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중국현대사 강의 05 장제스등극 국공합작파기 북벌완료 쑹씨3자매

작성자황영세|작성시간26.06.10|조회수0 목록 댓글 0

중국현대사 강의 05 장제스등극 국공합작파기 북벌완료 쑹씨3자매

 

 

**2-4 쟝졔스의 부상과 국민당의 분열

쑨원이 죽은 뒤, 그가 평생 꿈꿨던 새로운 중국의 도래는 멀어만 보였다. 하지만 쑨원이 죽기 바로 직전인 1925년 2월에는 이른바 제1차 동정東征을 감행해 쟝졔스의 지휘를 받는 황푸군관학교 생도들이 이끄는 군대가 광둥성 북부지역 차오저우潮州, 산터우汕頭일대에서 잔존세력을 거느린 천즁밍의 군대를 토벌했다. 5월에는 윈난과 광시의 군벌 양시민楊希閔과 류전환劉震寰의 반란을 격퇴하고 1만7,000명의 포로와 1만6,000정의 소총을 노획했다. 이 일련의 승리를 통해 국민당군대는 점차 다른 군벌들과의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을 자신감이 생겨났고, 이런 무력을 바탕으로 국민당정권 역시 쑨원이 꿈꿨던 ‘북벌’을 감행할 기반을 갖추게 됐다. 여기에 ‘2·7참안’ 이래 침체에 빠졌던 노동운동도 공산당의 지도아래 활기를 되찾았다. 1925년 5월1일 광저우에선 제2차 전국노동대회가 열려, 중화전국총공회中華全國 總工會가 탄생했다. 이는 명실상부한 전국의 노동자조직을 대표하는 단체로 이때 모인 노동자들은 지역의 농민, 병사들과 함께 대규모시위에 나섰다. 당시 노동자들의 최대조직은 상하이총공회였다. 상하이에서는 1923년 초까지 4만의 노동자가 24개 노동조합을 결성해, 1924년 메이데이에는 10만의 노동자들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벌일 정도였다. 1925년 2월 상하이의 방적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해고당하자 파업이 일어났다. 5월에 다시 노동자 두 명이 해고당한 일로 파업이 일어나자, 5월15일에 일본인 감독이 파업 중의 노동자에게 발포해 조합간부 구정훙顧正紅을 사살하고 수십 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이에 항의하는 노동자와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드디어 운명의 날인 5월30일을 기해 대규모시위가 일어났는데, 오후에 접어들어 시내번화가인 공동조계 인근의 난징루南京路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오전에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던 중, 영국경찰들이 군중들에게 발포해 13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중상을 입는 등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것을 ‘5·30운동’이라하는데,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중국에서의 반제국주의 운동의 시작으로 규정하고 있다. 상하이에서는 그날이후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들어갔고, 심지어 자국민의 살상에 분노한 자본가들도 파업을 지시했다. 이에 일본과 영국, 미국은 군함을 상하이에 집결하고 육군을 상륙시켜 민중들과 대치했다. 그리하여 사건이 벌어진 5월30일부터 6월10일 사이에 60여 명이 살해되고 7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전국각지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중 가장 치열한 투쟁이 벌어진 건 홍콩과 광저우였다. 6월19일에는 홍콩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켜 영국인 총독은 파업을 탄압하기위해 계엄령을 내렸고,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영국 식민지인 홍콩을 떠나 광저우로 집결했다. 6월23일 광저우에서는 노동자, 학생 등 10만여 명에 이르는 군중이 모여 대규모시위를 벌였다. 행진이 외국조계인 사몐沙面 건너에 이르렀을 때 조계경비를 맡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군대가 갑자기 기관총을 난사해 60여 명이 사망하고 17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를 6·23사건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새로운 도화선이 되어 영국상품에 대한 보이콧과 총파업이 잇달아 일어났다. 홍콩과 광저우에서는 그 뒤로도 파업이 16개월 동안이나 계속되고, 국민당정부도 영국정부에 대해 경제단교를 단행하고 파업노동자들을 지원했다.

“홍콩, 광저우의 파업이 1년4개월이나 계속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광둥의 국민당정권이 전력을 기울여 이 파업을 지원한 것이다. 광저우의 집회에서는 랴오중카이, 보로딘 등이 열변을 토했으며, 또 파업위원회에는 거액의 재정지원이 정부로부터 보내졌다. 노동자는 이러한 지원 아래 도박장이나 아편굴을 접수하고 그곳을 파업노동자의 기숙사와 식당으로 대체함과 동시에 굳건한 수비대를 조직했다. 한편 정부는 이러한 노동자의 조직에 근거해 강한 권력과 커다란 위신을 스스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여기서 노동운동은 정부의 지원 아래 발전하고 동시에 정부는 그러한 노동자의 힘에 의지함으로써 현실적인 세력으로 성장해간 것이다.” - [사에키 유이치(佐伯有一), 노무라 고이치(野村浩一) 외, <중국현대사> 329~330쪽]

당시 파업위원회는 홍콩에서 밀려들어오는 수만 명의 파업참가자들이 묵을 곳을 제공하고, 해안을 지키기 위한 무장규찰대를 배치했다. 특히 광둥정부가 제공한 막대한 금액의 예산을 자체적으로 운용하면서 파업방해자를 구금하는 등 경찰과 사법기관의 역할까지 해내 일종의 정부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어, 광둥에서는 이 위원회를 ‘제2정부’라 부를 정도였다. 이러한 정세는 국민당 내 좌파세력에 큰 힘이 됐으나, 동시에 반대편에 선 자본가계급에게는 큰 위협이 됐다.

국공합작의 기운이 한창 무르익던 1924년 4월에 몇몇 원로정치인들이 일종의 항의표시로 감찰위원회에서 탈퇴했고 광저우 ‘상단군’의 반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사실상 국민당 내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 출신이 다양했다. 이들을 하나로 아우른 것은 쑨원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인데, 이제 그 구심점이 사라지니 그동안 잠복해있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다. 쑨원 사후 국민당은 일단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했는데, 5월에 열린 중앙집행위원회를 주도한 건 오랫동안 국민당의 재정을 맡아온 좌파성향의 랴오중카이와 한때 아나키스트였고 이후로도 좌파지식인이던 왕자오밍, 그리고 우익을 대표하는 후한민이었다. 여기에 황푸군관학교 교장으로 군권을 장악한 쟝졔스가 있었다. 여러 위기요소가 잠복해있는 가운데, 1925년 7월1일에 열린 국민당 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정식으로 국민정부가 수립됐다.

