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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백차,청차

[스크랩] 무이암차의 역사에 대하여

작성자매뚜기|작성시간07.09.01|조회수287 목록 댓글 0
천년은 유교가 해석해 주고
만고는 산수차가 설명해 준다...

무이산간을 거니노라면 거울처럼 맑은 구곡계변이나 우뚝 솟은 기암괴봉에서나 가는 곳마다에서 생기발랄하게 성장하고 있는 키 작은 관목을 볼수 있다. 짙은 녹색의 계란형 잎과 회백색 줄기는 청산벽수에 또다른 풍경을 이루어준다. 이것이 바로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암차나무숲이다.

암차라는 명칭은 최초 청나라 말기에 나타난다. 그러나 진정한 중국10대명차의 하나로 된것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세기 90년대후반이다. 지금의 암차는 복건성에서 생산되는 차잎의 제일 대표성적인 것이다. 그림과도 같은 무이산수를 동반하여 전 중국에 알려졌고 나아가서 세계에 알려지고 있다.

암차의 역사는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올라가지만 또한 세월의 흥망성쇠의 과정도 겪었다.

야생차--
무이산차에 관한 문자기재는 한나라의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신농은 백초를 맛보았고 하루사이에 72독(毒)에 중독되였었는데 차로 인하여 해독이 되였다". 신농씨는 5000여년전의 남방 화하제족의 대수령이였다. 역사자료의 기재와 몇년전에 출토한 5000년전의 무이현관(懸棺-높은곳에 걸려있는 관) 및 수장품(隨葬品)으로 볼때 당시의 무이산에는 이미 현지거주민들이 있었으며 무이군이라고 불리우는 부락추장이 있었다. 그들은 남방의 초나라 월나라의 문화영향을 많이 받었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신농씨가 발명한 해독용 차는 빠른 시일내에 무이산에 전파되였다. 전설에 의하면 산중에서 생활하는 노인이 당시의 추장인 무이군에게 차를 선사하였다고 한다. 후에 사람들은 이 노인을 산신으로 모시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때의 차는 야생차로서 암차라고 불리우지 않었다. 이런 야생차는 후에 무이다농들이 차를 채취하는 최초의 견본품이였다.

랍면차(蠟面茶)--
만약, 최초의 차가 다만 병을 고치고 해독을 하는 야생초약이였다면 1000여년전의 당나라에 이르러 무이산차는 휴가와 오락공능을 가진 인공재배차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때의 무이차는 지금의 반발효오룡차가 아니라 "연고(硏膏)"와 "랍면(蠟面)"이라고 불리우는 증청압제차(蒸靑壓制茶)이다. 이런
차는 발효를 시키지 않고 볶지 않는다. 채취한 차잎을 약간 말리고나서 바
로 그릇에 담아 찐후에 눌러서 떡 모양으로 만든다. 마지막으로 말리운다.
마실때에는 차병을 갈아 부스고나서 끓인 물에 우려내서 마시기에 연고차
(硏膏茶)라고 불리웠다. 후에 다예의 발전에 따라 우린후의 찻물이 보기에
걸죽한 죽과 같고 녹인 촛물과 같기에(다른 일견으로는 차병의 표면에 촛물
을 한층 발라 차의 질량을 보호했다고 하여) 별명 랍면차(蠟面茶)이다. 랍면차는 제작공예가 정교롭고 품질이 우수하여 당시의 궁중의 사대부들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북원차(北苑茶)--
5대10국시기, 민왕은 다사(茶事)를 흥행시켰는데 건안부(무이산으로부터 100
여리) 성동의 봉황산에 있는 차상 장정휘에게 속하는 다원을 조정의 소유로
변경시키고 이름을 북원(北苑)이라고 칭하였다. 그리하여 북원차는 왕공귀족이 전문으로 마실수 있는 "공차"로 되였다. 북송왕조가 건립된후 태평흥국원
년에 이르기까지 민나라의 옛 제도를 세습하여 북원을 줄곧 어다원(御茶園)
으로 하였다. 관부에서 생산하는 이런 차는 모두 궁중에 진공하는 차로 되였기에 북원공차라고도 불리웠다. 북송시기 차가 날따라 흥행함에 따라 상류사회가 북원차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기에 북원차원은 인근지역으로 확장되였다. 이런 다원과 가공원은 건계양안을 따라 수백리가 이어졌는데 그중에 무이산도 포괄되였다. 그러나 그때의 무이산차도 북원차의 보충차로 되였기에
무이차도 북원차로 불리우게 되였다. 송휘종은 <대관차론(大觀茶論)>을 저
술하여 북원차에 관하여 논하였기에 북원차라는 명칭이 민북에서 생산되는
차를 일컫는 대명사로 될번 하였다.

