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세경(持世經) 제1권
요진(姚秦)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
〓 5음(온)에 대하여
| 5음(온) ① 색(色); 물질로 결합(지수화풍)된 상(相)을 집착 -色陰 즉 물질의 집적(集積), ② 수(受); 괴로움(苦),즐거움 (樂), 불고불락 등 3수(三受)를 느끼는 작용-수음(受陰) 즉 느낌의 집적 ③ 상(想); 외계(外界)의 사물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집착하는 작용-상음(想陰) 즉 생각의 집적, ④ 행(行); 잘못된 인연, 신구의(3업) 등에 집착하는 작용 -행음(行陰) 즉 작용의 집적, ⑤ 식(識);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見聞覺知) 것을 의식하고 분별하여 집착하는 작용-식음(識陰) 즉 인식의 집적.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如是我聞:
한때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의 가란타죽원(伽蘭陀竹園)에 큰 비구들과 함께 계셨다. 이때 세존께서는 약간의 백천만(百千萬)의 무리에게 공경을 받으며 둘러싸여 그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셨다.一時,佛在王舍城迦蘭陁竹園,與大比丘僧俱。爾時,世尊與若干百千萬衆,恭敬圍繞而爲說法。
모임 가운데 보살마하살이 있었는데 이름을 지세(持世)라고 하였다. 그는 모든 보살마하살의 무량한 공덕 장엄의 발심(發心)을 위하여 일체 법의 피안(彼岸)을 잘 알고자 하였고, 무량한 원을 발하여 무량한 장엄을 구족하는 것을 잘 알고자 하였으며, 무량한 모든 법의 결정된 상(相)에 통달하고자 하였으며, 무량한 장엄의 원을 발하여 깊은 마음의 소행이 청정하고자 하였으며, 청정하고 구족한 보시를 잘 알고자 하였으며, 會中有菩薩摩訶薩名曰持世,爲諸菩薩摩訶薩無量功德莊嚴發心,欲善知一切法彼岸,欲善知發無量願具足無量莊嚴,欲通達無量諸法決定相,欲發無量莊嚴願深心所行淸淨,欲善知淸淨具足布,
필경엔 청정한 지계(持戒)를 잘 알고자 하였으며, 구족한 인욕과 부드러운 마음을 잘 알고자 하였으며, 청정한 정진을 잘 알고자 하였으며, 청정한 선정을 잘 알고자 하였으며, 반야바라밀의 피안에 통달하는 일을 잘 알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무량한 공덕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벗어 매고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施欲善知畢定淸淨持戒,欲善知具足忍辱柔軟之心,欲善知淸淨精進,欲善知淸淨禪定,欲善知通達般若波羅蜜彼岸;以如是等無量功德故,從坐而起偏袒右肩,合掌向佛,白佛言(1권)
...중략...
2. 오음품(五陰品)
| 상(相): lakṣaṇa, saṃjñā. 물질의 형태와 의식의 관념, 본체 예) 4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법상(法相), 실상(實相) 예) 체상용(體相用): 체(본질/금), 相(형태, 모양/조각품), 용(用)(쓰임새/활용) |
이때 부처님께서는 지세(持世)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지세야, 만약 보살마하살이 일체 법의 실상(實相)을 얻고자 하고, 혹은 일체 법의 글귀를 잘 분별하고자 하며, 혹은 염력(念力)을 얻고자 하고, 혹은 몸을 돌려 끊어지지 않는 생각[不斷念]을 구족하게 얻고자 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면 爾時,佛告持世菩薩:“持世!若菩薩摩訶薩欲得一切法實相,若欲善分別一切法章句,若欲得念力,若欲轉身具足得不斷念,乃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마땅히 이와 같은 법의 문에 빨리 들어가야 하니, 이 법의 문에서 지혜의 광명을 얻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 법 안에서는 구족함을 빨리 얻기 때문이다.當疾入如是法門,於是法門得智慧光明。何以故?於是法中疾得具足故。
또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부지런히 이와 같은 법의 문을 닦아 모으고, 이 법의 방편의 문에 들면,
곧 능히 음(5陰;色受想行識)의 방편과
계(18界; 6근 안이비설신의/6경 색성향미촉법/6식)의 방편과
입(12入; 6근. 6경)의 방편과 인연으로 생하는 법의 방편과
4념처(4念處; 身念處, 受念處, 心念處, 法念處)의 방편과
5근(5根; 번뇌를 극복하는 힘)의 방편과
① 신근(信根): 진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
② 정진근(精進根): 바른 길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노력
③ 염근(念根): 대상을 항상 기억하고 알아차리는 마음챙김
④ 정근(定根): 마음을 하나로 모아 흔들리지 않는 집중
⑤ 혜근(慧根):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
여덟 가지 거룩한 길[팔정도 八聖道分]의 방편과
세간과 출세간(出世間)의 법의 방편을 분별하고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법의 방편을 분별(分別; 智明함을 얻는다. 又復,持世!菩薩摩訶薩勤修集如是法門,入是法方便門者,則能得分別陰方便,界方便,入方便,因緣生法方便,四念處方便,五根方便,八聖道分方便,世閒出世閒法方便,分別有爲無爲法方便。
지세야, 무엇을 보살이 5음(陰)을 분별하는 방편이라고 말하는가? 持世!何謂菩薩分別五陰方便?
보살마하살은 바르게 다섯 가지 번뇌의 쌓임[五取陰; 色受想行識]을 관한다. 이른바 무명(無明)의 쌓임은 곧 다섯 가지 번뇌의 쌓임이다. 菩薩摩訶薩正觀五取陰,所謂無明陰是五取陰,
괴로움의 쌓임은 곧 다섯 가지 번뇌의 쌓임이다. 병이 쌓이고 등창이 쌓이고, 화살이 몸을 뚫고 들어감과 같은 것이 쌓이는 것은 곧 다섯 가지 번뇌의 쌓임이다. 苦陰是五取陰,癡陰是五取陰,病陰癰陰,如箭入身陰是五取陰。
보살은
① 색의 번뇌의 쌓임[色取陰]을 분별하고 관찰하고 선택한다.
무엇을 색의 번뇌의 쌓임을 분별하고 관찰하며 선택한다고 하는가? 菩薩分別觀察選擇色取陰。云何爲分別觀察選擇色取陰?
이 색의 번뇌의 쌓임은 네 가지 요소[四大:地ㆍ水ㆍ火ㆍ風]로부터 생긴 것이니, 거짓으로 이름하여 색의 번뇌의 쌓임이라고 한다. 是色取陰從四大生,假名爲色取陰,
이 색의 쌓임[色陰]은 자성(自性)이 없다. 다만 네 가지 요소가 화합한 것으로서 거짓으로 이름하여 색의 쌓임이라고 하는 것이다. 是色陰無有自性,但以四大和合,假名爲色陰。
색의 쌓임은 짓는 자가 없고 부리는 자도 없다. 지음이 없고 일어남이 없고 남[出]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색이 쌓인 것이라고 한다. 다만 이전의 업의 인연으로 네 가지 요소가 섭수하는 수(數)를 색이 쌓인 것이라고 한다. 色陰無有作者,無使作者,無作無起無出,名爲色陰。但以先業因緣四大所攝,數名色陰,
쌓임이 아닌 것[非陰]은 곧 색이 쌓인 것이다. 비유컨대 허공과 같아서 쌓임은 실로 생기는 상(相)이 없으며, 만약 허공의 쌓임을 설한다면 이 가운데 법의 생함이 없을 것이니, 다만 명자(名字)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허공의 쌓임이라고 한다. 非陰是色陰,譬如虛空,陰實無生相。若說虛空陰,是中無有法生,但有名字,故名爲虛空陰。
범부는 이 쌓임이 없음에도 쌓임의 상이 있다. 전도(顚倒)된 마음 때문에 실(實)이 없음에도 실의 상이 있다. 나[我]의 다섯 가지 쌓임과 내 것[我所]의 다섯 가지 쌓임에 탐착하여 나의 색의 쌓임과 내 것의 색의 쌓임도 이와 같이 탐착한다.凡夫於此無陰陰相,以顚倒心故,無實實相貪著我五陰我所五陰,我色陰我所色陰,如是貪著。
이 모든 범부가 색에 탐착한 다음에는 색 가운데서 나(我)와 내 것(我所)에 의지하여 색이 있고 색을 받고 색을 취하고 색에 탐착하고, 색을 의지하여 갖가지 악하고 착하지 않은 업[不善業]을 받아 행한다. 우리들은 마땅히 범부의 배움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우리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보리를 돕는 법을 닦고 모아야 한다. 지금 마땅히 바르게 색의 쌓임을 관찰하여야 한다.是諸凡夫貪著色已,於色中依止我我所,有色受色取色著色依色,受行種種惡不善業。我等不應隨凡夫學,我等應勤修集助菩提法,今應正觀色陰。
보살이 바르게 색의 쌓임을 관찰할 때는 물거품이 모인 것과 같다고 안다. 어떻게 물거품의 모임과 같다고 아는가? 모임이 없는 것, 이것이 물거품의 모임이다. 菩薩正觀色陰時,知同水沫聚。云何知同水沫聚?無聚是水沫聚?
다만 뭇 인연으로부터 생기니 붙잡을 수가 없으며, 견고하고 튼튼함이 없다. 물거품 속에는 모임의 상이 없고, 모임이 없는 것이 곧 물거품의 모임이다. 색의 쌓임도 이와 같다. 색의 쌓임 안에는 쌓임의 상이 없다.但從衆緣生,不可執捉無有堅牢,水沫聚中無有聚相,無聚是水沫聚;色陰亦如是,色陰中無有陰相。
보살이 이와 같이 관찰할 때, 이러한 생각을 한다.
‘범부는 허망한 색을 바르게 관찰하지 못하며, 색이 무상(無常)함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며, 색의 상을 여실하게 알지 못한다. 우리들은 바른 길에 들어 마땅히 허망한 것에 탐착하지 말고 색에 탐착하지 않아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菩薩如是觀時,作是念:‘凡夫不能正觀虛妄色,不能如實知色無常,不能如實知色相。我等入正道,不應貪著虛妄,不應貪著色。何以故?
