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요한이 전하는 복음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대상이 헬라 지역(그리스)의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서입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그리스도 이방 지역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헬라인들(그리스인들)을 등장시킵니다.
이 헬라인들은 모두 철학자들일 정도로, 철학은 당시 헬라 지역에 대 유행이었습니다. 철학은 그들의 생활입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로가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해서 그들에게 새로운 신을 당신들에게 소개하겠다고 하자 많은 헬라인들이 그것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물론 바울로의 전도는 실패합니다만, 이렇게 헬라인들은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종교와 새로운 진리를 찾아서 다니기로 유명했습니다. 따라서 헬라인들이 유대인의 최대 종교적 절기인 유월절에 맞추어 유대지역을 방문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입니다.
헬라인들은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을 다 듣고 왔습니다. 그 유명한 성전을 뒤엎어버린 사건은 당시 이방인들에게까지 다 전해졌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성전은 여러 단계로 구분되어져 있는데, 이방인들은 첫 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뜰에는 이스라엘 여인들이 들어갔고, 그 다음 뜰에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들어갔고, 그 다음 마지막 뜰에 제단과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제사를 드리는 사제들만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인 헬라인들은 첫 번째 뜰까지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바로 이 첫 번째 뜰인 이방인들의 뜰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돈을 바꾸고 비둘기와 양을 파는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아마 이때 이방인들인 헬라인들은 예수님의 성전정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좀 더 알고자 오늘 따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필립보에게 부탁을 했는가. 분명히는 알 수 없지만 필립보(말의 친구, 말을 좋아하는 사람)라는 이름이 헬라어인 것으로 보아서, 아마 헬라인들과 깊은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이 사건은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으로 흩어질 징조로 보시면 됩니다. 당시 세상의 중심은 둘이었는데, 하나는 힘의 중심인 로마였고, 또 다른 하나는 정신과 사상의 중심인 바로 헬라(그리스)의 아테네였습니다.
부탁을 받은 필립보는 좀 더 예수와 가까운 안드레아에게 전했고, 안드레아는 그들을 예수님께로 안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거절하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는 절대 자기를 찾는 사람에게 냉대하지 않습니다. 예수께 다가가는 문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이렇게 열려 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서 온 것입니다. “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곳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갔다.”
다니엘서는 여러분께서 다 아시다시피 대표적인 묵시문학적 예언서입니다. 신약에 묵시록이 있다면, 구약에는 다니엘서가 있는 것이죠. 다니엘서의 기자는 그 당시 열강들인 앗시리아, 바벨론, 메대, 바싸 제국들을 묘사하는데, 그것들이 하도 잔인하고 야만적이어서 짐승들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열강들에 둘러싸여 약소국으로 살아가는 유대나라로서는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줄 누군가를 대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는데, 그를 동물이 아닌 사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다니엘의 뜻은 무섭고 야만적인 시대가 끝나고 평화적이고 인도적인 시대가 올 것을 기대하면서, 그것을 이루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우리와 똑같은 모습의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나라는 작고 국력이 너무 약하니 어떻게 그런 황금시대가 오겠느냐. 그래서 만군의 주 하느님이 직접 역사에 간섭해서 그가 기름 부어 세운 자, 즉 메시아(헬라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아들’입니다. 유대 민족은 어떤 곤란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그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이런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계를 정복하고 평화를 가져다줄 군림하는 정복자 왕으로서의 ‘사람의 아들’을 생각했고, 반대로 예수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택하는 고난의 ‘사람의 아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첫 마디인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라는 선언에는 크게 기뻐했을 것이나, 그 뒤에 계속되는 말씀에는 놀라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제패와 승리를 기대하는 그들에게 희생과 죽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이해하기는 꽤 힘들었겠죠.
‘밀알 한 알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듯이 예수의 영광도 정복이 아니라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말은 아주 전통적인 말로 바울로도 이미 사용했던 말입니다. (바울로의 서신들은 이 요한복음이 쓰인 시기보다 무려 반세기 전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6절을 보면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고 말합니다. 당시 많이 쓰던 표현 같은데, 요한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씨 한 알’과 ‘많은 열매’를 대조한데 있습니다. 즉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가 영광 받는 것은 어떤 신비한 과정에서 예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사건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대신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신 죽으므로, 또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
생명이란 것의 특수한 성격은 인간의 소원과는 반대로 그것에 집착하면 잃어버리고 그것에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살 수 있습니다. 다 알지만 결코 실천하기 힘든 것이기에 마치 새로운 인생관처럼 보입니다. 우리 모두는 영광을 정복, 권세, 통치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광을 희생, 죽음으로 대변되는 십자가로 보았습니다.
예수는 ‘생명은, 삶은 죽음에서 나오며, 생명을 버림으로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놀랄만한 것은 예수님의 이 역설 같은 말씀이 상식적인 진리라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여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26절에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누가 내 참 제자인가’라는 대답으로서 ‘나를 따르는 자’라고 하고, 그 따르는 자의 자세로서 이 말을 파악하고 있는데, 요한은 그 의미를 바꾸어서 ‘누가 나를 따를 것인가’란 질문으로서 ‘나를 섬기는 자’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은 제자의 책무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예수에게 베푸는 영광에 참여할 상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 영광은 희생과 죽음과 고난이라는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이 구절은 바로 십자가야말로 우리 인간 삶의 구원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의 상징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여러분, 내가 대신 죽어야 한다는 것, 희생해야 한다는 것,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면서도 또한 영광의 길입니다. 이것은 나를 버리는, 나를 비우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정말 힘든 것 같습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리고 수없이 많은 선례들을 보아왔으면서도 저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함이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이 경쟁사회에서, 눈 뜨고도 코 베이는 이 시대에 나 자신도 아니고, 내 가족도 아니고, 나도 모르는 내 이웃을 위해서 작게는 섬기고, 크게는 죽는, 그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이 멍청하게 사는 것이냐고 이 시대는 말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렇게 해야 모두가 살고, 그것이 영광의 길이라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이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묵상해보시고, 또 그것을 몸소 자신의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으로, 내 생활로 받아들이는 그런 한 주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