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시험(유혹) 이야기입니다. 그런 유혹을 만약 내가 사탄으로부터 받는다면 얼씨구나 덥석 잡고,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사순 첫 주일을 맞이하면서 이 복음을 보는 이유는 고난의 시작은 나를 흔들리게 하는 시험, 그 유혹이다. 이런 말이죠. 이 뿌리치기 힘든 세상적 인간적 유혹을 똑바로 직시하고 이것과의 한판 승부를 시작하는 것이 바로 사순절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요르단 강가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다른 사람들처럼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홀로 광야에 남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세례는 큰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겁니다. 무엇인가 자신을 정리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시간이 40일이었는지 그것은 알 길이 없고 그것은 상징적 숫자입니다.
그것보다는 이 이야기가 성경의 어는 부분에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보시다시피 이 이야기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3년간의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에 위치합니다. 왜 그럴까.
오늘은 3월 두 번째 주일입니다. 새 학기가 이미 시작되었고, 또 새로 입학도 했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시작을 하면서 학생들은 어떤 마음가짐을 갖습니까.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계획을 세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절대로 인터넷게임하지 말아야지. 늦잠 자지 말아야지. 우리가 새해를 맞이할 때 늘 하는 다짐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부터는 담배를 끊어야지. 매일 운동을 해야지. 결혼을 앞두고도 어떻게 살아야지. 또 직장생활도 마찬가지 시작하기 전에 다짐 같은 것을 합니다.
이 광야에서의 유혹이야기도 그런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특히 사순절을 시작하면서는 더욱 그런 식으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이냐. 예수는 세례를 받고 직감적으로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것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런 그의 통찰은 세례 후 하느님의 아들이라 선언하는 하늘로부터의 음성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문제는 그러면서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떤 종류의 지도자가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갈 길을 결정하고 세우고 다짐하고 결심하는 그 피나는 과정을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수요기도 오신 분들은 들었던 예화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호스피스 봉사 때 아주 성미가 고약한 환우 이야기입니다. 50대 중반이었고 저처럼 눈썹이 올라간 사람이었는데, 위암 말기 환자였고 죽음을 정리하러 들어왔다기보다는 간병할 가족이 없어서 들어온 사람입니다. 부인이 있기는 있는데 정이 이미 떨어진 상태라 직장을 핑계대고 호스피스로 보냈습니다.
그 사람이 어느 날 아침 프로를 보다가 산삼을 캔 이야기를 봅니다. 100년이 훨씬 넘은 1억원을 호가하는 산삼인데 심마니가 나와서 하는 말이 이거 먹으면 죽었던 사람도 벌떡 일어난다, 그 이야기를 이 환자가 듣습니다. 당연히 심마니는 그렇게 얘기하지 산삼이나 도라지나 그거 그거다 얘기하겠습니까. 하여간 그는 부인에게 나 산삼 먹으면 일어날 것 같다. 좀 사달라. 떼를 씁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환자라면 가족에게 산삼 먹겠다고 얘기하겠습니까. 또 반대로 가족이라면 환자에게 정신 차리라고 말하겠습니까. 물론 이 문제에 해답이 있을 리는 없고, 사람마다 또 그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문제는 그 산삼을 사주거나 말거나에 있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는 사주는 게 맞고, 누구에게는 안 사주는 게 맞습니다. 산삼은 그저 이 세상적으로 꽤나 비싸고 귀한 물질일 뿐입니다.
그것을 먹고 죽을 사람이 벌떡 일어날 리는 만무합니다. 그런데도 사달라는 것은 아직 죽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내 아픈 거 니들 탓이라는 것이죠. 분노로 억울함으로 속이 꼬일대로 꼬인 상태입니다. 그거 먹고 일어날 수 없다는 거 다 압니다. 그래도 사내라는 거죠. 고약한 마음입니다. 일종의 분풀이입니다.
부인은 집 팔고 대출 받아서 일억도 훨씬 넘는 그 산삼을 사주었습니다. 살리려고 사준 겁니까? 정말 그거 먹고 살아난다면 안 사주죠. 하루도 보기 싫은 사람인데. 그럼에도 사주는 것은 나의 의무감이나 죄책감과 타협하는 행위입니다. 가는 그 사람한테 나 할 만큼 했다. 그만큼 했으면 됐다. 백기를 들어야 하는데 그럴듯한 이유나 최소한의 면피하려는 행위. 체면과 세상 사람들의 눈과 힘과 타협하는 것이죠. 조금 똑똑한 사람들은 이것을 명분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어떤 큰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거나 또는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능력의 차이일 뿐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그 일을 잘 해결할 것이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잘 해결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해결하고 해결하지 못하고를 떠나서, 내가 그 일로 인해 내 삶의 실체를 보았는가. 나 자신을 찾았는가. 믿는 우리들은 이를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하느님을 만났는가.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큰일들은 바로 이런 것들을 보게 해줍니다. 가까운 가족의 죽음, 큰병, 사건, 사고 등 이런 큰일들을 당할 때마다 문득 느닷없이 초라하고 아무 것도 아닌 내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고 또 나의 삶을 직면하게 됩니다. 꼭 그것이 큰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종종 나 자신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높은 산에 올랐을 때 불과 몇 시간 전에 아등바등하며 내가 속해있던 저 세상을 내려다볼 때 문득 그동안 내가 잊고 살았던 내 삶과 맞닥뜨립니다.
