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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문학실

처용가(處容歌) - 처용

작성자대태양/김현수|작성시간11.09.06|조회수602 목록 댓글 0

처용가(處容歌)

東京明期月良 서울 밝은 달밤에

夜入伊遊行如可 밤 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들어와 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다리가 넷이로구나. <1-4행 : 역신의 침범>

二肹隱吾下於叱古 둘은 내 것이지만

二肹隱誰支下焉古 둘은 누구의 것인고?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奪叱良乙何如爲理古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5-8행 : 처용의 관용>

<양주동 현대역>

■핵심 정리

▮지은이 : 처용(處容)

▮갈래 : 8구체 향가

▮연대 : 신라 헌강왕 때

▮성격 : 축사(逐邪-사악함을 쫓음)의 노래

▮표현 : 제유법

▮주제 : 축신(逐神-귀신을 쫓음)

▮의의 : 벽사진경(僻邪進慶-사악한 것은 물리치고 경사로운 것을 맞이함)의 민속에서 형성된 무가(巫歌)

■작품 해설 및 감상

헌강왕이 개운포를 지나는데, 깜깜해지는 변괴가 일자 그 자리에 절을 지어 주기로 하니 어둠이 가셨다. 이 자리에 절을 지으니 망해사이다. 동해 용왕이 이에 감사하고 자신의 아들인 처용을 헌강왕에게 바쳐 서라벌에서 살게 되었다. 처용이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하여 이 노래를 부르니 역신이 감읍하여 처용의 상이 있으면 범접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벽사(僻邪)에 해당하는 것으로, 문이나 지붕에 처용상을 붙이게 된 기원, 즉 문신의 좌정 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배경 설화와 관련지어 작품을 읽어 보자.

이 노래는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신라에 와서 벼슬을 하던 어느 날, 그가 늦게까지 놀고 있는 사이에, 역신이 매우 아름다운 그의 아내를 흠모하여 몰래 동침했다. 집에 돌아와 상황을 안 처용은 이 노래를 부르자 역신은 크게 감복하여 용서를 빌고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귀신을 막았다. 이런 배경 설화를 가진 이 노래에 대한 해석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축사(逐邪) 및 벽사진경(僻邪進慶)의 노래로 이해하는 것이 통설이다. 역신이 처용의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자백하고 퇴각한 내용과 관련하여 무속에서는 아무리 악신(惡神)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김완진 해독-현대어 역

東京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들어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러라.

둘은 내해였고

둘은 누구핸고.

본디 내해다마는

빼앗은 것을 어찌하리오.

■배경 설화

제 49대 헌강왕 때에 서울서 바다 어구까지 집들이 총총 들어선 가운데 초가가 한 채도 없으며 길에는 피리 소리,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고 비바람도 철을 따라 순조로웠다. 어느 때 대왕은 개운포(지금의 蔚州)에 놀이를 베풀었다가 돌아가는 길에 바닷가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일고, 천지가 캄캄하여 앞길조차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괴이하여 좌우에게 물어보니 일관이 여짜옵기를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오니, 무슨 좋은 일을 행하여 이를 풀어야겠습니다.”라고 한다. 그래서 소관 관리에게 칙령을 내려서 용을 위하여 그 근처에 한 절을 세우게 하였는데, 이 칙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다 개었다. 그래서 거기를 개운포(開雲浦)라 불렀다. 동해의 용은 기뻐서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어전에 나타나서 왕의 덕을 찬송하여 노래하고, 음악을 올리며 춤을 추고, 그 한 아들을 왕께 주었다. 함께 서울에 와서 정치를 보좌하게 하였다. 이 용의 아들이 처용이다. 왕은 처용을 오래 멈추어 두기 위해서 아릿다운 아내를 주고, 또 급한 직을 주었다. 처용의 아내는 절세의 미인임으로 역신이 그를 흠모해서 사람의 모양으로 변신을 하고, 어떤 날 밤 그의 집에 이르러서 몰래 한께 자고 있었다. 처용은 바깥에 나갔다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둘이서 함께 자고 있는 지라 자기는 노래를 부르며, 춤추며, 물러나왔다. 이 때에 역신은 형체을 나타내고 처용의 앞에 꿇어 앉아서 “제가 공의 부인을 흠모하여 지금 범했는데, 공이 보시고도 노여워 안 하시고 도리어 노래를 부르시니 이 후로는 공의 화상만 있는 곳이라도 결코 들어가지 않고, 피하리다.” 하고 사죄하였다. 그로부터 나라 풍속에 처용의 화상을 문간에 붙여서 역신의 해를 피하곤 하였다.

