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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문학실

황조가 - 유리왕

작성자대태양/김현수|작성시간11.09.06|조회수670 목록 댓글 0

황조가

유리왕

翩翩黃鳥 (편편황조) 훨훨 나는 꾀꼬리는

雌雄相依 (자웅상의) 암수 다정히 노니는데

念我之獨 (염아지독) 이여 외로울사 이내 몸은

誰其與歸 (수기여귀) 리오. 뉘와 함께 돌아가리.

- <삼국사기> -

■핵심 정리 ■

▮성격 : 개인적 서정시 ※ 서사시로 보는 견해도 있음

▮표현 : 자연물(꾀꼬리)에 의탁하여 화자의 심정을 우의적으로 표현

대조를 통한 강조의 기법

▮짜임(구성)

제1,2행 : 암수 꾀꼬리의 정겨움

제3,4행 : 짝 잃은 '나'의 외로움

▮중요 시어 및 시구

* 꾀꼬리 → 시적 화자의 처지와 대비되는 자연물

* 외로울사 이내 몸은 → 화자의 정서가 직접 표출된 부분

* 뉘와 함께 돌아가리 → 화자의 외로움의 정서가 집약되어 있는 부분

▮주제 ⇒ 짝을 잃은 외로움(고독)

▮관련작품

▶<청산별곡> → <황조가>의 새는 작중화자가 부러워하는 대상이지만, <청산별곡>의 새는 시적 화자의 감정이 이입된 소재임.

▶<공무도하가>, <가시리>, <서경별곡>, <황진이의 시조>, <진달래꽃> → 이별의 정한을 주제하는 대표적인 국문학작품들.

▮국문학사적 의의 :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서정시

집단적 서사문학에서 개인적 서정문학으로 옮아가는 단계의 작품

▮창작연대 : 유리왕 3년(B.C17년)

■ 배경 설화■

대략 기원전 1세기 경, 동명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2대 왕이 된 유리왕은 송씨를 왕비로 맞았으나 왕비는 1년 후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은 두 여자를 계비(繼妃)로 맞이하였는데, 우리나라 골천 사람의 딸 화희와 한나라 사람의 딸인 치희였다. 이 두 여인은 왕의 사랑을 두고 서로 다투어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은 하는 수 없이 양곡의 동서에 두 궁전을 지어 따로 살 게 하였다.

어느날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이레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두 여자가 심하게 다투게 되었다. 이때 화희가 치희를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한나라의 천한 계집의 몸으로 어찌 이렇게 무례히 구느냐?" 라고 하니, 치희는 부끄럽고 분하여 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이 돌아와 이 말을 듣고 곧 말을 달려 쫓아 갔으나, 치희는 노여워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왕은 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었는데, 때마침 쌍쌍이 노니는 꾀꼬리를 보고 왕이 느낀 바 있어, 황조가로서 외로움을 읊었다.

▮▮‘황조가’에 대한 다른 견해

그동안 학계(學界)에서는 ‘황조가’가, 삽입된 설화와 그 시대상을 고려할 때 서정시냐 서사시냐 하는 문제와 작자가 유리왕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앞에서는 양주동(梁柱東) 이래 학계의 통설이 되어 온 서정시설을 따랐으나 서사시로 보는 견해도 있다. 황조가를 서사시로 해석하면서 화희와 치희의 쟁투를 종족간의 싸움으로 보고, ‘황조가’를 종족간의 상쟁(相爭)을 화해시키려다 실패한 추장의 탄성으로 이해하거나, ‘황조가’의 배경에 설화적인 모습이 있는 것과 화희와 치희의 이름이 토템적임을 들어 이에 동조하는 것이 그것이다.