색은 곧 탐착할 수 없는 상(相)이다. 색은 다만 명자(名字)만이 있을 뿐 결정적인 상(相)이 없다고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이 색은 결정적인 상이 없고 명자를 떠나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색이라 한다. 또 색을 설하여 번뇌를 무너뜨리는 상이라고 이름한다. 色是不可貪著相,色但有名字無決定相,當觀是色無決定相,離名字故名之爲色。又說色名惱壞相,
지혜 있는 자는 통달하여 이를 상이 없다고 안다. 우리들은 마땅히 잘 알아서 색에 상이 없는 방편을 닦아 모아서 색의 상에 탐착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사람이 색의 상에 탐착하면 곧 색에 탐착한다. 우리들은 마땅히 잘 알아서 색의 상에 들어야 한다.’智者通達知是無相,我等應當善知修集色無相方便,不貪著色相。若人貪著色相。卽貪著色,我等應善知入色相。’
보살이 이와 같이 바르게 관할 때, 여실하게 색을 관찰하고 선택한다. 이 색의 쌓임은 모두가 범부의 생각[憶想]과 분별로 일어난다. 만약 법이 생각과 분별로 일어난다면 이는 곧 불생(不生)이다. 모든 생각과 분별은 모두가 진실이 아니다.菩薩如是正觀時,如實觀察選擇色,是色陰皆從凡夫憶想分別起。若法從憶想分別起,卽是不生,一切憶想分別皆非眞實。
범부는 전도(顚倒)되어 일어난 색에 의지하여 색에 얽매이고, 색 때문에 해를 입고 오고 가며 고뇌한다. 무명과 어리석음의 어둠 때문에 색을 탐착하여 버리지 않고, 색을 항상하고 견고하며 튼튼하다고 본다. 이것을 범부의 사람이 색에 얽매인다고 한다. 凡夫依止顚倒所起色,爲色所縛爲色所害,往來苦惱,無明癡闇故貪色不捨,見色有常牢固,是凡夫人爲色縛。
색에 얽매이기 때문에 지옥과 축생과 아귀(餓鬼)와 천인(天人)을 왕래하며, 색의 맛을 깊이 탐착하고, 색 가운데 온갖 잘못과 악(惡)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色所縛故,往來地獄、畜生、餓鬼、天人,深貪色味,不觀色中有諸過惡。
우리들은 마땅히 범부의 배움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관찰하고 선택하고 분별하여 색의 방편을 닦아 익혀야 한다. 我等不應隨凡夫學,應當觀察選擇分別修習色方便。
색을 관찰하고 선택하고 분별할 때, 색의 성품을 보는 것은 꿈과 같다. 비유컨대 꿈속의 색은 모두가 생각과 분별의 각관(覺觀; 관조 觀照)으로부터 일어난다. 일찍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알았던 것의 인연에서 일어난다. 이 꿈속에서 또한 그와 나를 알고, 또 땅과 불과 물과 바람을 보고, 또 산과 강과 무성한 숲을 보아도 꿈속의 색의 상에 결정적인 것이 있을 리 없다. 다만 생각과 기억으로써만 있을 뿐이다. 分別觀察選擇色時,見色性如夢,譬如夢中色,皆從憶想分別覺觀起,曾所見聞覺知因緣起,是夢中亦知彼我,亦見地水火風,亦見山河叢林。夢中色相無有決定,但以憶想故有。
색의 쌓임의 상도 이와 같다. 선세(先世)의 업(業)의 인연으로부터 나와 결정적인 성품이 있을 리 없다. 보살은 이와 같이 사유(思惟)하여 색은 나이다, 혹은 내 것이다 하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 色陰相亦如是,從先世業因緣出,無有決定性。菩薩如是思惟不取色。若我若我所,
다만 색은 여실히 무상(無常)한 상(相)으로서 허망하고 전도된 것이라고 바르게 관한다. 중생은 전도되어 탐착해서 색은 혹은 나의 색이며, 혹은 내 것의 색이며, 혹은 그의 색이며, 혹은 그의 것[彼所]의 색이라고 취한다. 이와 같이 색을 바르게 관찰하고 선택할 때, 색을 얻지 않으며, 색의 성품을 보지 않으며, 또 색의 무상함을 탐착하지 않는다.但正觀色如實無常相虛妄顚倒。衆生顚倒貪著取色,若我若我所色,若彼色若彼所色。如是正觀察選擇色時,不得色,不見色性,亦不貪著色無常。
보살이 이때 만약 색 중에서 사랑하는 생각과 탐착을 모두 남김없이 끊어 없애서 색의 바른 상을 잘 알고 색의 평등한 상을 잘 알고, 색이 없어지는[滅] 상을 잘 알고, 색이 없어지는 길[滅道; 고집멸도에서 멸제]의 상을 잘 알고, 색의 쌓임이 쫓아오는 곳도 없고 또 가는 곳도 없음을 잘 알아서 이러한 생각을 한다.菩薩爾時若於色中,愛念貪著皆悉除斷,善知色正相,善知色平等相,善知色滅相,善知色滅道相,善知色陰無所從來亦無所去,作是念:
‘이 몸의 색의 쌓임은 모두가 업의 과보와 각관(覺觀)에서 일어난다. 네 가지 요소[四大]가 모여서 된 것이, 이 몸의 색의 쌓임으로서 나가 아니며, 그가 아니며, 속하는 것이 없으며, 쫓아 일어나는 곳도 없다.’‘是身色陰,皆從業果報覺觀起,四大所攝。是身色陰,非我非彼無有所屬,無所從起。
색의 쌓임을 관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안의 색[內色]을 탐착하지 않고 받지도 않고, 바깥 색[外色]을 탐착하지 않고 받지도 않는다. 과거의 색도 탐착하지 않고 받지 않으며, 미래의 색도 탐착하지 않고 받지 않으며, 현재의 색도 탐착하지 않고 받지 않는다. 곧 일체의 색의 쌓임은 생함이 없는 상이라고 안다. 이는 보살이 이때에 색을 없애지 않고, 또한 색을 없애는 법을 구하지도 않는 것이다. ’觀色陰如是,內色不貪不受,外色不貪不受,過去色不貪不受,未來色不貪不受,現在色不貪不受,卽知一切色陰是無生相。是菩薩爾時不滅色亦不求滅色法。持世!菩薩摩訶薩觀察選擇色取陰如是。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색의 번뇌의 쌓임[色取陰]을 관찰하고 선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지세야,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② 느낌[受:感受]의 번뇌의 쌓임을 관찰하고 선택한다고 말하는가? 보살은 이렇게 사유한다.持世!何謂菩薩摩訶薩觀察選擇受取陰?菩薩作是思惟:
‘이 괴로움의 느낌과 즐거움의 느낌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모두가 인연으로부터 생긴다. 여러 가지 인연에 속하여 느낌의 상(相)에 든다. 이 안에는 받는 자가 없으며, 다만 탐착하기 때문일 뿐이다. 탐착하는 자는 곧 이 진실이 아니며 허망하여 생각과 분별로 일어난다.’是苦受樂受不苦不樂受,皆從因緣生,屬諸因緣入受相中。此中無有受者,但以貪著故,貪著者卽是不眞虛妄,從憶想分別起。
이 보살이 이와 같이 사유할 때, 이러한 생각을 한다.
‘이 범부는 허망한 느낌에 얽매여 세 가지 느낌(三受) 때문에 해를 입는다. 이른바 괴로움과 즐거움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 범부가 만약 즐거움을 받으면 사랑의 결박으로 부리는 바가 있다. 사랑의 결박으로 부림을 받기 때문에 능히 나쁜 업을 일으킨다. 是菩薩如是思惟時,作是念:‘是凡夫爲虛妄受所縛,爲三受所害,所謂苦樂不苦不樂受。是凡夫若受樂,爲愛結所使,以愛結所使故,能起惡業。若受苦,爲恚結所使,以恚結所使故,起諸惡業。
만약 괴로움을 받으면 성냄의 결박으로 부리는 바가 되고, 성냄의 결박으로 부림을 받기 때문에 여러 나쁜 업을 일으킨다. 만약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는 느낌을 받으면 무명(無明)의 결박으로 부리는 바 되고, 이 사람은 무명의 결박으로 인하여 부림을 받기 때문에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과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若受不苦不樂受,爲無明結所使,是人因無明結所使故,不脫憂悲苦惱。
우리들은 이제 마땅히 범부의 배움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모든 법을 바르게 관하고, 우리들은 마땅히 모든 느낌을 여실하게 관할 것이다.’我等今不應隨凡夫學,應正觀諸法,我等應如實觀諸受。’
보살은 여실히 느낌의 쌓임[受陰]을 관하여 이러한 생각을 한다.
‘쌓임이 아닌 것은 곧 느낌의 쌓임이다. 생각과 분별로 일어나 전도되어 상응(相應)한 것일 뿐 받는 자는 없다. 다만 전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지금 세상에 연(緣)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모든 느낌은 자성이 공(空)하여 느낌 가운데 느낌의 상이 없다.’菩薩如實觀受陰,作是念:‘非陰是受陰,從憶想分別起,顚倒相應無有受者,但從先世業因起,今世緣故;諸受自性空,受中無有受相。’
보살은 느낌의 쌓임을 관하여 통달한다. 비유컨대 빗방울은 물거품과 같아 생이 있고 멸이 있으나, 결정적인 것은 없다. 느낌의 쌓임도 이와 같다. 차례의 인연으로 일어나며, 여러 인연에 속하여 머무는 때가 없다. 허망하고 실답지 않으며 생각과 전도되어 상응함을 따라 일어난다.菩薩觀達受陰,譬如雨渧水泡,有生有滅無有決定。受陰亦如是,次第因緣起,屬諸因緣無有住時,虛妄不實,從憶想顚倒相應起。
보살은 이때 이러한 생각을 한다.
