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4. 4-1 오늘 묵상글 등

250511. 묵상글 ( 부활 제4주일. - 주님이 진정 나의 목자라면. 등 )

작성자김 루도비꼬|작성시간25.05.11|조회수69 목록 댓글 0

250511. 묵상글 ( 부활 제4주일.  - 주님이 진정 나의 목자라면.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59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글 일부 : 아직 / 06:12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6:12 추가

 

----------------------------------------------------

 

250511. 부활 제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5.11 05:46

 

- 주님이 진정 나의 목자라면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양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을 우리는 뭐라고 하나요?

 

나의 목자라고 하나요?

 

 

 

물론 신앙인인 우리는 주님을 나의 목자라고 하겠지요.

 

생각으로는 그리고 말로는.

 

그러기에 관건은 실제로 나의 목자이냐? 그것입니다.

 

 

 

그 기준을 오늘 주님께서는 제시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이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 목자라면

 

그분의 양들인 우리는 그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우리는 여기서 알아듣는다는 말을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듣는다.’와 ‘안다.’가 합쳐진 말입니다.

 

 

 

우선 양들인 우리는 목자인 주님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듣기 싫어하지 않고 기꺼이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말씀이 듣기 싫고 그래서 듣지 않는다면 주님의 양이 아니지요.

 

십자가 지라는 말씀은 듣기 싫고 그래서 듣지 않는다면 주님의 양이 아닙니다.

 

 

 

둘째는 다른 말이 더 솔깃하여 주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말은 듣고 주님 말씀은 듣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 말씀을 말씀이 아니라 개소리로 여기기에 무시하고 듣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은 그분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이런 사람에게는 목자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존재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목소리를 알아듣기 전에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봐야 합니다.

 

먼저 나 같은 양들을 속속들이 아시는 착한 목자로 주님을 알아봐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을 안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아시는 주님이 좋습니까?

 

나를 속속들이 아시기에 두렵습니까? 아니면

 

나의 고통과 어려움을 다 이해하시니 감사합니까?

 

 

 

다음으로 우리 양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는 착한 목자로 알아봐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팔아 자기 배를 불리는 거짓 목자와 달리

 

우리를 푸른 풀밭으로 이끄시고 우리 배를 불리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러니 주님을 이렇게 알아뵌다면 우리가 이제 할 것은 목자를 잘 따르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또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양들이라면 생각으로만 또는 말로만

 

주님을 나의 목자라고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아무리 주님, 주님! 하고 불러도 따르지 않으면

 

그분은 나의 목자가 아니고 나는 그분이 양이 아닙니다.

 

 

----------------------------------------------------

 

250511. 부활 제4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의 추방된 부분들을 사랑하기! - 열아홉 번째 주간 실천

 

하느님의 숨

2025.05.10. 15:50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5월 10일 토요일 - 열아홉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유배의 시기를 살면서도 사랑을 살아간다는 것!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통해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법을 가르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로즈메리 와톨라 트로머(Rosemerry Wahtola Trommer)의 시 "내가 유배 보내려 했던 나의 부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우리 자신의 모든 측면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치유의 여정을 표현해 줍니다:

 

 

미안해요. 나는 그대를 쫓아냈다고 생각했어요.

그 길이 더 나아지고,

더 완벽해지고, 더 좋아지고, 더 자유로워 질 줄 알았어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대를 잘라내고,

그대를 내쫓으면, 내가 벽을 충분히 높게

쌓으면, 떠나 보낸 부분들이 더 온전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마치 달콤한 오렌지가

딱딱해진 껍질과 쓴 씨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마치 저 숲이

저 불길의 시퍼런 분노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유배는 효과가 없었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대는 늘 여기에 있었어요, 문의 경첩을 덜컹거리며

문을 두드려 대고,

문틈 사이로 속삭였어요.

나 혼자였으면, 나는 저 벽을 허물 줄도

몰랐을 테고,

그렇게 할 힘도 없었을 거예요.

그 행위는 재앙으로 위장한 은총이었어요.

그러나 이제 벽이 무너졌으니

내가 그대를 품고 싶을 마음을 가르쳐 주는 것도 은총이고,

온화해지도록 나를 이끌어 주는 것도

은총이예요.

여전히 다른 부분을 유배 보내려 하는 나의 부분인

나를 온화해지도록 이끌어 주니까요.

