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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집(2013.11.1)

율곡(栗谷) 선생을 생각한다/신봉승

작성자들미소|작성시간14.07.31|조회수37 목록 댓글 0

 

율곡(栗谷) 선생을 생각한다
- 한 지식인의 기념비적인 생애 -


1.
율곡 이이가 이루어놓은 태산준령과도 같은 학문에 비한다면
그의 몰년(沒年: 세상을 떠난 해)에 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지워낼
수가 없다. 퇴계 이황이 70세를 일기로 그 빛나는 생애를 마친
것에 비해 율곡 이이는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음이
후학들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율곡 이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고 총명하며 지혜가
숙성해, 일곱 살에 이미 경서(經書)를 통달하고 글을 잘 지었다고
전해진다. 강릉시 죽헌리에서 태어나 8세 때 부모를 따라 아버지
의 고향인 임진강(臨津江) 가, 그의 5대조가 지어 놓은 화석정(花石
亭)이 있는 파주 율곡리로 옮겨왔다. 열세 살에 진사초시(進士初試)
에 합격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고, 열여섯 살에 하늘과도 같은
스승이자 삶의 귀감이었던 어머님 사임당 신씨를 여의자 세상의
허무를 통탄하며 눈물로 3년 상(喪)을 마치고, 명종 9년(1554년)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교에 심취했던 것은 삶에 대한 회의를 풀
고자 하였던 방황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율곡 이이는 1년 만
에 방황을 끝내고 강릉 죽헌리 외가로 돌아와 외할머니와 재회
를 한다.
외할머니의 자애로운 보살핌을 받으면서 율곡 이이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다시 공부에 열중하면서 앞날을 설계한다.
이때 자기를 완성시키는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좌우명으로 삼았
다. 이것은 유학에서 불교에 잠깐 들어갔다가 다시 유학으로 되
돌아온 이후 스스로 큰 결단을 한데서 나온 반성문이나 다름이 없다.
자경문(自警文)의 내용은 이러하다.
제1조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도덕적 노력
을 기우려야 한다.
제2조 마음을 결정하는 데는 먼저 말을 적게 하여야 한다.
제3조 놓아버린 마음을 걷어 들여야 한다.
제4조 계구신독(戒懼愼獨)하여야 한다.
제5조 일보다 생각이 앞서야 하며 실천이 없는 독서는 무용의
학문이다.
제6조 재리(財理)와 영리(營利)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
제7조 할 만한 일이면 정성을 다해야 한다.
제8조 온 천하를 위해서라도 무고한 사람은 한 사람도 희생시켜
서는 안 된다.
제9조 아무리 횡포한 사람이라도 감화시켜야 한다.
제10조 때 아닌 잠을 경계하여야 한다.
제11조 수양과 공부는 완급(緩急)이 없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자신을 도야하는 준엄한 약속이라 하더라도 열아홉 살
어린 나이의 다짐으로는 완벽을 넘어서는 성숙도를 보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율곡 이이는 외할머니와 작별하고
고향인 임진강 가 화정리로 돌아와 성리학(性理學)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해 겨울 별시(別試)에 장원(狀元)하고, 이를 전후하여 과거
때마다 장원을 거듭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란 칭송을 받으면서
그 명성이 거침없이 퍼져나갔다.
명종 19년(1564년),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제수된 것을 시초로
관계에 진출하였고, 선조 3년(1570) 해주 야두촌(海州野頭村)에 돌아
가 학문의 터를 닦으려 하였으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제수 되었다. 그러나 이미 학문의 성취를 이루기
시작하였던 때라 정중한 상소로 다시 사직하고 파주(坡州)에 돌아
와 조선 성리학의 궁구로 일념 하고자 하지만, 통치자(임금)의 주
변에 학문과 경륜 높은 인재가 있고서만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조정이 건재하게 되고, 백성들은 그 건재한 조정에 의지하며 생
업에 종사할 수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선조 7년(1574), 율곡 이이는 군왕의 간곡한 소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황해감사(黃海監司)로 나가 반년 남짓 재직하였으나, 그 후
에도 자주 조정과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면서 대사간(大司
諫), 대사헌(大司憲), 호조판서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
나, 동서로 갈라진 정쟁(政爭)의 갈등이 날로 높아지는 현실에 좌
절감을 느끼게 된다.