‘범부를 가엾이 여겨야 한다. 여러 가지 느낌에 억제되어 느낌의 쌓임을 바르게 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즐거운 느낌을 얻고서 탐착이 생기고, 괴로운 느낌을 얻어서는 또 탐착이 생기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얻고서는 또 탐착이 생긴다. 菩薩爾時作是念:‘凡夫可愍,爲諸受所制,以不正觀受陰故,故得樂受生著,得苦受亦生著,得不苦不樂受亦生著,
여러 가지 느낌에 얽매여 분주히 뛰어서 오고 가며, 몸을 좇아 몸에 이르러 번뇌[結]의 여러 결박을 받으며 다섯 가지 길[五道;지옥,아귀,축생,인간,천상])에 윤회하여 쉬고 그침이 없다. 이 범부는 여러 가지 느낌에 탐착하고, 느낌에 억제되며, 느낌에 묶여 느낌의 쌓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느낌의 쌓임에서 나올 곳을 보지 못하고, 느낌의 쌓임을 바르게 보는 것을 알지 못한 까닭에 느낌의 쌓임이 무상함을 여실히 관할 줄 모른다. 爲諸受所縛馳走往來,從身至身受結所縛,輪轉五道無有休息。是凡夫著於諸受,爲受所制爲受所繫,不脫受陰,於受陰所不見出處,不知正觀受陰故。不知如實觀受陰無常,
느낌의 쌓임 안에서 탐욕으로 물들었기 때문에, 묶이고 느낌의 쌓임의 여실한 상을 알지 못한다. 우리들은 지금, 마땅히 범부의 배움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여실(如實)하게 느낌의 쌓임을 관찰하고 선택해야 한다. 즉시 쌓임이 없는 것은 곧 느낌의 쌓임이며, 진실하지 않은 쌓임은 곧 느낌의 쌓임이며, 전도된 쌓임은 곧 느낌의 쌓임이며, 머무르지 않는 쌓임은 곧 느낌의 쌓임이라고 느낌의 쌓임을 여실하게 관해야 한다.’於受陰中爲欲染所縛,不知受陰如實相。我等今不應隨凡夫學,應如實觀察選擇受陰。’卽時如實觀受陰,無陰是受陰,不眞陰是受陰,顚倒陰是受陰,不住陰是受陰。
이때 느낌의 쌓임의 여실한 상을 봄에, 지은 자가 없고 부리는 자도 없다. 느낌의 쌓임 중에서 느낌의 쌓임의 상을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이 느낌의 쌓임을 관함에 느낌의 쌓임이 안에 있는 것을 보지 않고, 느낌의 쌓임이 밖에 있음도 보지 않는다. 느끼는 나에게 집착하지 않고, 느끼는 그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是時見受陰如實相,無有作者,無有使作者,於受陰中不見受陰相。如是觀受陰,不見受陰在內不見受陰在外,不著受我不著受彼,
느낌의 쌓임은 쫓아서 오는 곳이 없고 속한 것이 없음을 안다. 법은 능히 느낌을 생하는 일이 없다. 다만 전도되어 상응함을 쫓아 전생의 업의 과보의 수(數)를 느낌의 쌓임이라고 한다. 느낌의 쌓임을 허망한 인연이 서로 이어진 행이라고 본다. 이때 과거의 느낌의 쌓임을 받지 않고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知受陰無所從來無有所屬。無法能生受者,但從顚倒相應先世業果報數名受陰,見受陰虛妄因緣相續行。爾時過去受陰不受不貪不著,
미래의 느낌의 쌓임도 받지 않고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현재의 느낌의 쌓임도 역시 받지 않고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즐거운 느낌 중에서 사랑의 결박을 제거하며, 괴로운 느낌 중에서 성냄의 결박을 제거하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 중에서 무명의 결박을 알고 보기[知見; 실견 實見] 때문에 부지런히 정진을 행한다. 未來受陰亦不受不貪不著,現在受陰亦不受不貪不著。是人於樂受中除卻愛結,於苦受中除卻恚結,不苦不樂受中知見無明結故,勤行精進。
보살이 이때 만약 즐거운 느낌을 받아도 마음에 사랑이 생기지 않는다. 만약 괴로운 느낌을 받아도 마음에 성냄이 생기지 않는다. 만약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받아도 마음에 어리석음이 생기지 않는다.菩薩爾時,若受樂受心不生愛,若受苦受心不生恚,若受不苦不樂受心不生癡。
지세야, 범부는 대부분 즐거운 느낌에서 사랑을 낳고, 괴로운 느낌에서 성을 내고,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서 어리석음을 낸다. 곧 여러 범부는 사랑과 성냄과 어리석음 때문에 어둠 속에 깊이 들어가 느낌의 쌓임을 여실히 알지 못한다. 持世!凡夫多於樂受生愛,苦受生恚,不苦不樂受生癡。是諸凡夫以愛恚癡故深入闇冥,不能如實知受陰,
또한 사랑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상을 알지 못하여 사랑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깊이 탐착한다. 이른바 이는 나[我]이며, 내 것[我所]이다. 이는 이것이다, 저것[彼]이다 하는 따위이다.亦不知愛恚癡相,深貪著愛恚癡。所謂是我我所,是此彼等。
지세야, 보살마하살이 이 가운데서 느낌의 쌓임을 바르게 관하면 사랑〔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끌리지 않는다. 만약 사랑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생기면 곧 능히 끊어 없애고 바른 길을 행한다. 持世!菩薩摩訶薩於此中正觀受陰者,不爲愛恚癡所牽。若生愛恚癡,卽能除斷行於正道,
즐거운 느낌 가운데서 사랑의 결사[結使; 번뇌]를 끊기 때문에 부지런히 정진하고, 괴로운 느낌 가운데서 성냄의 결사를 끊기 때문에 부지런히 정진하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 중에서 어리석음의 결사를 끊기 때문에 부지런히 정진하여 세 가지 느낌<삼수상三受相; ①괴롭다는 고수(苦受), ②즐겁다는 낙수(樂受), ③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사수(捨受)>의 상을 여실히 안다.於樂受中斷愛結使故勤精進,於苦受中斷恚結使故勤精進,於不苦不樂受中斷癡結使故勤精進。如實知三受相,
이때 느끼는 것(3수상)이 있기를 혹은 괴로움이거나 혹은 즐거움이거나,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이어도 모두 떠나서 탐착하지 않는다. 사랑의 결사를 떠나고 성냄의 결사를 떠나고 어리석음의 결사를 떠나, 모든 느낌이 일어날 때 능히 깨달아 느낌의 쌓임은 무상하다고 여실히 안다. 爾時有所受,若苦若樂若不苦不樂,皆離不著。離愛結使,離恚結使,離癡結使,諸受起時皆能知見,知受陰如實無常。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알고 나면 느낌의 쌓임 안에서 탐욕에 물드는 것을 남김없이 끊는다. 느낌의 쌓임을 끊고, 탐욕으로 물드는 길에 들어도 모든 느낌에 더럽혀지지 않는다. 若能如是知已,於受陰中欲染悉斷,入斷受陰欲染道中,不爲諸受所污。
이 보살이 만약 이와 같이 바르게 느낌의 쌓임을 관하면 느낌의 쌓임을 여실하게 알고, 느낌의 쌓임이 모인 것[集]과 느낌의 쌓임이 없어지는 것[滅]과 느낌의 쌓임이 없어지는 길[滅道]을 알고, 是菩薩若如是正觀受陰,如實知受陰,知受陰集受陰滅受陰滅道,
그런 뒤에 느낌의 쌓임은 곧 무생(無生)의 상
이라고 여실하게 알며, 무생의 상으로써 느낌의 쌓임은 상이 없다고 통달한다.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느낌의 쌓임을 관찰하고 선택한다.然後如實知受陰是無生相,以無生相,通達受陰無相。持世!菩薩摩訶薩如是觀察選擇受陰。
지세야,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③ 생각의 쌓임[想陰]을 관찰하고 선택한다고 하는가? 持世!何謂菩薩摩訶薩觀察選擇想陰?
보살마하살이 바르게 생각의 쌓임을 관할 때, 생각의 쌓임을 봄에 모두가 전도됨으로 좇아 일어나고 허망하며, 견고하지 않으며, 진실하지 않으며, 본래부터 상(相)을 낳지 않으며, 인연의 화합으로써 전생[先世]의 업력(業力)을 좇아 일어난다. 이러한 생각을 한다.菩薩摩訶薩正觀想陰時,見想陰皆從顚倒起,虛妄不堅固不眞實,從本已來不生相,以因緣和合從先世業力起。作是念:
‘쌓임이 아닌 것은 곧 생각의 쌓임이다. 허망이 쌓인 것은 곧 생각의 쌓임이다. 전도된 것의 쌓임은 곧 생각의 쌓임이다. 생각의 쌓임 안에 생각이 쌓인 상이 없는 것을 비유하면 늦은 봄의 달무리와 같다. 명자(名字) 때문에 설하여 불꽃의 쌓임이라고 한다. ‘非陰是想陰,虛妄陰是想陰,顚倒陰是想陰,想陰中無想陰想。譬如春後月焰,以名字故說名爲焰,
생각의 쌓임도 이와 같다. 인식[識]의 상(相) 때문에 설하여 생각의 쌓임이라고 한다. 범부는 이 허망한 생각 때문에 얽매인다. 혹은 즐거움을 알고, 혹은 괴로움을 알고,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알고, 혹은 춥고 더운 것을 알고, 혹은 남자와 여자를 안다.陰想陰亦如是,以識相故說名想陰。凡夫於此爲虛妄想所繫,或識樂或識苦,或識不苦不樂,或識寒熱,或識男女,
혹은 다섯 가지 길(5도)에 나고 죽는 것을 알고, 혹은 합(合)하는 것을 알고, 혹은 흩어지는 것을 알고, 혹은 과거를 알고, 혹은 미래를 알고, 혹은 현재를 알고, 혹은 좋은 것을 알고, 혹은 더러운 것을 알고, 혹은 있는 것을 알고, 혹은 없는 것을 안다. 이는 범부의 생각으로서 모두가 전도됨과 허망 때문에 여러 가지 인연에 속한다. 다만 거짓으로 이름하여 생각의 쌓임이라고 할 뿐이다. 或識五道生死,或識合或識散,或識過去或識未來或識現在,或識好或識醜,或識有或識無。是凡夫想,皆爲顚倒虛妄,屬諸因緣,但假名爲想陰。
이 가운데 혹은 밖에, 혹은 안에 생각이란 없다. 범부의 사람은 허망한 생각에 얽매었기 때문에, 혹은 탐욕을 알고, 혹은 성냄을 알고, 혹은 어리석음을 알고, 혹은 아내와 자식을 안다. 범부는 이 생각의 쌓임에 의지하고 허망한 것을 탐착하며, 이 생각의 쌓임 때문에 분주히 뛰어서 가고 온다. 생각의 쌓임이 곧 허망한 것을 여실하게 관하지 못한다. 此中若內若外,無有想者,凡夫人虛妄想所繫故。或識貪欲,或識瞋恚,或識愚癡,或識妻子,凡夫依止是想陰貪著虛妄,以是想陰馳走往來,不能如實觀想陰是虛妄。
범부의 사람은 나에 대한 생각과 그에 대한 생각과 남자와 여자에 대한 생각으로 생각의 쌓임에 얽매어 벗어나지 못한다. 생각의 쌓임에 탐착하여 나는 곧 생각이 쌓인 것이며, 내 것은 곧 생각이 쌓인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마땅히 범부의 배움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凡夫人以我想彼想男女想,繫於想陰不能得脫,貪著想陰,我是想陰,我所是想陰。我等不應隨凡夫學。’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바르게 생각의 쌓임을 관하므로 생각의 쌓임 가운데서 생각이 쌓인 상을 얻을 수가 없다. 마치 불꽃의 쌓임 가운데서 불꽃이 쌓인 상을 얻을 수가 없는 것과 같다. 菩薩摩訶薩如是正觀想陰,想陰中想陰想不可得,如焰陰中焰,陰相不可得。
보살이 생각의 쌓임은 불꽃의 성품과 같다고 보면 과거의 생각의 쌓임도 탐하지 않고 받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미래의 생각의 쌓임도 탐하지 않고 받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현재의 생각의 쌓임도 머무르지 않는다. 혹은 나, 혹은 그를 분별하지 않는다. 菩薩見想陰如焰性,過去想陰不貪不受不著。未來想陰亦不貪不受不著。現在想陰不住。不分別若我若彼,
즉 그 생각과 느낌이 쌓이는 길을 없애고, 생각의 쌓임은 곧 남이 없는 것[無生]이라고 통달하며, 생각의 쌓임이 혹은 온 곳과 혹은 가는 곳을 보지 않는다. 다만 선세의 업인(業因)이 전도되어 상응하여 일어난 것으로 현재의 연(緣)에 묶인 것이며, 쌓임이 없음은 곧 생각의 쌓임이다. 卽彼滅想受陰道,通達想陰是無生。不見想陰若來處若去處,但以顚倒相應先世業因所起,現在緣所繫,無陰是想陰,
생각의 쌓임을 관찰하고 선택함에 좇아오는 곳이 없고, 또 가는 곳도 없다. 즉 생각의 쌓임은 생함이 없는 것이라고 통달하고, 또 생각의 쌓임이 없어지는 것을 분별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생각과 느낌의 쌓임을 없애기 위한 까닭이며, 또한 여실한 지견(知見;사물을 바르게 관찰하는 견해)에 머무는 까닭이다.觀察選擇想陰,無所從來亦無所去,卽通達想陰無生,亦不分別想陰滅,但爲滅一切想受陰故,亦住如實知見故。
보살이 여실하게 생각의 쌓임을 관할 때, 모든 생각의 길을 멀리 떠나며, 마음도 모든 생각의 길에 머물지 않는다. 다만 지견으로서의 생각의 쌓임과 또 여실한 생각의 쌓임과 탐착하지 않는 생각의 쌓임에 머물러 여실하게 모든 생각의 쌓임을 관찰하고, 여실하게 생각의 쌓임이 모이고 없어지고 다하는 것을 안다.菩薩如實觀想陰時,遠離一切想道心,亦不住一切想道。但住知見想陰,亦如實想陰,不貪著想陰,如實觀察一切想陰,如實知想陰集滅盡。
지세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생각의 쌓임을 바르게 관찰하고 선택하면 곧 생각의 쌓임의 번뇌[欲染]를 떠나고, 또한 생각의 쌓임의 번뇌를 끊는 길을 행한다.持世!菩薩摩訶薩如是正觀察選擇想陰,則離想陰欲染,亦能行斷想陰欲染道。
지세야,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④ 행의 쌓임[行陰]을 관찰하고 선택한다고 말하는가? 持世!何謂菩薩摩訶薩觀察選擇行陰?