處容郞 望海寺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自京師至於海內.比屋連墻,無一草屋.笙歌不絶道路.風雨調於四時.於是大王遊開云浦.(在鶴城西南.今蔚州).王將還駕.畵曷穴於汀邊.忽雲霧冥日壹.迷失道路.怪問左右.日官秦云.此東海龍所變也.宜行勝事以解之.於是束力有司,爲龍刱佛寺近境.施令已出.雲開霧散.因名開雲浦.東海龍喜.乃率七子現於駕前.讚德獻舞秦樂.基一子隨駕入京.輔佐王政.名曰處容.王以美女妻之.欲留其意.又賜級干職.其妻甚美.疫神欽慕之.變爲人.夜至基家.竊與之宿.處容自外至其家.見寢有二人.乃唱歌作舞而退.歌曰.東京明期月良夜入 伊游行如可入良沙寢矣見昆脚鳥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於叱古 二肹隱誰支下焉古本矣 吾下是如馬於隱奪叱良乙何如爲理古.時神現形,跪於前曰.吾羨公之妻.今犯之矣.公不見怒.感而美之.誓今已後.見畵公之形容.不入其門矣.因此,國人門巾占處容之形.以僻邪進慶.王旣還.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曰望海寺.亦名新房寺.乃爲龍而置也.又幸鮑石亭.南山神現舞於御前.左右不見.王獨見之.有人現舞於前.王自作舞.以像示之.神之名或曰祥審.故至今國人傳此舞.曰御舞祥審.或曰御舞山神.或云.旣神出舞.審象其貌.命工摹刻.以示後代.故云象審.或云霜髥舞.此乃以其形稱之.又幸於金剛嶺時.北岳神呈舞.名玉刀鈐.又同禮殿宴時,地神出舞.名地伯級干.語法集云.于時山神獻舞.唱歌云.智理多都波.都波等者,盖言以智理國者.知而多逃,都邑將破云謂也.乃地神山神知國將亡.故作舞以警之.國人不悟.謂爲現瑞.耽樂滋甚.故國終亡.

심화 감상

처용은 동해 용왕의 아들로 헌강왕에 의해 경주에 들어와 벼슬과 아내를 얻었다. 그의 아내가 역신과 동침하는 것을 보고 이 노래를 불렀더니 역신이 물러났다. 뒤에 처용의 화상은 역신을 내모는 기능을 하여 문신(門神)이 되었다. 제1~4구는 밝은 달밤에 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보니 역신이 아내를 범하였더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다. 제5~6구는 다리 둘은 내 것이지만 나머지 둘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말로서 침입자를 나무라는 뜻이 강하게 나타난다. 처용의 갈등과 대결 의식이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시구이다. 제7~8구는 일반적으로 체념으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본디 내 것인데 앗아가다니 될 말인가?’의 강한 저항으로 단념이 아닌 항거의 뜻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역신이 처용의 너그러운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밝히고 물러갔다는 배경 설화의 내용에서 무속에서는 아무리 악한 신이라 하더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우리의 종교․전통 의식과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엿볼 수 있다.




■ 이 노래의 유래

신라 제 49대 헌강왕 때, 대왕이 개운포에 놀러 나갔다가 문득 짙은 구름과 안개가 끼어 길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이는 동해 용왕의 조화이므로 마땅히 용왕을 위해 좋은 일을 하여 그 마음을 풀어 주셔야 합니다.” 했다. 왕은 곧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명하자 안개가 걷히고 구름이 개었으므로 개운포라고 이름 지었다. 이윽고, 동해 용왕이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데리고 헌강왕 앞에 나와 춤을 추며 용궁 음악을 아뢰게 했다. 그 때 용왕의 아들 하나가 헌강왕의 정사(政事)를 보좌하였는데, 이름을 처용이라 했다.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이 흠모하여, 밤에 몰래 들어와 동침했다. 밖에서 놀다가 밤늦게 돌아온 처용은 그 광경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나갔다. 그러자 역신이 감복하여 “내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지금 잘못을 범하였는데, 노하지 않으시니 감격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후로는 맹세코 공의 그림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처용가>의 주술성

<처용가>는 <구지가>에서 <해가>로 이어지는 주술 시가의 맥을 계승하고 있으며, 고려 속요 <처용가>의 모태가 된 작품이다. 향가 <처용가>는 배경 설화에서 독립시켜 놓고 보면 노래 자체에는 주술적(呪術的) 성격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이 노래와 더불어 춤을 춤으로써 역신을 몰아냈다고 한 것으로 보나, 그 뒤에 처용의 화상(畵像)은 역신을 내모는 기능을 하여 문신(門神)이 되었고, 처용의 이야기가 처용무, 처용희 등으로 전승되어 나례(儺禮 : 작귀를 쫓기 위한 의식)에 결부되어 역시 잡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하니, <처용가>는 애초부터 어느 정도 주술적 능력을 발휘했던 노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노래를 남녀 사이의 치정(癡情) 관계를 담은 노래가 아니라 처용의 아내가 병이 들었다가 그 병을 치료한 것을 비유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처용이 동해 용왕의 아들이었다는 말은 그가 동해 용왕을 모신 무당이었다는 뜻이고, 무당이었던 처용은 아내가 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 내고, 이 노래를 불러 아내의 병을 치료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향가 <처용가>와 고려 속요 <처용가>의 비교