한편 정병욱(鄭炳昱)은 ‘황조가’는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오던 민요로서 유리왕 설화에 삽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즉 황조가는 형식이나 내용으로 보아 중국의 시경(詩經)과 같은 것으로서 연희석상에서 남녀간의 연정을 읊던 노래의 형태이고, 그 기원은 이미 오래 된 것이며, 따라서 황조가의 작자는 유리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화(禾)’가 벼, ‘치(雉)’가 꿩인데 착안하여 화희와 치희의 쟁투에서 치희가 부끄럽게 여기고 유리왕 곁을 떠났음을 당시의 시대상과 결부시켜, 유리왕 대가 수렵 경제 생활 체제에서 농경 경제 생활 체제로 발전되던 역사적 사실을 신화적으로 투영한 것이라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 밖에도 여러 견해가 있지만, 확실한 논증이 없는 지금 이 황조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정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 시가의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병기(李秉岐) : 원시적 서사 문학 가운데서 축수 또는 기원의 요소적인 부분이 분화 독립하여 서정시로 형성되었는데, ‘황조가’도 그 한 예이다.

임동권(任東權) : 고구려의 민요로서 유리왕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가창했을 따름이다.

정병욱(鄭炳昱) : 이 노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전하는 제례의식(祭禮儀式) 중에서 남녀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 불려진 사랑가의 한 토막이다.

이명선(李明善) : 유리왕의 치희에 대한 개인적인 미련에서 불려진 것이 아니라, 종족간의 상쟁(相爭)을 화해시키려다 실패한 추장의 탄식으로 이해된다.

▮▮‘황조가’의 의의

이 노래는 국문학 발생 초기에 집단 서정(集團抒情) 문학에서 개인 서정(個人抒情) 문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의 작품으로 현전(現傳)하는 고구려 최고(最古)의 서정시이다.

이 노래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임금일지라도, 실의(失意)에 처했을 때 가지게 되는 그 슬픔이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허탈해진 상태에서 대조적으로 즐겁게 노니는 황조를 보았을 때 나온 이 노래는 쓰라린 외로움의 독백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왕이 아닌 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작품 감상 (1)

이 노래는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의 설화에 나오는 삽입 가요다. 4연 4구의 한악부체(漢樂府體)의 정제된 시행으로 한역된 이 노래는 시전(詩傳)의 고시체(古詩體)와 비슷하여 구지가(龜旨歌)보다 후대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구지가가 주술적인 집단 무요(巫謠)의 성격을 띤 시가임에 비하여 이 노래는 고대인의 이별을 소박하게 노래한 개인적 서정시이다. 또한 이 작품은 우리 나라 최초의 서정시로 시심(詩心)이 소박하고 임을 여읜 외로움을 노래한 주제 또한 평이하여 독자에게 강한 호소력을 느끼게 한다.

이 노래의 짜임은 극히 단순하나 완벽한 대칭 구조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짝을 이루어 즐거이 노니는 꾀꼬리와 홀로 있는 사람, 하늘을 나는 가벼움과 외로운 심사의 무거움, 그리고 마지막 구절 뒤의 쓸쓸한 여운이 서로 대립하고 중첩되면서 그리움의 간절함과 깊이를 보여 준다. 개인의 감정을 꾀꼬리라는 자연물에 이입시킨 대조의 표현이 돋보인다.

■작품 감상 (2)