지세야, 보살마하살이 행의 쌓임을 관함에 전도됨으로부터 일어난 것이고 허망한 생각[憶想]과 분별을 임시로 빌려서 있는 것이다.持世!菩薩摩訶薩觀行陰從顚倒起,虛妄憶想分別假借而有。
보살이 이때 혹은 몸의 행(行)과 입의 행과 뜻의 행 모두가 부정(不淨)하고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공(空)하며 무아(無我)라고 관한다. 이와 같이 관할 때, 이 생각을 한다.菩薩爾時若身行口行意行,皆觀不淨無常苦空無我。如是觀時,作是念:‘
‘쌓임이 아닌 것은 곧 행의 쌓임이다. 괴로움이 쌓인 것은 곧 행의 쌓임이다. 인연으로 생하는 쌓임은 곧 행의 쌓임인 것이다. 모양[像]이 쌓인 것도 행의 쌓임이다. 모든 행의 쌓임은 더함이 없고 덜함이 없고 모임도 없다. 몸의 행과 입의 행과 뜻의 행은 짓는 자가 없다.’非陰是行陰,苦陰是行陰,因緣生陰是行陰,像陰是行陰,諸行陰無增無減無集。若身行口行意行無有作者。
지혜로운 자는 느낌[受]이 곧 행의 쌓임이라 하여 탐착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智者不貪受是行陰。何以故?
이 모든 몸의 행은 몸 안에 있지 않으며, 몸 밖에 있지 않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다. 입의 행과 뜻의 행도 이와 같아서 뜻 안에 있지 않고, 뜻 밖에 있지 않고, 중간에도 있지 않다. 행의 쌓임 안에 행이 쌓인 상(相)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是諸身行,不在身內,不在身外,不在中閒。口行意行亦如是,不在意內,不在意外,不在中閒。行陰中無行陰相。何以故?
이 행의 쌓임은 뭇 인연이 전도됨으로부터 일어난 것으로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으며 이전에 지은 업의 과보가 거두는 것이며, 또 인연으로 묶여 능히 짓는 것[所行]이 있다. 모든 지음이 있는 행, 혹은 몸의 행과 혹은 입의 행과 혹은 뜻의 행은 모두가 진실한 행이 아니다. 이는 지음이 없는 행이며, 이는 허망한 행이며, 이는 전도된 행이다. 이런 까닭에 쌓임이 아닌 것은 곧 행의 쌓임이라고 설한다. 무슨 까닭인가? 是行陰從衆因緣顚倒起,虛妄不眞,先業果報所攝,亦令因緣所繫,能有所行。諸所有行,若身行,若口行若意行,皆非眞行,是無所有行,是虛妄行,是顚倒行,是故說非陰是行陰。何以故?
지혜로운 자는 결정코 행이 쌓인 상을 얻지 않는다. 이는 몸의 행이다, 이는 입의 행이다, 이는 뜻의 행이라든가 이곳이라든가 저곳이라든가, 혹은 안, 혹은 밖, 또는 몸과 입과 뜻의 행은 더욱 결정적인 행의 상이라고 얻을 것도 설할 것도 없다. 하물며 행의 쌓임을 얻을 수 있고 설할 수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쌓임이 없는 것은 곧 행의 쌓임이라고 설한다.智者不決定得行陰相,是身行是口行是意行,此處彼處若內若外。又身口意行,尚無決定行相可得可說,何況行陰可得可說?是故說無陰是行陰。
범부는 전도된 생각을 일으켜 몸과 입과 뜻의 행에 탐착하고 잊지 않고 생각해서 이는 행의 쌓임이라고 분별하며, 행의 쌓임 때문에 묶여서 분주히 뛰어서 가고 온다. 이 범부의 사람은 전도됨으로 해서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일으키고, 일으킨 다음에는 탐착하여 돌아가는 곳이 법이 없음에도 법의 생각을 내고 쌓임[陰]이 없음에도 쌓임의 생각을 내는 곳이다. 전도된 행에 탐착하기 때문에 행의 쌓임에 묶여 다섯 갈래의 길(5도)에 오고 가며 항상 몸과 입과 뜻의 행을 따르므로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여실하게 관할 수가 없다. 凡夫起顚倒想,貪著身口意行,憶念分別是行陰,爲行陰所縛馳走往來。是凡夫人以顚倒故,起身口意行,起已貪著歸趣,無法生法想,無陰生陰想。貪著顚倒行故,爲行陰所繫往來五道,常隨身口意行,不能如實觀身口意行,
여실하게 행의 쌓임을 관할 수 없기 때문에 몸과 입과 뜻으로 모든 행을 일으킨다. 이는 모든 범부가 전도된 것에 탐착하기 때문에, 진실하지 않은 법에 탐착하기 때문에, 허망에 탐착하기 때문에 수(數; 수량)를 행의 쌓임이라고 이름한다.不能如實觀行陰故,以身口意而起諸行。是諸凡夫著顚倒故,著不眞法故,著虛妄故,數名行陰。’
지세야, 보살은 이 가운데서 이와 같이 모든 행은 근본이 없다고 바르게 관한다. 쇠약하고 용렬하고 힘이 없는 뭇 연[衆緣]의 화합으로써 행의 쌓임을 설할 것이다. 이 가운데 진실한 행의 쌓임은 없다. 쌓임이 없음은 곧 행의 쌓임이며, 본래부터 줄곧 생하지 않는 것은 곧 행의 쌓임이다. 持世!菩薩於此中如是正觀諸行無有根本,羸劣無力以衆緣和合,可說行陰,是中無有眞實行陰,無陰是行陰,從本已來不生是行陰,
성품이 없음은 곧 행의 쌓임이다. 모든 행의 과거[前際]는 얻을 수가 없다. 미래[後際]도 얻을 수 없으며, 현재[中際]도 얻을 수가 없다. 머무는 때도 없고, 모든 행은 생각마다 나고 없어진다.無性是行陰。諸行前際不可得,後際不可得,中際不可得,無有住時,諸行念念生滅。
지세야, 보살은 이와 같이 바르게 행의 쌓임을 관한다.
‘공(空)하여 얻을 수가 없고 굳고 튼튼하지 않은 상이며, 나아가 호리(毫釐)도 얻을 수가 없다.’ 持世!菩薩如是正觀行陰空不可得,不堅牢相,乃至毫釐亦不可得,
이 모든 범부는 굳고 튼튼하지 않은 법에 묶이고, 행의 쌓임에 묶이고, 탐착에 묶여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일으킨다. 나는 곧 행이며, 내 것은 곧 행이라고, 이와 같이 업을 일으켜 행의 쌓임에 묶여 행의 쌓임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서 무명(無明)의 어리석은 어둠 속에 들고, 모든 행 가운데서 진실의 상을 낳고 전도되기 때문에 느낌[受]과 취(取)함과 행의 쌓임에 탐착한다. 作是念:‘是諸凡夫爲不堅牢法所繫,行陰所繫,貪著所縛,起身口意行,我是行我所是行。起如是業爲行陰所縛,不知行陰性入無明癡冥,於諸行中生眞實想,以顚倒故貪著受取行陰。
이 사람은 느낌과 취함과 행의 쌓임에 탐착하는 까닭에 혹은 즐거운 행을 일으키고, 혹은 괴로운 행을 일으키고,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행을 일으킨다. 이 사람은 즐거운 행을 일으켜서 즐거운 몸을 얻고, 괴로운 행을 일으켜서는 괴로운 몸을 얻으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행을 일으켜서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몸을 얻는다. 이 사람은 즐거운 몸을 얻고서는 사랑을 낳고, 괴로운 몸을 얻고서는 성을 내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몸을 얻고서는 어리석음을 낳는다. 是人貪著受取行陰故,或起樂行,或起苦行,或起不苦不樂行。是人起樂行已得樂身,起苦行已得苦身,起不苦不樂行已得不苦不樂身。是人得樂身已生愛,得苦身已生瞋,得不苦不樂身已生愚癡。
이 사람은 사랑과 성냄과 어리석음 때문에 모든 행의 잘못과 악(惡)을 보지 않고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청정하게 하지 못한다. 이 사람은 몸과 입과 뜻의 행이 청정하지 않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은 길에 떨어진다. 이른바 지옥과 축생(畜生)과 아귀(餓鬼)이다. 혹 때로는 천인(天人) 속에 나서 몸과 입과 뜻의 행에 탐착하고 깊이 행의 쌓임에 집착한다.是人以愛瞋癡故,不見諸行過惡,不能淸淨身口意行。是人身口意行不淸淨故,墮不淸淨道中,所謂地獄、畜生、餓鬼;或時蹔生天人中,貪著身口意行,深著行陰。’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바르게 관하여야 한다.
‘지금 우리들은 마땅히 범부의 배움에 따르지 않아야 한다. 우리들은 마땅히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마땅히 행의 쌓임에 탐착하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행의 쌓임의 잘못과 악을 관해야 한다. 마땅히 행의 쌓임을 벗어날 길을 구해야 한다.’菩薩摩訶薩應如是正觀,今我等不應隨凡夫學,我等應淸淨身口意行,不應貪著行陰,應觀行陰過惡,應求出行陰道。
이와 같이 관하는 자를 이름하여 여실하고 바르게 행의 쌓임을 관한다고 한다. 또 행의 쌓임의 무상함을 바르게 관한다고 이름한다. 즉시 여실하게 모든 행과 모든 행의 모임[集]과 모든 행의 없어짐[滅]과 모든 행의 없어지는 길을 관하여 모든 행을 받지 않고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행의 쌓임에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관할 때, 행의 상을 멀리 떠나고, 또한 행의 쌓임이 없는 길을 행한다. 如是觀者名爲如實正觀行陰,亦名正觀行陰無常。卽時,如實觀諸行,諸行集諸行滅諸行滅道,不受不貪不著諸行,亦不貪不著行陰。如是觀時遠離行相,亦行無行陰道,
즉 모든 행의 공(空)함을 관하여 일체의 모든 행 중에서 놀라고 두려워 싫어하여 떠나려는[厭離] 마음을 내고 다만 청정한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일으킨다. 행의 상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행의 쌓임의 상을 떠나기 때문에 이 사람은 얻은 바가 있는 몸이며 모두가 곧 청정하다. 무슨 까닭인가? 卽觀諸行空。於一切諸行中,驚怖生厭離心,但起淸淨身口意行,壞行相故,離行陰相故。是人有所得身皆是淸淨。何以故?
이 사람은 몸의 업이 청정하고 입의 업이 청정하고 뜻의 업이 청정하며, 몸의 행이 청정하고 입의 행이 청정하고 뜻의 행이 청정하다. 이 사람은 행의 쌓임의 상을 멀리 떠나고, 모든 법과 근본의 상을 무너뜨린다. 이와 같이 바르게 관할 때, 행의 쌓임이 쫓아오는 곳이 없고, 또 가는 곳도 없음을 본다. 是人身業淸淨,口業淸淨,意業淸淨,身行淸淨,口行淸淨,意行淸淨。是人遠離行陰相。壞諸法及根本相。如是正觀時,見行陰無所從來亦無所去,
결정코 모든 행의 생하는 상을 얻지 않으며, 또한 결정코 없어지는 상도 얻지 않는다. 즉 모든 행의 생함과 멸함이 없는 상을 관하여 일체의 모든 행도 역시 생멸(生滅)이 없는 것이다.不得諸行決定生相,亦不得決定滅相,卽觀諸行無生滅相,一切諸行亦無生滅。
이 사람은 일체의 모든 행의 생멸이 없는 상을 관하여 싫어하여 떠나려는 마음을 내고 모든 행이 모이고 없어지는 상을 바르게 통달한다. 비록 모든 행의 생함이 없는 상을 밝혔다[證] 하더라도 모든 행의 상에 잘 통달한다. 무슨 까닭인가? 是人觀一切諸行無生滅相,生厭離心,正通達諸行集滅相。雖證諸行無生相,而善通達諸行相。何以故?
