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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정(鄭瓜亭) 정서
(전강) 내, 님을 그리며 울고 지내더니 (중강) 산 접동새와 난 (처지가) 비슷합니다 (후강) (역모에 가담했다는 나에 대한 참소가 ) 옳지 않으며 거짓이라는 것을 (부엽) 잔월효성(殘月曉星 :지는 달 새벽 별)만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대엽) 넋이라도 님을 함께 모시고(지내고) 싶어라. (부엽) (내 죄를) 우기던 이, 그 누구입니까 (이엽) (나는) 잘못도 허물도 전혀 없습니다 (삼엽) 뭇 사람들의 참소하던 말입니다. (사엽) 슬프구나! (부엽) 님께서 나를 벌써 잊으셨나이까 (오엽)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아!) 님이여, 내 사연 들으시고 다시 사랑해 주소서 ■ 핵심 정리 ▮작자 : 정서(鄭敍) ▮연대 : 고려 의종 때 ▮형태 :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 단연시(單聯時), 유배시 ▮문체 : 처량, 섬세, 애절함 ▮제재 : 임과의 이별 ▮주제 : 임금을 그리는 정, 자신의 결백과 연군의 정 ▮의의 : 고려 가요 중 작자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고, 유배 문학의 효시이며, 또한, 충신 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로서, 후세에 많이 지어진 연군가(戀君歌)의 대종(大宗)이 된다. 향가의 잔영으로 볼 때, 향가의 하한선(下限線)이 12세기까지 내려올 수 있다. ▮출전 : <악학궤범(樂學軌範)> ▮별칭 : '삼진작(三眞勺)' ◘ 작품 해설 ▱ 내 님믈 그리사와 ~ 난 이슷하요이다. '내가 임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요, 또 순편하기는 하나, '나의 임을'로 풀이하는 견해도 있다. 임을 그리워 하며 울고 지내는 서러운 모습을 두견새와 같다고 여기는 작자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 (산) 졉동새 난 이슷하요이다. 나는 산에서 우는 접동새(두견새)와 비슷합니다. 여기서 '접동새'는 한(恨)과 고독의 이미지로 표상되고 있다. 김소월(金素月)의 시 '접동새'와 맥락이 통한다. 여기서 '접동새'와 자신의 처지가 비슷하다고 말을 하고 있다. 접동새는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恨(한)을 상징하는 새이다. 그래서 접동새와 같다고 자신을 말해서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접동새는 '자연의 풍경이나 예술 작품 따위에 자신의 감정이나 정신을 불어넣거나, 대상으로부터 느낌을 직접 받아들여 대상과 자기가 서로 통한다고 느끼는 일'의 '감정이입(感情移入)'의 대상이기도 하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감정이입이란 자신의 감정을 대상 속에 이입시켜 마치 대상이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 때 시적 화자의 정서나 사상을 나타내 주는 사물·정황·사건을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윤동주'의 '별헤는 밤'에서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라는 시구가 있는데 시적 화자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벌레'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접동새'는 시적 화자의 심정을 대신한다는 의미에서 '접동새'에 시적 화자의 '감정이 이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 殘月曉星(잔월 효성)이 아르시리이다. 저기 보이는 저 지새는 달과 새벽별은 나의 결백함을 알 것입니다. 자신의 무고함과 결백을호소하고 있는 대목으로서,'잔월 효성'은 가장 정당하고 공정한 심판자의 표상으로 쓰이고 있다. ▱ 넉시라도 님은 한데 녀져라 아으 몸은 떨어져 있지만 영혼만이라도 임과 함께 가고 싶다는 의미로 충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 대목은 또 다른 고려 가요인 '만전춘 별사(滿殿春 別詞)'와 유사한 내용이다. ▱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임금님의 뜻을) 어긴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우기던 사람, 곧 나를 귀양 보내게 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나를 헐뜯고 우기는 사람에 대한 원망의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 말힛마리신뎌 '뭇 사람들 보고 참소하지 말아 달라'는 청으로 볼 수도 있고, '말씀이 마르다, 즉 할 말이 없다'는 평서문의 의미로 볼 수도 있다. ▱ 슬웃븐뎌 아으 사뢰고 싶구나. 슬프구나, 사라지고 싶구나. ▱ 아소 님하, 아소는 오늘날의 '아서라'라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금지어로서, 원망과 기원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구절이다. ▱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돌려 들으시어 사랑하소서. 임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기원하는 구절로서, 임금이 돌려 들으시어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 또 다른 해석 1 내가 임을 그리워하여 울고 지내더니 산두견과 나는 비슷합니다. 옳지 않으시다 하고 거칠다 하시더라도 진심을 잔월효성이 알으실 것입니다. 넋이라도 임을 한 데 모시고 지내고자 하는데 항거하시는 이 뉘십니까? 과도 허물도 천만 없습니다. 