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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만재산책

도덕지귀 : 노자본전老子本傳

작성자바랑|작성시간24.08.15|조회수11 목록 댓글 1

 

노자본전老子本傳

 

 

老子, 姓李, 楚之苦縣瀨鄕曲仁里人也. 或云, 母懷胎八十一載, 逍遙李樹下, 老子割左腋, 而生指李樹, 以爲姓. 或云, 母夢流星入口, 而有脈七十二年, 生老子, 故曰老子.

노자는 (자두나무라는 뜻의) 라는 성姓을 가지고, (아주 먼 옛날의) 초楚나라 고현苦縣 뇌향瀨鄕 곡인리曲仁里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일컬었다. “(노자의) 어머니가 노자를 가진 지 81년이 되던 해, 자두나무 아래를 거닐 때, 노자가 (어머니의) 왼쪽 겨드랑이를 가르고 나와서 자두나무를 가리켰는데, 따라서 (어머니는 자두나무라는 뜻의 이李를 노자의) 성姓으로 지어주었다.” (따라서 또한) 어떤 사람은 일컬었다. “(노자의) 어머니가 떨어지는 별이 입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기胎氣를 느낀 지 72년이 지나서 노자를 낳았는데, 따라서 (어머니는 아이를) 노자라 불렀다.”

 

 

名耳, 一名重耳. 字伯陽. 謚曰聃. 聃者, 耳漫無輪之稱. 豈老子耳漫無輪歟! 老子, 身長八尺八寸. 黃色, 美眉, 大目, 踈齒, 方口, 厚脣. 廣額有三五, 達理, 日角月懸. 長耳有三門, 鼻有雙柱. 手把十丈. 足蹈二五.

(노자는 어려서는 귀가 큰 아이라는 뜻의) 이耳로 불리는 한편 (귀의 크기가 다른 아이의 2배나 되는 아이라는 뜻의) 중이重耳로 불렸다. 어른이 되어서는 (귀가 커서 가장 많이 볕을 쬐는 사람이라는 뜻의) 백양伯陽으로 불렸다. (따라서) 시호가 이른바 ‘담聃’이 되었다. 담聃은 귀가 커서 귓바퀴를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노자가 귓바퀴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귀가 컸겠는가! (아마도 노자는 귀가 아니라, 키가 아주 컸었던 것 같다. 따라서 어려서는 키가 커서 귀가 작아 보이는 아이로 불렸던 한편, 키가 커서 귀의 크기가 다른 아이보다 2배나 작아 보이는 아이重耳 불렸고, 어른이 되어서는 키가 커서 가장 먼저 볕을 쬐는 사람伯陽으로 불렸으며, 따라서 시호가 키가 커서 귓바퀴를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일컬었다) “노자는 키가 약 2m 67cm였고, 얼굴빛이 노랬으며, 눈썹이 (길어서) 보기에 좋았고, 눈이 컸으며, 이는 가지런했고, 입은 반듯했으며, 입술은 두툼했다.” (따라서 또한 어떤 사람은 일컬었다. 노자는) “이마까지의 높이가 약 45m나 되었는데, (따라서 노자가) 마을 사람들 앞에 서면, (얼굴이) 해가 뜬 듯했고, 달이 뜬 듯했다. 귀까지의 높이가 3층 누각만큼이나 되었다. 코(의 길이)가 처마기둥의 2배만큼이나 되었다. (두) 손이 움켜쥘 수 있는 물건의 둘레가 약 3m나 되었다. (두) 발이 건너뛸 수 있는 거리가 약 30m나 되었다.”

 

 

周景王, 時年, 百有六十餘歲, 爲守藏室史. 當是時, 孔子, 方三十歲, 聞老子, 典藏書, 多識古事, 乃適周, 問禮於老子. 老子曰, 子所言者, 其人與骨, 皆已朽矣, 獨其言在耳. 且君子, 得其時, 則駕, 不得其時, 則蓬累而行. 吾問之, 良賈, 深藏若虛, 君子, 盛德, 容貌若愚. 去子之驕氣與多欲, 熊色與淫志. 是, 皆無益於子之身.

