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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네비우스전도방법

작성자정정일|작성시간08.06.04|조회수399 목록 댓글 1


네비우스 선교방법과 교회성장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한국 교회성장에 미친 영향 -김영재


들어가는 말

한 사건의 원인은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그 사건이 다른 역사적 사건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한마디로 평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한국 교회성장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그 평가가 분분하다.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일부는 네비우스 방법 자체가 결함이 있으며, 또 이를 적용하는 선교사들의 실천이 미흡해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어쨌든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한국 교회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긍정적·부정적 평가가 있음을 염두에 두고 네비우스 방법을 되새기며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1) 본 고는 네비우스 방법을 평가하기 위해 네비우스 방법의 내용과 이를 수용한 선교사들의 태도, 또 적용을 받은 한국 교회의 역사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찰해 보려한다.

1. 네비우스 방법의 내용

파머 스펜서는 “네비우스 방법은 중국에서는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나 한국에서는 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2) 그 이유에 대해, 1891년에 내한한 베어드(W. M. Baird) 는 한국 선교사들이 마음을 모아 이를 받아들이고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힌다. 1927년, 베어드는 한국 선교의 성공에는 네비우스의 힘이 컸다고 피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선교회가 한국에 알맞은 선교방법과 원칙을 찾아 모색하고 있을 때 네비우스의 생각은 선교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선교사들이 성실하게 기도하며 일치 단결해 이 방법을 따라 선교 일을 한다면 성공할 것임에 틀림없다.”3) 곽안련(郭安連, Charles A. Clark)선교사는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적용하는 데 참여했던 초기 선교사의 입지에서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방법』4)을 저술했으며, 그 책에서 한국 교회의 급성장은 네비우스 방법에 기인한다고 했다. 또 그는 네비우스를 선교의 새 길을 연 선지자로도 언급했다.5)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네비우스는 중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동료도 없었다. 그러던 중 1885년 상하이의 「차이니즈 레코더」(Chinese Recorder)에 실린 글이 1886년 소책자로 출판되었고, 그것이 한국 선교사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6) 1890년 6월에 한국에 거류하는 7명의 젊은 장로교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박사와 그의 부인을 초청해 2주간 동안 같이 지내며 토의했다. ‘선교 정략가들(missionary statesmen)’이라는 탐탁치 않는 칭함을 들을 정도였던 젊은 선교사들은 드디어 네비우스 원리를 선교를 위한 방법론으로 채택하고 과감하게 실천하기로 했다.
여기서 네비우스 방법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1)선교사는 널리 순회하며 사람들을 일대 일로 만나 전도해야 한다.
(2)자립전도 : 모든 신자는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 돼야 한다. 남에게 배운 사람은 남을 가르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다. 신자 각자나 신자의 회는 즉 새·결신자를 막론하고 성경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교회에 속한 모든 회원은 전도에 힘써야 한다. ‘양식(養殖)하는 방식’으로 전도 사업을 확장해야 한다.
(3)자립정치 : 모든 신자의 회는 무보수로 일하는 이들의 지도를 받도록 한다. 그러나 시찰회는 보수를 받는 조사(Helpers)를 둔다. 이들은 장차 목사가 될 사람들이다. 시찰회 모임은 장차 군, 도, 국가 단위의 지도자가 되도록 인물을 양성해야 한다.
(4)자립경영 : 교회 건물은 신자들 스스로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 신자의 회가 구성되면 곧 시찰회 소속 조사의 급료를 지불하기 시작한다. 학교도 설립 초기에만 부분적으로 보조해야 하며, 개체 교회 목회자는 일체 외국 선교부에서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
(5)모든 신자는 자기 회 지도자나 시찰회 조사의 지도 아래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지도자와 조사는 성경공부 반을 체계 있게 가르쳐야 한다.
(6)엄격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고 성경 중심의 권징을 받도록 한다.
(7)다른 선교단체와 협력해서 일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지역을 나누어 일해야 한다.
(8)선교사들은 소송문제나 그러한 유의 사건에 관여를 삼가야 한다.
(9)그러나 주민들의 경제 문제는 언제나 도와 줄 자세를 가져야 한다.