“국민정부는 국민당에 의해 지도됐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국민당이 국공합작, 국민회의운동 등의 통일전선에 기초한 반제, 반봉건의 중심 정치세력이었다는 점, 광둥정부가 노동운동의 에너지를 결집해 그것에 의해 강화되고 있었다는 점, 보로딘을 통한 소련의 지도와 원조가 중요한 정신적, 물질적 기초였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광둥 국민정부를 민족 민주적 연합 정권의 맹아로서 보는 게 좋다. 이런 의미에서 국민정부 성립은 1912년 이래 중화민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다.” - [히메다 미츠요시(姬田光義) 외, <중국 근현대사> 239쪽]

이제 기존의 대원수제도가 폐지되고 새롭게 왕자오밍이 정부 주석이 되고, 랴오중카이는 재정부장, 후한민은 외교부장, 쉬충즈許崇智가 군사부장이 됐다. 주석과 재정부장을 좌파가 차지함으로써 일단 국공합작을 이어가려는 쑨원의 유지가 받들어지는 듯 보였지만, 국민당 내부의 움직임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국민당을 지지하는 주요세력은 지주나 기업가였는데, 이들은 농민의 소작료와 세금인하요구, 임금인상을 위한 도시지역의 파업 등에 공감하지 못했다. 쑨원 사후 그의 뜻을 받들어 국공합작 임무를 수행한 건 랴오중카이였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레 국민당내 불만분자들의 표적이 됐고, 급기야 8월20일 국민당 집행위원회에 참석하러가는 길에 대여섯 명의 젊은이에게 총격을 받고 살해됐다. 사건직후 특별위원회가 꾸려져 수사에 착수한 결과 후이성胡毅生, 린즈몐林直勉, 주줘원朱卓文의 세 젊은이에게 체포령이 떨어졌지만, 린즈몐만 체포되고 나머지 두 사람은 종적을 감췄다. 체포된 뒤 린즈몐은 랴오중카이가 공산당이니 정부 요직을 맡을 수 없다는 말만할 뿐 범행은 극구 부인했다. 결국 이 사건은 결말을 짓지 못하고 흐지부지되는데, 달아난 후이성이 후한민의 사촌동생이고 군사부장 쉬충즈의 부하도 연루됐기에, 결국 왕자오밍과 쟝졔스는 후한민을 모스크바로 추방하고 쉬충즈의 군대를 무장 해제시켰다. 사실상 이들과 같은 우파 입장에 섰던 쟝졔스가 좌파인 왕자오밍과 손잡은 건 좌우를 떠나 쉬충즈와 후한민이 각각 쟝졔스와 왕자오밍의 경쟁 상대였던 탓이다. 랴오중카이가 암살되자 집단체제가 붕괴하고 왕자오밍과 장졔스의 협력체제로 돌아섰다. 왕자오밍은 국민정부 주석에 중앙집행위원회 정치위원회 주석, 황푸군관학교주재 당대표가 돼 당과 정부를 장악했고, 쟝졔스는 황푸군관학교 교장과 국민혁명군 제1군 군장으로서 군대를 장악했다. 10월2일에는 광둥의 국민혁명군이 제2차 동정東征에 나서 후이저우 일대에서 명맥을 잇고 있던 천즁밍의 세력을 격파하고 광둥성의 통일을 완수했다. 랴오중카이의 죽음으로 좌파진영은 일시 타격을 입은 듯했지만, 1926년 1월에 개최된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의 결과 좌파진영은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다. 대회에 참가한 278명의 대의원들 중 168명이 좌파나 공산당원이었으며, 중도파는 겨우 65명이었고, 우파는 겨우 45명에 불과했다. 나아가 국민당 집행위원회의 위원 36명 가운데 7명이 공산당원, 14명이 좌파에 속할 지경이 되자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국민당 정치고문 보로딘은 국민당 내 각 위원회에서 공산당의 자리를 3분의 1로 제한할 만큼 여유를 부렸다. 광저우는 노동자들이 거리순찰을 하고 파업이 장기화돼 당시 사람들이 ‘붉은 도시’라 부를 정도였다.

바야흐로 보수파는 이런 현실에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에 앞서 1925년 11월에는 국민당 우파당원인 린썬林森이 한때 공산당에 경도되기도 했던 민족주의 지식인 다이지타오戴季陶, 선딩이沈定一 등과 베이징근교의 시산 비윈쓰에서 별도 모임을 가졌다. 회합을 가진 지명을 본 따 ‘시산파西山派’라 하는 이들은 자기네 회동을 제4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라 칭하고, 공산당원의 국민당적 박탈, 보로딘의 해직, 왕자오밍의 6개월간 당적 박탈 및 공산당적 중앙위원 9명의 제명을 결의했다. 허나 이들의 주장은 일거에 묵살되고, 곧이어 앞서의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쑨원이 죽기 전부터 공산당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던 쟝졔스 또한 국민당내 좌파세력의 준동은 참을 수 없었다. 당시 황푸군관학교 내에는 공산당계의 청년군인연합회와 국민당계의 쑨원주의학회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비록 저우언라이가 정치위원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지만, 학생들 사이에 은근히 퍼져가는 반공정서를 막을 수는 없었다. 공산당과 국민당내 우파사이의 미묘한 대립과 갈등은 바야흐로 일촉즉발의 긴박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런 흐름을 일거에 바꿔놓은 게 바로 1926년 3월18일 발생한 이른바 중산함中山艦 사건이었다. 중산함은 사실 4년 전인 1922년 쑨원이 천즁밍에게 쫓겨 광저우에서 상하이로 갈 때 타고 간 융펑함으로, 쑨원 사후에 중산함으로 개명했다. 사건개요는 간단하다. 당시 해군국장대리며 중산함의 함장이던 리즈룽李之龍이 군함을 광둥에서 황푸로 돌린 걸 쟝졔스가 자신에 대한 쿠데타로 여겨 3월20일 리즈룽과 소련고문단을 체포한 것이다. 이때 보로딘은 소련에서 중국정세를 시찰하러온 사절단을 접견하기위해 베이징에 가있었고, 쟝졔스 역시 황푸군관학교를 떠나 광저우에 있었다. 어찌 보면 보로딘이 잠시 광저우를 떠나있는 틈을 타 누군가 일을 벌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누가 중산함을 황푸군관학교로 회항하도록 명령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따라서 이 사건의 진상역시 미궁에 빠졌다. 중요한 건 이 사건을 계기로 쟝졔스가 국민당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는 사실이다. 잠시 추방됐던 보로딘 일행은 쟝졔스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 바로 다음 달인 4월에 되돌아왔다. 중산함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는 국민당을 우파와 좌파로 가르는 충격적 결과를 낳았고, 쟝졔스가 국민당을 장악해 좌파들을 압박하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이 사건은 쟝졔스가 벌인 일종의 ‘반공쿠데타’라 할 수 있다. 곧이어 쟝졔스는 5월에 열린 중앙위원회에서 당무정리안黨務整理案을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첫째, 다른 당원이 국민당에 가입할 경우, 그 당은 해당명부를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해야한다. 둘째, 다른 당원으로 국민당 고급기관의 간부를 맡게 될 경우, 전체의 3분의 1을 넘어서는 안 된다. 셋째, 다른 당원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자는 당 중앙기관의 부장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다른 당’이란 게 ‘공산당’을 가리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결국 골자는 국민당 내에서 공산당의 활동을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이 방침으로 중앙집행위원회의 각 부서에서 활약하던 탄핑산과 린쭈한, 마오쩌둥 등은 그 지위를 내놔야했다. 그런데 국민당 내 좌파와 공산당 측은 이 안에 대해 극히 타협적인 태도로 협조했고, 쟝졔스 역시 국공합작의 기본 노선을 단번에 버리진 않았다. 국민당과 공산당사이에 마찰이 생기면 연석회의가 열렸고, 그 자리에는 반드시 코민테른 대표가 참석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쟝졔스는 국민당의 세력을 장악해가는 한편 당내에서, 특히 자신의 권력기반인 군대 내에서 공산당세력을 몰아낸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한편 중산함사건이후 당무정리안의 제출까지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쑨원 사후 초기 집단지도체제가 랴오중카이 암살로 무너진 뒤 쟝졔스와 양강체제를 이뤘던 왕자오밍은 쟝졔스가 주도한 일련의 조치들에 항의하면서 유럽으로 건너갔다. 왕자오밍은 국민당 내 좌파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는데, 그가 잠적하자 남은 좌파들은 어쩔 수 없이 공산당과의 협력을 모색하게 된다. 합법적 공간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며 세를 늘려간 공산당은 아직까진 때가 아니라는 판단 하에 국민당 내 우파세력과 정면 대결하는 것보다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는 입장을 견지했다. 국민당을 장악한 쟝졔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쑨원이 그토록 염원했던 ‘북벌’이었다. 이에 앞서 쟝졔스는 국민당정부 내에 속해있는 여러 성격의 군대를 명목상으로나마 통일하기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황푸군관학교 창설이후 국민당은 자체의 군대를 보유하게 됐다. 게다가 이들 군관학교 생도들이 이끄는 군대가 두 차례 ‘동정東征’을 통해 광둥성 일대를 통일하자 곳곳에서 군벌부대가 국민당군에 투항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헌데 이렇게 편입된 군벌부대출신들은 이전생활방식 그대로여서 어떤 이들은 아편에 중독돼 있는가하면 상황에 따라 탈영을 일삼는 등 대체로 규율이 없고 훈련도 부족했다. 즉 이들은 국민당군에 대해 양날의 칼인 셈이었다. 이제 국민당세력에 포함된 군대는 명목상이나마 새롭게 재편됐다. 국민당군을 제1군으로 하고, 후난군은 제2군, 윈난군은 제3군, 광둥군은 제4군, 푸졘군은 제5군으로 하는 ‘국민혁명군’이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이제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북으로 진격해 군벌들을 타도하고 통일정부를 세우는 일만 남았다. 이전에 국민당 정부의 군사고문인 갈렌은 북벌이 가능한 시점이 도래했다고 선언하고 독자적인 북벌계획을 세운바 있었다. 쟝졔스는 당무정리안으로 당내의 공산당세력을 견제하고 자신의 군 권력을 확대하기위해 조기북벌을 원했다. 하지만 공산당 내의 입장은 좀 복잡하고 어정쩡했다.

