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고려) : 강감찬의 귀주대첩

작성자박기훈|작성시간26.06.16|조회수10 목록 댓글 0

귀주대첩

 

거란의 소손녕[소배압(蕭排押)을 말함]이 침입하니, 병사가 10만 명이라 하였다. 당시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가 되었는데, 왕이 명하여 상원수(上元帥)를 삼고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내사사인 박종검(朴從儉)과 병부낭중 유참(柳參)을 판관으로 삼아 군사 20만 8300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에 주둔하게 하였다.흥화진(興化鎭)에 이르러 기병 1만 2000명을 뽑아 산골짜기 안에 병사를 숨기고 큰 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개천을 막아서 기다리다가, 적이 오자 막고 있던 물줄기를 터뜨리고 복병을 일으켜 크게 이겼다. 소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개경으로 나아가자 강민첨이 추격하여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에 이르러 또 크게 이겼고, 시랑 조원(趙元)이 또 마탄(馬灘)에서 공격하여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이듬해 정월 강감찬은 거란병이 개경을 위협하자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에게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게 하고 급히 개경으로 들어가 지키게 하고,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도 또한 군사 3300명을 보내어 지원하였다. 이때 거란이 군사를 돌려 연주(漣州)·위주(渭州)에 이르자 강감찬 등이 숨었다가 공격하여 500여 급을 베었다. 2월에 거란의 병사가 귀주(龜州)를 지나자 강감찬 등이 동쪽 교외에서 맞아 싸우는데 양쪽의 군대가 서로 비슷하여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였다. 그런데 김종현이 군사를 끌고 그곳에 이르니,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서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아군이 기세를 타고 용기백배하여 격렬히 공격하니 거란 병사들이 북쪽으로 달아났다. 아군이 추격하여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니 시신이 들을 덮고 사로잡은 포로, 노획한 말과 낙타, 갑옷, 무기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니 거란이 패한 것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거란의 왕1)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어 소배압을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적을 무시하고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겠는가. 짐이 마땅히 너의 낯가죽을 벗긴 연후에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강감찬이 3군을 거느리고 개선하여 포로와 노획물을 왕이 친히 영파역(迎波驛)에서 맞이하여 채붕(綵棚)을 맺고 음악을 준비하여 장군과 병사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금화팔지(金化八枝)를 친히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고는 왼손으로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잔을 잡아 위로하고 감탄하기를 끊임없이 하니 강감찬이 감사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드디어 역(驛)의 이름을 고쳐 흥의(興義)라 하고 역리(驛吏)에게 관대(冠帶)를 주어 주현리(州縣吏)와 같게 하였다.

-『고려사』권94, 「열전」7 [제신] 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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