사랑하는 모든 부분에 이름을 붙이도록

초대해 주는 것도 은총이예요.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진솔한지요. 얼마나 인간적인지요.

나는 그대를 나 자신으로 알고

처음에는 원치 않았던 것에 마음을 열고

그것을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여기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을 신뢰하고

그대가 집에 온 것을 환영하는 법을 끊임없이 배우겠다고

약속할게요.

 

 

References

Rosemerry Wahtola Trommer, “Letter to the Parts of Me I Have Tried to Exile,” ONEING 13, no. 1, Loving in a Time of Exile (2025): 52–53. Available in print or PDF download. Poem previously unpublishe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Kryuchka Yaroslav, Untitled (detail), photo, USA, Adobe Stock.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존재들은 깨져 버릴 것이고, 우리가 준비되면 우리는 그 깨진 조각들을 다시 맞추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각자 지극히 고유하고 소중하게 사랑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숨

2025.05.11. 05:44

 

 

 

우리는 가끔씩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혹은 그리스도을 믿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가 특별한 삶을 살아가면서 뭔가 비범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맞는 것이기도 하지만 틀린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보자면 맞는 것이지만, 그런 선한 삶을 살며 행하게 해 주는 근본적인 원천, 즉 하느님 사랑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틀린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착하고 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영웅적인 선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어떻든 간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 즉 규정, 법 등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율법의 제일가는 계명인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하게 말해서 믿음의 결과 혹은 열매이지 믿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의식하며 깨어 있는 마음으로 새겨야 합니다.

 

또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하느님이 주도하시는 하느님과 하나 됨의 길을 제시해 주는 경전이지, 윤리 교과서나 규정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정확한 정의를 아주 정확하게 몇 마디 말씀으로 우리에게 들려 주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믿음은 가장 우선적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들입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목소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각 그 모습대로, 즉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고유한 존재성대로 불러 주시는 목소리이지, 한꺼번에 "이리 오너라!" 하고 말씀하시는 목소리가 아닙니다.

 

 

이와 맥을 같이해서 13세기의 프란치스칸 철학자요 신학자인 존 둔스 스코투스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존재들을 어떤 류(類)나 종(種)으로, 사람들 무리나 소들 무리 등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존재 하나하나를 창조해 주셨으며, 존재 하나하나에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그러나 각기 고유하게 부여해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무리를 볼 때 그 무리의 전체 특징을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무리가 다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어도, 그 무리 안에 있는 존재 하나하나의 고유함을 아시고 사랑하시고 당신 자신처럼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을 창조해 놓으시고 저 멀리서 그저 관망하시면서 "이놈들 어떻게 하나 보자!" 하시는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특히 우리 인간은 하느님 모상을 부여받는 존재로서 그 고유함과 소중함은 하느님의 존재성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정도의 존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이름(존재성)을 다 아실 수밖에 없으시겠지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 저자는 이렇게까지 선언합니다.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요!

 

 

그래서 그분은 당신 사랑 안에서 절대 멸망하지 않는 존재가 되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무한한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 무상의 선물, 즉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알고 깊이 인식하라고 우리를 초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은총과 사랑을 의식하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은총과 사랑에 부당하게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해 주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아니 우리가 부당할 때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더 강한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misericordia - 비참함으로 향하는 마음)입니다!

 

이 진리를 우리가 참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황송해 할 수 있을 때, 그분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서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도 우리가 이루는 선이 바로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선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기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은 우리 믿음의 삶에 있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객의 전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가시도록 내어 맡겨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런 사랑 안에서 우리 하나하나를 불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가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를 당신과 하나로 만드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처럼요. 그러나 이 우리를 당신과 하나가 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여전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함과 소중함을 보존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마틴 부버가 말했듯이, 진정한 사랑은 한 주체와 다른 주체와의 관계성 안에서 서로에게 사랑의 영향을 주고받지만 절대 한 주체가 다른 주체를 자기쪽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는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 됨은 양쪽의 특성이 완전히 혼합되어 결합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하나 됨은 그야말로 사랑의 신비, 즉 한 주체와 다른 주체간의 관계성의 신비입니다.

 

예전에 한 번 소개해 드렸던 토마스 머튼의 글이 이 이해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존재를 소유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그들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맡겨주신다. 그분은 절대로 이 모든 것들을 당신의 소유로 취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이것들을 우리의 것으로 취하여 파괴하지만 말이다.