신라의 향가 <처용가>는 고려에 와서 궁중의 나례와 결부되어 ‘처용희’, ‘처용무’로 발전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궁중에서 섣달그믐에 구나 의식을 행한 뒤, 내당에서 지당구를 설치하고 노는 놀이 중에 불렀다.

고려 속요 <처용가> 역시 처용이 역신을 몰아내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향가 <처용가>와는 달리 처용의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역신에 대한 분노가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그 가무와 노래가 질병을 몰아내는 주술적 양식으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변모는 향가 <처용가>가 주술적 효력을 발휘해 역신을 물리치는 기능을 발휘하자, 그것을 전승시킨 무당들의 굿이라는 행사에 적합하도록 길게 고쳤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하다.

한편 『악학궤범』에 실려 있는 고려 속요 <처용가>에 향가 <처용가> 중 6구가 한글로 수록되어 있어서 향찰을 해독하는 열쇠 역할을 하였다.



■ 고려 속요 <처용가>

(전략)

東京(동경) 발근 다래 새도록 노니다가

드러 내자리 보니 가라리 네히로새라.

아으, 둘흔 내해어니오 둘은 뉘해이니오.

이런저긔 처용아비옷 보시면

熱病神(열병신)이아 膾ㅅ가시로다.

千金(천금)을 주리여, 처용아바

七寶(칠보)를 주리여, 처용아바

천금 칠보도 말오

열병신을 날자바 주쇼서

산이여 히여 千里外(천리외)에

처용아비 어여려 거져

아르, 열병 大神(대신)의 發源(발원)이샷다.




■ 서술형 ․ 논술형 대비

(1) 이 노래가 여타의 향가와 구별되는 특징을 쓰시오.

노래를 만든 사람이 설화적 인물인데다가, 인간이 아닌 역신을 상대로 한 작품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또 분노와 적개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역신에게 관용을 베풀었다는 점도 일반적 서정시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2) 이 노래는 후대에 전승되면서 어떤 모습으로 변형이 되었는지 서술하시오.

향가 <처용가>는 역신을 歌舞에 의해서 쫓아내는 우리나라 무속의 일면을 보여 주면서, 후대 가면 무속의 근원적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노래는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단순한 무속적 형태를 벗어나, 축사를 위한 의식무(儀式舞) 또는 궁중 연희(演戱)의 형태로 변형되는 과정을 밟는다. 특히 고려의 <처용가>는 신라 <처용가>체 많은 사설이 더해져 극시적(劇詩的) 형태로 개작된 것이고, 따라서 그 내용에서 서정성이 없어지고 서사성이 강조되었다.



(3) 무속 신앙과 관련하여 ‘처용’은 어떤 주술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서술하시오.

<처용가>에서 처용은 직접적으로 역신을 축출하는 주술적 기능을 갖는다. 그러나 민간에서 음력 정월에 동구밖에 내던지던 볏집 인형 제웅처럼 사악을 짊어지고 대신 버려짐으로써 액(厄)을 물리치는 주력(呪力)을 갖기도 한다. 처용과 제웅은 발음 및 축사의 기능이 같으므로 동일시되는데, 이는 원시 사회에서 행해지던 인신공희(人身供犧)의 자취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무속에서 처용의 기능은 벽사진경(辟邪進慶)에 있다.



(4) 마지막 행에 나타나는 ‘처용’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추측하여 쓰시오.

처용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것을 보고도 그 사내를 비난하지 않는다. 이 때 처용의 심리는 슬픔과 체념, 그것을 극복하는 달관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처용의 관용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5) 향가 <처용가>의 구비 전승 과정을 서술하시오.

향가 <처용가>는 향찰로 표기된 기록 문학으로, 아내를 범한 역신에게 관용을 베푸는 처용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것이 고려 시대로 이어지면서 향찰이라는 표기(기록) 형식 대신에 구비 문학의 형태를 따르게 되면서 ‘벽사진경(辟邪進慶)’이라는 민간 풍속의 의미가 보다 강하게 개입된다. 즉 역신을 내쫓는 처용의 의미가 강조되어 축사신(逐邪神)으로서의 처용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처용가>의 구비 전승에는 ‘벽사진경(辟邪進慶)’이라는 처용의 역할이 세시 풍속을 통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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