당무정리안으로 공산당활동이 위축된 7월에 열린 공산당중앙위원회 제2회 확대회의에서는 쟝졔스를 ‘신新우파’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경계심을 높였다. 아울러 노동운동이나 군사 행동 등을 통해 당시 고조되던 반혁명움직임에 적극 대처하려했지만, 결국 이런 방침들은 철저히 이행되지 못했다. 나아가 쟝졔스의 ‘북벌’계획에 대해서도 당시 공산당지도자였던 천두슈는 북벌보다는 혁명의 근거지인 광둥지역을 강화해야한다는 ‘북벌 시기상조론’을 주장했고, 군사고문인 키산카Kisanka는 ‘북벌필패론’마저 주장했다.

그럼에도 대세는 ‘북벌’로 기울었다. 본격 군사행동에 들어가려면 가장 필요한 게 자금과 병력이었다. 자금은 쑨원의 처남으로 하버드를 졸업한 뒤 뉴욕의 국제은행단에서 3년 동안 일하고 돌아와 1924년에 광저우중앙은행 총재가 된 쑹쯔원宋子文이 맡았다. 쑹은 수완을 발휘해 주요재원을 축적하는 한편, 1925년에는 국민당 광저우정부의 재정부장으로 승진한 뒤 세입을 4배나 증가시켰다. 아울러 정부의 자금마련을 위한 채권도 대량으로 발행했다. 그리고 황푸군관학교는 유능하고 숙달된 정예장교를 속속 배출해냈다. 입학을 위해서는 적어도 중학교졸업 이상의 학력을 요구했기에 노동자나 농민출신의 젊은이들은 애당초 학교에 입학하기 어려워 학생들은 대부분 비교적 부유한 농촌가정 출신으로 채워졌다. 1926년 중반에는 이미 7,795명의 졸업생들이 전투에 임할 준비를 갖추고 있을 정도였다. 1926년 6월 쟝졔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했고, 7월에는 본격적으로 북벌을 개시했다. 당시 병력은 1군에서 8군까지 모두 10만 명 정도였고, 각 군의 군장은 허잉친 何應欽, 탄옌카이譚延闓, 주페이더朱培德, 리지선李濟深, 리푸린李福林, 청쳰程潛, 리쭝런 李宗仁, 탕성즈唐生智 등이었다. 북벌의 진로는 세 갈래로 나뉘었다. 첫째, 제4, 제7, 제8 군은 우페이푸가 지배하던 후난, 후베이 방면으로, 광저우서 우한까지 철도를 따라 거슬러 오르거나 샹강湘江을 따라 후난의 거점도시 창사로 진군했고 둘째, 제2, 제3, 제6군은 간쟝 贛江을 따라 쑨취안팡이 지배하던 쟝시로 나아갔으며 셋째, 제1군은 동부해안을 따라서 저우인런周陰人과 차오완순曹萬順 등이 할거하던 푸졘으로 북상했다.