 

 

그분은 모든 것에게 그들인 바를 끊임없이 주고 계시면서도 그들에게 감사하도록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분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그들이 그분이 주시는 바를 받고, 사랑받으며, 그분에 의해 양육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하느님은 이렇게 해서 그들이 커지고 번창할 때 자연스럽게 찬미받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모든 것을 좋은 것으로 바라보셨을 뿐, 그것들을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누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여기셨을 뿐, 그것들을 원치 않으셨다.

 

 

어제 어떤 분이 "하느님은 대상이 아닌 듯해서요..." 라는 의문 아닌 의문을 제기하셨는데, 그분의 이해도 틀리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고, 또 하느님도 우리 사랑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지요. 물론 제노아의 성녀 가타리나는 하느님을 깊이 관상하던 중 자기 내면 가장 깊은 곳의 하느님을 발견하고 거리로 뛰쳐 나가 이렇게 외쳤다고 하지요. "나의 가장 깊숙한 나는 하느님이다!"라고요.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은 여전히 양쪽의 특성이 완전히 홉합되어 완전히 다른 특성이 되는 그런 결합이 아니라, 하느님과 '내'가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고는 있지만 하나 되어 있는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더 헷갈릴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이런 표현은 과학자나 철학자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성소 주일에 우리는 특별한 성소, 즉 수도 성소와 사제 성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만, 우리가 각자 받은 성소를 제대로 살기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소를 제대로 살 때, 즉 우리가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듣고 그분을 따를 때 이 특별한 성소들도 자연스럽게 증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250511. 부활 제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5.11 05:48

 

 

 

지난주 우리 성당에서는 교구에서 주최하는 꽃봉오리 그림대회가 열렸습니다. ‘성당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는 주제였지요. 어떻게 그리는지 둘러보는데, 크레파스로 열심히 그림 그리는 아이의 모습에서 어렸을 때의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소풍 가서 그림대회가 있었습니다. 크레파스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너무 힘을 주었을까요? 크레파스가 뚝 하고 부러진 것입니다. 그 순간 저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그림대회 간다고 어머니께서 사주신 새 크레파스였거든요. 그런데 가장 큰 이유는 이 크레파스가 부러졌으니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울고 있는 제게 선생님께서 다가오셨고 크레파스 부러진 것 때문에 울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부러져도 그릴 수 있어.”

 

 

 

크레파스가 부러졌다고 색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을 수는 있지만, 별문제 없이 색칠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림을 다 그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부러짐의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병에 걸렸을 때, 실패의 경험을 하게 될 때,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느낄 때 등이 바로 부러짐의 체험을 할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요? 삶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살 수 없는 것일까요? 특히 하느님의 사랑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다면 그럴수록 더 큰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다시 힘을 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오늘은 성소주일로 특별히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한 날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인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에게만 부르심이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충실하면서, 특히 능력과 재주가 많아야 부르심이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 부르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고 부르셨던 제자들 역시 특별하지 않음을, 오히려 부족함이 많았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러짐의 체험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그 안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으면 제대로 응답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부모의 사랑은 완전하다. 그 사랑은 자녀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변하지 않는다(에리히 프롬).

 

 

----------------------------------------------------

 

250511. 부활 제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며, 착한 목자 주일이요 성소주일입니다. 이날 우리는 참으로 귀한 말씀을 듣습니다. 사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목소리들이 혼탁하게 뒤섞여있습니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온갖 뉴스들과 비난비판의 소리들, 그리고 우리 자신 안에서도 요란스런 생각들의 소리가 거세게 들려옵니다. 우리는 이 많은 소리들의 홍수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구별할 줄 알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사도13,47)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던 사도 바오로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던.”(사도 13,52 참조) 제자들이 목자들의 모델로 제시됩니다.

 

<제2독서>에서는 목자인 ‘어린양’의 보살핌으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성전봉헌축제’ 때 벌어진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논쟁을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둘러싸고 윽박지르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28ㄱ)

 

 

 

여기에서, ‘목자’의 특성은 ‘알다’ 와 ‘준다.’ 라는 동사로, ‘양’의 특성은 ‘알아듣는다’ 와 ‘따른다’ 라는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양들’은 들려오는 그 많은 말들 중에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들’이라면, 분명 그 많은 목소리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양들은 어떻게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는가?

