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고려) : 윤관의 여진 정벌

작성자박기훈|작성시간26.06.23|조회수13 목록 댓글 0

윤관의 여진 정벌

 

윤관(尹瓘)이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 겸 태자빈객으로 벼슬을 옮겼다. 그가 아뢰기를 “신이 적의 기세를 보니 강성함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여서 마땅히 군사를 쉬면서 대비하여 후일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또 신의 패한 까닭은 적은 기병인데 우리는 보병이라 대적할 수 없어서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건의하여 처음으로 별무반(別武班)을 만들었으니 문무 산관(散官)과 이서(吏胥)로부터 상인과 복예(僕隷) 및 주(州)·부(府)·군(郡)·현(縣)에 이르기까지 무릇 말을 가진 자는 다 신기군(神騎軍)으로 삼았고, 말이 없는 자는 신보군(神步軍)·도탕군(跳蕩軍)·경궁군(梗弓軍)·정노군(精弩軍)·발화군(發火軍) 등에 속하게 했다. 20세 이상인 남자로 과거 응시자가 아니면 모두 신보군(神步軍)에 속하게 하고, 서반(西班)과 여러 진·부(鎭·府)의 군인(軍人)은 4계절마다 훈련하였으며, 또 승도(僧徒)를 뽑아 항마군(降魔軍)으로 삼았다. 마침내 군사를 훈련하며 곡식을 비축하여 다시 군대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고려사』권96, 「열전」9 [제신] 윤관

 

○ 12월에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임하여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에게 부월(鈇鉞)을 하사하여 파견하였다. 을유일에 윤관과 오연총이 동계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에 병사를 주둔하였다. 군사는 모두 17만이었는데 20만이라고 일컬었다. 병마판관 최홍정(崔弘正)·황군상(黃君裳)을 정주(定州)와 장주(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을 속여서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장차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내려고 하니 너희들은 와서 명을 들으라"라고 하였다. 추장이 이를 믿고 고라(古羅) 등 400여 명과 함께 오니, 이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복병을 출동시켜 이를 섬멸하였다. …(中略)…

을미일에 윤관은 5만 3000명을 이끌고 정주 대화문(大和門)으로 나가고, 중군병마 김한충(金漢忠)은 3만 6700명을 이끌고 안륙수(安陸戍)로 나가고, 좌군병마사 문관은 3만 3900명을 이끌고 정주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갔다. 우군병마사 김덕진은 4만 3,800명을 이끌고 선덕진(宣德鎭)과 안해(安海)·거방(拒防) 두 수 사이로 나가고,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竦), 원흥도부서사(元興都部署使) 정숭용(鄭崇用), 진명도부서부사(鎭溟都部署副使) 견응도(甄應陶) 등은 수군 2600명을 이끌고 도린포(道麟浦)로 나갔다. 윤관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을 지나서 반나절을 행군하자 여진은 그 군사의 위엄이 매우 장대함을 보고 모두 도망쳐 달아나 가축들만 들에 널려 있었다. 문내니촌(文乃泥村)에 이르니 적이 동음성(冬音城)으로 들어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자 윤관은 병마검할(兵馬鈐轄) 임언과 최홍정에게 정예병을 거느리고 급히 공격하니 (적들이) 패하여 달아났다. …(중략)…

○ (병신일에) 중군은 고사한(高史漢) 등 35촌을 격파하여, 380명의 목을 베고 230명의 목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다. 우군은 광탄(廣灘) 등 32촌을 격파하여 290급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다. 좌군은 심곤(深昆) 등 31촌을 격파하여 950급을 베었다. 윤관은 대내파지부터 37촌을 격파하여 2120명의 목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았다. 녹사 유영약(兪瑩若)을 보내어 승리를 알리니 왕이 기뻐하며 유영약에게 7품직을 주고, 좌부승지·병부낭중 심후(沈侯)와 내시·형부원외랑 한교여(韓皦如)에게 명하여 조서를 내려 장려하고 위무하였으며 윤관·오연총 및 여러 장수들에게 격려하고 위로하였으며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윤관은 또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어 땅의 경계를 확정하고, 또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를 보내어 터를 보아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성(城) 950칸을 쌓아 영주(英州)라 이름하였고 화곶산(火串山) 아래에 992칸을 쌓아 웅주(雄州)라 이름하였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74칸을 쌓아 복주(福州)라 이름하였으며, 궁한이촌(弓漢伊村)에 670칸을 쌓아 길주(吉州)라 이름하였다. 또 호국인왕(護國仁王)과 진동보제(鎭東普濟) 두 절을 영주성 안에 창건하였다.

-『고려사절요』권7, 예종문효대왕 1 정해 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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