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장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歿身不殆.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謂襲常.
(비유컨대, 아들인) 천하가 (유위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가 비롯되면, (임금은 그 아들이 무위한) 천하의 어미(母; 道·自然)를 일삼게 해야 한다. 이른바, (그 아들이) 그 어미를 얻게 함으로써, 그 아들(이 그 어미)을 알아차리게 해야 하고, 이른바 그 아들(이 그 어미)을 알아차리게 함으로써, (그 아들이) 그 어미를 되돌이키고 지키게 해야 하며, (따라서 그 아들이 그) 몸을 다할 때까지 (일부러 일삼아) 위태롭지 않게 해야 한다. 그 (아들이 일부러 일삼아 말하는) 입을 막게 해야 하고, (그 아들이 일부러 일삼아 하는 말이 나고드는) 문을 닫게 해야 하며, (따라서 그 아들이 그) 몸을 마칠 때까지 (일부러 일삼아) 수고롭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아들이 일부러 일삼아 말하는) 입을 열게 하고, 그 (아들이 일부러 일삼아 말하는) 일을 더하게 하면, (그 아들이 그) 몸을 마칠 때까지 구제되지 못하게 된다. (그 아들이 안으로 무위無爲가) 작은 바를 (일부러 일삼아) 살피게 해야 하는데, 이른바 (그 아들이 안으로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가 큰 바를) 밝게 하도록 해야 하고, (그 아들이 유위有爲가) 부드러운 바를 (안으로) 이기게 해야 하는데, 이른바 (그 아들이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유위有爲가) 부드러운 바를 (안으로) 굳세게 하도록 해야 하며, (그 아들이 밖으로 일부러 일삼아 번쩍이지 않는) 빛남을 일삼게 해야 하고, 그 (빛남이 안으로) 밝아지는 바를 되돌이키고, (그러한 빛남으로) 되돌아가게 해야 하며, (따라서) 몸이 (일부러 일삼아) 재앙에 이르는 바를 남기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가) 늘 그러한 바(常; 母·明·光·性·命·道·自然)로 물러나 (그것에) 잠기게 하는 일이다.
羣, 動, 根於靜. 萬, 有, 生於無. 百, 昌, 本乎一. 曰靜, 曰無, 曰一, 皆道也.
천하가 (유위有爲가) 시끄러우면, (임금은 천하가 유위有爲가) 조용한 바를 뿌리 삼게 해야 한다. 천하가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있으면, (임금은 천하가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로써 살아가게 해야 한다. 천하가 (유위有爲가) 무리지어지면, (임금은 무위無爲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바를 뿌리 삼게 해야 한다. “이른바 (유위有爲가) 조용한 바”, 이른바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 “이른바 (무위無爲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바”, 모두 도(道; 自然)이다. 〔홍석주는 이 장을 치인治人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다〕
故有得乎道者, 抱一守靜. 以無爲, 而天下之事天下之物, 無不在是者. 是, 所謂得其母以知其子也.
따라서 도道를 얻은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은 (무위無爲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바를 품고, (유위有爲가) 조용한 바를 지키는데, 따라서 (천하가) 무위無爲하게 되고, 따라서 천하의 사안들과 천하의 사람들이 (도道·自然) 그것에 자리하지 않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이것이 “득기모得其母, 이지기자以知其子”의 뜻이다.
旣知天下之動, 而我, 則常靜. 旣知天下之有, 而我, 則常無爲. 旣知天下之衆, 而我, 則常一. 是, 所謂知其子, 復守其母也.
(따라서 도道를 얻은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은) 천하가 (유위有爲가) 시끄럽다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따라서 그는 (천하가) 늘 그러하게 (유위有爲가) 조용해지게 한다. (그는) 천하가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따라서 (그는 천하가) 늘 그러하게 무위無爲하게 한다. (그는) 천하가 (유위有爲가) 무리지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따라서 (그는) 늘 그러하게 (천하가 무위無爲와 더불어) 하나가 되게 한다. 이것이 “지기자知其子, 복수기모復守其母”의 뜻이다.
以一身, 言之, 則耳目鼻口, 四軆, 百骸, 皆子而所稟以生者. 卽此, 綿綿若存, 之, 神氣也. 能守是而不失, 則可以遠害而保其生矣.