 

 

 

그것은 먼저 목자가 양들을 “알고” 사랑하여 불렀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지극한 사랑의 목소리로 양들을 거듭거듭 불렀고, 그 바람에 목자의 목소리가 양들의 귀에 담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목소리를 체험으로 알고 기억하고 있어 알아듣게 된 까닭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들어,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그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너희 하느님께서는 땅 위에 너희를 높여주실 것이다.”(신명 28,1)

 

 

 

그러니 이미 ‘마음에 새겨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신명기>의 ‘쉐마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하느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6,4-6)

 

 

 

그러니 “알다”라는 단어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알아듣는다.”라는 말은 단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 곧 ‘믿음으로 듣는 것’이요, ‘사랑을 깨달아 알아듣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믿음으로 사랑을 받아들인 내면적인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 인격적인 교류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양들은 목자를 따르게 됩니다. “따른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를 넘어서, ‘곁에 있다’는 표현입니다. 곧 ‘곁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믿고 사랑하는 이는 순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명으로 따르면, 더 더욱 사랑을 깊이 깨달아 알아갑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믿고 따르는 이에게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 곧 당신의 생명이신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

 

결국, 이 네 동사는 모두가 관계를 깊이 맺는 진실 된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성소의 길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주님과의 관계를 깊고 진실 되게 맺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말씀을 듣고 체험하면서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당신의 손”은 바로 ‘당신의 권능’을 드러냅니다. 당신의 권능의 손에서 아무도 그분의 양들을 빼앗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잘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지적을 들어봅니다.

 

“그러나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라고 했지,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가진 이는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아무도 우리를 하느님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고, 아무도 우리를 채 갈 없지만, 우리가 게으르다면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예레미야 강해 18,3)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처럼, 스스로 완고함으로 “주님의 목소리”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떨어져 내리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목장의 주인이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그렇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자와 양들도 서로 알아보고 한 몸을 이루며, 목자는 당신의 지체인 양들을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무엇보다도 양들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양들을 구하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

 

 

주님!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서

숨지 않고 피해 달아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 나서서 주님임을 알고

당신 사랑의 목소리 듣게 하소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게 하시고 깨달아 알게 하소서!

깨달아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새기게 하시고 따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을 따름이 제 행복입니다. 아멘.

 

 

----------------------------------------------------

 

250511. 부활 제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여러분은 가장 오래 기억나는 과자가 무엇인가요?” 저는 초코파이와 새우깡이 생각납니다. 오리온 초코파이는 1974년 4월부터 판매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국민 과자의 위상을 지닌 대한민국 제과계를 대표하는 히트 상품입니다. 사실상 오리온 과자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제품입니다. 오리온은 “출시 이래 누적 판매량은 500억 개를 돌파했으며, 누적 매출은 8조 원을 훌쩍 넘어섰다”라고 밝혔습니다. 저도 군대에 초코파이를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리온 초코파이는 51년이 넘은 장수 브랜드입니다. 농심 새우깡은 1971년 12월 대한민국의 식품회사 농심에서 출시한 과자입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새우깡 광고 노래가 있습니다. “손이 가요 손이 가/ 새우깡에 손이 가요/ 아이 손, 어른 손 자꾸만 손이 가/ 언제든지 새우깡 어디서나 맛있게/ 누구든지 즐겨요. 농심 새우깡/” 새우깡은 2023년 기준으로 누적 판매량은 85억 3,500만 봉, 누적 매출액 2조 3천4백억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농심 새우깡은 54년이 넘은 장수 브랜드입니다. 사람들의 입맛은 변해도 이 과자들은 살아남았고, 그 안엔 정성과 철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자도 이렇게 오래 사랑받는데, 신앙은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 가톨릭 신앙,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져 왔을까요?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열두 제자와 함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 13억 8,900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그 뜻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오래되고, 깊고, 넓게 퍼진 브랜드입니까? 한국교회도 1784년에 시작되어, 이제 24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선조들은 성직자도 없고, 성당도 없고, 미사도 없는 상황에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박해 속에서 고향을 떠났고, 재산을 잃었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바쳤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국내 천주교 신자는 597만 675명에 이릅니다. 성직자는 총 5,721명에 이릅니다. 추기경 2명, 주교 40명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오늘 우리는 성당에서 평화롭게 미사 드릴 수 있습니다. 이분들이야말로 신앙의 장수 브랜드입니다. 신앙은 마케팅이 아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생명을 바치게 했고, 세상을 바꾸게 했습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부르십니다. 어떤 이는 사제로, 수도자로, 또 어떤 이는 부모로, 선생님으로, 간호사로, 교사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 이익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이라는 점입니다. 초코파이와 새우깡도 먹는 사람을 생각하며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랑받았습니다. 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자신보다 다른 이를 위해 살아가겠다는 용기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즘 세상은 “나를 위한 선택”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진짜 의미 있는 삶은, 타인을 위한 선택에서 피어납니다. 미국의 작가 조지 엘리엇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을 조용히 바꾼 사람은 역사책에 나오지 않지만, 그들의 선함 덕분에 우리는 지금 숨 쉬고 있다.” 오늘, 이 성소 주일에, 그런 조용한 부르심에 응답한 삶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초코파이와 새우깡에는 손이 갑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마음이 가야 합니다. 성소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가장 의미 있는 길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소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받은 부르심을 돌아보며 묻겠습니다. “주님, 저를 어디로 부르고 계십니까?” 그리고 이렇게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