지세야, 이 행의 쌓임의 결정적인 상이 없는 것은, 비유컨대 파초와 같아서 굳고 튼튼한 상을 얻을 수가 없다. 굳고 튼튼함이 없는 상도 얻을 수가 없다. 행의 쌓임도 이와 같다. 굳고 튼튼한 상을 얻을 수가 없고, 굳고 튼튼함이 없는 상도 얻을 수가 없다.持世!是行陰無決定相。譬如芭蕉堅牢相不可得,無堅牢相亦不可得,行陰亦如是,堅牢相不可得。無堅牢相亦不可得。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관찰하고 선택하고 사유하여 행의 쌓임에 든다.”持世!菩薩摩訶薩如是觀察選擇思惟入於行陰。”(1권)
<지세경 2권>
지세야,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바르게
⑤ 식의 쌓임[識陰]을 관찰하고 선택한다고 말하는가? “持世!何謂菩薩摩訶薩正觀察選擇識陰?
보살마하살은 쌓임이 아닌 것은 곧 식의 쌓임이며, 전도된 쌓임은 곧 식의 쌓임이며, 허망의 쌓임은 곧 식의 쌓임이라고 관한다. 무슨 까닭인가? 菩薩摩訶薩觀非陰是識陰,顚倒陰是識陰,虛妄陰是識陰。何以故?
지세야, 이 식의 쌓임은 전도된 것을 쫓아서 일어나고 허망한 연(緣)에 묶였으며 이전의 업(業)을 쫓아 있고, 현재의 연에 묶여 뭇 인연에 속한다. 허망은 소유(所有)함이 없고 생각과 분별로 일어나고 식으로부터 생긴다. 持世!是識陰從顚倒起,虛妄緣所繫,從先業有,現在緣所繫,屬衆因緣,虛妄無所有,憶想分別起,從識而生,
인식하는 바가 있는 까닭에 이를 이름하여 식이라고 한다. 생각과 분별에서 각관(覺觀)이 생긴다. 임시로 빌려서 있으며 인식하는 바가 있는 까닭에 수(數)를 이름하여 식이라고 한다. 有所識故名之爲識。從憶想分別覺觀生,假借而有,有所識故數名爲識。
온갖 사물을 인식하는 까닭이며, 마음의 업을 일으키는 까닭이며, 사유(思惟)하는 까닭이며, 뭇 인연의 생상(生相) 때문이며, 갖가지 사유를 일으키는 까닭에, 수(數)를 식의 쌓임이라고 이름한다. 以識諸物故,以起心業故,以思惟故,衆緣生相故,起種種思惟故,數名識陰。
인식하는 바가 있음으로부터 식의 상(像)이 나옴이 있다. 마음의 업을 나타내는 까닭이며, 사유를 섭수하는 까닭에 수(數)를 식의 쌓임이라고 이름한다. 혹은 이름하여 마음[心]이라고 하며, 혹은 이름하여 뜻[意]이라고 하며, 혹은 이름하여 식(識)이라고 한다. 從有所識,有識像出,示心業故,攝思惟故,數名識陰。或名爲心,或名爲意,或名爲識,
이 모두는 뜻의 업이 분별하는 까닭에 식의 쌓임이 섭수하는 바로서 식의 상(相)과 식의 행과 식의 성품을 나타내는 까닭에 수를 식의 쌓임이라고 이름한다. 皆是意業分別故,識陰所攝,識相識行識性示故,數名識陰。
이와 같이 쌓임이 아닌 것은 곧 식의 쌓임인 것이다. 나지 않고 일어나지 않고 짓지 않는 것이나 다만 전도되어 상응하여 허망한 식(識)을 연하기 때문에 수를 식의 쌓임이라고 이름한다. 무슨 까닭인가? 如是非陰是識陰,不生不起不作,但以顚倒相應緣虛妄識故,數名識陰。何以故?
이 식의 쌓임은 뭇 인연으로부터 생겨 자성(自性)이 없고, 차례로 상속(相續)하여 생하며 생각마다 생하고 멸한다. 是識陰從衆因緣生無自性,次第相續生,念念生滅,
이 식은 낳지 않는 쌓임의 상을 연(緣)한다. 무슨 까닭인가?
이 식의 쌓임이 낳는 상[生相; 色心에서 일어나는 相]은 얻을 수 없고, 결정적인 상도 얻을 수 없다. 낳는 상을 얻을 수 없는 까닭이며, 결정적인 상을 얻을 수 없는 까닭이며, 근본을 소유함이 없는 까닭이며, 자상(自相)이 없는 까닭이며, 굳고 튼튼함을 얻을 수 없는 까닭에 지혜로운 자는 바르게 관찰하고 선택하여 쌓임이 아닌 것, 이것이 식의 쌓임이라고 통달한다. 是識緣不生陰相。何以故?是識陰生相不可得,決定相亦不可得。生相不可得故,決定相不可得故,根本無所有故,自相無故,牢堅不可得故,智者正觀察選擇通達非陰是識陰。
범부는 식의 쌓임이 아닌 것에서 식의 쌓임의 상을 낳고, 각관(覺觀)과 분별하는 생각으로 전도되어 상응하여 허망함에 묶인다. 굳이 이름하여 식의 쌓임이라고 한다.凡夫於非識陰生識陰相,以覺觀分別憶想顚倒相應虛妄所縛。强名爲識陰,
이 식의 쌓임에 탐착하고, 인식하는 것에 의지하고, 식에 의지하여 갖가지 사유(思惟)를 나타내는 까닭에 식의 쌓임을 낳고 일으킨다. 이 사람은 여러 가지로 분별하고, 안의 식에 탐착하며, 밖의 식에 탐착하며, 안과 밖의 식에 탐착하며, 먼 식[遠識]에 탐착하며, 가까운 식[近識]에 탐착하며, 식의 상이기 때문에 분별하고 식의 쌓임을 일으킨다. 貪著是識陰,依止所識,依止識種種示思惟故生起識陰。是人種種分別,貪著內識,貪著外識,貪著內外識,貪著遠識,貪著近識,以識相故分別起識陰。
이 사람은 생각과 분별로써 혹은 마음[心]과 혹은 뜻[意]과, 혹은 식(識)을 임시로 빌려 굳이 이름하여 ‘이는 마음이다, 이는 뜻이다, 이는 식이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마음의 상이 생기는 것을 안다. 이는 범부가 식의 쌓임에 탐착하여 식의 쌓임에 묶인 것이다. 是人以憶想分別若心若意若識,假借强名是心是意是識,如是知種種心相生。是凡夫貪著識陰,爲識陰所縛,
마음과 뜻과 식이 합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식의 쌓임을 일으킨다. 허망한 일을 분별하는 까닭이며, 하나의 상인 까닭이며, 결정적인 상인 까닭에 능히 이는 마음이다, 이는 뜻이다, 이는 식이라고 하게 되어 능히 분별하고 애착한다. 心意識合故,起種種識陰。分別虛妄事故,以一相故,以決定相故,能得是心是意是識,能得分別愛著。
이 사람은 식의 쌓임에 의지하여 깊이 식을 탐하는 까닭에 또한 과거의 식의 쌓임을 얻어 탐착하는 생각[念]이 있고, 또 미래의 식의 쌓임을 얻어 탐착하는 생각이 있으며, 또 현재의 식의 쌓임을 얻어 탐착하는 생각이 있다.是人依止識陰深貪識故,亦得過去識陰貪著念有,亦得未來識陰貪著念有,亦得現在識陰貪著念有。
모든 범부는 보고[見] 듣고[聞] 깨닫고[覺] 아는[知] 법 가운데서 식의 쌓임을 헤아리고 얻어 탐착하는 생각이 있다. 이 사람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법에 탐착하여 식의 쌓임에 묶이고, 그 아는 바를 귀하게 여긴다. 諸凡夫於見聞覺知法中,計得識陰貪著念有,是人貪著見聞覺知法,爲識陰所縛,貴其所知,
마음과 뜻과 식이 합하여 묶임으로 해서 분주히 뛰어서 가고 온다. 이른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에 이르고, 저 세상에서 이 세상에 이르는 모두가 식의 쌓임에 묶였기 때문에 여실하게 식의 쌓임을 알지 못한다.以心意識合繫故馳走往來。所謂從此世至彼世,從彼世至此世,皆識陰所縛故。不能如實知識陰,
식의 쌓임은 곧 허망함과 실답지 않음[不實]과 전도되어 상응한다.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법을 인하여 일어나며, 이 안에는 진실한 식[實識]이 없다. 만약 이와 같이 실답게 관하지 못하면, 혹은 좋은 식[善識]을 일으키고, 혹은 좋지 않은 식[不善識]을 일으키며, 혹은 좋고 좋지 않은 식[善不善識]을 일으킨다. 이 사람은 항상 식의 행에 따르고, 식이 생하는 곳을 모르며, 식의 여실한 모양을 모른다.識陰是虛妄不實顚倒相應,因見聞覺知法起,此中無有實識者;若不能如是實觀,或起善識,或起不善識,或起善不善識,是人常隨識行,不知識所生處,不知識如實相。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이 가운데서 이와 같이 바르게 관하여 식의 쌓임은 허망한 식으로부터 일어난다고 안다.持世!菩薩摩訶薩於此中如是正觀,知識陰從虛妄識起,
‘이른바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법 중의 뭇 인연에서 생한다. 법이 없는데 법의 생각이 생겼으므로 식의 쌓임에 탐착한다. 우리들은 마땅히 범부의 배움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지금 우리들은 여실하고 바르게 식을 관찰하고 선택하여, 여실하고 바르게 식의 쌓임을 관찰하고 선택해야 한다.’所謂見聞覺知法中衆因緣生,無法生法想故貪著識陰。我等不應隨凡夫學人,我等當如實正觀察選擇識,如實正觀察選擇識陰。
이 모든 보살이 여실하게 관할 때, 식의 쌓임은 허망하고 실답지 않다고 알며 본래부터 항상 생하지 않는 상(相)임을 알아, 쌓임이 아닌 것은 곧 식의 쌓임이며, 상(像)의 쌓임은 곧 식의 쌓임이며, 환(幻)의 쌓임은 곧 식의 쌓임이라고 안다. 是諸菩薩如實觀時,知識陰虛妄不實,從本已來常不生相,知非陰是識陰,像陰是識陰,幻陰是識陰。
비유컨대 요술로 된 사람의 식과 같이 안에 있지 않고, 또한 밖에 있지 않고, 또 중간에도 있지 않다. 식의 성품 또한 이와 같아서 환(幻)의 성품과 같이 허망한 연(緣)에서 생기고 생각과 분별로부터 일어난다. 실다운 일[實事]이 없으며 인형[機關木人]과 같다.譬如幻所化人,識不在內亦不在外,亦不在中閒,識性亦如是;如幻性虛妄緣生,從憶想分別起,無有實事如機關木人,
식은 또 이와 같이 전도됨으로부터 일어나고 허망한 인연이 화합한 까닭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할 때, 식은 모두가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부정(不淨)하고 무아(無我)라고 알며, 식의 상은 환과 같다고 알며, 식의 성품은 환과 같다고 관한다. 識亦如是,從顚倒起虛妄因緣和合故有。如是觀時,知識皆無常苦不淨無我,知識相如幻,觀識性如幻。
보살은 이때 이 같은 생각을 한다.