(따라서) 한 몸으로써, (그 공능功能) 그것을 말하면, (한 몸의) 귀와 눈과 코와 입, 두 팔과 두 다리, 온갖 뼈가 모두 (그 어미의) 아들로서,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건네받은 (성性·명命)대로 (오래동안) 살아가게 된다. 이른바, 이것은 (그 어미를 되돌이키고, 지킴으로써, 그 어미가 그 아들에게) 이어지고 이어지게 되며, 따라서 (그 어미가 그 아들에게 오래동안) 자리하게 되고, (따라서 그 아들의 무위無爲) 그것이 (오래동안) 신령스럽게 되며, 기운차게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 어미) 그것을 (되돌이키고) 지킨 채, (내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되면, (그 한 몸이) 해롭게 되는 바를 멀리하게 되고, 그 (한) 삶을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오래동안) 지킬 수 있게 된다.
吳幼淸曰, 易, 以兌卦, 取口象, 塞其兌, 謂杜口, 不言也. 門者, 氣, 所出入之門, 謂鼻也. 由不言, 以漸調息, 以至無息, 則氣, 專於內, 終身不因勞, 而致耗矣. 愚謂. 人, 由動作, 必由乎門. 塞兌閉門, 皆謂守靜而無爲也.
(중국 원元나라 때) 오징(吳澄, 1249~1333)은 (『도덕진경주道德眞經註』 제44장 주註에서 이렇게) 일컬었다. “『역경易經』이 태兌 괘卦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입의 형상을 차용한 것에 따르면, 색기태塞其兌는 (일부러 일삼아 말하는) 입을 막는다(는 말로서), (일부러 일삼아) 말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폐기문閉其門에서) 문門은 기氣가 나고드는 문으로서, 코를 가리킨다. (따라서 색기태塞其兌, 폐기문閉其門, 종신불근終身不勤은 뜻한다) ‘(임금은 그 아들이 일부러 일삼아) 말하지 않는 바를 말미암게 해야 하는데, 따라서 (그 아들이) 점차 (일부러 일삼아 쉬던) 숨을 고르게 되고,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숨 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며, 따라서 기氣가 (몸) 안에서 오롯하게 되고, (따라서) 몸을 마칠 때까지 (일부러 일삼아) 수고롭게 되는 바를 말미암지 않게 되고, 따라서 (몸을 마칠 때까지, 일부러 일삼아 수고롭게 되는 바를) 줄이는 바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나는) 어리석지만, 일컫는다.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움직이는 바와 일삼는 바를 말미암는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그 유위有爲의) 문을 말미암게 된다. (따라서) 색기태塞其兌, 폐기문閉其門은 모두 뜻한다. ‘(임금은 그 아들이 움직이고 일삼는 데 있어, 반드시 유위有爲가) 조용한 바를 지키게 하고, 무위無爲하게 해야 한다.’”
濟, 如左氏傳, 請濟師之濟. 有道者之於事也, 聽其自然, 而應, 以無我. 若以身, 往爲之, 徇焉. 則身, 爲事役, 而其敗也. 不可救矣.
(또한, 나는 어리석지만, 일컫는다) “(제기사濟其事에서) 제濟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환공桓公11년年」) ‘합청제사어왕(盍請濟師於王; 어찌하여 임금에게 증군增軍을 요청하지 않는가?)’의 제(濟; 더하다)와 (뜻을) 같(이 한)다. (이른바) 도道를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이 사안을 처리하는 데 나아감은 그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 無爲)를 받아들이고, 따라서 (그 저절로 그러한 바와 더불어) 어우러지며, 따라서 (그 일부러 일삼는) 자신(我; 有爲)을 가지는 바가 없다. (그러나 도道를 가지는 바가 없는 사람은) 이른바 몸이 (유위有爲에게) 나아가고, (따라서 유위有爲) 그것을 일삼으며, (따라서 유위有爲를) 드러내고, 따라서 몸이 사안이 (일부러 일삼아) 부려지는 바를 일삼게 되고, 따라서 그 사안이 (일부러 일삼아) 어그러지게 된다. (따라서 몸을 마칠 때까지) 구제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陳深曰, 見小曰明, 內視之, 謂明也. 守柔曰强, 自勝之, 謂强也.
