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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작성자도진|작성시간26.06.17|조회수17 목록 댓글 0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불자들이라면 이에 대한 대답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대자유인’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시비분별을 여의어 중도실상을 바로 보게 하는 수행법 참선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불성을 바로 보아 스스로 부처임을 알면 곧 영원한 행복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 때 나오는 미소가 ‘억겁의 미소’일 수도 있다. 사진은 성각스님의 선화 ‘억겁의 미소’.

일체의 분별과

가식을 버리고

자신의 본성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

스스로 부처임을 알아

부처답게 사는 것

- 사람이 부처님이다

석두 : 그대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약산 :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석두 : 그렇다면 한가로이 앉아있는 것이로구나. 약산 : 한가로이 앉아 있다면, 하는 일이 있는 겁니다.

<선문염송(禪門拈頌)>에 소개된 중국 당나라의 선승 석두희천(石頭希遷)과 약산유엄(藥山惟儼) 사이의 대화다. 매우 짤막한 문답이지만, 선불교의 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법담(法談)이다. 약산은 ‘앉아있다’고 하는 미세한 생각조차 망념(妄念)이라며 무심(無心)을 지향하고 있다. 이렇듯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 없이 하는 것. 일체의 분별과 가식을 버리고 자신의 본성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 스스로 부처임을 알아 부처답게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선(禪)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은 일반적으로 조사선(祖師禪)을 가리킨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깨달음을 이룬 조사들이 행하고 가르친 선을 일컫는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가 싹을 틔우고 6조 혜능스님이 완성했다.

마는 서기 527년 남북조시대에 중국으로 건너와 문자와 형상에 의존하지 않는 무심(無心)의 선법을 펼쳤다. 당시 남조의 양(梁)을 건국한 양무제는 수많은 사찰을 짓고 경전을 편찬하며 ‘불심천자(佛心天子)’를 자처했다. 그러나 달마는 “그러한 공덕은 부질없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며 불교의 진수는 외형이 아니라 본성을 깨우치는 일에 있다고 강조했다.

본성은 불성(佛性)이다. 곧 ‘자기 자신이 부처’임을 인식하는 것이 깨달음인 셈이다. 달마의 법은 2조 혜가(慧可)에게 전해졌고 이후 3조 승찬(承璨)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을 거치면서 숙성됐다. 6조 혜능(慧能)스님이 조사선의 종결자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즉심즉불(卽心卽佛))을 전제로 모든 인간이 부처임을 선언했다.

스님은 <육조단경>에서 “세상 사람들의 성품은 본래 깨끗하다”며 ‘본래부처’를 명확히 했다.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살아간다는 점에서 중생과 부처는 동일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욕심을 내고 부산을 떠니까 부처다. 반면 부처는 마음의 농간으로부터 자유롭다.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임이 없어, 마음이 장벽과 같으면, 능히 도(道)에 들어가리라.(보리달마, <이종입>)”

- 생각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조사선은 단출하고 담백하다. 무념위종(無念爲宗). 무념을 근본으로 삼는다. 생각하되 그 생각이 실체가 아니라 마음이 만든 헛것임을 자각하고, 그 생각에 억압당하지 않으면 거기가 바로 깨달음의 경지라는 것이다.

차별과 편견을 조장하는 이분법적 논리를 극복한다는 취지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내세웠다. ‘지금 이대로가 부처’라는 즉불(卽佛)의 사상은, 일부러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무수(無修)를 추구한다. 열심히 좌선에 몰입하고 있는 마조도일 선사를 보고 “벽돌을 갈아서 거울이 되겠느냐”던 남악회양 선사의 핀잔은 유명하다.

6조 혜능선사 역시 깨달음이라는 목표에 사로잡혀 좌선에만 열중하는 일을 ‘좌착(坐着)’이라 경계했다. 대신 삶의 현장에서 자신이 부처임을 실천하는 동선(動禪)을 강조했다. “일행삼매(一行三昧)란 어느 때에나 걷고 멈추고 앉고 눕는 모든 일상에 항상 직심(直心)을 행하는 것이다<육조단경>.”