북벌군의 북상속도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후난과 후베이 방면의 경우 8월12일에 창사를 점령했고, 18일에는 웨저우岳州를 점령했으며, 10월10일에는 우창을 점령했다. 우창은 1911년의 같은 날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바로 그 ‘우창봉기’가 일어난 지 정확하게 15년 만에 반동적인 군벌을 물리치고 그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혁명군대를 맞이해 새 역사의 중심지가 될 운명에 처한 것이다. 쟝시 방면은 12월4일에 쥬쟝九江을 점령하고 12월7일에 성도인 난창南昌을 점령했다. 북벌을 개시한지 반년도 되지 않아 양쯔강 유역 중류일대가 모두 국민혁명군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그 와중에 국민당 내 좌파와 공산당은 중공업지대로 당시 노동운동의 중심지였던 우한으로 모여들었고, 쟝졔스는 뒤늦게 점령한 난창에 국민당집행위원회 위원들을 모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국민혁명군의 성공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국민당은 숫자에서는 군벌들에 비해 훨씬 열세에 있었지만, 그들은 반봉건, 반제국주의라는 대의명분이 있었고 병사들은 분명한 목표의식을 갖고 용감하게 전투에 임했다. 또 결정적으로 이런 대의명분에 동의하는 민중의 지지가 있었다. 국민혁명군이 진군할 때 농민들은 그들을 위해 기꺼이 양식을 내놨고, 직간접적으로 전투에 참가해 북벌군을 지원했다. 당시 화중, 화북 지역에는 대개 5명의 유력 군벌들이 있었는데, 만저우에서 산둥과 베이징주변에는 장쭤린이, 우한에서 베이징에 이르는 징한철도京漢鐵道 연변에는 우페이푸가, 쟝쑤와 저쟝, 안후이, 쟝시 지역은 쑨취안팡이, 그리고 산시山西에는 옌시산閻錫山이, 그밖에 산시陝西에는 ‘국민군’이라 자칭한 기독교도장군 펑위샹馮玉祥이 있었다. 이 가운데 펑위샹은 명백하게 국민당과 연계하면서 다른 군벌들을 견제했고, 다른 군벌들 역시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합종연횡과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북벌군이 성공을 거두고 양쯔강 중류지역을 지배할 무렵, 국민당 내에서는 국민정부 수도를 남쪽에 치우친 광둥에서 중원지역 한복판, 교통의 요충지인 우한으로 이전하자는 논의가 일었다. 그러나 쟝졔스는 자신의 거점인 난창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아니 더 이상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에 끌려 다니기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우한에서는 1926년 12월 국민당중앙 집행위원과 국민정부위원의 임시연석회의가 열렸고, 이 연석회의를 최고직권 수행기관으로 할 것을 결정했다. 그래서 우한정부는 1927년 정초부터 실질적으로 그 직무를 행사하고 있었다. 그해 1월3일에는 국민당주최의 축하대회가 열렸는데, 우한 삼진三鎭 중 하나인 한커우의 영국조계지에서 군중들과 영국육군 사이에 충돌이 벌어져 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분노한 군중들의 항의로 5일에 우한정부가 한커우 영국조계를 회수했고, 뒤이어 6일에는 쟝시성 쥬쟝에서도 영국조계가 중국 측에 접수됐다. 1월11일 쟝졔스가 자기 견해를 밝히고자 우한을 방문했지만, 그곳 인사들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했고 보로딘과 다른 좌파인사들로부터 공개적인 모욕을 받은 뒤 난창으로 돌아갔다. 쟝졔스가 난창으로 돌아간 직후인 2월에 우한정부의 사람들은 국민정부의 우한이전을 결정했다. 이로써 국민당 내 우파는 난창으로 좌파와 공산당은 우한으로 집결함으로써 두 세력은 분명한 대립관계에 놓이게 됐다. 1927년 3월 우한에서 열린 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회 권한을 강화하는 한편,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직위를 폐지하고 쟝졔스를 군사위원회의 위원 가운데 한사람으로 격하했다. 이는 쟝졔스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라 할만 했다. 이에 양자 간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었다. 이때 이런 국면을 결정적으로 뒤바꿔놓을 사건이 상하이에서 벌어졌다.

상하이는 제국주의와 외국자본이 중국에 진출하는 출발점이자 근거지였지만, 1925년 ‘5·30 사건’ 이래로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히 일어났던 국제도시였다. 1927년 2월 상하이노동운동 지도자들은 총노동조합 조직가들의 도움을 받아 이미 인근의 항저우를 점령한 국민혁명군의 도착을 목전에 두고 총파업을 벌였다. 총파업을 주도한 수뇌부에는 중산함사건과 쟝졔스의 당무정리안 등의 조처로 광저우를 떠나 공산당중앙의 지령으로 새로운 활동장소인 상하이로 잠입한 저우언라이가 있었다. 그곳의 군벌인 쑨취안팡의 군대는 이 총파업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팜플렛을 뿌리던 노동자는 그 자리에서 목이 베어졌으며, 거리에서 연설하던 학생 3명도 살해됐다. 결국 총파업은 실패하고 일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다음 달인 3월에 접어들자 국민혁명군은 상하이근교 룽화龍華까지 접근했고, 군벌군대는 3월21일 상하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를 기화로 총공회는 새로 총파업을 지시했다. 3월21일 총파업이 감행되는데, 이번에는 지난번의 실패를 교훈삼아 5,000명의 순찰대가 조직됐다. 순찰대장은 노동자출신 구순장顧順章이었고, 저우가 부대장을 맡았다. 이내 순찰대와 외국군대 간의 교전이 벌어졌는데, 수적으로 열세였던 외국군의 저항은 무력했고, 23일 저녁 무렵에 거의 모든 상황이 끝났다. 그 다음날인 24일에는 노동자들의 ‘임시정부’가 성립했다.

“상하이폭동은 분명히 중국공산당의 지도아래에 있던 상하이 총공회가 중심이 되어 노동자 계급과 소부르주아 대중이 연합해 북벌군에 호응해서 싸운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국민혁명의 과정에서 성장해 혁명의 지도력까지 획득하기에 이른 중국노동자계급의 위치를 부각시킨 상징적 사건이었다.” - [히메다 미츠요시(姬田光義) 외, <중국근현대사> 246쪽]

바로 이날 난징에서는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국민혁명군이 난징에 진입했을 때 혼란 속에서 병사들이 영국과 미국의 영사관이나 교회에 들어가 선교사를 살해했다. 양쯔강에서 대기하고 있던 영국과 미국의 함대는 즉각 자국민보호를 명목으로 난징성내를 포격해 2천 명 이상의 민중과 병사가 살해됐다. 결국 사건직후 도착한 외국의 조사단은 선교사살해가 퇴각하던 펑톈파군벌 소속의 병사가 저지른 것이라는 증거를 찾아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 않고 영국과 미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등 5개국은 쟝졔스에게 항의했다. 기실 이들이 노린 건 쟝졔스가 좌파들로 구성된 우한정부와 계속 협조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 편에 설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었다. 여기에 상하이의 은행가나 상인, 공장주 등 자본가계급을 대표하는 상하이총상회의 회장이 1926년 말 쟝졔스가 있는 난창을 방문해 재정지원을 약속한바 있었다. 당시 상하이의 자본가계급 가운데 일부는 ‘청방靑幇’ 같은 암흑가의 비밀결사와 연결돼있기도 했는데, 청방지도자들은 중국인사회에서 확고한 입지를 가진 성공적인 기업인이기도 했고, 국민당 측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쟝졔스의 선택에 달려있었다.