곽안련은 네비우스의 ‘새’방법과 비교해 ‘옛’선교방법을 요약 소개하였다.
(1)큰 지역 센터 선교사는 전도자들을 고용해 선교 현장으로 내보내고,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
(2)신자들은 자기 고향에서 일하고 싶은 욕망이 강하겠지만 그런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계획은 거의 없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일반 신자들이 그렇게 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지 혹은 가져야 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3)선교사가 돈주머니를 쥐고 있는 한 자립정치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단순한 정도의 자립을 바라는 것이 최선이다.
(4)외국인 기금으로 읍이나 마을에 있는 집회 장소를 사거나 임대할 수 있으며, 이를 관리할 사역자 역시 외국인 기금으로 고용할 수 있다. 돈을 받고 개 교회에 고용된 사역자들은 보조금이 줄어들어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
(5)네비우스가 말한 유의 성경공부반이 한국에서 확장되어선 안 된다. 조직적인 가르침을 별로 강조하지도 않고 성경의 능력을 신뢰하지도 않는다.
(6)교인을 잃을까 두려워 엄격한 신앙 지도를 하지 않는다.
(7)지역 분담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 교회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연합만 강조한다.
(8)극단적인 예로 중국 카톨릭은 사제들에게 관리가 가진 권리를 인정해 주기를 요구했으나 개신교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러나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 초기에 불의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소송에 너무 자주 개입했다.
(9)교회의 유일한 의무는 영혼을 구하는 것이므로 주민들의 경제 생활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네비우스는 산둥(山東)성에서 자기가 주창한 선교 방법을 따라 선교했으나 1886년 7년 만에 포기했다. 곽안련은 8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참고 계속했더라면 긍정적인 결과를 보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네비우스는 약 60개 모임을 돌보고 있었는데, 14년이 지난 후 그 중 36개가 교회를 세워 꾸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옛 선교방법에 따라 운영되고 있었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중국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중국인이 한국인에 비해 자존심 내지는 자립심이 더 강하다든지, 외래 종교에 더 배타적이라든지, 종교심이 덜하다든지 하는 이유는 근거가 없으므로 타당하지 못하다. 보다 합리적인 이유는 당시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기울어 가는 나라에 구원의 희망을 주는 종교로 간주된 데 반해, 중국에서는 기독교 종교가 식민주의 침략의 교두보 역할을 한다는 인식이 전반적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또 한가지 네비우스 방법이 중국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한 중요한 요인은 선교사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네비우스의 동료 선교사 머티어(Mateer)는 ‘옛’방법을 주장하며 네비우스의 방법을 철저하게 반대했다. 심지어 네비우스가 죽은 후 7년 되는 해에는 『네비우스 방법의 재검토(Review of the Nevius Method)』라는 책을 써서 호되게 비판하기까지 했다.
네비우스 방법은 옛 방법보다 시행하기 어렵다. 중국은 한국보다 선교 역사가 오래됐으며 옛 방법이 이미 정착한 상태였다. 게다가 선교사들간 견해도 각각 달랐으므로 이를 적용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네비우스의 처지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을 한 마음으로 수용해 협력하며 적용한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토착교회의 자립을 강조한다는 것은 네비우스가 새롭게 개발한 방안이 아니다. 윌리암 캐리와 헨리 벤이 이미 말한 바이다. 캐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복음을 전해야 하며, 그 나라말로 된 성경을 보급하고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비기독교인들의 사상과 그 배경을 깊이 연구하고, 가능하다면 빨리 본토 사역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했다. 캐리는 이러한 현대적 선교방법과 선교사의 자립을 제안하고 실천했다.
런던 ‘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의 총무였던 헨리 벤은 1854년 이미 선교는 ‘자립 정치, 자립 경영, 자립 전도’할 능력을 갖춘 교회 설립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선교의 안락사’를 언급했다. 즉 선교지에 교회를 설립하면 선교회는 곧 그 지역에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즉시 미복음화 된 지역으로 가야하고 세워진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곽안련도 네비우스도 전혀 윌리암 캐리나 헨리 벤에 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에 관한 정보가 없어서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인도와 중국에서 네비우스 방법과 비슷한 원리가 나왔다는 것은, 이것이 곽안련이 말한 대로 모든 선교지에 필요한 보편적인 선교방법이라는 점이다.

