굳세게 지켜서 우기는 바를) 가지지 않고, (자신이 알아차린 바를 일부러 일삼아) 기대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의 모양과 모습을) 일삼아 봄이 어떠한가?”
堯, 明知鯀之不可用, 及聞四岳試可乃已之言, 不得已用之. 盖聖人之治天下, 明睿, 雖無所不照, 然順萬物之情, 使是非, 賢, 不肖, 各得其分, 而己之知, 不勞焉. 此, 所以有天下, 而不如焉者也.
(따라서 예컨대 아주 먼 옛날) 요堯 임금은 (우禹 임금의 아버지) 곤鯀이 (신하로 삼아) 쓸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밝게 알아차렸지만, 사방의 제후를 통솔하는 관장의 “(신하로 삼아 쓸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점검을 해 보는 일이 마땅할 따름이다”라는 말을 듣고, 부득이하게 그를 신하로 삼아 썼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던 시대, (성인은 자신의 “앎”이) 밝고 밝아서, (천하를) 비추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지만, 이른바 (천하) 사람들의 (본래 저절로 그러한) 실상(情; 性·命·自然)을 말미암은 채, (천하 사람들의 일부러 일삼은) 옳고 그름과 뛰어남이 (자신에게로) 불러들여지지 않게 했는데, (따라서 천하 사람들의 “앎”이) 각기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분수(分; 情)를 얻게 되었으며, 따라서 천하 사람들의 (본래 저절로 그러한) “앎”이 (일부러 일삼아) 수고로워지지 않았다. 이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자리를) 가졌지만,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과) 더불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畜, 許六反. 長, 上聲.
(비유컨대, 성인은 백성을) 낳고 기른다. (그러나) 낳지만,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지 않는다. (기름을) 일삼지만, (자신의 공功이나 이름을) 기대지 않는데, (성인은 백성을) 성장시키지만, (백성에게 일부러 일삼아) 주장(하거나 결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어렴풋한 (성인의) 덕스러움德이다. 축畜은 거성(去聲; 4聲)의 동사動詞이다. 장長은 상성(上聲; 3聲)의 동사動詞이다.
長, 長人也. 宰, 主張也. 玄德, 玄之又玄之德. 盖至是, 渾然太極之無名矣. 此, 以上道之用也.
“장長”은 (천하) 사람들을 성장시킨다는 말이다. “재宰”는 (일부러 일삼아) 주장하거나 결정한다는 말이다. “현덕玄德”은 (노자가 제1장에서 일컬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어렴풋하고, 가장 어렴풋한” “덕스러움德”을 뜻한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어렴풋한 바가 가장) 지극한 (“현덕玄德”) 이것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의 끝점을 가지는 바가 없는無極) 태극太極이나 (노자가 제1장에서 일컬은 일부러 일삼아)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바(無名; 自然)와 (더불어 하나로 아우러지고) 어우러지는 바이다. (요컨대) 이 문장은 앞 (“전기치유專氣致柔”) 문장이 일컬은 도道의 작용에 관한 문장이다.
右第十章. 自二章至此, 言煉精煉氣煉神之功用. 爲詩語, 首尾叶一韻. 古人, 言心, 以爲言有盡, 而意無窮也. 必以詩語歎發之. 觀於洪範, 重. 極之. 無偏. 無黨. 亦可驗也.
여기까지가 제10장에 대한 풀이이다. (덧붙여) 제2장에서부터 이 (제10)장에 이르기까지, (첫째 노자는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면밀한 바(精; 性·命·自然)를 불어나게 하고, 기(氣; 陰·陽·太極)를 불어나게 하며, 신령스러운 바(神; 自然·無極·道·德)를 불어나게 하는 일의 공능功能에 대해 일컬었다. (둘째, 비유컨대 노자는) 시詩에 쓰이는 말을 일삼듯, 첫 음音과 끝 음音이 하나로 맞춰지게 했다. 노자가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마음(心; 精·氣·神)을 (그렇게) 일컬은 것은 (그러한 마음을) 일부러 일삼는 (수단인) 말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의 끝점을) 다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것으로서, (말이 일컫는 대상인) 마음(意; 心)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의) 끝점을 다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노자는 제2장에서부터 이 10장에 이르기까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는 수단인) 시詩에 쓰이는 말로써, (대상인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마음) 그것을 일컬었다. 『상서尙書』 「주서周書」와 「홍범제육洪範第六」을 살피건대, 거듭하여 일컫는다.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의) 끝점에 다다라야 한다.”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의 끝점으로) 치우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어야 한다.”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의 끝점과 더불어) 한 무리가 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또한, (노자가 시詩에 쓰이는 말로써, 마음을 일컬은 까닭을) 검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