 

250511. 부활 제4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아휴 영감을 사랑해서 사나.. 미운 정, 고운 정 들었으니 그냥 사는 거지.’ 사랑은 식었지만, 정이라는 것이 들어서 그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시는 분? 정으로 산다는 것이 나쁘게 들리십니까? 조금은 별 볼 일 없고, 조금은 식어버린 감정이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펄펄 끓은 물이라고 한다면 ‘정’은 용광로에서 끓고 있는 붉은 쇳물이라 생각합니다. 물은 쉽게 식지만, 쇳물은 그리 쉽게 식지도, 그리고 끓지도 않습니다. 오랜 시간 가열하기도 하였지만 여러 가지 쇳조각, 그러니까 삶의 여러 가지 모양들이 녹아들었기 때문입니다.

 

부활 이전에 제자들은 주님을 그저 사랑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좋은 모습, 위대한 모습만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했지만 금방 식어버릴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 이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주님의 위대한 모습뿐만 아니라 그분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주님의 삶을 통째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정’이라는 과정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그 앎이 얼마나 불완전한 앎인지 말입니다. 안다고 자부했는데, 그 앎이 틀린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주님의 제자들도 그러했지요. 주님의 죽음 앞에서 ‘어머! 저런 분이었어?’라고 반문합니다. 그리고 다들 떠나지요. 주님은 제자들이 여기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 후에 다시 제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사랑에서 정으로 넘어가도록, 알고, 실망하기도 하고, 또 서로 기쁘기도 하면서 사랑을 넘어 정으로 가도록, 그리고는 마침내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나를 알고, 나도 그들을 안다, 그들은 나를 따른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사랑을 넘어 정의 과정에 들어서길, 또한 우리들 서로서로가 사랑의 과정을 넘어 정의 과정에 들어서길 희망합니다.

 

 

 

 

⭐늘 함께 있는 것.

 

 

들숨과 날숨은 늘 함께 있습니다.

밤과 낮도 함께 있습니다.

내리막과 오르막도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우울함도 함께 있습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우울함이 올라오는 이유는

사랑이 커질수록 다 채우지 못하는 깊은 그림자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우울함을 지나면 다시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우울함은 자기방어입니다.

우울함은 더 이상 마음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려는 자기방어인 것입니다.

 

우울함이 있다고요?

정상 아닐까요? 그대의 사랑이 크기에 우울함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울함을 안아주세요. 조급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우울함 뒤에 다시 사랑이 있음을 자신에게 알려주세요.

 

 

----------------------------------------------------

 

250511. 부활 제4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의 길

 

 

 

경청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고 잘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주님의 소리는 바람이 귀를 스치듯 은밀해서 더욱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아니 듣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소리가 아니라 희생과 고난의 길로 인도하는 말씀이기에 외면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유혹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려면 아주 예민한 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다’는 곧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나와 가깝고 친밀한 내 옆에 있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양보하고 더불어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세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그 사람의 모든 행동과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랑이 시작하는 단계, 그리고 나의 모든 생각과 계획 안에 그 사람이 함께하는 단계, 그리고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해 내가 소유한 모든 것, 삶까지도 내어주는 무한한 사랑의 단계가 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무한한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며 적극적으로 주님의 뜻을 찾는 자세가 필요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을 ‘알고 계시고’ 그 양을 위해 모든 것을 ‘주십니다’.