선조 8년(1575)에 편찬한 「성학집요(聖學輯要)」는 그의 정치사상
을 정리한 탁월한 저작이었고, 또 다른 역저인 「격몽요결(擊蒙要
訣)」도 획기적인 저술이었다. 「성학집요」가 수기치인(修己治人) 등
제왕학의 조선적 이론서라면, 「격몽요결」은 소학의 이론을 보다
심화하고 조선화한 아이들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두 책 모두
율곡 사상을 집약한 명저(名著)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선조에게도 그의 간곡한 가르침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이 있
었기에 율곡 이이는 때를 가리지 아니하고 상소문을 올려 선조의
선정을 일깨우고자 하였다.
- 삼가 생각하건대 천하의 일에는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습니다.
먼저 그 근본을 다스리는 것은 오활한 듯하나 성과가 있고, 말단만
을 일삼는 것은 절실한 것 같으면서도 해가 됩니다. 오늘날의 일로
써 말한다면 조정을 화합시키고 옳지 못한 정사를 고치는 것이 근
본이고, 병력과 식량을 조달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은 말단입
니다. 말단도 실로 거행해야 하겠지만 더욱 먼저 해야 할 것은 근
본입니다.
선조 14년 4월 1일 다 「선조수정실록」
율곡 이이가 생각하고 있는 임금의 소임과 신하의 소임이 무엇
인지가 여실하게 들어나 있고, 지금의 우리 현실과도 부합되는
글이다.
2.
율곡 이이를 거론하면서 천하의 대상소문 <만언봉사(萬言封事)>
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표제가 말하는 만언(萬言)이 문자 그
대로 만 가지 말이라는 뜻이라면, 그 원문의 길이가 어느 정도인
가를 짐작하게 한다. 임금의 마음가짐을 거론하고, 나라의 정체
성을 거론하며, 지식인(사대부)의 도리를 거론하면서 때로는 고금
의 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또 때로는 칼날과도 같은 논리
로 현실을 비판하는 이 장문의 상소를 모두 읽자면 때로는 지루
율곡(栗谷) 선생을 생각한다 17
함을 이기지 못할 경우도 허다할 것이라 믿어서 여기서는 발췌에
발췌를 거듭하면서 그 요건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 우부승지 이이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에 관한 것과
재변을 없애고 덕을 진취시키는 것에 대한 설을 극진히 아뢰었다.
그 소에, ʻ신은 삼가 아룁니다. 정사는 시의(時宜)를 아는 것이 귀
하고 일은 실공(實功)을 힘쓰는 것이 중요하니, 정사를 하면서 시의
를 모르고 일을 당하여 실공을 힘쓰지 않으면 비록 성군(聖君)과 현
신(賢臣)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치적(治績)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총명 영의하시고 선비를 좋아하고 백성
을 사랑하시매, 안으로는 음악과 주색을 즐기는 일이 없고 밖으로
는 말달리고 사냥을 좋아하는 일이 없으시니, 옛날 군주들이 자신
의 마음과 덕을 해치는 것들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좋아하시지 않
는다 하겠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노성(老成)한 신하를 믿어 의지하
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 쓰며, 뛰어나고 어진 이를 특별히 불러
쓰시어 벼슬길이 차츰 밝아지며, 곧은 말을 너그럽게 용납하여 공
론이 잘 시행되므로 조야가 부푼 가슴을 안고 지치(至治)를 고대하
고 있으니, 기강이 엄숙해지고 민생이 생업을 즐겨야 당연할 것입
니다.ʼ <중략>
대체로 재이(災異)가 일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이 심원하여 참으
로 측량하기 어려우나 역시 임금을 인애(仁愛)하는 것에 불과할 뿐
입니다. 역사를 두루 살펴보건대 옛날 명철하고 의로운 군주가 큰
사업을 이룰 수 있는데도 정사가 혹시 닦여지지 않으면 하늘은 반
드시 견책을 내 보여 경동(警動)시켰으며, 하늘과 관계를 끊은 자포
자기한 군주에 있어서는 도리어 재이가 없었으니, 이 때문에 재이
가 없는 재이야말로 천하에 가장 큰 재이인 것입니다. 이제 전하의
철하고 성스러우신 자질로 큰 사업을 할 수 있는 지위에 계시고
또 그러한 때를 만났는데도 기강이 이와 같고 민생이 또 이와 같
이 경성(景星)이 날로 나타나고 경운(慶雲)이 날로 일어나더라도 전
하께서는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삼가고 두려워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재변이 거듭 나타나 무사히 지나가는
날이 없으니, 이는 곧 하늘이 전하를 극도로 인애(仁愛)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잘못을 반성하는 일
