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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비타민

부활6주일 설교(네 이웃을 사랑하라)

작성자전노아|작성시간15.05.09|조회수65 목록 댓글 0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이는 예수님의 최대 지상명령입니다. 이 말을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듣다보니까,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또 이것처럼 지키기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오늘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함께 나누어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당시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경구였습니다. 이는 당시 그들의 경전인 모세5경(토라) 중에서 법전이라고 불리는 레위기 19:18에 나오는 구약에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 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을 아끼는 것인지 그 방법이 세세하게 나옵니다.

 

예를 들면,

 

이 법 조항들에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바로 이웃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하느님의 사랑이 그 바닥에 깔려있다는 것입니다. 문자대로의 법 조항은 이미 낡아서 우리가 이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그리 많지 않지만, 그 시대 그 사회에서 그 법 조항들이 말하는 힘없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이 ‘이웃사랑’을 오늘 말씀하셨는데, 왜 그 당시 사회 지도층인 대사제들이나 바리사이인들은 그토록 예수를 미워하고 잡아 죽이려고 했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서로 사랑하라고 한 것이 그리 죽일 일인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이건 그 위는(지도층, 기득권층)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대로가 좋은 겁니다. 그래서 말 잘 듣는 사람을 좋아하고요, 제도나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이에 거스르는 사람은 적으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변화는 폭력(의거나 혁명)에 의해서만 되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지도층은 그 폭력을 독점하고 지배했습니다. 폭력으로 국민들을 다스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공포정치라고 하지요. 경찰들이 길거리에 깔리고 차벽을 쌓고. 그런데 글쎄 예수는 폭력의 정반대인 사랑으로 변화를 꾀했고, 결과적으로 그 변화는 폭력보다 더 강력했습니다. 사랑은 그 어떤 폭력보다도 당시 사회를 더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당시 사회 지도층인 대사제들이나 바리사인들은 예수의 그 사랑을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사회의 대변혁을 싫어했던 겁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입지를 위태롭게 하는 예수의 사랑운동을 폭력으로 억압했던 것이죠.

 

그럼, 그렇게 사회를 뒤집어 엎어놓을 정도의 변화를 가져온 강력한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한 번 살펴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말하는 이웃이 도대체 누구를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인지 알아보고 또 예수님이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그 사랑의 방법인 ‘서로’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웃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볼 때, 바리사인들은 “교리도 제대로 못 지키는 저 사람들도 내 이웃입니까”라는 투의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이웃이란 모든 사람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사마리아인 비유에서도 나오듯이 비단 내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늘 마주치는 사람들도 ‘사랑’이라는 것을 하는지 안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생면부지의 사람까지 이미 사랑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다. 차라리 ‘노력하면서 살아라’, ‘남을 도와주어라’, ‘헌금을 많이 내라’와 같은 것들은 수행 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광범위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말씀하셨을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율법학자가 이웃이 정확히 누구냐고 물었던 것입니다.(루가 10장) 그 율법학자는 그 시대 법조인답게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는 문제가 생길 때 참고할 수 있는 법률적인 정확한 정의를 원했던 것이죠. (이웃이란 반경 3킬로미터 안에 사는 사람) 그러나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하셨고(루가 10:25-37), 이 이야기의 핵심은 나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이웃이라는 조금은 구체적인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왜 하필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을 예로 들으셨는가. 여기에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알다시피 유대인들이 역사적으로 결코 사랑할 수 없는 민족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웃이고, 또 그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의 이웃이라는 것이죠. 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 네 이웃이다. 네팔 국민들이 대지진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으면 그들이 바로 내 이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보이는 이웃인 사마리아인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진정 사랑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말하는 이웃은 모든 사람이면서,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 모두 내 이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웃은 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하는 대상입니다.

 

두 번째 사랑입니다. 모든 능력 가운데 사랑은 가장 강력하면서 동시에 가장 무력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최후이자 최고의 난공불락 요새를 정복할 수 있으므로 가장 강력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목숨까지 버리는 것을 수없이 보지 않습니까. 반면에 상대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가장 무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나누는 그 행위 자체가 기적입니다. 사랑하는 서로의 마음이 동하게 하는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사랑은 바로 하느님시이다.’(요한1 4:8)라고 말해도 맞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무턱대고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로맨틱한 이상주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은 최후의 희망이거나 궁극적인 진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사랑은 감정이라기보다는 의지적 행위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하신 것은 그들을 편안하게 감정적 느낌으로 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이웃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노력하는 자세로 그들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관점에서 보면 이웃을 반드시 좋아하지 않더라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자, 모든 것이 다 잘 풀릴 거요.”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마태오 23:33)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을 다른 방법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서로’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다의 우리 옛말 고어의 뜻은 ‘생각하다’라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서로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역지사지’ - ‘입장 바꿔 생각하기’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진해서 내가 먼저, 몸소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이럴 때 둘은 통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다는 뜻도 됩니다.

 

또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나의 하느님이 있고, 당신 안에 당신 하느님이 있는데,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내 안의 하느님이 당신 안의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동학사상과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이다) ‘서로’ 존중해주는 것이죠.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짝사랑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서로’ 통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어보았습니다. 이 한 가지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넘치고 벅찹니다. 주변에 혹시 우리들의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한 곳이 없는지 살펴보고, 그들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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