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부활 밤까지가 성주간의 핵심입니다. 오늘 오전에 성유축복식과 성직자 서품서약갱신이 있었고, 그리고 지금 성체제정과 세족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구주수난일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날로서, 그 수난예식인 장엄기도와 예수님이 처형된 십자가를 경배하는 예식이 있습니다.
마지막 토요일 밤에는 죽음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에서 새불 축복식과 그 불로 시작되는 부활초 축복식, 또 우리의 믿음을 갱신하는 세례언약갱신, 그리고 부활밤 성찬식이 거행됩니다.
제가 처음에 성공회에 와서 성주간 전례를 겪으면서, (조그만 책자인 공도문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참 복잡하고 어렵지만, 그 전례가 주는 경건함과 소소한 의미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전례가 모두 성서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에 대해서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정말 멋있었습니다.
제가 다른 교단의 전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다른 교단의 전례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말하기를 우리 성공회 전례가 가장 아름답고 성서적이고 신앙의 신비함을 잘 드러낸다고 입을 모읍니다. 그 아름다운 전례의 핵심이 바로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주간 전례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성목요일 전례인 성체제정과 세족례를 거행하면서 지금 여기서 우리들이 주님의 현존하심과 그 임재하심을 체험하는 신앙의 신비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우선 성체제정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매주 봉행하는 감사성찬례도, 오늘 바로 예수님이 행하신 성체제정을 바탕으로 한 제사 형태의 대표적 전례입니다.
제사란 것은 내가 접촉할 수 없는 세계와 연결시켜주는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서로 연결시켜줄 수 있는 같은 세계라면 그건 제사가 아니라 잔치이고, 행사이고 모임입니다. 하지만 나와 돌아가신 조상이나 하느님은 같은 곳에 있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것을 연결시켜주는 무언가가 필요한데 바로 그것이 제사라는 예식입니다.
때문에 그 예식에 나와 그리고 나와 다른 세상에 있는 하느님이나 조상과 연결을 원하는 간절한 마음과 원을 그 예식에 담아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단지 하나의 기념식이 되고 맙니다.
또 반면에 우리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예식규범에 따라 전례를 행하지만 그 절차에 너무 매이다보면 우리의 하느님을 향한 그 마음이 훼손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예식에 충실하되 그 예식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하느님께 향하는 도구로써 행해져야 합니다.
특히 이 성주간 예식은, 그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행하는 성체제정 예식은, 사순절이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이마에 재 바르는 예식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예식입니다.
즉,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바름 예식과 오늘 사순절을 끝내는 성체제정 예식은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 신앙의 신비함을 체험하고, 공동체의식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니만큼 함께 해야 합니다.
혼자 재 만들어서 이마에 찍어 바르면 안 되고, 혼자 발 닦고 포도주 혼자 마시면 별 의미가 없다는 소리입니다.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이마에 재를 바르며 우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반드시 돌아갈 것임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다시 한 번 다잡는 것이고, 또 서로 발을 닦아주고 거룩한 식사를 함께 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때 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2천년 전 유월절 전날 밤, 그러니까 잡혀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불러 모아 한 자리에 앉혀놓고 발도 닦아주고,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며 행하였던 이 예식의 시작.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에 들어가 직접 체험하고, 어떻게 나의 현재적 사건으로 만드느냐는 것이 관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성목요일 밤에 우리들이 모여서 세족례도 하고, 성체제정을 재현하는 것은, 단지 2천년 전에 예루살렘 한 다락방에서 이루어졌던 그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서 우리들의 현재적 사건으로 우리가 체험하기 위해서입니다.(아남네시스) 오늘 여기서 현재적 사건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오늘 여기서 이루어져야 합니까. 발을 닦아주는 것. 빵 맛, 포도주 맛을 체험하기 위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럼, 그 너머에 있는 예수님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는 예수님의 그 마음과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라.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서로 높이 섬기라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낮은 자세로 엎드려서 상대방의 발을 닦아주는 것. 또 거꾸로 내 발을 누구에게 보이기도 좀 그런데, 하물며 닦으라고 내놓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베드로가 제 발만은 안 된다고 했다가 야단맞지 않습니까.
하여간 이 발씻음 예식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께서는 가장 어렵고 더럽고 힘든 일을, 또 그런 사람을 섬기는 일을 내가 그랬듯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반대로 베드로처럼 그런 힘들고 어려운 일을 숨기지 말고 주님 앞에, 공동체 앞에 꺼내놓으라는 얘기입니다. 그거 안 내놓으면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이가 된다.
내 형제의, 우리 공동체의, 내 이웃의 아픈 곳을, 어려운 곳을, 힘든 곳을 찾아가서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닦아주고 안아주고 풀어주라는 것이죠. 또 나의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 문제는 내 형제들에게 나의 공동체에 나의 이웃에게 꺼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새 계명으로 연결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내 제자인 너희들의 차이점이다.
오늘 세족례, 그리고 성체제정의 근저에는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이 있고, 즉 하느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다는 것이고, 우리들에게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파하라고 간곡하게 명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것은 죽으러 가기 전날 밤에 하셨다는 것이죠.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들에게 전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공식적인 유언입니다. 그 분의 제자로서, 자녀로서 유언을 듣고 따르지 않는다면, 그거 짐짐해서 어떻게 살죠?
우리는 그 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뭐 주일성수, 십일조, 구역기도, 전도 이런 것은 몰라도, 우리의 주님이신 그 분의 유언은 따라야 되지 않겠느냐. 우리의 이웃을 섬긴다는 것. 우리의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실천하고, 나의 생활로, 나의 삶으로 나타내는 그러한 제자 된 도리를 오늘, 이 마지막 날 밤에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