주周나라 경왕(景王, 재위 BC.544~520)은 어느 해 (노자가) 160살이 넘었지만, 수장실守藏室의 관리로 삼았다. 이른바, 그 해, (노魯나라의) 공자는 이른바 30살이 되었는데, “노자가 (옛) 을 (많이) 보고, 옛일을 많이 안다”는 말을 듣고, 이내 주周나라로 찾아가, 노자에게 (옛) 예禮에 대해 물었다. 노자는 일컬었다. “그대가 (옛 예禮에 대해) 물었는데, 그 (옛 예禮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옛) 사람은 (그) 뼈와 함께 모두 썩어 없어졌을 따름이다. (그러나) 오직 그 (옛 예禮에 대한 옛사람의) (나에게 모두) 읽혀 있을 따름이다.” 이어서 (노자는 일컬었다) “(따라서 내가 알기에) 군자는 (비유컨대) 그 (자신이 읽은 바의 가치를 알아보는) 때를 얻으면, 천자天子가 보내 준 수레를 타고 (세상에 나아가 자신이 읽은 바를 세상에 펼치며), 그때를 얻지 못하면, 쑥으로 엮어 이엉을 올린 채, (자신이 읽은 바를 스스로) 일삼을 따름이다. (또한, 따라서) 내가 알기에 (군자는 비유컨대 자신이 읽은 바의) 가치를 빼어나게 일삼았을지라도, (그것을 안으로) 깊이 감춘 채, (밖으로 그것이) 텅 빈 듯이 하며, 군자는 (자신의) 덕스러움德을 굳세고 단단하게 일삼았을지라도, (그) 낯빛몸짓을 (덕스러움德을) 부드럽고 연하게 일삼은 사람인 듯이 할 따름이다. (따라서 내가 알기에 그대는 ‘내가 읽은 바가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그대의 교만한 기운과 (‘세상에 나아가 내가 읽은 바를 펼치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아주) 많은 욕구, (‘내가 일삼은 읽은 바의 가치가 빼어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거만한 낯빛과 (‘세상의 덕스러움德을 굳건하게 일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아주) 어지러운 몸짓을 (자신에게서) 떠나보내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그대의 몸에 이로움을 가져오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孔子去, 謂弟子曰, 鳥, 吾知其能飛. 魚, 吾知其能游. 獸, 吾知其能走. 走者, 可以爲罔. 游者, 可以爲綸. 飛者, 可以爲矰. 至於龍, 吾不能知. 其乘風雲而上天. 吾今日見老子, 其猶龍邪! 其後, 孔子適諸侯之國, 答人問禮, 擧老子之言. 曰, 吾聞諸, 老聃曰, 天子崩, 國君薨, 則祝取羣廟之主, 而藏諸祖廟, 禮也. 卒哭成事, 而後主各反其廟.

공자가 (노魯나라로) 되돌아와 이른바 제자들에게 일컬었다. “(예컨대) 새라면, 나는 그것이 날아 올라갈 수 있는 높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 물고기라면, 나는 그것이 헤엄쳐 들어갈 수 있는 깊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 짐승이라면, 나는 그것이 달려나갈 수 있는 빠르기를 알아차릴 수 있다. (또한) 달려나가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그물로 가로막을 수 있다. 헤엄쳐 들어가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낚시로 끌어 올릴 수 있다. 날아 올라가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화살로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나) 용龍에 이르니, 나는 그것이 얼마나 높이 날아 올라갈 수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떨어뜨릴 수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겠다. 그것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올라가고, 하늘 위에 자리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이른바 용龍이었다!” 그 이후, 공자는 여러 나라를 다녔는데, (옛) 예禮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으면, 대답할 때에는 (늘 그러하게) 노자의 가르침을 소개했다. 이른바, “나는 자세하게 들었다. 노자는 일컬었다. ‘천자天子나 제후가 죽으면, 종묘宗廟에 모셨던 여러 조상의 신주를 모두 한곳에 모아서, 여러 조상에게 천자天子나 제후의 죽음을 알리고, 여러 조상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차례에 따라 죽은 천자天子나 제후의 신주를 모시는 것이 (옛) 예禮이다. (또한, 삼우제三虞祭를 지내고 석 달이 지나서) 졸곡제卒哭祭를 마친 다음, 한곳에 모았던 여러 조상의 신주를 종묘의 각 자리에 다시 모신다.’”