2. 네비우스 방법에 근거한 선교정책 및 그 실효

장로교 공의회는 1893년 회합에서 네비우스 방법에 의거해 아래와 같이 한국 선교 정책을 정식으로 채택했다.
(1)상류층보다는 근로 층을 상대로 전도하는 것이 더 낫다.
(2)부녀자들에게 전도하고 소녀들을 교육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2세의 교육에는 부인들이 더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3)초등학교 교육은 기독교 교육 목표 달성에 매우 유익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사 양성에 힘써야 한다.
(4)장차 한국 목사들도 이 학교에서 배출될 것이므로 이 점을 더욱 유의해야 한다.
(5)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좋은 성경번역이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다.
(6)모든 기독교 서적이나 출판물은 한문을 쓰지 않고 한글로만 쓰도록 한다.
(7)생명 있는 교회가 되려면 자립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는 사람 수는 될 수 있는 대로 줄이고 자급해 세상에 공헌하는 사람을 늘여야 한다.
(8)한국 대중들은 동족의 전도에 의해 믿게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접 대중들에게 설교하는 일보다 비록 수가 적다 하더라도 한국인 전도자 양성에 주력해야 한다.
(9)의료 선교사들은 환자들과 오래 사귈 때 더 효과적으로 선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성경 말씀을 가르칠 기회도 얻고 마음을 주고받으며 조언할 수 있다. 치료만으로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10)지방에서 와 치료받은 환자들의 마을로 찾아가 계속 치료해 주며 안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여태까지 경험으로 보면 사랑으로 치료할 때 전도의 문이 열렸다.

네비우스 방법과 그에 기초한 선교정책의 초점은 토착교회의 행정과 재정의 자립, 또 조직적 성경공부 및 전도이다. 장로교 뿐 아니라 감리교도 네비우스 방법을 따랐다. 아펜젤러는 1890년 첫 사분기 북감리교 선교 보고에서 집사들은 적극적으로 교회 재정을 담당한다고 보고했다. 돈이 없으면 빚을 지지 않기 위해 냉방에서 예배하고, 전도사업에 필요한 문서보급과 말씀 전파가 고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 일들이 무료로 봉사하는 일꾼들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과 선교부는 전도사업을 위해 단 한 명만을 고용하고 있다고 했다.7)
선교사들은 한국 교인들이 자력으로 예배당을 짓고 운영하도록 격려했으며 한국 교인들은 기대 이상으로 그 원리를 따랐다. 선천(宣川) 선교지부의 보고에 의하면 1906년 당시 이 지역의 기독교 학교 수는 56개이고 기독학생 수는 1,192명이었다. 그런데 이중 외국 선교회로부터 보조를 받는 학교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또 이 지역에는 건물을 가진 교회가 70개나 되었는데, 단지 두 교회만 선교회의 보조를 받았다.8) 1910년에는 전국을 통틀어 80%의 교회가 이미 자립했다.
네비우스 방법에 충실해 선교사들이 재정 자립을 이루는 일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치리권’을 넘겨주는 데 인색했다는 비판이 있다. 1907년이면 선교를 시작한 지 20년이나 지났지만 선교사들은 목사를 장립하지 않았다. 장로교회가 독노회를 조직한 1907년 보고에 의하면, 당시 장로교 교세는 목사 7명, 장로 53명, 교인이 7만 이었고 그 가운데 세례교인이 1만9천 명이었다.9) 이러한 교세를 감안한다면 독노회 조직은 상당히 늦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회가 처음 10년 간 더디게 성장하다가 1895년경부터 교인수가 불어나기 시작해 1900년도에 들어서며 급성장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복음에 대한 한국인의 대단한 호응은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의 지성인들과 애국자들이 정치적 동기에서 교회를 찾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애국과 신앙을 조화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한국인에게 치리권을 넘겨주기 힘들었다. 선교사들은 교회 자립을 투쟁을 통해 식민주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정치적인 독립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저항과 투쟁하는 민족운동과 선교와 교육을 통해 성장하는 교회운동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의 재정적 자립은 독려했으나 영적으로는 계속 지배하려 했다는 비판이 있다.10) 그 예로 한국인 전도자에게 설교는 허락됐지만 성례 집행은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외국인 선교사와 선교지 교인의 문제가 아니라, 목사와 평신도라는 교회론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치리와 말씀, 성례 집행은 개혁주의 신앙고백이 규정하는 목사의 중요한 직무이다. 교회 자립을 위해서는 사역자 양성이 중요하지만 이는 단 시일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 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의 개교회주의 성향을 네비우스의 교회 자립 경영 정책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감리교회나 장로교회나 교구 교회로 성장해 왔다. 장로교는 1950대 초반까지 시찰회와 노회가 감독기관으로서 그 기능을 다했다. 요즘 말로 하면 교회를 개척할 경우, 지교회는 기도소를 설치해 장로나 집사를 불문하고 그 지역에 속한 교인들로 하여금 기도소에서 집회를 갖도록 해 교회로 성장하도록 했다. 예배당을 건축할 경우는 시찰회와 노회가 이를 도왔다.
한국 교회가 개교회주의 성향을 띠게 된 것은 교회 분열로 인해 교단간에 교세 확장 경쟁을 시작하면서 부터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피난 교인들의 교회와 더불어 무지역 노회가 생겨난 것도 하나의 요인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주하고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교인들은 설교자를 찾아 이동했다. 그러면서 대형교회가 형성되고 이 과정에서 개교회주의 성향도 심화되었다.