쟝졔스는 3월말 상하이에 들어왔다. 그는 외국인 조계지역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열강들을 안심시키는 한편, 노동조합 측에게도 역시 그들의 열띤 투쟁과 그 성과를 치하했다. 쟝졔스는 자신의 속내를 감춘 채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렸다. 4월1일에는 중산함사건 이후 유럽으로 도피했던 쟝졔스의 라이벌 왕자오밍이 귀국해 4월6일 공산당의 최고지도자 천두슈를 만났다. 우한에선 ‘왕자오밍을 영입해 쟝졔스에 반대하자迎汪反蔣’는 구호가 넘쳐났다. 왕자오밍과 천두슈는 공동선언에서 국공합작을 계속할 것을 천명했지만, 누가 봐도 우한정부와 쟝졔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었고, 일촉즉발의 위기의식이 양측에 팽팽했다. 그런데도 쟝졔스는 왕자오밍을 만나는가하면 베이징대학의 전 총장 차이위안페이 같은 국민당 중도파인사와 부유한 상하이기업가들, 그리고 두웨성杜月笙 등과 같은 ‘청방’의 지도자들도 만나는 등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쟝졔스는 노동자들에게 우호적인 군대들은 시외로 이동시켰고, 청방의 지도자들은 공진회共進會를 결성해 프랑스조계 형사주임의 집에 본부를 마련하고 있었다. 상하이의 외국인조계에는 3만 명의 외국군대가 사전정보를 입수해 대비하고 있었으며, 상하이시내를 관통하며 흐르는 황푸쟝黃浦江에는 군함 30척이 정박해 미구에 도래할 사태에 언제라도 응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운명의 4월12일 새벽4시 흰 완장을 두르고 푸른 옷 입고 중무장한 공진회 회원들이 노동자들의 집결지를 급습했다. 이 준군사적인 깡패집단은 외국조계당국의 묵인과 원조 하에 움직였고, 이른 새벽 미처 잠이 깨기도 전에 급습당한 노동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노동조합 측 순찰대원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잠깐 새에 제압돼 처참하게 살해됐다. 당시 순찰대부대장인 저우도 후저우회관湖州會館에 있다가 전투 중에 간신히 탈출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당시 쟝졔스와 연합한 군벌 바이충시白崇禧의 군대에 체포됐으나, 황푸군관학교 제자의 도움으로 겨우 탈주할 수 있었다한다.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그 다음날인 13일에는 상하이의 시민과 노동자, 학생들이 대중 집회를 열고 총공회의 보호와 조합파괴자의 징벌을 요구하며 청원단을 구성해 사단사령부로 파견했다. 목적지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기다린 건 무차별 기관총 세례였다. 군인들은 총검을 꽂고 군중 속에 뛰어들어 처참한 살육전을 벌였다. 일순간에 수백 명이 죽고 부상당했다. 그 뒤로도 한동안 체포와 처형이 이어졌고, 상하이시내에서 모든 파업행위가 금지됐다. 이른바 4·12쿠데타로 인해 공산당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많은 노동자들과 공산당원들이 희생됐을 뿐 아니라 그들이 애써 구축해놓은 노동조합 역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붕괴했다. 일련의 사태에 분노한 우한정부는 4월17일 쟝졔스의 당적박탈과 체포령을 의결했다. 쟝졔스는 이를 맞받아 그 다음날인 4월18일 난징에 국민정부를 수립하니, 결국 국민당은 우한정부와 난징정부로 양분됐다. 4·12쿠데타는 정국을 일시에 흔들어놓았다. 이제 노동조합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은 쟝졔스와 국민당우파가 장악한 지역을 넘어 북부의 군벌들 지역에도 반공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이른바 ‘국민연군(이전의 국민군)’의 지도자인 펑위샹은 우한과 난징 양쪽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산시山西군벌 옌시산은 재빨리 쟝졔스와 타협했다. 그리고 장쭤린은 1926년 4월 안후이파 지도자인 돤치루이를 또다시 몰아내고 이미 세력이 약해진 즈리계 군벌을 대신해 최대군벌로 올라섰다. 장쭤린은 4·12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인 1927년 4월6일에 베이징에서 소련대사관을 수색해 그곳에 숨어있던 35명의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한 뒤 처형했는데, 그중에는 중국공산당의 주요한 지도자가운데 한사람이었던 리다자오도 끼어있었다. 한때 ‘붉은 도시’라 불리기도 했던 광저우 역시 리지선李濟深에 의해 공산당원과 혁명적 노동대중에 대한 체포와 학살이 자행 됐고, 그밖에도 우시无錫와 , 창저우常州, 산터우汕頭 등지에서도 ‘청당淸黨’이란 명목으로 백색테러가 자행됐다. 그 밖의 여러 지역에서 파업은 금지되고, 노동조합과 농민협회는 해체됐다. 국민혁명군 내에서도 동요가 일었다. 5월17일 독립 제14단장 샤더우인夏斗寅이 쓰촨군벌 양썬楊森과 함께 우한공격을 선언했고, 곧이어 5월21일에는 국민혁명군 제8군 군장인 탕성즈의 부하인 창사수비사령 쉬커샹許克祥이 후난성 총공회와 성 농민협회, 당 본부, 당 학교 등을 급습해 100명 이상을 살해했다. 5월29일과 6월9일엔 쟝시성 주석 주페이더가 휘하의 국 내부와 성 정부 내에서 공산당원을 추방하려는 사건을 일으켰다.

 

**2-5 제1차 국공합작의 결렬과 북벌의 완성

이제 우한정부는 위기에 처했다. 우한정부를 둘러싼 내외상황은 보기보다 복잡했다. 우선 우한정부의 중추를 이루는 국민당좌파와 공산당은 난징정부와 대립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들과 결별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4·12쿠데타 같은 대가를 치렀음에도 여전히 국민당과의 관계를 유지하려했다. 이것은 우한정부 내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대외적으로는 국공합작을 기획하고 이끌어왔던 코민테른내부의 문제이기도 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1924년 1월에 사망한 레닌의 후계를 놓고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한창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싸움이 군사 전쟁으로 이어진 건 아니고, 주로 이념적인 면에 치우쳐있었는데, 중국혁명에 대한 해석은 양자사이 논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중국혁명의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강조하며 중국공산당이 상하이를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국민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트로츠키는 혁명을 도시중심의 전투라고 봤고 그 주체 역시 프롤레타리아가 중심이 돼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의 정적과 어떤 타협을 볼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도 궁극적으론 쟝졔스를 용인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중국공산당은 독자적으로 혁명을 수행할 역량이 없으므로 국공합작이라는 대전제하에 쟝졔스 입장을 일단 묵인해 그와 타협할 것을 주장했다. 심지어 4·12쿠데타가 일어나기 열흘 전에 스탈린은 이런 연설을 했다.

“국민당은 연합체다. 우익, 좌익, 공산당의 일종의 혁명적 의회다.···· 장졔스는 아마 혁명에 동정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그는 군대를 지도하고 있다. 그는 제국주의자와 싸우기 위해 군대를 지도할 수밖에 없다.···· 쟝졔스는 규율에 따르고 있다. ····· 그런데 왜 쿠데타가 일어난다고 할까.···· 그들은 최후까지 이용되고 레몬처럼 짜내곤 내버려야한다.” - [사에키 유이치(佐伯有一), 노무라 고이치(野村浩一) 외, <중국현대사> 342쪽]