 

양을 지키는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양들 하나 하나의 이름과 건강은 물론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의 행복과 슬픔, 어려움 등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도 인간의 절망과 슬픔 등 모든 것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슬프다면 배반의 아픔을 겪으신 주님의 슬픔을 생각해 보십시오. 힘겨운 생활로 절망하고 있다면 겟세마니 동산 십자가 위에서 참혹한 절망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신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모든 고통을 겪으신 주님이시기에 우리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을 아시고 위안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떼에게 영원한 생명과 삼위일체의 생명, 그리고 당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신 착한 목자이십니다. 양들이 목자이신 주님의 생명력으로 살아 갈 때 비로소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양과 주인은 하나의 생명이며 그 무엇으로도 나눌 수 없는 사랑으로 결합된 삶과 죽음을 같이하는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영혼을 위협하는 온갖 유혹이 많습니다. 유혹에 빠져 공동체로부터 멀어지고 점점 외로운 양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에서 구원해 줄 진정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나 또한 다른 사람을 이끌어 줄 목자이기도 합니다.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우리의 사제들이, 유일한 목자이며 주님이신 하느님을 본받는 착한 목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저희 삶을 보살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 저희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주님을 따르도록 언제나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깊은 영혼 속에서 울리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2. 주님과 같이 함께 하는 친밀함을 느끼고 있습니까?

3. 우리는 부족하지만 한 가정의 목자이며, 이웃 그리고 어느 공동체의 목자이기도 합니다. 그 곳에서 나는 어떤 목자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

 

250511. 부활 제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소聖召의 여정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삶”

 

 

 

오늘은 계속되는 파스카 축제 계절, 성모성월 5월에 맞이하는 부활 제4주일이자 성소주일입니다. 예전에는 착한목자 주일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여전히 신록의 기쁨, 파스카의 기쁨으로 빛나는 축제같은, 우리의 성소를 확인하는 귀한 날입니다. 끊임없는 부르심과 응답의 성소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찾는 열정에 있습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우리의 참나의 성소는 신록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도 주님의 성소자로서 우리의 신원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떼라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 주님의 백성이요 주님의 양떼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입니다. 성소주일이면 생각나는 유다인 랍비 여호수아 헤쉘의 말과 김춘수의 꽃이란 시입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주님께 불림받음으로 비로소 무명과 익명의 존재가 아닌 존재감 충만한 참나를 살게 되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그대로 주님께 불림받은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꽃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께 불림받아 사랑받으며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고 싶은 것은 인간 누구나의 근원적 갈망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참나의 성소에 우선적으로 확인할 것이 착한목자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 고백처럼 우리의 모든 갈망을 충족시켜 주는 착한목자 주님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알아갈수록 참나를 알아감으로 자존감 높은 참나의 삶입니다. 이런 주님은 나의 운명이자 사랑이 됩니다.

 

 

 

이런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없이 살아가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헛것의 유령같은 삶일 수 있습니다. 허무와 무의미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삶의 의미이자 중심이신 주님없이 어떻게 거칠고 험한 광야인생을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그러니 우선적인 것이 착한목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이런 착한목자 예수님이 아니고 어디서 이런 목자를 만날 수 있을런지요! 가짜 목자는 얼마나 많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주시어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 주님이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주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도 더욱 우리를 용기백배하게 합니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온 세상, 온 역사의 시간이, 또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의 수중에 있습니다. 이런 아버지와 하나인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참 자유, 참 행복, 참 부유의 삶입니다. 그러니 날로 주님과의 깊어가는 일치의 우정이 제일입니다.

 

 

 

둘째, 제자리, 꽃자리에서 주어진 사명을, 책임을 다하는 삶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참나를 깨닫게 하고 마르지 않는 샘솟는 열정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삶을 보면 그가 얼마나 주님과 깊은 관계에 있는지 담박들어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복음선포의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담대한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참 좋은 모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일치의 삶에서 샘솟는 다음과 같은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복음선포의 사명을 다하다가 박해로 쫓겨나면서도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 삶의 자리에서 자기 고유의 몫의 사명과 책임에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은 기쁨과 성령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십니다. 막연한 추상적 사랑이나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셋째, 늘 내적 시선은 천상을 향해야 합니다.