을 어찌 조금이라도 게을리 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몸을 닦고
행실을 돈독히 하는 것은 무엇을 구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니,
초야에 어찌 작록을 무시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선비의 거취는
본디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작은 벼슬이라도 낮다고 여기
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재능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활용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하께서 현인을 불러들임에 있어서
는 벼슬만 내려줄 뿐, 만나보거나 살피고 시험하여 뽑아 씀으로써
도를 실천하게 하는 실상이 전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천
거되어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부모를 위하여 굴복
하였다는 사람도 있고, 가난 때문에 벼슬한다는 사람도 있고, 다만
성은에 보답하기 위하여 왔다는 사람도 있으니, 도를 실천하기 위
하여 나왔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현인을 구
하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일인데도 결국 헛된 겉치레에 불과한 것
이 되고 마니, 나라를 다스리는 도가 무엇을 통하여 이루어지겠습
니까. <중략>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것이라
고 여기지 마시고, 작은 일이라 소홀히 여기지 마소서. 늘 평소에
도 학문을 중단하지 마시어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선현들의 격언
및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같은 책을 번갈아가며 읽으시고
그 뜻을 깊이 연구하소서. 그리하여 성현의 뜻이 아니면 감히 마음
에 두지 마시고 성현의 글이 아니면 감히 보지 마소서. <이하 략>
선조 16년 4월 1일 자 「선조수정실록」
줄이고 또 줄여도 긴 글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지
도자들이나, 군대의 지휘관, 기업의 총수, 그 밖의 지식인들에게
는 성전(聖典)이 되고도 남을 내용이다. 5백 년 전의 글을 읽으면
서도 오늘의 현실과 비교하게 되고,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난제들이 어디에서 기인되었는가를 여실하게 지적하고 있다.
3.
조선시대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지식인이 세상을 떠나면 「조선
왕조실록」에 <졸기(卒記)>를 등재하여 그 분의 업적을 후대에까지
기린다. 율곡 이이의 졸기는 이러하다.
-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이(李珥)가 졸(卒)하였다.
이이는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인하여 병이
생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었으므로 상이 내의(內醫)를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이때 서익(徐益)이 순무어사(巡撫御史)로 관북
(關北)에 가게 되었는데, 상(上)이 이이에게 찾아가 변방(邊方)에 관
한 일을 묻게 하였다. 자제(子弟)들은 병이 현재 조금 차도가 있으
나 몸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되니 접응(接應)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말하기를,
ʻ나의 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만약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殞命)이다.ʼ
하였다.
억지로 일어나 맞이하여 입으로 육조(六條)의 방략(方略)을 불러주
었는데, 이를 다 받아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甦生)하더
니 하루를 넘기고 졸(卒)하였다. 향년 49세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너무도 놀라서 소리를 내어 슬피 통곡하였
다. 3일 동안 소선(素膳)을 들었고 위문하는 은전(恩典)을 더 후하게
내렸다.
백관의 요우(僚友)와 관학(館學)의 제생(諸生), 위졸(衛卒) ․ 시민(市
民), 그 밖의 서관(庶官) ․ 이서(吏胥) ․ 복례(僕隷)들까지도 모두 달려
와 모여 통곡했다.