따로 부처가 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부처이니 지금 당장 부처의 일을 행하라는 경책이다. 따라서 ‘무수’는 엄밀히 이야기하면 무수지수(無修之修)다. 수행하되 수행이란 상(相)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며, 삶과 수행을 일치시키라는 권고다.

6조 혜능스님 이후 조사선은 분등선(分燈禪)으로 확대됐다.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당나라 말기에서 송나라 초기까지 일어난 분화를 가리킨다. 마조도일과 임제의현은 분등선 시대를 대표하는 종장(宗匠)이다. 전자는 평상심(平常心)을, 후자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설파하며 선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평상심이란 지금 이 순간 흘러가는 마음이며 흘러가는 마음을 붙잡지 않는 마음이다. “평소의 이 마음이 바로 도(道)이다. 짐짓 꾸미지 않고, 이러지 저러니 따지지 않고, 마음에 드는 것만 좇지 않고, 무엇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얽매이지 않고, 평범하다느니 성스럽다느니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마조어록>” 마음에 빗금이라도 긋는 순간, 세상의 절반은 폐허가 된다.

아프리카 학교건립 기금 마련 선서화전에 나온 경봉스님의 선화 ‘달마선사’.

- ‘있는 그대로’를 사는 사람

무위진인(無位眞人)은 평상심으로 사는 사람이다.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선 안 된다. 마음이 나면 갖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지니,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이건 출세간이건 부처도 없고 법도 없다.”<임제록>

결국 세상만사와 삼라만상이 마음놀음임을 확고히 깨달아 만물을 평등하게 바라보고 자비로 대한다면 그가 바로 무위진인이다. “붉은 몸뚱이에 한 사람의 무위진인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 출입한다. 무위진인은 그대 자신이다. <임제록>” 또한 ‘자리 없는 참사람’이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 ‘신분과 처지에 굴하지 않는 사람’으로 의역될 수 있다. 달마도의 서슬파란 침묵은, 어떠한 역경에도 동요하지 않는 무쇠소의 내공을 보여준다.

중국 송대(宋代)에 이르러 조사선은 간화선(看話禪)이라는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정착됐다. 한국불교 대표종단 조계종의 정통수행법이다. 화두를 타파하면 말길이 끊어지고 이른바 ‘맛없는 맛’ 몰자미(沒滋味)를 얻는다. 빈부(貧富) 고하(高下) 시비(是非) 등등의 이분법에 훼손되지 않은 중도(中道) 실상(實相)을 일컫는다.

<무소유>의 법정스님은 이를 ‘텅빈 충만’이라 표현했다. 몸뚱이로서의 ‘나’는 끝내 고통이며 꿍꿍이로서의 ‘나’는 기어이 죄업이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나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이란 화두는 영겁토록 소멸하지 않는 ‘참나’를 겨냥하고 있다.

- ‘선사’였던 부처님

사실 부처님도 선사였다. 부처님이 꽃을 들자 가섭이 빙그레 웃어보였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는 허심탄회한 소통의 진수를 보여준다. <선문염송>엔 또 다른 꽃을 매개로 한 법문이 등장한다. 부처님에게 한 바라문이 찾아왔다. 그는 부처님에게 공양하기 위해 양손에 꽃 두 송이를 들고 있었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했다. “버려라.” 바라문이 왼손에 있던 꽃 한 송이를 버렸다. 다시 부처님이 말씀했다.

“버려라.” 바라문은 오른손의 꽃마저 버렸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또 다시 다그쳤다. “버려라.” 바라문이 말했다. “저는 지금 빈손이거늘 다시 무엇을 버리라는 말씀입니까?” 이에 부처님이 말씀했다. “나는 너에게 꽃을 버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분별심을 일거에 버려야 더 이상 버릴 곳이 없는 그 자리가 생사를 면하는 자리니라.”

이 말에 바라문은 크게 깨쳤다. 일체에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겠다는 생각에마저 집착하지 않는 공공(空空)의 경지. 진정한 자유는, 자유라는 환상과 기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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