 

 

老子, 居周久之. 見周衰, 遂西, 遊岐州, 至散關. 關令尹喜. 周大夫也. 學星宿服, 精華隱德, 下位. 至是, 見紫氣浮關, 知眞人當過, 勅史孫景物色迹之. 老子乘靑牛, 史徐甲爲御, 而過關. 喜禮迎之, 積誠求道. 老子奇其志, 告語之. 將別, 喜請曰, 子將隱矣. 彊爲我著書. 於是老子, 著書上下篇, 言道德五千餘言, 遂去.

노자는 주周나라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주周나라의 기운이 줄어드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쪽으로 가서, 기주(岐州;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바오지시寶鷄市)를 둘러본 다음, 산관(散關;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바오지시寶鷄市 바오지현寶鷄縣)에 이르렀다. (이 때) 산관의 책임자가 윤희尹喜였는데, (수장실守藏室을 오랫동안 드나들던) 주周나라의 대부大夫였다. (따라서 윤회는 노자가 일컬은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 대한) 배움이 별처럼 빛났는데, (따라서 스스로) 낡은 옷을 입었으며,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에 대한) 면밀함(; ·)꽃처럼 빛났는데, (따라서 스스로 자신의) 덕스러움(; 自然·無爲)을 숨겼으며, (다른 사람을 위로 높인 채) 자신을 아래로 낮추었는데, (따라서 스스로 산관의 책임자와 같은) 자리에 머물렀다. (노자가 산관에 이르던) 그 때, (윤회는) 자줏빛 기운이 산관 위로 솟는 것을 살피고, 성인眞人이 곧 (산관을) 지나갈 것임을 알아차려, (아랫사람) 손경孫景을 시켜 (산관에 들어오는 사람들 중에) (그) 모습이 남다른 사람을 찾게 했다. (이 때) 노자가 푸른빛이 도는 소에 올라탄 채, 관리 서갑徐甲의 호위를 받으며, 산관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에) 윤희는 예禮로써 노자를 맞이한 다음, 정성을 다해 도道를 구했다. 노자가 그의 뜻에 따라 그것을 알려주고 그를 깨우쳐 주었다. 노자가 (다시) 떠나려 하자, 윤희가 청했다. 이른바, “그대는 이제 (세상을 등진 채) 숨으려 하는 것 같다. 따라서 그대가 나를 위해 책을 써주면 좋겠다.” 이에, 노자는 상上·하下 편의 책을 지어, 도道·덕德에 대해 5,000 여 마디로 일컬은 다음, (산관을) 떠나갔다.

 

 

老子壽極長. 不知所終. 故世, 多傳會爲說. 老來子者, 亦楚人也. 逃亂, 耕於蒙山之陽, 菀葭爲墻, 蓬蒿爲室, 墾山播穀以爲食. 楚王至門, 迎之, 遂去至江南. 著書十五篇, 與孔子同時, 人以爲老聃也.

노자의 나이는 시간의 끝점에 다다랐다. (따라서 누구도 노자의 나이가 다다른) 시간의 끝점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세상에는 (노자에 대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와 (책에서 책으로) 옮겨지는 이야기가 많았다. (예컨대, 첫째) 노래자老來子가 있는데, (노래자는 노자와) 같은 초楚나라 사람이었다. (전쟁의) 혼란을 피해, 몽산(蒙山; 지금의 스촨성四川省 야안시雅安市 밍산구區 일대)의 해가 잘 드는 곳으로 들어가 밭을 갈고, 엉겅퀴와 갈대를 엮어 담을 세우고, 쑥대를 묶어 이엉을 얹고, 쑥잎을 뜯어 바닥에 깔았다. (이른바) 산을 파고 씨를 뿌려 먹고 살았던 것이다. 초楚나라 임금이 (신하로 쓸려고) 집 앞까지 찾아오자, 임금을 맞이해 놓고선, 곧바로 강江을 건너 남쪽으로 가버렸다. (책) 15편을 짓고 썼으며, 공자와 더불어 (살던) 시대를 같이 했으며, 사람들로부터 “노담老聃”이라 불렸다.

 

 

又有周太史儋, 見秦獻公曰, 始秦, 與周合, 而離. 離五百歲, 而復合. 合七十歲, 而霸王者出焉. 時去, 孔子卒, 百有二十有九年, 人亦以爲老聃也.