술 잔뜩 취해서 자다가 새벽에 깨서 화장실 갔다 오고 물마시고 우두커니 앉아 멍한 가운데 불현듯 초라한 내 삶과 맞닥뜨립니다. 그럴 때 그런 시간이 영 낯설고 익숙치 않다보니 어색해서 체머리 흔들면서 빠져나오려 합니다. 다 그런 거지 뭐. 사는 게 별 거 있나. 에이 모르겄다. 적당히 넘어가고 타협하면서 구차스런 현재의 삶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기엔 우리 인생이 너무 억울합니다.
좋은 영화 감명 깊게 보고 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오랫동안 앉아서 곱씹으며 삭히고 싶은데, 다음 회분 사람들 들어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납니다. 우리 생활이 그렇죠? 쫓기듯 삽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영화 끝나고 음악과 함께 스탭이름들 나오고 할 때 그거 잠시 못 기다리고 서둘러서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그렇게들 삽니다. 분망스럽게 쫓고 쫓기듯 삽니다.
저는 젊었을 때 심한 위염과 위궤양으로 고생하다가 어느 날 병원에서 암선고를 받았습니다. 서른아홉살 때입니다. 의사에게 그 말을 듣고 병원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무릎이 꺾였습니다.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서 병원 정원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서 저 아래 멀리 긴 차 행렬을 보는데 아주 낯선 딴 세상을 보는 느낌입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바쁘게 살던 내 삶터인데 말이죠.
집에 가서 뭐라고 얘기하나. 아직 아이들 어린데.... 앞으로 어쩌나.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왜 내가 걸리나? 별 생각이 다 납니다. 대단한 혼란과 좌절과 분노와 어이없음. 반면에 여태까지 뭘 대단한 일 한답시고 이렇게 살았나. 이제는 다만 얼마를 살더라도 벗어나자. 사업하면서 얽기고 설킨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그런 일들. 그만 두고 싶어도 도저히 그만 둘 수 없는 그런 골치 아픈 상황. 다 끊고 빠져나올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정말 시골에 내려가서 얼마를 살든 여행도 다니고, 텃밭도 가꾸고, 봉사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야지. 그래서 수술 받고 몸 추스르기도 전에 바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다 버리고 다 끊고 다 팔고 시골로 내려와서 지금까지 이렇게 살고 있네요.
살면서 겪는 큰일, 이로 인해서 대단한 혼돈과 좌절과 분노가 입니다. 바로 사탄이 벌이는 시험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를 뒤집으면 새로운 눈이 떠지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살면서 문득, 느닷없이 내 삶과 직면하든, 감명 깊은 영화를 보고 인생의 의미를 언뜻 깨닫든, 아니면 감당하기 힘든 큰일을 당하든 내 발가벗겨진 적나라한 삶과 직면하게 됩니다. 그랬을 때 그것과 타협하면 안 된다는 것이 바로 오늘의 복음입니다.
나라고 별 수 있나. 다 그런 거지 뭐.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거지. 이 정도 하면 내 할 바를 다 한 거 아닌가. 체념, 포기, 기껏해야 타협, 체면 차리기, 남 보여주기. 이게 바로 마귀의 덫에 걸린 겁니다. 그래서 사탄과 거래합니다. 마귀, 사탄의 목적은 우리를 죽이는데 있지 않다고 말씀드렸죠? 우리를 굴복시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면서 강한 성령체험을 합니다. 이 때 체머리를 흔들면서, 영화 끝나기도 전에 나가는 것과 같이 서둘러 세상에 복귀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광야에 홀로 남아, 한 동안 금식하면서, 내가 지도자가 되면 절대로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게 하소서. 어떤 힘에도 굴복하여 스스로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뒤로 물러나는 명분을 만들지 않게 하소서.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결심합니다. 이렇게 사탄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정말로 3년도 안 되는 짧은 공생애를 통해서 이 다짐을 삶으로 보여주었고, 죽음으로 지켰습니다.
여러분, 이제 사순절인데요. 이 기간 동안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정말 복잡하고 난해하고 녹녹치 않은 이 세상을 내 삶으로 살아내면서, 신앙적으로 어떤 다짐을 하고, 어떤 결심을 해야 하는가, 내가 지금 처한 이 상황에 혹시 체념하거나 포기하거나 타협하는 것은 아닌가. 광야까지 가서 금식기도는 못할망정, 진지하게 기도하고 묵상하는 그런 시간 꼭 가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