‘세간은 매우 어지럽고 어리석다. 이른바 생각과 분별로부터 세간에 식을 일으켜 마음과 뜻과 식과 합한 3계(界)는 다만 식일 뿐이다. 菩薩爾時作是念:‘世閒甚爲狂癡,所謂從憶想分別識起於世閒,與心意識合,三界但皆是識,
이 마음(心)과 뜻(意)과 식(識)은 또한 형상[形]이 없고, 방위[方]도 없으며, 법 안에 있지 않고 법 밖에 있지 않으며, 범부는 허망함에 상응하여 묶였기 때문에 식의 쌓임 가운데서 혹은 나, 혹은 내 것이라고 탐착한다. 是心意識亦無形無方,不在法內不在法外。凡夫爲虛妄相應所縛故,於識陰中貪著若我若我所,
이 사람은 식의 쌓임은 안에 있다고 탐착하며, 식의 쌓임은 밖에 있다고 탐착하며, 식의 쌓임은 안팎에 있다고 탐착하며, 식의 쌓임은 그와 나에게 있다고 탐착한다. 是人貪著識陰在內,貪著識陰在外,貪著識陰在內外,貪著識陰在彼我,
이 사람은 식의 쌓임을 귀하게 여겨 식의 쌓임에 얽매인다. 식의 쌓임의 맛을 느껴 식이 쌓인 상(相)을 설한다. 이른바 혹은 마음과, 혹은 뜻과, 혹은 식과 그 맛의 행을 따르는 까닭에 식의 쌓임을 탐착하여 받는다. 是人貴此識陰,爲識陰所縛,受識陰味,說識陰相,所謂若心若意若識,隨味行故貪受識陰,
이 사람은 식에 얽매인다. 식의 쌓임과 합하는 까닭에 마음과 뜻과 식에 끌린다. 마음과 뜻과 식은 인연의 힘인 까닭에 이 범부를 낳는다. 是人爲識所縛,識陰合故爲心意識所牽。以心意識因緣力故生是凡夫,
만약 아래 생각을 일으키면, 아래 몸(下身; 지옥, 아귀, 축생계)을 얻고, 혹은 위의 생각을 일으키면, 위의 몸(上身; 천상계)을 얻으며, 만일 중간의 생각을 일으키면 중간의 몸(中身; 아수리, 인간계)을 얻는다. 若起下思得下身,若起上思得上身,若起中思得中身,
이 사람은 마음과 뜻과 식의 힘에 따르는 까닭에 생하여 모든 6근과 6경(入)에 의지하고, 식의 쌓임에 탐착하는 까닭에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과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다.’是人隨心意識力故生,依止諸入,貪著識陰故,不脫生老病死憂悲苦惱。’
보살은 이 안에서 여실히 바르게 식의 쌓임을 관하고 선택한다. 여실하고 바르게 식의 쌓임의 무상한 상(相)을 관하는 까닭에 과거의 식의 쌓임을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생각[念]하지 않으며, 쌓임이 아닌 것은 곧 식의 쌓임이라고 안다. 菩薩於此中如實正觀選擇識陰,如實正觀識陰無常相故,過去識陰不貪不著不念,知非陰是識陰。
미래세(未來世)의 식의 쌓임도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쌓임이 아닌 것은 곧 식의 쌓임이라고 안다. 현재의 식의 쌓임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여실하게 식의 쌓임의 무상한 상을 알며, 여실하게 식의 쌓임이 생하고 멸하는 상을 안다. 未來世識陰亦不貪不著不念。知非陰是識陰。現在識陰亦不依止。如實知識陰無常相,如實知識陰生滅相。
만약 이와 같이 사유하여 바르게 식의 쌓임을 관하면, 이를 바르게 관하여 식의 쌓임의 길에 든다고 한다. 이른바 여실하게 식을 알고, 여실하게 식의 모임을 알고, 여실하게 식의 멸(滅)을 알고, 여실하게 식이 멸하는 길을 안다. 若如是思惟正觀識陰,是名正觀入識陰道。所謂如實知識,如實知識集,如實知識滅,如實知識滅道。
이 사람은 여실하게 식의 쌓임이 모이고 멸하는 상을 관하여 능히 식의 쌓임을 무너뜨리고, 능히 일체의 상(相)을 끊어 식의 쌓임이 모이고 멸하는 상을 알며, 또 식의 쌓임이 모이고 멸하는 상에 통달한다.是人如實觀識陰集滅相,能壞識陰,能斷一切相,知識陰集滅相,亦通達識陰集滅相。
보살은 이때 또한 식의 쌓임을 생하지 않는다. 또 식의 쌓임을 멸하지도 않는다. 이 식의 쌓임은 본래부터 생함이 없다. 이와 같이 관할 때, 식의 멸하는 상을 분별하지 않고, 식의 쌓임이 생함이 없는 상에 통달한다. 무슨 까닭인가? 菩薩爾時亦不生識陰,亦不滅識陰,是識陰從本已來無生,如是觀時不分別識滅相,通達識陰無生相。何以故?
지세야, 이 식의 쌓임은 생함이 없고 상이 없으며 이루는 것도 없다. 이 식의 쌓임이 생하는 성품이 허망하기 때문에 생함이 없는 상(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이다. 持世!是識陰無生無相無成,是識陰生性虛妄故,入在無生相中。
지세야, 식의 쌓임은 마침내 생멸하는 상이 있지 않다. 이 식의 쌓임의 상은 뭇 인연으로부터 생한다.持世!識陰終不有生成相,是識陰相從衆因緣生。
지세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인연의 법을 관함에 쌓임이 아닌 것은 곧 식의 쌓임인 것이다. 관찰하고 선택하여 믿고 이해하며 깨달아 알아서 모든 있는 바 식에 통달하여 모두 그 진실을 안다. 보살은 식의 쌓임의 진실을 알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일체 반연하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안다.持世!菩薩摩訶薩如是觀因緣法,非陰是識陰,觀察選擇信解證知通達諸所有識悉皆知實。菩薩知識陰實故,如是一切所緣知皆破壞。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식의 쌓임을 관하고, 이 식의 쌓임은 생함이 없는 것이며, 지음이 없는 것이며, 일어남이 없는 것이며, 받음이 없는 것이며, 느끼는 것도 없는 것이라고 안다. 持世!菩薩摩訶薩如是觀識陰,知是識陰無生者,無作者,無起者,無受者,無所受者,
다만 모든 연[衆緣]으로써 생하며, 뭇 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있으며,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법을 연하는 까닭에 유(有情)에 묶이며, 본래부터 항상 필경공(畢竟空; 절대 부정하는 空까지도 空)한 것)인 것이다.但以衆緣生,衆緣合故有,緣見聞覺識法故繫有,從本已來常畢竟空。
이와 같이 식의 쌓임을 관할 때, 즉 식의 쌓임은 곧 지음이 없으며 일어남이 없는[無起; 선악(善惡)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성〕 상이라고 알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如是觀識陰時,卽知識陰是無作無起相,不貴不著。
지세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바르게 관찰하고 선택하여 식의 쌓임에 든다. 持世!菩薩摩訶薩如是正觀察選擇入識陰。
만약 보살이 능히 이와 같은 방편으로 다섯 가지(5온;색수상행식) 쌓임에 들고, 능히 이와 같은 방편으로 바르게 다섯 가지 쌓임을 관하면 이를 ‘통달하여 다섯 가지 쌓임이 모이고 멸하고 멸하는 길에 든다’라고 한다. 若菩薩能如是方便入五陰,能如是方便正觀五陰是名通達入五陰集滅道,
모두가 능히 모든 쌓임의 상(想)을 끊고 참답게 다섯 가지 쌓임의 방편을 안다. 이 방편 때문으로 해서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五受陰] 중에서 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묶이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다. 皆能斷諸陰相,眞知五陰方便,以是方便故,於五受陰中,不貪不著不縛不繫,
여실하게 색의 무상(無常)의 상을 안다. 如實知色無常相,
이 보살이 만약 색(色)에 대해서 탐욕의 물듦이 있다면 곧 능히 끊어 없앤다. 또 여실하게 느낌[受]과 생각[想]과 행(行)과 식(識)을 알고, 또 여실하게 느낌과 생각과 행과 식의 무상의 상(相)을 알며, 혹 느낌과 생각과 행과 식 가운데서 탐욕의 물듦이 있으면 곧 능히 끊어 없앤다. 是菩薩若於色有欲染則能除斷;亦如實知受想行識,亦如實知受想行識無常相,若於受想行識中,有欲染則能除斷。
보살은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 중에서 탐욕의 물듦을 끊어 없애는 까닭에, 수순하여 결정적인 다섯 가지 쌓임의 방편에 통달한다. 이와 같이 관할 때,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의 미세한 생멸의 상을 알 수 있다.菩薩於五受陰中除斷欲染故,隨順通達決定五陰方便,如是觀時,能知五受陰細微生滅相。
지세야,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능히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의 미세한 생멸의 상(相)을 관찰하여 선택한다고 말하는가? 持世!何謂菩薩摩訶薩能觀察選擇五受陰細微生滅相?
<태내 5위>
보살마하살은 중생이 처음 태(胎)에 드는 가라라 <歌羅羅; kālala. 태내(胎內)의 5위(位) 중의 하나. 잉태한 첫 7일간의 상태(生有).>의 때를 관한다. 菩薩摩訶薩觀衆生初入胎歌羅羅時,
<태내 5위>
| 가라라 Kalala | (迦邏邏, Kalala / 응 : 凝)시기: 잉태 직후의 첫 7일 상태: 어머니의 피와 아버지의 정액이 결합한 상태로, 마치 맑은 물방울이나 엉긴 젖과 같이 매우 미세한 형태 |
| 알부다 Abbuda | (頞部曇, Abbuda / 포 : 疱)시기: 두 번째 7일 (8일~14일)상태: '물집'이라는 뜻으로, 가라라 단계에서 조금 더 부풀어 올라 얇은 피부에 싸인 물집이나 거품 같은 형태 |
| 폐시 Pesi | (閉尸, Pesi / 굴 : 軟肉)시기: 세 번째 7일 (15일~21일)상태: '살덩어리'라는 뜻으로, 물집 형태가 응고되어 굳어지며 만지면 부드러운 살덩어리 형태 |
| 건타 Ghana | (鍵南, Ghana / 견 : 堅肉)시기: 네 번째 7일 (22일~28일)상태: '단단한 덩어리'라는 뜻으로, 굳어진 살덩어리가 더욱 단단해져서 형태 |
| 바라사하 Pasakha | (鉢羅奢羅, Pasakha / 지체 : 肢節)시기: 다섯 번째 7일 이후 (29일~출생)상태: '팔다리'라는 뜻으로, 이 단계에서 팔, 다리, 머리 등 인체의 완전한 지체(머리카락, 손발톱 등 포함)가 비로소 뚜렷하게 자라나며 태아의 형태 |
먼저의 다섯 가지 쌓임은 멸하고 곧 다시 다섯 가지 쌓임이 생한다. 이로부터 다섯 가지 쌓임의 생멸의 상을 관한다. 비록 먼저의 식이 멸한다 하여도 또한 다섯 가지 쌓임은 끊어 없어지는 상의 식이 아님을 안다. 가라라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또한 다섯 가지 쌓임은 이르지 않고 항상하지 않음을 안다. 先五陰滅卽更有五陰生。從是已來觀五陰生滅相,雖先識滅亦知五陰非斷滅相識,雖依止歌羅羅,亦知五陰不至不常。
이와 같이 처음 태에 드는 한 생각[一念]과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이 생멸하는 상과 가라라로부터 나아가 출생함과 뒤에 증장함과 나아가 죽는 때를 관하여, 이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이 생각마다 생멸하는 상을 관한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의 미세한 생멸의 상을 관찰하고 선택한다. 如是觀初入胎一念五受陰生滅相,從歌羅羅乃至出生,及後增長乃至死時,觀此五受陰念念生滅相,如是觀察選擇五受陰微細生滅相。
지세야, 이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의 미세한 생멸의 상이라는 것은 이른바 먼저의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이 멸하면 차례로 물(物)로서 태에 이르는 것이 없으며, 식이 처음으로 합할 때 다섯 가지 쌓임 즉 생멸이 있는 것이다. 世!是五受陰微細生滅相者,所謂先五受陰滅,次第無物有至胎,識初合時五陰卽有生滅,
가라라로 인한 다섯 가지 느낌이 쌓인 것을 임시로 이름하여 사람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지세야, 식은 의지하는 바가 없으면 능히 머물지 못하며 식의 의지하는 바는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 이것이다.因歌羅羅五受陰假名爲人。所以者何?持世!識無所依則不能住,識所依者五受陰是。
지세야, 또 무색계(無色界) 중의 여러 하늘[天]의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의 미세한 생멸의 상도 마땅히 이와 같다고 알아라. 持持世!又無色界中諸天,五受陰細微生滅相亦應如是知。
지세야, 이와 같이 미세한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이 생멸하는 상은 벽지불(辟支佛)의 지혜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니, 하물며 성문(聲聞)의 지혜에 있어서이겠느냐? 持世!如是細微五受陰生滅相,辟支佛智慧所不能及,何況聲聞智慧?