3. 성경 번역과 문화 사업

우리 말 성경 번역은 만주와 일본, 국내에서 18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만주에서는 1870년대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한국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시작했다. 1883년 일본에서는 미장로교 선교사 낙스와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가 이수정에게 성경을 번역하도록 했다. 1887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성경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아래 성서 번역 위원회를 두어 한국어 성경의 번역과 개정, 출판 및 반포를 맡도록 했다. 성경 번역과 기독교 문서활동을 위해 한글을 발굴하고 사용한 일은 신앙 전파를 위해서 뿐 아니라 한국 문화 창달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890년 경 대한 제국이 문호를 개방하긴 했지만 아직 선교사라는 신분은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1984년 최초로 입국한 헤론과, 언더우드, 아펜젤러, 그 뒤를 이은 스크랜튼 가족은 의사 자격으로 입국했다. 이들은 서울과 지방 각처에 병원을 세우며 정부의 방역사업을 지휘함으로써 왕실을 비롯한 유력자들의 호의와 국민들의 신뢰를 얻었다. 동시에 선교사들은 배재, 이화, 경신, 정신, 고등교육기관으로 세브란스 의학교를 세워 교육을 실시했다.
선교사들은 서양 의학, 서구교육제도, 청년운동과 여성운동, 서양 음악과 스포츠에서부터 과수원 재배법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지식과 서양의 문물을 한국에 도입했으며 교회는 그 통로가 되었다. 기존 문화와의 갈등이나 조화에 대해 선교부가 공식 입장을 표명한 적은 없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개인적으로 전통문화를 보존하는 일에 배려를 했다. 신교육이 학생들을 서양화하는 교육이 아니므로 한국인은 정체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찬송가도 한국 가락에 맞춰 부르도록 배려했다.
4. 순회전도

선교사들은 네비우스가 특히 강조한대로 순회 전도를 열심히 했다. 순회전도가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특징처럼 얘기되는데, 이는 초기 개척 선교사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다. 언더우드는 이미 1887년부터 혼자 전도 여행을 시도했으며, 1888년에는 아펜젤러와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났다.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았고 개척자로서 한국의 지리와 풍습을 익히고 정리해서 후배 선교사들에게 남기기 위해 더욱 힘을 기울였다. 한국 문화에 특히 관심이 많았던 게일(J. S. Gale)은 1889년에서 1897년까지 8년 동안 계절을 불문하고 매번 다른 길로 한반도를 12번이나 돌았다. 1915년 보고에 따르면 무려 25번이나 전국을 다녔다고 한다. 「한국평론」(Korea Review)에 기고한 선교사들의 글을 보면, 한국의 역사와 문화 및 관습을 연구하려는 그들의 왕성한 의욕과 예리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이 쓴 글은 한국학 연구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결실은 복음이 전국에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189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서기 엘린우드(F. F. Ellinwood)는 한국은 특정 지역에 많은 힘을 투입하기보다 전도의 범위를 넓히고 전국에 전도소를 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자 선교부는 그 정책에 따랐다. 1930년의 통계에 따르면 인구의 73%가 농촌에 거주했는데, 전도소 수는 도시에 225개, 그리고 전국에 7,000개나 있었다.