이로써 잇따른 반공발언 등 같은 여러 정황을 볼 때 쟝졔스의 쿠데타의도를 미리 간파할 수 있었음에도 중국공산당 내에 4·12쿠데타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스탈린의 생각과 달리 그의 정적인 트로츠키는 날카로운 직관과 정보 분석을 통해 이미 중산함사건 이래 국민당의 노선전환 등을 예상하고 공산당이 이에 대비하는 동시에 독자 노선을 추구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미 당내에서 입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우한정부 내의 국민당좌파와 공산당은 기본적으로는 협력을 유지하며 어떻게든 우한정부를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27년 5월 우한에서 열린 제5차 전국대표 대회에서는 오랜 토의 끝에 대지주의 땅만을 몰수하는 선에서 논의를 중동무이했다. 이것 역시 바로 직전에 있었던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논쟁 끝에 나온 결론을 반영한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노동자와 농민, 소자본가 계급, 그리고 군인의 소비에트만이 혁명정부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스탈린은 그리할 경우 우한정부 내에서 국민당좌파를 몰아내는 결과가 빚어질 수 있다며 트로츠키 주장을 단호히 거부했다. 스탈린은 친親국민당 군벌들이 국민당을 배반하거나 당시의 혁명적 상황을 깨뜨리지만 않는다면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토지에 손대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중국공산당 측에 전달했다. 결국 공산당의 지도자인 천두슈는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노동자, 농민운동을 통제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것으로 5월21일 후난성에서 1,000여 명의 부하만으로 구성된 비교적 소규모인 쉬커샹의 군대가 노동자와 농민, 학생들을 매일 10회 이상 학살해 이에 분격한 수천 명의 농민군이 무기를 들고 집결했을 때 우한 공산당 중앙위원회로부터 “계획을 중지하고 국민정부가 문제해결을 위해 취할 행동을 기다려 달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현재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천두슈의 이런 조치들에 대해 ‘우익기회주의’ 노선이라 비판한다. 그러나 사실상 천두슈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충실히 실행에 옮긴 것 말고는 아무 잘못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천두슈가 가졌던 중국혁명에 대한 인식 역시 정확하지는 않았다. 곧 당시 공산당은 아직 역량이 미숙했기에 일단 국민혁명은 민족자본가 계급으로 구성된 국민당이 중심이 되고 공산당은 그에 협조해야하며, 공산혁명은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성숙하고 다수의 산업노동자가 나타날 때 가능하다는 견해를 되풀이했다. 따라서 당시는 노동자나 농민들이 자본가계급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투철하지 못한 인식 때문에 공산당은 크나큰 희생을 치러야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모든 게 지나간 뒤에나 내릴 수 있는 것이고,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산당이 주축이 되는 중국혁명은 아직 미성숙 단계에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혼란과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앞서 말한 공산당 제5회 전국대회에 참석한 인원은 5만7,000명에 이르렀다. 공산당이 창당됐던 1921년에 비하면 약 1,000배, 그리고 가장 가까운 1926년 7월의 확대회의에 비하면 4배 정도 증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곧 공산당의 혁명에 대한 올바른 이론과 전망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이를 위해서는 앞으로도 더 많은 시련과 경험이 필요했다. 결국 중국공산당은 한편으로는 국민당 좌파와 제휴를 강화하는 한편, 노동자 농민 대중운동을 더 철저히 수행해나가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추구할 수 없는 모순된 목표였다. 특히 노동자 농민운동이 격화될수록 자본가계급 출신의 우한정부 내 군인과 고급관료들은 동요했고 혁명으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들은 5월에 벌어진 노동자, 농민학살이 공산당 때문에 초래된 재앙이었다고 비난하며, 이런 학살을 용인하는 동시에 군벌세력과의 유대를 강화해나갔다. 이에 따라 공산당 역시 보로딘과 천두슈 같이 국민당과의 통일전선을 유지하기위해 노농운동의 과격화를 억제하는 견해를 가진 쪽과 로이와 마오쩌둥, 취츄바이瞿秋白 등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쪽으로 나뉘었다.

“1927년 5월 우한에서 제5차 대표회의가 열렸을 때 당은 아직 천두슈의 지배하에 있었다. 비록 쟝졔스가 반反혁명을 주도했고, 상하이와 난징에서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지만, 천두슈는 우한의 국민당에 대해 아직도 온건하고 타협적이었다. 주위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익기회주의의 하찮은 자본주의적 정책을 수행했다. 나는 당시 당 정책에 불만이 컸으며 농민운동에 대해서는 더 그랬다. 오늘날 농민운동이 더 철저히 조직화되고 지주에 대한 계급투쟁을 위해 좀 더 철저히 무장돼있었다면, 소비에트가 전국적으로 좀 더 일찍 그리고 훨씬 더 강력하게 발전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 [에드거 스노 <마오쩌둥 자전> 119쪽]

당시 우한정부는 재정적으로도 큰 어려움에 처했다. 한커우 외국기업들은 활동을 정지했고, 자산가들은 현금을 챙겨 한커우를 떠났다. 그에 따라 많은 공장과 상점이 문을 닫아 수천 명이 실직했다. 우한정부는 일상경상비조차 충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져 돈을 찍어냈지만, 은행들은 그 돈을 받지 않았다. 실업이 만연한 가운데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물가는 계속 올라갔다. 그 와중에 난징정부와의 경쟁심에서 우페이푸 군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다. 결국 우한정부는 점차 독자적으로 존립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우한정부는 어쩔 수 없이 난징정부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5월과 6월에 걸쳐 군대내부에서 공산당계열의 장교를 숙청 하고 체포하는 등, 반공적인 사건들을 일으켰다. 그해 6월1일 스탈린은 느닷없이 중국주재 코민테른대표인 보로딘과 이 무렵 코민테른 최고 간부로 선발돼 중국에 파견된 젊은 인도인 공산주의자 M. N. 로이에게 긴급훈령을 전달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농촌혁명 없이는 승리할 수 없으니, 토지혁명을 감행해 지주의 재산을 몰수한다. 그리고 흔들리고 타협하는 국민당지도자들을 타도한다. 새로운 군대를 모으기 위해 2만 명의 공산당원과 학생 사령관 휘하의 5만 명의 ‘혁명적 노동자, 농민’을 동원해 믿음직스런 군대로 보낸다. 또 반동적인 장교를 재편하기위해 혁명재판부를 조직하라.” 당시 보로딘과 로이는 공산당이 직면한 현안들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였다. 6월15일 로이는 보로딘을 견제하고, 국민당 측에게 공산당이 청산돼야할 세력이란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해 이 전문을 우한정부 주석인 왕자오밍에게 보여줬다. 왕자오밍은 일찍이 “청 말에 청년논객이자 혁명가로 명성을 얻고, 일본과 광저우에서 쑨원의 심복으로 일했던” 인물이다. “쑨원의 임종을 지킨 것도 그였고, 지도자의 마지막충고와 가르침을 들은 것도 그였다. 광저우정부의 총리로서 많은 문제에서 공산당과 견해를 같이했지만, 1926년 3월20일 쟝졔스의 중산함쿠데타 이후엔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했던” 어찌 보면 신념이 확고하지 못한 지식인일 따름이었다. 결국 왕자오밍에서 볼 수 있듯이 국민당좌파 인사들은 근본적으로 국민당 내의 우파들과 계급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독자적인 군사력이 취약해 탕성즈 같은 기회주의적 군벌들에 의존해야만했다. 안 그래도 동요하던 우한정부 내의 국민당 좌파는 단번에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제 쑨원의 미망인 쑹칭링宋慶齡(1893~1981)과 덩옌다鄧演達 같은 소수를 제외하고 국민당 좌파들은 연이어 혁명에 등을 돌리고 난징의 쟝졔스와 손잡으려했다. 그래서 왕자오밍은 명목상 국민당좌파와 동맹관계를 맺었으면서, 그 나름의 독자적 노선을 모색하던 펑위샹과 협상을 진행했다. 왕자오밍은 펑위샹에게 그가 우한정부를 지원하는 대가로 공산당세력을 더 견제하기로 약속했고, 펑위샹은 또 쟝졔스를 만나 양측의 중개인역할을 자임했다. 드디어 왕자오밍은 탕성즈의 군대를 북부전선에서 소환하고 7월15일에 국민당 내 공산당세력을 축출한다고 공식발표했다. 코민테른 대표 로이와 보로딘은 이에 앞서 자동차와 트럭을 타고 고비사막을 지나 소련으로 돌아가는 긴 장정에 올랐고, 남았던 공산당원들은 우한을 겨우 빠져나갔다. 이날은 우한정부가 와해되고, 쑨원이 주도해 3년 7개월간 이어졌던 ‘제1차 국공합작’이 붕괴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나(에드거 스노)는 마오쩌둥에게 우한연립정부를 실패케 하고 결국 난징독재정권에 전면적 승리를 안겨준 1927년 공산당실패의 가장 큰 책임이 누구에게 있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마오는 천두슈를 지칭하며 맹렬히 비난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로이는 바보였고, 보로딘은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었고, 천두슈는 무의식적인 배반자였다고 마오는 생각했다.···· 최근 이 시기에 관한 몇몇 중요한 연구가 축적됐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스탈린의 책임을 강조하며, 중국역사학계에서는 공산당의 공식견해를 분석한 자료를 아직 내놓지 않고 있다.” - [에드거 스노 <마오쩌둥 자전> 125~127쪽]