궁벽한 마을의 일반 백성들도 더러는 서로 위로하며 눈물을 흘
리면서 말하기를,
ʻ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기도 하다(民生無福矣)ʼ 하였다.
발인(發靷)하는 날 밤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집결하여 전송하
였는데, 횃불이 하늘을 밝히며 수 십리에 끊이지 않았다.
이이는 경중(京中)에 집이 없었으며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
다. 친우(親友)들이 수의(禭衣)와 부의(賻儀)를 거두어 염(殮)하여 장례
(葬禮)를 치룬 뒤 조그마한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다. 그래도 가
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서자(庶子) 두 사람이 있었다. 부인
노씨(盧氏)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죽었는데 그 문에 정표(旌表)하
게 했다.
이이의 자(字)는 숙헌(叔獻)이고 호(號)는 율곡(栗谷)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탄에 잠긴 나머지 잘못 선학(禪學)에 물이 들어 19세
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도(佛道)를 닦았는데, 승려들 간에 생불(生佛)
이 출현했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잘못된 행
동임을 깨닫고 돌아와 정학(正學)에 전념하였는데,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도 도의 큰 근본(大原)을 환하게 알고서 정미하게 분석
하여 철저한 신념으로 힘써 실행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청현직(淸顯職)을 여러 번 사양하였으며,
그 도(道)를 작게 쓰고자 아니하여 해주(海州)의 산중으로 물러가 살
면서 강학(講學)하며 후학(後學)을 교육시켰다.
이에 은병 정사(隱屛精舍)를 세워 주자(朱子)를 사사(祠祀)하여 정암
(靜菴) ․ 퇴계(退溪)를 배향(配享)하여 본보기로 삼았다.
나아가고 물러남과 사양하고 받아들이는 일(出處辭受)을 한 결 같
이 옛 사람이 하던 대로 하는 것을 스스로의 규범으로 삼았다. 어
려서부터 장공예(張公藝)가 구세동거(九世同居)한 것을 사모(思慕)하여
항상 그림을 걸어놓고 완미(玩味)하였다.
이때에 와서 맏형수(兄嫂)에게 신주(神主)를 받들어 함께 살기를
청하여 모시고 아우와 자질(子姪)을 모아 의식(衣食)을 함께 하면서
세시(歲時)와 초하루 보름에는 이른 아침에 찾아 배알(拜謁)하는 등
한결같이《주자가례(朱子家禮)》대로 하였다.
아래로 비복(婢僕)에 이르기까지 참알(參謁)하고 출입하는 데 모두
예식이 있었는데 별도로 훈사(訓辭)를 만들어 언문(諺文)으로 번역(飜
譯)해서 가르쳤으며 규문(閨門)이 마치 관부(官府)와 같았다.
한 당(堂)에 모여 식사를 하고, 연주하고 노래하며 놀 때에도 모
두 예절이 있었다.
당세(當世)에 예의(禮義)를 강구(講究)하여 초상(初喪) 때와 제사(祭
祀) 때에 정성을 다한다고 이름 난 사람이라도 가정교육(家庭敎育)의
예절(禮節)에 있어서는 모두 따를 수가 없었다.
매양 아버지를 일찍 여읜 것을 슬퍼하여 중형(仲兄)을 아버지 섬
기듯이 하여 성심(誠心)과 성의(誠意)를 다하고 게을리 함이 없었다.
그리고 서모(庶母)를 친어머니 섬기듯이 하여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
름에는 시원하게 보살폈으며 저녁과 아침마다 정성으로 문안드렸
다. 또 녹봉(祿俸)도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았는데, 학자들이 그것은
예(禮)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이는 말하기를,
ʻ내 의견이 그러할 뿐인데, 본보기가 될 수는 없다.ʼ
하였다.
조정에 나아가서는 위를 섬김에 있어 갈충(渴忠) 진력(盡力)하였으
며 시골에 물러나 있을 때에도 애타는 심정으로 잊지 못하였다.