(중국 명明나라 때) 진심(陳深, 1260~1344)은 (『노자품절老子品節』 「하경下經·15장十五」 주註에서) 일컬었다. “견소왈명見小曰明, ‘(임금은 세상 사람들이) 안으로 (무위無爲가 작은 바) 그것을 (일부러 일삼아) 살피게 해야 하는데, 이른바 (임금은 세상 사람들이 안으로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가 큰 바, 그것을) 밝게 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수유왈강守柔曰强, ‘(임금은 세상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아 (유위有爲가 굳센 바) 그것을 (안으로) 이기게 해야 하는데, 이른바 (임금은 세상 사람들이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유위有爲가 부드러운 바無爲, 그것을 안으로) 굳세게 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愚謂. 人, 恒以無所不察爲明. 而老子, 以不用其明高明. 所謂小者, 與多相對之辭, 非與大相對之辭也.
(그러나 나는) 어리석지만, 일컫는다. “(진심陳深은 그) 세상 사람들이 늘 그러하게 (무위無爲의 범위나 규모가 작은 바를) 살피지 않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하는 일을 (세상 사람들이 늘 그러하게 본래 저절로 그러한 무위無爲의 범위나 규모가 큰 바를) 밝게 하는 일로 삼았다. 그러나 노자는 그 (세상 사람들이 늘 그러하게 유위有爲의 수준이나 정도가) 밝은 바를 일삼지 않게 하는 일을 (세상 사람들이 늘 그러하게 본래 저절로 그러한 무위無爲가) 밝은 바(의 수준이나 정도)를 높이게 하는 일로 삼았다. 이른바, (진심陳深이 주석한) 소小는 다(多; 많다)에 상대되는 말(로서, 범위나 규모가 ‘작은 바小’라는 뜻)이지, (노자가 일컬은) 대(大; 크다)에 상대되는 말(로서, 수준이나 정도가 ‘적은 바少’라는 뜻)이 아니다.”
故含光, 內蘊, 悶悶, 若昧, 不得已而用之, 則不耀于外, 而反于內, 此, 卽所謂復守其母者也. 今夫水與火, 皆能照物. 水, 長涵, 而火, 易熄者. 火之, 明, 在外, 而水之, 光, 在內也. 人之, 用其光也, 能如水. 則終身用之, 而不及於殃矣. 其所以用其强, 亦當猶是也.
이른바, 머금은 빛이 안으로 쌓이게 하고, (그것을) 어둡고 어둡게 하며, (그것이 없어) 마치 어두운 듯하고, 그것을 부득하게 일삼으며, (그것을 일부러 일삼아) 밖으로 번쩍이게 하지 않고, (그것을) 안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일, 이것이 “그 어미를 되돌이키고, 지키는 일”이다. 이른바, 물과 불은 모두 사물을 비출 수 있다. (그러나) 물은 (사물의 모습을) 오래 담고 있지만, 불은 (그것을) 쉽게 꺼뜨린다. 불은 (그) 밝음이 바깥에 자리하게 하지만, 물은 (그) 빛남이 안에 자리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람은 그 (물의) 빛냄을 일삼아야 하고, (그) 물(의 빛남)과 더불어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몸을 마칠 때까지,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오래 사는 바) 그것을 일삼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재앙에 이르지 않게 된다. 그 (아들이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가) 굳센 바를 일삼게 해야 하는 까닭, 이것이다.
襲, 藏也. 常, 猶上篇復命曰常之常. 襲常, 言退藏於常也.
습襲은 잠긴다는 말이다. 상常은 제16장 “복명왈상(復命曰常; 본래 저절로 그라한 명命을 되돌이키는 일, 이른바 본래 무위無爲가 늘 그러한 바로 되돌아가는 일)”의 상(常; 본래 무위無爲가 늘 그러한 바)을 뜻한다. (따라서) 습상襲常은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가) 늘 그러한 바(常; 母·明·光·性·命·道·自然)로 물러나 (그것에) 잠긴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