결과적으로 스탈린이 중국공산당에 내린 훈령은 앞뒤가 안 맞는 모순된 것이었다. 그는 당원과 노동자, 농민들이 무장할 것을 명하면서 동시에 국민당과의 합작을 유지하라고 했던 것이다. 대체 어쩌라는 건가? 노동자, 농민운동이 격화되면 지주와 자본가계급으로 구성된 국민당은 자연히 공산당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공산당 총서기였던 천두슈 역시 이 점을 지적하고 불만을 토로한바 있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우경기회주의 노선’을 추구했다는 비판을 받고, 총서기직에서 해임됐다. 이 와중에도 우한정부 붕괴를 한탄하며 국공합작의 기조가 무너진 걸 통렬히 비판한 이가 있었다. 쑹칭링이었다. 우한정부 붕괴직후인 8월에 쑹칭링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고 소련으로 망명한 뒤 1929년 귀국할 때까지 유럽에 머물렀다. “쑨중산의 정책은 지극히 명백하다. 만약 당내의 지도자가 그의 정책을 관철할 수 없다면, 그들은 쑨중산의 진정한 추종자일 수 없으며, 당 또한 이미 혁명의 당이 아니다. 단지 이러저러한 군벌의 도구에 불과하다. 당은···· 민중을 압박하는 하나의 기계, 일종의 도구로 변해, 현재의 노예를 이용해 스스로를 살찌우는 한 마리 기생충이 될 것이다. 우린 중대한 위기에 접어들었다.···· 혁명이란 중국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공산당원들이 떠나간 뒤 왕자오밍과 쟝졔스는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하지만 4·12쿠데타 후 쟝졔스도 잠시 곤란한 상황에 처했었다. 재정적인 어려움이 우한정부만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쟝졔스 역시 일상적 차원에서 자신의 군대를 유지하고 나아가 북벌이라는 거대한 ‘사업’을 진행하기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상하이의 은행가나 기업가들을 쥐어짰다. 기업인들은 정부의 채권을 강매당하거나 거액의 기부금을 할당받았다. 청방단원들은 중국인지역이든 외국인조계든 맘대로 다니며 상인들을 위협하고 강탈했다. 하지만 온갖 명목을 동원해서 자금을 확보하려해도 필요한 만큼의 돈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쟝졔스의 군대는 철도교차지로서 전략적 요충지였던 쉬저우徐州를 차지하려고 벌인 전투에서 군벌군대에 패했다. 여러모로 힘든 상황에서 그해 8월14일 모종의 양해아래 쟝졔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을 일시 사임했다. 그리곤 9월28일 일본으로 건너가 쑹칭링의 동생 쑹메이링宋美齡과의 결혼을 추진했다. 쟝졔스는 그때 이미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고 본처와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았기에 엄밀히 말해 중혼重婚인 셈이었다. 그는 당시 일본에 머물던 쑹씨 자매의 어머니를 만나 오랜 설득 끝에 결혼허락을 받았다. 기독교집안인 쑹씨 가문의 뜻대로 쟝졔스가 ‘기독교를 공부’하기로 약속하고 얻어낸 결혼승낙이었다. 12월1일 상하이로 돌아온 쟝졔스는 쑹메이링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예식은 두 가지로 치러졌는데, 하나는 하버드 출신으로 당시 중국YMCA의 총무로 일하던 데이비드 위[위르장余日章]가 주재한 기독교식 혼례였고, 또 하나는 전 베이징대학총장이며 현 국민당 교육부장인 차이위안페이가 진행한 중국식 혼례였다. 이리해서 그는 쑨원과는 동서가 되고, 국민당재정을 좌우했던 오랜 친구 쑹쯔원과는 처남 매부의 관계를 맺게 됐다. 쟝졔스는 결혼을 통해 당시 중국을 움직이는 중요인사들과 유력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한편 쟝졔스가 하야하고 1927년 9월17일 우한정부 측은 난징으로 돌아가 두 정부의 공식 합작을 선언했다. 이어 1928년 2월1일부터 열린 국민당제2기 4차 중앙위원회전체회의에선 쟝졔스가 다시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복귀하고, 3월엔 중앙정치회의 주석에 취임해서 군軍과 정政의 명실상부한 실권을 거머쥐게 됐다. 국민당을 장악한 쟝졔스는 본격적으로 북벌을 이어갔다. 동맹세력인 펑위샹과 옌시산, 그리고 새롭게 광시를 대표하는 군벌이 된 리쭝런의 군대는 ‘4·12쿠데타’가 일어난 지 만 1년만인 1928년 4월에 공세를 시작했다. 양쯔강 지역에 할거했던 쑨취안팡과 우페이푸의 군대는 이미 1차 북벌로 패배해 양쯔강 이북으로 밀려나있었고, 베이징에서는 펑톈파 장쭤린이 여타 군벌들을 결집해 안국군총사령 安國軍總司令에 취임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했다. 빠르게 북상하던 북벌군은 5월 산둥 지역에서 자국민보호를 구실로 출병한 일본군에 의해 잠시 물러섰다. 쟝졔스의 원래 목표는 북방 군벌세력들이었기에 공연히 일본을 자극할 생각이 애당초 없었다. 4월30일 산둥성의 성도인 지난濟南에 진입한 쟝졔스의 군대는 뜻밖에 일본군의 저항을 받았다. 당시 지난에는 2,000명가량의 일본인들이 거주했는데, 일본은 자국민보호의 명목으로 군사 500명을 파견 하고 있었다. 쟝졔스가 직접 나서서 일본군의 철수를 요청하자 일본 측은 요구를 받아들일 듯이 보였다. 그러나 5월3일 일본군은 돌연 국민당군을 공격했다. 전투가 치열해지자 일본 측은 병력을 증파해 5월11일 국민당군을 시내에서 몰아냈다.