오직 모든 부처님 여래만이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을 잘 아시고, 처음 태에 든 미세한 생멸의 상으로부터 무색천(無色天)의 여러 가지 쌓임이 생각마다 생멸하는 것에 미친다. 惟諸佛如來善知五受陰,從初入胎細微生滅相,及無色天諸陰念念生滅,
이른바 일체의 지혜와 일체의 세간을 뛰어넘은 지혜인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 부처님 지혜의 경계에 이른다. 이 사람이 비록 이와 같이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의 미세한 상을 관찰하고 선택한다 하여도, 처음 태에 든 것으로부터 나아가 무색천까지, 또한 모든 부처님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다 알 수는 없다.所謂一切智慧,出一切世閒智慧。菩薩摩訶薩得無生法忍,至佛慧境界,是人雖如是觀察選擇五受陰細微相,從初入胎乃至無色天,亦不能究盡如諸佛所知。
지세야,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는 남을 따르는 지혜가 없으며, 자연히 모든 지혜와 방편을 얻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 持世!諸佛如來無有隨他智慧,自然得一切智慧方便,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은 걸림이 없는 지혜로 일체의 법 가운데서 결정적인 지혜를 얻었으며, 일체의 법 중에서 자재한 힘을 얻으셨다. 諸佛智慧無所不達,諸佛無㝵智慧,於一切法中,得決定慧,於一切法中得自在力。
무슨 까닭인가? 무량하고 무수한 천만억(千萬億)의 아승기겁 동안 깊은 법을 행하셨기 때문이다.何以故?於無量無數千萬億阿僧祇劫行於深法故。
지세야, 모든 범부는 이와 같은 방편으로 다섯 가지 느낌이 쌓인 것을 관할 수가 없다. 하물며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의 미세한 생멸의 상에 있어서이겠느냐. 무슨 까닭인가? 持世!一切凡夫不能如是方便觀五受陰,何況觀五受陰細微生滅相?何以故?
모든 범부의 사람은 다섯 가지 느낌이 쌓인 것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며, 범부는 취(取:受)를 모르며, 느낌의 쌓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諸凡夫人不能知五受陰如實,凡夫不知取,不知受陰。
지세야, 무엇을 말하여 취(取)라고 하는가?
취란 나의 취[我取]와 중생의 취[衆生取]와 생각의 취[見取]와 계의 취[戒取]와 다섯 가지 쌓임의 취[五陰取]와 열여덟 가지 성품[十八性:18界]의 취와 열두 가지 인연의 취를 이른다. 이것을 일러 취라고 한다. 持世!何謂爲取?取名我取、衆生取、見取、戒取、五陰取、十八性取、十二因緣取,是名爲取。
나아가 소유(所有)의 법과 혹은 안, 혹은 밖의 이른바
①탐욕의 취[欲取; 물질 욕망에 대한 집착]와
②존재의 취[有取/見取]와
③보고 듣고 깨닫고 인식하는 취(戒禁取)와
④나와 내 것의 취(我語取;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乃至所有法,若內若外,所謂欲取,有取,見聞覺識取,我我所取。
지세야, 범부는 이 허망한 취를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전도된 인연으로 여러 가지 법을 취한다. 持世!凡夫於此虛妄取不知不見,顚倒因緣而取諸法,
이 사람은 취에 얽매이고 무명(無明)의 인연으로 여러 가지 행(行)을 취하며, 여러 가지 행의 인연으로 식(識)을 취하며, 是人爲取所繫,無明因緣取諸行,諸行因緣取識,
식의 인연으로 명색(名色)을 취하며, 명색의 거친 상[麤相]에 중생은 물들고 집착하여 돌아간다. 識因緣取名色,名色麤相衆生染著歸趣。
이른바 색은 색의 화합으로 색에 얽매이는 것을 취하고, 및 네 가지 색이 없는 쌓임과 느낌과 생각과 행과 식을 취하고 분별해서 이름[名]을 삼은 것이다. 所謂色取色合色縛,及取四無色陰,受想行識分別爲名。
지세야, 만약 모든 부처님이 없으면 중생은 곧 아는 것이 없고 보는 것이 없어 바르게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을 관할 수가 없다. 모든 부처님은 세간에 나와 중생이 의지하는 색을 깨뜨리고, 의지하는 느낌과 생각과 행과 식을 깨뜨리며, 화합한 하나의 상까지도 깨뜨리는 까닭에 모든 부처님 여래는 이와 같이 분별하여 설하신다.持世!若無諸佛,衆生則無所知無所見,不能正觀五受陰。諸佛出於世閒,壞衆生依止色,壞依止受想行識,壞和合一相故。諸佛如來作如是分別說:,
‘너희들이 의지하는 곳과 돌아가는 곳, 이를 색이라 한다. 이 색은 다만 네 가지 요소[四大:地ㆍ水ㆍ火ㆍ風]로 화합된 것이다. ‘汝等所依所歸,是名爲色,是色但以四大和合
느낌과 생각과 행과 식은 다만 명자(名字)만 있을 뿐이다. 명색의 상을 성취하는 까닭에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이라고 설한다. 너희들 중생은 이 굳고 튼튼하지 않은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에 탐착하여 돌아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受想行識但有名字,名色相成就故說五受陰;汝等衆生莫貪歸此不牢堅五受陰。’
지세야, 여래는 무슨 까닭으로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을 설하시는가? 持世!如來何故說五受陰?
지세야, 이 범부의 사람은 전도됨으로부터 생하여 무명의 그물에 들고 분주히 뛰어서 오가는데 어디 돌아갈 곳이 있어서이겠느냐.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의 상을 탐하고 받아서 이러한 생각을 한다.
‘나는 이에 의지하여 마땅히 즐거움을 얻으리라.’持世!是凡夫人從顚倒生入無明網,馳走往來何所歸趣?貪受五受陰相,作是念:‘我依止此當以得樂。
이 사람은 이 즐거움의 생각으로써 다섯 가지 쌓임에 탐하여 돌아간다. 괴로움의 생각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생각으로써 다섯 가지 쌓임에 탐하여 돌아간다. 범부의 사람이 돌아가는 곳과 의지하는 곳, 이를 다섯 가지 쌓임(5온)이라고 한다.’是人以是樂想貪歸五陰,以苦想以不苦不樂想貪歸五陰。凡夫人所歸所依止處,是名五陰。
지세야, 모든 범부의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눈이 멀어 다섯 가지 쌓임이 곧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다섯 가지 쌓임이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를 알지 못하며, 다섯 가지 쌓임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는 까닭에 다섯 가지 쌓임을 탐하고 받는다. 持世!諸凡夫人從生以來,盲不知五陰爲是何等,不知五陰從何所來,不知五陰如實故,貪受五陰,
이러한 까닭에 설하여 느낌의 쌓임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받는 자 누가 있겠느냐. 이 중에 받는 자는 불가득(不可得)이다. 是故說名受陰。於此中誰有受者?此中受者不可得,
다만 전도됨과 탐착함과 분별함과 허망함과 스스로 얽매이는 것과 무명과 어리석음의 어둠 때문에 나를 취하고 내 것을 취하고 이것과 저것을 취한다. 이런 까닭에 느낌의 쌓임이 곧 다섯 가지 쌓임이라고 설한다. 但以顚倒貪著分別虛妄自縛無明癡闇故,取我取我所,取此彼,是故說受陰是五陰,
취함이 없는 것은 또한 결정된 상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지혜로운 자는 쌓임이 아닌 것은 곧 다섯 가지 느낌이 쌓인 것이며, 전도된 것의 쌓임은 곧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이며, 무명의 쌓임은 곧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이라고 안다. 無有取者亦無決定相。是故,智者知非陰是五受陰,顚倒陰是五受陰,無明陰是五受陰,
범부는 이 때문에 얽매여 다섯 가지 취(取)의 쌓임을 탐하여 돌아간다. 탐하여 돌아가기 때문에 어떠한 것들이 취인지, 어떠한 것들이 취(取)의 쌓임인지를 모른다. 다만 돌아가는바 다섯 가지 쌓임에 탐착하기 때문에 생사에 왕래하여, 이 다섯 가지 쌓임에 탐착하는 까닭에 여러 갈림길[諸趣; 6도]을 분주히 뛰어다닌다. 凡夫於此爲所繫縛,貪歸五取陰。以貪歸故不知何等是取?何等是取陰?但爲貪著所歸五陰,往來生死,貪著是五陰故馳走諸趣。
어떤 것들에게로 탐하여 돌아가는가?
보는 것에게로 탐하여 돌아가고, 듣는 것에 탐하여 돌아가며, 깨달은 것에게로 탐하여 돌아가며, 인식하는 것에게로 탐하여 돌아가며, 애(愛)에게로 탐하여 돌아가며, 무명에게로 탐하여 돌아간다. 貪歸何等?貪歸見、貪歸聞、貪歸覺、貪歸識、貪歸愛、貪歸無明。
이 여러 범부는 애의 결박에 묶여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을 탐애(貪愛)하며, 여러 가지 번뇌[蓋]에 가려져서 무명의 어둠속에 든다. 우리가 지금 어느 곳으로 탐하여 돌아가고, 어느 곳에 얽매어 있는가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是諸凡夫爲愛縛所縛,貪愛五受陰,爲諸蓋所覆入無明闇冥,不知不覺我等今爲貪歸何處?繫縛何處?