또한, (둘째) 주周나라의 태사담太史儋이 있는데, (태사담이 어느 날) 진秦나라 헌공獻公을 찾아가 일컬었다. “처음에 진秦나라는 주周나라와 더불어 합쳐지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周나라와 더불어) 분리될 것이다. (주周나라와 더불어) 분리된 지 500년이 지나면, 다시 (주周나라와 더불어) 합쳐질 것이다. (주周나라와 더불어) 합쳐진 지 70년이 지나면, (진秦나라에서 천하를 통일할) 패왕이 나올 것이다.” 시간이 흘러, 공자가 죽은 지 129년이 되던 해, 사람들은 또한 (주周나라의 태사담을 초楚나라의 노래자老萊子와 더불어) “노담老聃”이라 불렀다.

 

 

列仙傳云, 老子, 殷陽甲時, 下降, 武丁時, 昇天. 辛紂時, 又降, 爲周文王守藏史, 武王時, 遷柱下史, 成王時, 西遊大秦竺乾等國, 號古先生. 康王時, 還周, 復爲柱下史, 昭王時, 去官歸毫.

(또한, 셋째 한漢나라의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은 일컫는다. “노자는 은殷나라의 () 해가 (이제) 떠오르던 (문文 임금과 1대代· 무武 임금) 때 아래로 내려왔다, () 해가 (모두) 떠오른 (강康 임금과 4대代· 소昭임금) 때 하늘로 올라갔다. (은殷나라의 해가) 매운맛을 내던 주紂 임금 때, 이른바 (땅으로) 내려와, 주周나라의 문文 임금(BC.1152~1056)을 위해 수장(守藏; 역사)의 일을 보는 관리가 되었고, 무武 임금(재위 BC.1046~1043) 때 주하(柱下; 제도)의 일을 보는 자리로 옮겼으며, 성成 임금(재위 BC.1042~1021) 때 서쪽으로 로마, 인도 등의 나라들을 둘러보았는데, (따라서 로마, 인도 등의 서쪽 나라 사람들은 노자를 인仁·의義를 근본으로 삼는) ‘옛 (예義를 자신들에게 전하기 위해 동쪽에서 온) 스승’이라 불렀다. (노자는) 강康 임금(BC.1020~996) 때 주周나라로 되돌아와, 다시 주하柱下의 일을 보는 관리가 되었으며, 소昭 임금(BC.982~963) 때 관직을 떠나 (비유컨대) 한 오라기 실로 되돌아갔다.”

 

 

夫以周公之聖. 其, 於文王之守藏史, 半世同朝, 豈不見尹喜所見紫氣乎? 不知, 而不語, 匪周公也. 語之而不見用老子之識, 又無足稱也. 豈其然哉!

이른바, (주周나라의 문文 임금, 무武 임금, 성成 임금을 보좌했던) 주공周公은 성인聖人이었다. 따라서 노자가 문文 임금 때 수장守藏의 일을 보는 관리로 있었다면, (주공이) 50년이나 나랏일을 (노자와 더불어) 논의했을 것인데, 어찌 (주공은) 윤희가 보았던 (그) 자주색 기운(이 조정朝庭 위로 솟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만약, 주공이 그것을) 볼 수 있는 식견이 되지 못했으며, 따라서 (주공이 노자와 더불어) 논의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인이었던) 주공(의 실상)에 합당하지 않다. 노자와 더불어 (나라의 일에 대해) 논의는 했지만, 노자의 식견을 알아차리거나 일삼지 못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 또한 (성인이었던 주공의 실상에) 합당하지 않다. (따라서) 어찌 그것이 그러했겠는가!

 

 

子宗, 爲魏將, 封於段干. 宗子, 注. 注子宮. 宮玄孫假, 任漢孝文帝時. 其子解, 爲膠東王卬, 太傳. 家于齊.

(노자의) 아들은 (이李)종宗이었는데, (전국戰國시대) 위魏나라의 장수將帥로 일삼아졌고, 단간段干의 성내려졌다. (단간)종宗의 아들은 (단간)주注였다. (단간)주注의 아들은 (단간)궁宮이었다. (단간)궁宮의 손자의 손자는 (단간)가假였는데, 한漢나라 효문제(孝文帝, 467~499) 때 관리로 일삼아졌다. (단간)가假의 아들은 (단간)해解였는데, (한漢나라 효문제 때, 제후국諸侯國 제齊나라의) 교서왕膠西王 앙卬이 태전太傳으로 일삼았다서명응은 교동왕膠東王 웅거雄渠와 교서왕膠西王 혼동한 듯하다. (태전은) 제齊나라의 대부大夫 지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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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바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8.15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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