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함께할 친구
하루는 아난이 자기생각이 너무 지나치지 않을까
하고 의구심을 가지고 부처님께 아룁니다.
“대덕이시여, 곰곰이 헤아려 보메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성스런 일에 절반에 해당된다고 생각됩니다.
제소견이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처님께서는 이에
“아난아 그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착한 벗이 있고 착한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성스러운 길의 전부 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친구의 중요성을 한층더 강조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마가다라는 마을을 향해 길을 가던중
길가 숲에 깊이 들어가 좌선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때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숲을 이리저리
무엇인가를 찾아다니다
나무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한 여자가 도망가는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사연인즉 젊은 부부들이 동반으로 소풍을 나왔다가
그중 한명의 독신자가 기생을 데리고 나왔는데
노는데 정신이 팔려
기생이 여러 사람들의 값진 물건을 가지고 달아나 버려
그 여인을 찾고 있었던 중입니다.
부처님은 이와같은 사정을 듣고 말씀하시길
“젊은이들이여 달아난 여인을 찾는 것과
자신을 찾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그 말을 듣고 여인을 찿아 헤메는 그들은 제정신이 돌아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라고 대답하고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이해하며
그 자리에서 출가를 하였다고 합니다.”
종교는 현재의 윤택이 아니고
현재의 좋은 일로 이어지는 내세의 평안입니다.
현세의 삶을 끝내고 육도윤회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단순하게 기도하고 윤택만을 기도 한다면
어려운 시간을 가질 필요도 없고
작업장에 나가서 수당을 받고
일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다시 한번더 강조하자면 현실의 문제 보다는
내세의 문제, 성과보다는 안전
눈에 보이는 성과에 급급한 사람들은
즉석복권을 많이 이용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심리가 인내를 요구하는 생활이 싫다보니까
꾸준한 삶을 요구하는 종교생활은
꾸준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법회에도 여러번 빠지게 되고 빠지다 보니
미안해서 못 나오고 그러다 보니
안나오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데
이런 때 옆에서 법회로 이끌어주는
진리의 친구가 있다면 나태해지는
마음을 가다 듬을수 있습니다.
이쯤 우리는 자세가 바뀌어야 하는데
게을러서 좋은 친구를 도움 받을 것이 아니라
내가 올바른 신앙관을 갖고
종교 생활에 변화를 줄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남들에게 좋은 도반이 되어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도 가다듬고
남이 넘어지지 않게 신앙의 기둥이 될수 있음을
아난의 물음에 대답하신
부처님의 뜻을 이해 할수 있어야 합니다.
풀라톤은 “한명의 진정한 벗은 만 명의 친척보다 소중하다”
공자는“ 벗은 먼데로부터 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로마의 철학자 시세로는
“벗은 눈앞에 있지 않아도 거기에 있으며
가난해도 풍족하고 허약해도 건강하고,
또 말로 나타내기 어렵거니와
죽었다고 해도 살아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제 도반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사회에 있는 몸임을 만들어 활동할 시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훌륭한 도반이 되어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부족을 메워줄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좋은 친구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