알지 못하는 까닭에 지옥과 축생과 아귀와 인간과 하늘의 길을 왕래하며 생사에 얽매여 생사에 탐하여 돌아가면서 버리지 못하고 놓아버리지 못하며, 다섯 가지 쌓임을 끊지 못하고, 또 다섯 가지 쌓임의 여실한 상을 알지 못한다. 以不知故,往來地獄、畜生、餓鬼、人天道中,生死所縛,貪歸生死不放不捨,不斷五陰亦不能知五陰如實相。
여실하게 알지 못하는 까닭에 갖가지 고뇌로 인하여 해를 입고 허공의 지옥에 떨어져 나올 곳을 모른다. 이 사람은 나오는 길을 보지 못하는 까닭에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생사의 길 가운데서 모든 생사를 받고, 이런 까닭에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과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다. 不如實知故,爲種種苦惱所害,墮虛空獄不知出處。是人不見出道故,於無始生死道中受諸生死,是故不能得脫生老病死憂悲苦惱,
또 무량한 생사의 험한 길을 건널 수가 없다. 또한 모든 큰 괴로움의 무더기[苦聚]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도리어 다시 괴로움으로 돌아가 괴로움에 탐착하고 괴로움에 부림을 당한다. 어떠한 것을 괴로움이라 하는가?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이 그것이다. 생할 때는 다만 괴로움이 생기며 멸할 때는 다만 괴로움의 멸인 것이다.亦不得度無量生死險道,亦不得脫諸大苦聚,還復歸趣於苦,貪著於苦,爲苦所使。何等爲苦?五受陰是,生時但苦生,滅時但苦滅。
지세야, 나는 이 인연으로 해서 제자들을 위하여 법을 설한다. 너희들 비구는 마땅히 바르게 색의 쌓임을 관해야 한다. 또 마땅히 여실하게 색의 무상한 상을 알아야 한다. 持世!我以是因緣故,爲弟子說法。汝等比丘!當正觀色陰,亦當如實知色無常相。
너희들이 만약 색 가운데서 탐욕의 물듦이 있으면 마땅히 빨리 끊어 없애야 한다. 너희들은 마땅히 느낌과 생각과 행과 식을 바르게 관해야 한다. 또 마땅히 여실하게 느낌과 생각과 행과 식의 무상한 상을 알아야 한다. 汝等!若於色中有欲染者,當疾除斷;汝等當正觀受想行識,亦當如實知受想行識無常相,
만약 느낌과 생각과 행과 식 가운데서 탐욕의 물듦이 있으면 마땅히 빨리 끊어 없애야 한다. 탐욕의 물듦을 끊어 없애기 때문에 마음이 바른 해탈을 얻는 것이다.若於受想行識中有欲染者,當疾除斷,除斷欲染故心得正解脫。
지세야,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설하는 법의 뜻을 알고서 이와 같이 능히 설함과 같이 수행하면 마땅히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과 번뇌에서 벗어남을 얻는다. 持世!若有人知我所說法義如是,能如說修行,當得脫生老病死憂悲苦惱。
만약 사람이 설함과 같이 수행하지 못하면 색의 결박에 얽매이고 애(愛)의 결박에 얽매여 무명의 어둠속으로 들어가 다섯 가지 쌓임을 탐하여 취한다. 이 사람은 다섯 가지 쌓임을 탐하여 취하기 때문에 생사의 험한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若人不能如說修行,爲色縛所縛,爲愛繫所繫,入無明闇冥貪取五陰。是人貪取五陰故,不能得脫生死險道。
지세야, 이 뜻의 까닭으로 해서 내가 설하는 세간(世間)이 나와 다투어도 나는 세간과 다투지 않는다. 持世!以是義故,我說世閒與我諍,我不與世閒諍。
무엇을 세간이라 하는가? 이른바 다섯 가지 느낌이 쌓인 것을 탐착하는 자는 세간이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이 사람은 다섯 가지 쌓임에 탐하여 돌아가 다섯 가지 쌓임에 묶이고 다섯 가지 쌓임의 성품을 알지 못하여 다섯 가지 쌓임의 공(空)한 상을 알지 못하여서 나와 다툰다. 이 사람은 부처님의 말씀을 어기고 거슬러 부처님과 함께 다투는 까닭에 큰 쇠뇌(衰惱;지옥)에 떨어진다. 何等爲世閒?所謂貪著五受陰者,爲世閒所攝,是人貪歸五陰,爲五陰所縛。不知五陰性,不知五陰空相,而與我諍。是人違逆佛語,與佛共諍,故墮大衰惱。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나, 혹은 부처님이 멸도하신 뒤에, 능히 이와 같이 허망한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은 공하고 소유가 없으며, 전도됨과 무명의 어둠으로부터 일어났으며, 허망하고 거짓된 망상은 다만 범부를 속이며, 다섯 가지 쌓임이 아닌 것을 다섯 가지 쌓임을 닮았다고 관하면, 이와 같은 사람은 부처님과 다투지 않는다. 부처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않는 까닭에 지옥과 축생과 아귀의 고뇌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若有人於佛在世若佛滅後,能如是觀虛妄五受陰空無所有,從顚倒無明闇冥起,虛誑妄想但誑凡夫,非五陰似五陰,如是之人不與佛諍,不逆佛語故,得脫地獄、畜生、餓鬼、苦惱。
지세야, 모든 부처님은 사람과 다투지 않는다. 일체의 다툼을 끊는다. 이를 일러 부처라고 한다. 다만 중생을 위해 진실한 법을 연설하여 이렇게 말을 한다. 持世!諸佛不與人諍。斷一切諍訟名之爲佛,但爲衆生演說實法,作是言:‘
‘너희들이 이전에 취한 것은 모두 전도된 것이다. 일체의 중생은 전도된 힘 때문에 다섯 가지 쌓임에 탐하여 돌아가서 세간에 왕래한다.’ 汝等!先所取者皆是顚倒,一切衆生顚倒力故,貪歸五陰往來世閒。
이러한 사람은 다섯 가지 쌓임에 탐하여 돌아가서는 갖가지 삿된 소견을 일으키고 갖가지 명자(名字)에 탐하여 돌아가고, 갖가지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과 번뇌에 탐하여 돌아간다. 이런 사람은 갖가지 삿된 소견과 번뇌와 갖가지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과 번뇌 때문에 해를 입어 능히 구제함을 짓고 집을 짓고 돌아감을 짓고 나아가는 길을 짓는 일이 있을 수 없다.’是人貪歸五陰已,起種種邪見,貪歸種種名字,貪歸種種憂悲苦惱,是人爲種種邪見煩惱、種種憂悲苦惱之所殘害,無有能爲作救作舍作歸作趣,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구제할 수 있다. 범부는 마음이 작고 지혜가 적은 까닭에 다섯 가지 욕망[五欲]을 탐하여 좋아하고 너무 지나치게 다섯 가지 쌓임에 의지한다. 이 범부의 사람은 구제해 주는 자와 돌아가는 자와 의지하는 자와 일체의 고뇌를 벗어난 자와 함께 다툰다.唯佛能救。凡夫小心小智慧故貪嗜五欲,依止多過五陰,是凡夫人與救者歸者依者脫一切苦惱者,而共諍訟。
지세야, 나는 지금 손을 들어 그 다섯 가지 쌓임을 보는 자와 쌓임의 상을 보는 자와 다섯 가지 쌓임을 탐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곧 이 사람을 위하여 스승이 되지 않을 것이다. 持世!我今擧手其有見五陰者,見陰相者,貪五陰者,我則不與是人爲師,
이 사람은 또한 나의 제자가 아니다. 나를 따라서 출가한 것이 아니며, 나를 따라서 행하지 않으며, 나에게 귀의하지 않는다. 是人亦非我弟子,不隨我出家。不隨我行,不歸依我,
이 사람은 삿된 길에 들고 허망한 길에 들어서 진실하지 않은 것을 취한다. 이는 전도되어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며, 부처님께서 마땅함을 따라 설하시는 다섯 가지 쌓임을 알지 못하며, 부처님의 제일의(第一義)를 알지 못한다. 是人入於邪道,入虛妄道,取不實者,是爲顚倒不知佛意,不知佛隨宜說五陰,不知佛第一義,
이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며, 공양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아서 나는 이 사람의 출가를 아직 허락하지 않는다. 하물며 사람의 공양을 마땅히 받을 수 있음이겠는가. 是人不受佛教,不應受供養而受。是人我尚不聽出家,何況當得受人供養?
무슨 까닭인가? 이와 같은 사람은 곧 외도(外道)의 무리이다. 이른바 다섯 가지 쌓임의 상을 낳는 자이며, 다섯 가지 쌓임에 탐착하여 돌아가는 자이다.何以故?如是之人是外道徒黨,所謂生五陰相者,貪著歸趣五陰者。
지세야, 장차 오는 세상의 뒤의 5백 세[後五百世]에 법이 멸하려고 할 때, 나의 법 안에 출가한 많은 자는 이 다섯 가지 쌓임의 상을 낳는 자로서 결정적으로 다섯 가지 쌓임의 상(相)을 설하고 깊이 다섯 가지 쌓임에 집착하여 허망한 삿된 길에 들고, 持世!當來之世後五百歲法欲滅時,於我法中出家多是生五陰相者,決定說五陰相,深著五陰入虛妄邪道,
나의 법 안에서 출가함을 얻어서는 가사로 목을 두르고[袈裟繞咽] 늘 속인[白衣]의 집을 왕래하기를 즐긴다.於我法中而得出家,袈裟繞咽,常樂往來白衣居家,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외도와 다름이 없으며, 또 나의 법으로 해서 많은 무리의 사람에게 공경과 공양을 받는다.當知是人與外道無異,亦以我法多爲衆人恭敬供養。
지세야, 나는 설한다. 이 다섯 가지의 쌓임을 보는 자와 결정적으로 다섯 가지 쌓임을 설하는 자와 다섯 가지 쌓임을 탐착하는 자는 사람에게서 한 그릇의 물을 받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持世!我說是見五陰者,決定說五陰者,貪著五陰者,不聽受人一㮎之水。
무슨 까닭인가? 이 사람은 나의 법 가운데서, 나아가 유순하게 따르는 법인[柔順法忍]이 없고, 이 사람은 나의 법을 어겨 거슬러서 거룩한 행을 등지고 버리기 때문이다.所以者何?是人於我法中,乃至無有柔順法忍,是人違逆我法,背捨聖行。
지세야, 이런 까닭에 보살마하살은 뒤의 나쁜 세상에서 마땅히 이와 같이 큰 서원(誓願)을 내어야 한다.持世!是故菩薩摩訶薩於後惡世,應如是發大誓願,
‘나는 이와 같이 깊고 깊은 경전을 마땅히 함께 지켜 지니고, 또 중생에게 다섯 가지 쌓임에 대한 견해[五陰見]를 끊게 하는 까닭에 이를 위하여 설법할 것이다.’於我如是甚深經典當共護持,亦斷衆生五陰見故,而爲說法。
지세야, 나는 이 경 중에서 모든 쌓임[陰]의 상을 깨뜨리고 탐착을 떠난 쌓임의 상을 설한다. 이때 많은 재가(在家)와 출가(出家)가 있어 이와 같은 경을 듣고서 다툼을 일으켜 진실한 상(相)을 낳지 않는다. 보살마하살은 이 가운데서 마땅히 큰 서원을 내야 한다.持世,我是經中說破一切陰相、離貪著陰相。爾時,多有在家出家,聞如是等經,起於諍訟不生實相。菩薩摩訶薩,於此中應發大誓願:‘
‘우리들은 뒤의 나쁜 세상에서 다섯 가지 쌓임에 탐착하는 삿된 소견을 가진 중생에게 큰 이익을 짓고자 한다. 이른바 탐착하여 다섯 가지 쌓임을 보는 중생을 건지고 해탈하게 하는 마땅함에 따른 방편의 법으로 이익되게 하리라.’我等於後惡世貪著五陰邪見衆生,作大利益,所謂度脫貪著見五陰衆生,隨宜方便以法利益。
이런 까닭에 지세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잘 알고 또 모든 법의 글귀[長句]를 잘 분별하는 일을 얻고자 하며, 염력(念力)을 얻고자 하며, 몸을 변하여 끊이지 않는 생각[念]을 성취하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면, ’是故,持世!菩薩摩訶薩,若欲得善知諸法實相,亦善分別諸法章句,欲得念力,欲得轉身成就不斷念,乃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마땅히 항상 이 다섯 가지 쌓임의 무상(無常)한 상과 괴로운 상과 내가 없는 상과 허망한 상과 튼튼하고 굳지 않은 상과 필경엔 공한 상을 본래부터 낳지 않는 상이라고 관해야 한다. 應常觀是五陰無常相、苦相、無我相、虛妄相、不堅牢相、畢竟空相、從本已來不生相。
항상 바르게 관할 때,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 안에 있는 탐욕의 물듦[欲染:번뇌]은 곧 능히 끊어 없어지고, 또 이와 같은 깊은 법 안에 있는 방편을 얻는다.常正觀時,五受陰中,所有欲染則能除斷,亦得如是等深法中方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