뭇사람들이여 참소 말으소서 혹은 할 말이 없습니다 슬프구나 임께서 벌써 나를 잊으셨습니까? 마십시오, 님이시여, 마음을 돌리시어 다시 사랑해 주십시오 ◙ 또 다른 해석 2 내가 임을 그리워하여 늘 울고 지내더니(늘 울고 있노라니), 저 산접동새와 나는 비슷합니다. 참소의 말이 (참이) 아니며 거짓인 줄을 지새는 달과 새벽별이 아실 것입니다. 죽은 영혼이라도 임과는 한 곳에 가고 싶습니다. 아아, (임의 뜻을) 어기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저 자신이었습니까? 아니면 간신들이었습니까?). (저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은) 뭇 사람의 참소하는 말입니다. 사라지고 싶구나. 아아 임이 저를 (다시 부르시겠다더니) 벌써 잊으셨습니까? 마소서, 임이시여, 들려 들으시어 다시 사랑하소서. ◘ 이해와 감상 우리말로 전하는 고려 가요 중 작자가 확실한 유일한 노래로 주목된다. '고려사'악지에 따르면 작자는 인종과 동서간으로서 오랫동안 왕의 총애를 받아왔는데, 의종이 즉위한 뒤 참소를 받아 고향인 동래로 유배되었다. 이때 의종은 머지 않아 다시 소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오래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에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작자가 귀양에서 풀려난 것은 무신란이 일어나 명종이 즉위한 해였다. 작자의 호를 따서 후세 사람들이 이 노래를 '정과정'이라 하였다. 이 노래는 충신 연주지사로 사람들에게 널리 애송되었으며, 궁중에서도 이를 전악(典樂)으로 보존하여 모두 익히도록 할 정도로 귀히 여긴 고려 가요이다. 고려 가요 중 향가의 잔영으로서 대표적인 작품인데, 작자가 유배 상황에서 임금을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심화 자료 ◖이제현 소악부에 실린 한시◗ 憶君無日不霑衣 억군무일부점의 님 그려 옷을 적시지 않는 날이 없으니, 政似春山蜀子規 정사춘사촉자규 바로 봄산의 자규와 비슷하도다. 爲是爲非人莫問 위시위비인막문 옳거니 그르거니 사람들아 묻지 마오. 只應殘月曉星知 지응잔월효성지 응당 새벽달과 별이 알 것이로다. ◖향가계(鄕歌系) 여요(麗謠)◗ 신라의 향가에서 고려 가요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과도기적 형식의 노래를 총칭하는 개념이다. 고려 때 지어진 노래로 향가적 형식을 띤 '도이장가(悼二將歌), 정서의 '정과정' 등을 말한다. 정과정을 향가계 시가로 보는 이유는 고려 가요의 특징인 '분장 혹은 분연'이 되어 있지 않고, 후렴구가 보이지 않고, 10행(8행과 9행을 한 행으로 본다)으로, 곧 향가의 10구체와 비슷하고, 낙구에 '아소'와 같은 감탄사가 있기 때문이다. ◖삼진작(三眞勺)◗ <세종 실록(世宗實錄)> 권 제3에 '진작속악 곡조명'이라 하였으니, 진작은 곡조 이름임을 알 수 있고,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진작(眞勺)에 一二三四의 종류가 있으니, 이는 곧 소리의 느림과 빠름의 도수이다."고 하였으니 一진작이 가장 느리고, 四 진작이 가장 급한 곡조임을 알 수 있다. ◖'만전춘 별사(滿殿春別詞)'와의 관계 ◗ '악장가사' 소재인 '만전춘' 에 이 노래의 5. 6행과 비슷한 내용이 들어 있다. 넉시라도 님을 녀닛景 너기다니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 제작 동기 및 연대 ≪고려사≫ 악지에 제작 동기와 이제현(李齊賢)의 해시(解詩)가 수록되어 있으며, 우리말 노래는 ≪악학궤범 樂學軌範≫에 전한다. 또, ≪대악후보 大樂後譜≫에는 노래와 함께 곡조도 아울러 표시되어 있다. 우리말로 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작자가 확실한 유일한 노래이다. ≪고려사≫ 악지에 따르면 작자는 인종과 동서 간으로서 오랫동안 왕의 총애를 받아왔는데, 의종이 즉위한 뒤 참소를 받아 고향인 동래로 유배되었다. 이 때 의종은 머지않아 다시 소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오래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이에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작자가 귀양에서 풀려난 것은 무신란이 일어나 명종이 즉위한 해였다. 작자의 호를 따서 후세 사람들이 이 노래를 ‘정과정’이라 하였다. 유배지에서 신하가 임금을 그리워하는 정을 절실하고 애달프게 노래하였다 하여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로 널리 알려졌으며 그 때문에 궁중의 속악 악장으로 채택되어 기녀(妓女)는 물론 사대부 간에도 학습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후대에 정철(鄭澈)의 〈사미인곡 思美人曲〉·〈속미인곡 續美人曲〉 같은 연주지사의 원류가 되었다. 이 노래의 제작 연대에 대하여서는, ① 의종 5∼24년(1151∼1170), ② 의종 5∼11년(1151∼1157), ③ 의종 20년 이후(1166∼?), ④ 의종 24년(1170) 9∼10월 등 여러 견해가 있다. 여기에서 의종 5년이 준거가 되는 것은 이 해가 의종의 아우를 추대하려는 음모에 작자가 가담했다는 참소를 입어 동래로 귀양갔기 때문이며, ≪고려사≫ 악지의 해설을 존중하여 귀양간 이후 상당 기간이 흐른 이후의 어느 시기에 임금의 소환을 기다리며 지은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또, 의종 24년으로 보는 근거는 이 해에 무신의 난이 발생하여 의종이 폐위되고 작자는 소환되기는커녕 다시 거제도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이 때 의종이 축출됨을 슬퍼하는 동시에 자기의 곧은 절개는 변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래의 내용과 ≪고려사≫의 해설이 더욱 일치하므로 앞의 견해가 더 타당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