건차(建茶)--
송나라시기 무이산은 건주부(당나라시기에는 건안군, 명나라시기에는 건녕
부)의 관할지였고 류역은 민강 상류의 건계였기에 송나라 사람들은 무이산에
서 생산되는 차를 "건차" 혹은 "건계차"라고 불렀다. 이 점은 송대의 많은
명인들의 시사중에서 증명을 얻을수 있다. 소동파의 영차시(詠茶詩)에는
"무이계변속립아, 전정후채상농가(武夷溪邊粟粒芽,前丁后蔡相籠加)"라고
하였고, 벙중엄의 두차시(斗茶詩)에는 "건계관차천하절, 향미욕전수소설
(建溪官茶天下絶, 香味慾全須小雪)"라고 하였으며 주희는 무이차를 "무이고처시봉래, 채취영아수자재(武夷高處是蓬萊, 采取靈芽手自栽)"라고 하였다.
"건차"를 주제로 하는 시사는 아주 많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건차,
건계차, 북원차, 무이차가 거의 하나의 개념이였다. 북원차가 좋다고들 하였지만 북원차의 시조가 도대체 어디 있는지 몰랐을 뿐이다.

원나라시기에 이르러 북원다원은 황폐해지고 무이산에다 어다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무이산차를 계속 건차라고 불렀다.

단차(團茶)--
한가지 알아둬야 할것은 송나라때 이름을 날렸던 "건차"가 지금의 암차와 같
은 지역에서 생산되였지만 가공공예가 완전히 다른 증청긴압녹차이다. 건차의 전신은 랍면차이고 공예가 더욱 정교롭다. 외관은 작고 둥글고 얇은 병차로 얇은 면지(솜종이)로 포장하였으며 포장지에는 용봉도안(龍鳳圖案)이 찍
혀있었다. 하여 용봉단차라고도 불리웠다. 용봉단차는 차잎채취에 조심하고
가공제작에 공을 들였기에 산량이 아주 적었다. 유관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한개의 가공원에서 생산하는 산량이 200~300근에 불과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나라시기 무이구곡계변의 어다원의 최고 년생산량도 900근이였다. 송,원
수백년간 용봉단차는 귀하기를 황금과도 같았고 궁중과 상류사회의 귀족사대부들사이에서만 맛볼수 있었기에 일반 백성들은 그 모양도 볼수가 없었다.
이렇게 사치한 제품이였기에 최후에는 다업의 쇠퇴와 몰락을 맞이하였다. 일년내내 고생한 다농들의 소득은 아주 미소하였다. 생산적극성도 아주 큰 타격을 받었다. 명나라시기에 이르러 다농들은 용봉단차생산을 싫어하여 무이산다원도 대면적으로 황폐해지고 다농들은 사처로 류랑생활을 하였다. 조정에서는 하는수 없이 어다원을 폐제하였는데 수백년간 이름을 날렸던 용봉단차도 그림자를 찾아볼수 없게 되였다. 후에 초청산차제작방법을 유입함에 따라 암차와 홍차제작방법을 발전시켜 무이다업이 점차적으로 생기를 띠게 되였다.

무이차(武夷茶)--
청나라 무이산의 정산소종(正山小種)홍차는 영국여왕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인하여 구미 상류사회의 유행음료로 되였는데 이는 홍차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당시 중국에서 수출하는 홍차는 주요하게 무이산에서 생산된 홍차였기에 구미사람들은 중국차를 무이차라고도 불렀다. 19세기초 영국의 저명한 시인
바이런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 마음이 이렇게 동정심이 풍부하게 변하였거늘, 무이의 홍차에게 도움을 청해보리라"라고 썼다. 전홍, 기홍 및 인도, 스리랑카홍차의 대량적인 생산에 따라 무이홍차의 생산은 줄어들었다. 오히려 암차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무이산의 독특한 지리와 기후환경에서 성장한 차나무는 오룡차를 제작하기에 아주 적합하였다. 향이 진하고 맛이 순한 독특한 오룡차는 민남지구와 조산다객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 일대 사람들이 대만, 동남아로 이주함에 따라 무이산의 오룡차도 해외로 전파되였다. 동시에 민남지역과 대만다업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삽시간에
무이산은 홍차, 녹차, 오룡차가 병존하는 상황을 이루었으며 이런 풍경은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무이차는 모든 무이산지역에서 생산되는 차의 총칭으로 되였다.

암차(岩茶)--
무이산 홍차, 녹차, 오룡차가 병존하지만 그 중에서 품질이 제일 좋은 차는
풍경명암구에서 나는 오룡차이다. 민남안계, 광동봉황 등 지역에서 생산되는 오룡차와 구별하기 위하여 무이산오룡차가 마시기에 특히 진한 특점에 따라 무이오룡차를 엄차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후에 무이산에 현애초암의 지형특점에 따라 무이산에서 생산되는 오룡차를 암차(岩茶)라고 부르게 되였다.
즉 암석위에 자라는 차나무라는 뜻이다. 암차의 일익번창은 무이산다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무이산지>에 의하면 청나라 다업이 최고로 성행할때 하매차시에서 매일 외지로 운송하는 차잎은 300여개 죽배에 달했다고 한다. 광서중기 년 생산량은 8000담(擔)에 이르렀고 가격으로는 70여만은원에 달하였다. 동시에 차나무의 품종과 제품의 명칭도 백가쟁명을 이루었다. 수선, 육계(肉桂), 대홍포, 철나한, 백계관(白鷄冠) 등등 수백가지에 달하였다. 중국다업중에서 오래도록 시들지 않는 꽃으로 되였다. 오늘날, 무이암차는 중국의 10대명차의 하나로 되였으며 국가로부터 원산지보호상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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