5. 선교지 분담 정책

선교사들의 문화와 교육 및 의료사업 활동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전도활동과 교회 정책은 여러 가지로 비판을 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장로교의 특징적 선교정책이었던 ‘선교지 분할’은 지역 감정의 골을 깊게 하고 한국 교회의 지방색을 더욱 짙게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세기 선교는 열강의 식민지 분할 및 확장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유럽 선교사들은 대체로 자기 나라가 개척한 식민지에서 활동했으므로 ‘선교지 분할’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루어진 선교지 분할 정책은 이익에 따라 지역을 나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예의를 지키며 지역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분담’이 적합하다.
1893년 장로교 공의회는 소속이 다른 선교사들이 불필요하게 경쟁을 하거나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수고를 덜자는 취지에서, 또 한국에 하나의 장로교를 세워 함께 선교하기 위해 선교지역을 나누어 담당키로 했다. 그래서 북장로교 선교회는 관서지방, 캐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지방, 호주 선교회는 영남지방, 남장로교 선교회는 호남지방을 각각 담당했다. 또 미국 북장로교와 북감리교 선교회도 선교지 분담을 합의했다.
(1)인구 5천이 넘는 도시, 개항장이 특별히 필요하다고 인정된 곳은 예외로 한다.
(2)인구 5천 미만인 지역은 선교사가 1년에 2∼4차례씩 방문하는 전도소를 두며, 교인들이 정기적으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 곳에는 다른 선교회가 들어가지 않는다.
(3)6개월 간 기능이 정지되면 자유롭게 그 지역에 들어가 전도할 수 있다.

장로교 내부?【?, 또 장로교와 감리교 간에 이러한 분담이 가능했던 이유는 선교사들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복음전도자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또 장로교나 감리교나 기존에 교구제도에 익숙했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했다. 어쨌든 초기 한국 선교회 교파 상호간의 선교지 분담 정책은 협력선교의 좋은 예가 된다. 수많은 교단과 교파가 분열하고 개교회가 어지럽게 경쟁하는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 역사를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6. 성경공부와 신학교육 정책