전후에 걸쳐 올린 봉장(封章)과 면대하여 아뢴 말들을 보면 그 내
용이 간절(懇切)하고도 강직한데, 치체(治體)를 논함에 있어 규모가
높고 원대(遠大)하여 삼대(三代)의 정치(政治)를 회복하는 것으로 목
표를 삼았다. 폐정(廢政)을 고치고 생민(生民)을 구제(救濟)하고 무비
(武備)를 닦는 것으로 급무(急務)를 삼았다. 그리고 이를 반복해서
시종일관(始終一貫) 한 뜻으로 논계하였는데, 소인(小人)이나 속류(俗
流)의 배척을 당했어도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임금도 처음에는 견제(牽制)를 가하였으나 늦게나마 다시 뜻이
일치되어 은총(恩寵)과 신임(信任)이 바야흐로 두터워지고 있는 때에
갑자기 졸(卒)한 것이다.
이이는 타고난 기품이 매우 고상(高尙)한데다가 수양(修養)을 잘하
고 더욱 높은 경지에 나아갔는데, 청명(淸明)한 기운(氣運)에 온화한
분위기가 배어나오고 활달하면서도 과감(果敢)하였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상황이든 한 결 같이 정성(精誠)되고 신실(信
實)하게 대하였다. 은총과 사랑을 받거나 오해나 미움을 받거나 털
끝만큼도 개의(介意)치 않았으므로 어리석거나 지혜 있는 자를 막론
하고 마음으로 그에게 귀의(歸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시대를 구제(救濟)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에 물러났
다가 다시 조정(朝廷)에 진출해서도 사류(士類)를 보합(保合) 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이 때문에 사심(私心)없이 할 말을
다하다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꺼리는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당인
(黨人)에게 원수(怨讐)처럼 되어 거의 큰 화(禍)를 면치 못할 뻔하
였다.
이이는 인물(人物)을 논하고 추천(推薦)할 때 반드시 학문(學問)과
명망(名望)과 품행(品行)을 위주(爲主)로 하였으므로 진실 되지 못하
면서 빌붙으려는 자들은 나중에 많이 배반하였다. 그래서 세속(世
俗)의 여론(輿論)은 그를 너무도 현실에 어둡다고 지목하였다. 그러
율곡(栗谷) 선생을 생각한다 23
나 이이가 졸(卒)한 뒤에 편당(偏黨)이 크게 기세를 부려 한쪽을 제
거시키고는 조정(朝廷)을 바로잡았다고들 하였다. 그 내부에서 다시
알력(軋轢)이 생겨 사분오열(四分五裂)이 되어 마침내 나라의 무궁(無
窮)한 화근(禍根)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이르러
서는 강토(疆土)가 무너지고 나라가 마침내 기울어지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이이가 평소에 미리 염려하여 먼저 말했던 것이 사실과 부합(符
合)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건의했던 각종 편의책(便宜
策)들이 다시 추후에 채택되었는데, 국론과 민언(民言)이 모두 ʻ이이
는 도덕과 충의의 저인으로 꽉 차 있어 흠잡을 수 없다.ʼ고 칭송하
였다.
저서로 문집과《성학집요(聖學輯要)》・《격몽요결(擊蒙要訣)》․《소
학집주(小學集注)》개정본이 세상에 전해온다.
선조 17년 1월 1일 다 「선조수정실록」
율곡 이이는 수신의 덕목으로 성(誠)을 중요시하여 항상 성심으
로 사람을 대하였다. 가정적으로는 어려운 상항이었음에도 화기
띤 얼굴빛과 명랑함을 유지하여 주변 사람에게 큰 위안을 주는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참 지식인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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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승 극작가·예술원 회원
1933년 강릉 출생.
1957년, 문예지 「현대문학」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옴. 「조선왕조 5백년」, 「이동인의 나라」 등 많은 TV드라마와 역사소설을 썼으며,
서울시 문화상, 위암 장지연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 다수 수상.
전, 추계영상문예대학원 석좌교수. 예술원 회원(현)
E-mail: shinbs33@hanmail.net
율곡(栗谷) 선생을 생각한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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