쟝졔스는 베이징입성에 앞서 일본과의 충돌로 더 이상의 손실을 입고 싶지 않았기에 국제 연맹에 그 부당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사태를 중둥무이하고 자신의 군대를 돌려 황허를 건너 서쪽으로 진로를 바꾼 뒤 베이징으로 향했다[지난사건濟南事件]. 일본 측에서는 비록 전쟁 중의 자국민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유야 어쨌건 다른 나라의 영토에서 거리낌 없이 무력행사를 한다는 건 그 국가 주권을 무시한 일일뿐 아니라 내심 그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대륙침략의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과연 불과 4년 뒤 ‘만저우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본격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산둥지역에서의 일본군과의 충돌은 당시엔 작은 해프닝에 불과했지만, 이후 본격 진행될 일본의 중국대륙침략의 전조로 볼 수 있다. 아울러 대세의 흐름을 간파한 일본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지원해온 장쭤린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였다. 베이징에 주둔하는 장쭤린의 군대는 자신들의 근거지인 동북지역과 긴밀하게 연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베이징에 입성하기에 앞서 국민당군은 그 연결루트를 끊기 위해 톈진을 공격하기로 했다. 톈진은 외국조계가 다섯 군데나 있고 외국인들이 많은 투자를 한 곳이기에, 서구열강들은 여기서 분쟁이 벌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 이런 이해관계를 대변해 일본이 앞장서서 장쭤린에게 자신들이 책임지고 국민당군을 막아줄 테니 베이징을 포기하고 동북지역으로 돌아가라고 종용했다. 장쭤린은 백방으로 방책을 구했으나 달리 방도를 찾지 못해 결국 6월2일 결사항전을 선언하며 베이징을 떠났다. 6월4일 오전5시 장쭤린을 태운 기차가 산하이관山海關을 벗어나 펑톈에 도착하기 직전, 만철선과 교차하는 황구툰皇姑屯을 지날 때 엄청난 굉음과 함께 열차가 폭파되고 장쭤린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장쭤린 폭사). 사건 주모자는 일본관동군 고급 참모인 가와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대좌로 알려졌다. 일본으로서는 장쭤린이 동북지역으로 들어오면 그들을 추격하는 국민혁명군도 따라 들어올 테고, 그리되면 동북지역을 노리던 일본에게 큰 위협이 되리라는 판단 하에 이 같은 일을 저지른 것이다. 아울러 장쭤린 사후 동북지역이 혼란에 빠지면 그만큼 자신들 운신의 폭이 넓어질 것이었다.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은 아편중독자로 만저우군 내에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그저 그런 인물로 본 일본군은 애당초 그를 위협거리로 여기지 않았다. 일본 측은 그에게 국민당과 거리를 두면서 ‘만저우’지역의 자치를 유지하라고 종용했다.

그러는 사이 7월6일 쟝졔스는 베이징북쪽 샹산香山의 비윈쓰에 있는 쑨원의 영전에서 북벌 완료를 보고했다. 이제 국민당은 중국전역을 장악한 듯이 보였다. 쟝졔스는 난징이야말로 중국의 유일한 수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 이날이후 ‘베이징’에서 수도를 뜻하는 ‘징京’을 빼고 대신 ‘북쪽의 평화’를 뜻하는 ‘베이핑北平’이란 명칭을 쓰게 했다. 이 명칭은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사용된다. 1928년 10월10일 쌍십절에는 난징에서 새로운 국민정부가 공식출범했고, 쟝졔스는 주석의 자리에 올랐다. 한편 장쉐량은 일시에 면모를 일신하고 놀라운 결단력으로 자기 아버지가 지배했던 동북3성을 난징정권과 통합하는 결정을 단행했다. 그리고 1928년 12월 난징정부에 충성을 서약했다. 이로써 군벌 시대가 정식으로 종언을 고했다.

여기서 이른바 ‘국민혁명’ 시기를 굳이 구분한다면, 1924년 1월~1925년 3월까지 쑨원의 주도하에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던 시기를 ‘제1기’라 할 수 있고,

쑨원 사후에 국민당 집단지도체제가 성립해서 왕자오밍과 쟝졔스의 협력체제로 이행했던 1925년 3월~1926년 3월까지를 ‘제2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국민당이 우한정부와 난징정부로 나뉘어 각축을 벌였던 1926년 3월~1927년 7월 까지가 ‘제3기’가 된다.

 

**2-6 쑹宋씨 세 자매

중국현대사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쑹씨 세 자매는 아이링靄齡과 칭링慶齡, 메이링美齡을 가리킨다. 이들의 아버지는 중국명이 쑹쟈수宋嘉樹(1863~1918년)인 찰스 존스 쑹 또는 찰리 쑹Charles Jones Soong인데, 본래 객가客家출신으로 감리교목사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는 본래 한韓씨였지만 12세 때 자식 없는 삼촌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쑹’씨 성으로 개명했다. 15세 때 미국에서 개신교로 개종해 신학공부를 한 뒤 감리교 선교사가 됐으며, 1886년에 중국에 돌아와 그 이듬해 결혼했다. 뒤에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담배와 면화 등의 사업을 벌여 큰돈을 벌었다. 1894년 상하이에서 쑨원을 만난 뒤 중국 혁명에 관심을 갖게 돼, 쑨원이 이끄는 ‘중국동맹회’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그는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는데, 아들들은 아버지 뒤를 이어 사업가나 금융가로 활동했다. 큰아들인 쑹쯔원宋子文은 국민당정부의 재무부장관과 외무부장관을 역임했고, 둘째아들인 쑹쯔량 宋子良은 뉴욕에서 사업가로 활동했고, 막내인 쑹쯔안宋子安은 홍콩 광둥은행의 은행장을 역임했다. 찰리 쑹의 아들들이 관료나 사업가, 은행가로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던데 반해, 딸들은 중국현대사에 걸출한 족적을 남긴 이들과 결혼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첫째인 아이링은 부유한 은행가이자 국민당정부의 재무부장관을 지낸 쿵샹시孔祥熙와 결혼해 ‘돈을 사랑한 여인’이라 불렸고, 둘째인 칭링은 아버지의 친구인 쑨원의 비서노릇을 하다가 그와 결혼해 ‘중국을 사랑한 여인’이라 불렸다. 또, 딸 가운데 막내인 메이링은 쟝졔스와 결혼해 ‘권력을 사랑한 여인’이라 불렸다. 부자와 결혼해 안락한 삶을 선택한 아이링은 1940년대에 미국에 건너가 평생을 거기서 살다죽었기에 별다른 이야깃거리가 없지만, 칭링과 메이링은 평생 대립하며 살았다. 쑨원이 일찍 죽은 뒤 칭링은 국민당내 좌파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어 쟝졔스와 대립했다. 해방 후에는 내전을 거친 뒤 칭링은 중국본토에 남아 중국공산당을 지지했고, 많은 사회활동을 하다 1959년 국가 부주석에 올랐다. 공산당과의 싸움에 패한 국민당정부를 따라 타이완으로 이주한 메이링은 이후에도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였는데, 1975년 남편 쟝졔스가 죽자 3년 뒤 1978년에 미국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결국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 두 자매는 평생 연락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한다.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황새네 냉탕온탕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