토착 교회의 자립을 위해서는 목사 후보생 교육과 목사 장립이 선결 과제이다. 언더우드는 1888년부터 그의 사랑에서 여덟 명의 청년들에게 기독교 교리와 함께 성경공부를 가르쳤는데, 선교부에는 이를 ‘단기 신학 교습’이라고 보고했다. 1890년부터는 ‘보통 성경공부반’, ‘지역 성경공부반’, 교회 직분자를 위한 ‘고급 성경공부반’, 장차 신학 교육을 받을 사람들을 위한 ‘특별 성경공부반’이렇게 네 단계로 나누어 실시했다.11)
1891년, 장로교 선교사들은 성경공부를 필수로 정했다.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교인 수는 전체 교인 증가와 병행했다. 헌트(W. B. Hunt)는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교육 유무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이 성경공부반을 거쳤다고 기록했다. 1904년의 보고에 의하면, 학습교인의 60%이상이 하나 내지는 둘 이상의 성경공부반에 참가해 교육받았다고 한다. 1909년에는 북장로교 선교 구역에만 해도 약 800의 성경공부 반이 있었다. 여기에는 세례교인의 두 배가 넘는 5만 명이 참석했다.12)
1896년, 남장로교 레이놀즈 선교사는 목사 후보생의 일반 교양교육이 필요함을 역설했으며, 1987년 스왈론 역시 같은 주제의 글을 발표했다.13) 1901년 장로교 공의회는 신학교 설립을 결정하고 1902년 개교해 1907년에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고 독노회 조직과 더불어 그들을 안수함으로써 명실공히 자립적인 독노회로 출발하도록 했다. 감리교는 1901년에 두 사람을 목사로 안수하고 이어서 매해 한 두 사람의 전도자를 목사로 장립했다. 감리교는 대각성 운동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목회자를 수급하기 위해 정규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전도자를 목사로 안수하던 정책이 있었다. 그러나 신학교육이 본격화되면서 장로교와 감리교는 그러한 전통과 상반되게 신학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18세기 중엽, 미국 장로교는 각성운동으로 목회자 수요가 급속히 늘어나자 감리교나 침례교에서 하듯이 단기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도 목사 안수를 주자는 ‘뉴 사이드’(New Side)와 신학교육은 여전히 철저해야 한다는 ‘올드 사이드’(Old Side)로 나뉜 적이 있었다. 초기 한국 장로교의 신학제도는 올드 사이드 전통을 따랐으나, 교육 내용은 뉴 사이드가 주장한 대로 선교지 실정을 감안해 보다 낮은 수준으로 했다. 그러나 오히려 감리교는 목회자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하면서 올드 사이드 입장에 가까운 정책을 폈다.
교과과정의 편성을 보면, 장로교는 성경을 비롯한 신학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 반면 감리교는 교양 과목에 거의 절반의 시간을 할애했고, 장로교에 비해 소수 정예교육을 실시했다.14) 목사 후보생의 수적인 차이는 후에 교세차이를 가져온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동시에 이미 교세가 차이 났기 때문에 목사 후보생 수도 달랐다고 볼 수 있다. 감리교는 소수정예와 교양교육을 지향한 반면, 장로교는 성경지식과 경건에 치중했음을 알 수 있다. 장로교는 지식보다 경건에 더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네비우스의 견해에 공감했다. 오늘날 신학교들은 지식과 경건의 균형을 강조하지만, 초기 선교 단계에서는 경건에 더 역점을 두었다. 한국 교회는 많은 지식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신앙이 두터운 목사들과 봉사자들을 통해 크게 발전했다.15)

7. 사회 계층에 차별적으로 대응한 선교 정책

선교사들이 상류층보다 근로층에 우선을 둠으로써 양반층이 기독교를 적대시하게 되었고, 교회가 양반층을 소홀히 하다 보니까 양반층에 의해 전수되는 전통문화도 소홀히 다루게 되었다.16) 독일 선교학의 아버지 구스타프 바르넥(Gustav Warneck)은 선교방법을 논하면서 선교는 온 국민을 대상으로 해야 하고 하층만을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건전한 국민층’(die gesunden Volkselemente), 즉 상류층과 중산층이 교회 설립에 필요하기 때문이다.17) 이 원칙은 선교의 과제를 위해서 뿐 아니라 선교의 목적을 위해서도 이상적이다. 바르넥에게 선교의 과제는 온 국민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이며 선교의 목표는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18)
복음은 특정한 그룹이나 계층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만인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피선교국이 사회 계층간 격차가 클수록 이 이상적인 선교원칙을 적용하기 어렵다. 아마도 그래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하류층 선교에서 활로를 모색한 것 같다. ‘먼저 하류층에’라는 원칙은 이상적인 것이 못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것이 실제적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기독교를 지적인 결단으로 받아들였으나 한국은 거리나 시장, 시골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는 어린아이와 같이 신뢰하며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19)
한국의 양반사회는 이미 17세기 이후부터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19세기에 와서는 거의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즉 권력을 가진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계층에 동화 되고 말았다. 동학농민전쟁, 일제 침략을 경험하며 양반층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로마 카톨릭도 처음에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도태되었던 양반층 시파를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심한 박해로 이 양반 그룹이 거의 말살되자 주로 하류층을 대상으로 선교했다. 실제로 양반층은 유교적이며 보수적인 문화전수자로서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개혁 또는 개화운동에 반대했다. 개신교 역시 이러한 양반층에 복음으로 접근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상류층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들은 왕실의 총애를 받았으며, 상류층 출신의 많은 지성인들을 얻었다. 유교 양반 전통이 강한 남부 지방보다 북부 지방이 훨씬 빠르고 왕성하게 복음을 받아들였다.20)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시작한 것은 유교적인 양반을 회심시키는 대신 새로운 지식층을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맺는 말