이 노래의 소재는 ‘꾀꼬리’라는 자연물이고, 주제는 사랑하던 짝을 잃은 외로움과 슬픔이다. 즉, 주체할 수 없는 실연의 아픔을 꾀꼬리라는 자연물에 의탁(依託)하여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찍이 유리왕은 아버지를 이별하고 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어머니 곁을 떠나 남방으로 방랑하게 되었고, 끝내는 왕비까지 잃게 되어 화희(禾姬)와 치희(雉姬)의 두 계비를 맞이하는 등, 애초부터 정에 굶주리고 있었다. 이러한 그가 두 계비 간의 사랑 싸움으로 치희를 잃게 되자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것은 당연하다. 때마침 정다운 모습으로 펄펄 나는 한 쌍의 꾀꼬리는 두 계비의 시샘과 자신의 갈등이 상징적으로 어우러지면서 그 비애감을 한층 더하게 하였으나, 이 시의 모티브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허탈에 빠진 왕은 나무 그늘에 무심히 앉아 있었다. 때마침 나뭇가지에는 황금빛 꾀꼬리 한 쌍이 서로 부리를 맞대고 정답게 놀고 있었다. 무슨 사랑의 이야기나 나누는 듯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왕은 그 순간 과거의 그 즐거웠던 시절을 생각하며 더욱 뼈저리는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짤막한 이 한 편의 노래에서 우리는 왕으로서의 유리왕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유리왕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그에게서 따뜻한 정감이 흐르는 훈훈함을 맛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참고 ; 유리왕 설화]

유리왕이 기원전 19년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유리(類利) 혹은 유류(孺留)라고 일컬어지는데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 동명왕)의 원자(元子)이고 어머니는 예씨(禮氏)이다. 처음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 장가를 들어 임신이 되고 주몽이 망명한 후에 유리가 태어났다. 유리가 어릴 때에 거리에 나와 놀며 참새를 쏘다가 잘못하여 물을 길어 가던 여인의 물동이를 깨뜨려 여인이 꾸짖기를, 이 아이는 아비가 없어 이같이 미련한 짓을 한다고 하였다. 유리는 부끄러워하면서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내 아버지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다. 그 어미가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보통사람이 아니며 이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으므로 남녘 땅으로 망명하셔서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셨다. 망명하실 때에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만일 사내아이를 낳으면 내가 가졌던 유물을 일곱 모가 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 두었으니 이것을 찾아 가지고 오면 나의 아들로 맞겠다.’고 하셨다.” 유리는 이 말을 듣고 곧 산골짜기에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어느 말 아침, 집에 있노라니까 소나무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가보니 주춧돌이 일곱 모로 되어 있었다. 기둥 아래에서 끊어진 칼 도막을 하나 찾았다. 드디어 이것을 가지고 옥지(屋智), 구추(句鄒), 도조(都祖) 등 3인과 더불어 길을 떠나 졸본(卒本)에 이르러 부왕(父王-주몽)을 뵙고 끊어진 칼을 바치자 왕이 가지고 있던 칼과 맞추어 보니 비로소 한 자루의 칼이 이루어져 왕은 크게 기뻐하며 유리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아, 이 때(기원전 19)에 이르러 왕위를 계승하였다. 【출전】'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 황조가

■ 구지가와 황조가

구지가는 집단가요임에 반해 황조가는 개인적 서정시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구지가는 집단가요(민요)이면서 오랜 세월 동안 민간에 전승되었고 황조가는 중국의 시경(詩經) 작품 중 하나에서 운을 빌려 그대로 지은 복사제품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구지가가 질박한 형식을 띠고 있고 황조가는 세련되게 정제된 형식을 지닌 것을 볼 때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 생각해 볼 문제 ]

1. 이 작품을 특정의 개인이 창작한 우리 나라 최고의 서정시로 평가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

→ * <삼국사기>의 기록을 사실의 진술로 받아들여 <황조가>를 유리왕이 직접 지은 것으로 보는 것.

* 고구려 초엽에는 한(漢)문화와 빈번한 접촉을 가진 계층은 한문을 자유롭게 구사했으므로 <황조가>는 유리왕이 한자로 직접 창작한 것이라 단정하기도 함.

2. 이 작품에서 주제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수사법은 ?

→ 대조법( 황조 ↔ 나, 相依 ↔ 獨 )

3. 작자에게 인식되는 꾀꼬리의 이미지는 ?

→ 정답게 서로 사랑하는 자연물, 님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시키는 존재, 과거를 회상하게 해 주는 매개체, 실연의 아픔을 깨닫게 하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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