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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할머니의 텃밭에 가을이 앉았다

작성자박미정|작성시간25.09.25|조회수16 목록 댓글 0

할머니의 텃밭에 가을이 앉았다

가을은 언제나 조용히 찾아온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분명하다. 아침마다 성긴 안개를 몰고 와 땅의 숨결을 차갑게 만들고,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따뜻하지만 금세 스러져가는 저녁놀 속에 묘한 그리움을 남긴다. 나는 올해도 어김없이 할머니의 텃밭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언제나 계절이 가장 솔직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삶의 이치를 배워왔다.

텃밭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넓게 자리 잡은 배추였다. 무수한 잎들이 겹겹이 쌓여 제 몸을 지켜내고 있었다. 구멍 난 잎도 있고, 벌레가 스쳐 간 흔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상처가 오히려 배추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사람의 삶도 이와 같을 것이다. 흠집 없는 삶은 없다. 중요한 것은 상처가 아니라, 그 상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땅에 뿌리내리고 햇살을 받아들이는 배추의 태도일 것이다.

줄지어 선 무잎 사이로 이슬이 맺혀 반짝였다. 아직 땅속에 감춰진 무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두툼한 잎의 생명력은 확실히 뿌리의 건강을 말해주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자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위대한가.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과에만 집착하다가 종종 삶의 본질을 놓치곤 한다. 그러나 무는 땅속에서 묵묵히 자라며, 때가 되면 그 단단한 몸을 드러낸다. 기다림은 언제나 헛되지 않다는 것을, 무밭은 조용히 가르쳐준다.

밭 한쪽에는 큼지막한 호박이 누워 있었다. 덩굴은 이미 여기저기 뻗어가고 있었고, 그 길 끝에서 호박은 땅의 품을 의지하며 자라고 있었다. 할머니는 늘 호박은 얌전하다고 말씀하셨다.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저 제 뿌리를 따라 뻗는 길 위에서 몸을 키운다고. 호박의 삶은 겸손하다. 그러나 그 겸손 속에서 가장 넉넉한 열매를 맺는다. 어쩌면 우리 삶이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 겸손한 넉넉함이 아닐까.

텃밭 옆 장독대 위에도 가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빗방울에 젖은 장독은 더욱 진한 갈색을 띠고 있었다. 장독 안에는 세월이 담겨 있다. 콩이 발효되어 된장이 되고, 고추가 숙성되어 고추장이 된다. 그 기다림과 변화 속에 가족의 밥상이 완성된다. 가을의 장독대는 그저 저장의 공간이 아니라, 세월을 발효시키는 철학의 그릇이었다.

밭두렁 사이로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 있었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 소박한 빛깔은 텃밭의 풍경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종종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착각하지만, 꽃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피고, 곧 스러지면서도 풍경 전체를 아름답게 빛내주었다. 진정한 삶의 의미란 아마도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빛나는 것일 것이다.

텃밭 너머로 펼쳐진 벼 이삭은 이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황금빛 물결이 바람에 흔들릴 때, 나는 할머니의 미소를 떠올렸다. 늘 구부정한 허리로 밭을 돌보시던 모습, 그러나 그 손길에서 피어난 수확의 기쁨. 가을의 들녘은 그 자체로 경건했다. 땅과 사람, 땀과 시간이 빚어낸 풍경은 마치 기도의 대답 같았다.

할머니의 텃밭은 소박했다. 그러나 그 소박함 속에 모든 철학이 있었다. 배추의 상처, 무의 기다림, 호박의 겸손, 장독의 발효, 꽃의 무심함, 벼의 숙연함, 그것들은 모두 삶의 이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가을은 그렇게 앉아 있었다. 화려하지 않게, 그러나 분명한 울림으로.
나는 할머니의 텃밭에서 다시 배운다.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소박하고 첫마음 같은 일상 속에 진실이 숨어 있다. 가을이 앉은 텃밭은 그것을 조용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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