처음부터 한국 교회는 재정 자립을 이룩한 교회로 시작했다. 조직적인 성경공부가 이루어졌으며 선교사와 사역자 뿐 아니라 초신자들도 열심히 전도했다. 1904∼7년에 일어난 대부흥은 성경공부와 기도 생활에서 얻게 된 선물이다. 선교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만에 신자 수가 불어나기 시작해 1900년부터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장로교는 선교사들로부터 교회의 치리권을 넘겨받았다. 감리교는 남북 선교부 아래 있던 교회들이 1930년 하나의 감리교회로 출발하면서 한국인 감독이 치리하는 교회로 출발하게 되었다. 1915년부터 감리교는 신학교육에 한국인 교수가 참여했고, 장로교는 30년대 초부터 참여했다. 초대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은 다양했는데, 한국 교회는 주로 선교사들의 전도활동을 넘겨받아 전도하는 교회로 발전했다.
선교사들의 관심과 기여는 다양했다. 한국 교회는 선교사들이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기여한 것을 충분히 계승하지 못해 유감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일제 식민지로 말미암아 참여할 사회를 상실했고 늘 생존을 염려하는 처지였다.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와 교회의 설립을 위해 본국 선교부가 우려할 정도로 한국의 역사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식민지 시대를 지나 1950년 대 이후 교회는 분열되었고 보수적 교회는 전도와 선교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1950∼60년까지 구제봉사활동은 계속 선교사들이 맡아 했으며, 신자들은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외국 교회의 선교부나 봉사기관의 원조를 받아 했다.
한국 교회의 부정적 현상들을 선교사들의 선교정책 때문이라고 전가시키는 사고는 지양해야 한다. 교육과 사상이 그렇듯이 신앙은 짜여진 틀에 똑같이 찍혀 나오는 공산품이 아니다. 백 년이면 몇 세대가 살고 가는 긴 세월이다. 그 세월에서 얼마든지 변수가 작용할 수 있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들포도를 맺었다는 이사야의 탄식이나 가라지 비유가 그것을 말해준다.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부정적 모습의 원인은 선교사들 때문이라기 보다 우리 민족이 경험한 역사적 과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 역사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한국전쟁, 독재정치가 시작된 흔적은 있는데 그 끝은 말끔하지 않다. 그것은 교회에도 동일하게 반영되어 교회가 역사를 주도하기보다는 종교의 이름으로 역사 속에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따라서 부정적인 현상의 원인은 초기 선교사들에게 있기보다는 주로 역사의 과정에 있었던 복합적인 사건들과 한국 교회와 지체된 우리 각자에게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1800년대 후반 그리고 1900년대 초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후진국에 와서 복음과 서양문화를 전수하며 다양하게 사역했다. 오늘날 한국 선교사가 그대로 모방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머티어가 주장한 ‘옛’방법보다는 네비우스의 ‘새’방법이 훨씬 배울점이 많다. 따라서 네비우스의 방법을 충분히 참고하고 현지 사정을 고려해 융통성 있게 활용하길 바란다. 선교지 상황은 항상 다르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에서 일한 외국 선교사들이 네비우스의 방법을 따른 것 가운데 가장 배울 점은 성경강조와 더불어 ‘선교지 분담 정책’이다. 선교사들이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며 복음을 전한 모습은 참으로 배울 점이다. 한국 교회는 수없이 분열돼 일치와 연합을 지향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시점에서 파송받은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하나의 협의체를 구성해 협력하며 선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1945년 이전까지 한국에서 활동한 외국 선교사 수는 1,529명에 달한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몇 사람에 의해 수행된 것이 아니었다. 이제 한국 교회도 선교사들을 세계 각 곳에 흩어져 고군분투하도록 하기보다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지역을 전략적으로 선교하는 방안을 제안하며 말을 맺는다.

** 김영재 교수: 서울대 문리대를 나오고 현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다(sarabos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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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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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겨울아이 | 작성시간 08.06.04 목사님^^ 아침일찍부터 수고가 많으셨네요 감사합니다. ^&* 평양대부흥에 대해서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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