 

지상 순례여정중의 삶임을 한시도 잊어선 안됩니다. 궁극의 희망을 천상에 둘 때 결코 세상 것들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탐욕의 유혹이나 수렁에 빠지지 않습니다. 세상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초연한 이탈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삶을, 존엄한 품위의 삶을 유지할 수 있음도 천상에 궁극의 희망을 둘 때 가능합니다. 바로 제2독서 묵시록에서 천상 성인들의 모습이 우리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바로 이런 천상모습에 내 희망의 닻을 내릴 때 주님의 전사로서 백절불굴, 천하무적,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다. 위에서 묘사되는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천상성인들은 어떤 분입니까? 다음 말씀 꼭 마음에 담아 두시기 바랍니다.

 

 

 

“저 분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분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되었다.”

 

 

 

결코 온실같은 안락한 세상을 살았던 분들이 아니라, 크고 작은 무수한 고난을 겪어 낸, 순교적 삶에 항구했던 성인들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단히 부끄럽게 하고 분발케하는 성인들입니다. 위 말씀에 근거한 다음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저녀성무일도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은 제가 자주 즐겨 바치는 기도입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불림받은 성소자들입니다. 참으로 각자 불림받은 삶의 자리에서 제몫의 사명과 책임에 최선을 다할 때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존엄한 품위의 삶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천상에 희망을 두고 성소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

 

250511. 부활 제4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빼앗기지 않으시는 당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나조차

나를 불신에

허투루 빼앗길지언정

 

나를 믿으시는

당신만은 나를 불신에

결코 빼앗기지 않으시니

 

불신에게 빼앗긴 나를

당신의 믿음으로

늘 새로 다시

찾나이다

 

나조차

나를 절망에

허투루 빼앗길지언정

 

나를 희망하시는

당신만은 나를 절망에

결코 빼앗기지 않으시니

 

절망에게 빼앗긴 나를

당신의 희망으로

늘 새로 다시

찾나이다

 

나조차

나를 탐욕에

허투루 빼앗길지언정

 

나를 사랑하시는

당신만은 나를 탐욕에

결코 빼앗기지 않으시니

 

탐욕에게 빼앗긴 나를

당신의 사랑으로

늘 새로 다시

찾나이다

 

나조차

나를 슬픔에

허투루 빼앗길지언정

 

나를 기뻐하시는

당신만은 나를 슬픔에

결코 빼앗기지 않으시니

 

슬픔에게 빼앗긴 나를

당신의 기쁨으로

늘 새로 다시

찾나이다

 

나조차

나를 죽임에

허투루 빼앗길지언정

 

나를 살리시는

당신만은 나를 죽임에

결코 빼앗기지 않으시니

 

죽임에게 빼앗긴 나를

당신의 살림으로

늘 새로 다시

찾나이다

 

 

----------------------------------------------------

 

250511. 부활 제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교회는 해마다 부활 4주일을 ‘착한 목자 주일’ 혹은 ‘성소주일’로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각자의 성소안에서 주님이 몸소 보여 주신 착한 목자 처럼 사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의 비유는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 임금 안티오쿠스 4세에게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봉헌한 사건 (기원전 164년)을 기념하는 봉헌절과 연결됩니다. 주님은 당신과 양들의 관계를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에 연결시키킵니다. 성전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 한가운데 하느님의 현존이 머무시는 곳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구약성서 저자들은 하느님을 목자로, 이스라엘 백성을 양떼로 곧잘 비유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은 당신 자신을 착한 목자로 소개함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표현히는 성전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봉헌절 축제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성전 구내에서 주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 이다.” 하고 분명히 말씀함으로써 봉헌절의 의미를 완성 하십니다. 이처럼 주님이 하느님의 백성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완전하게 드러내시듯 우리 또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말과 표양으로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도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성소의 핵심은 착한 목자 예수님 처럼 주님을 본받아 완덕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본받는 삶은 무엇보다도 기도와 성서 말씀을 실천하는 데서 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차츰 주님처럼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성서 중 한마디라도 생활화하는 것이, 재미를 위해, 호기심의 만족을 위해, 혹은 헛된 지식을 쌓기 위해 수십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낫습니다. 비록 황홀경을 체험하지는 못할지라도 정신을 집중하여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글 속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을 알아듣도록 힘써야 합니다.

 

초세기 교회에서 성서를 필사하거나 암기하는 것이 당시의 은수자들 사이에서 흔해 행해졌던 수련방법 이었습니다. 초세기 교회에서 처럼 오느날에도 우리 신앙인들이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은 성서를 암기하느냐, 혹은 성서를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생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착한 목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고 어떻게 그분을 본받야 하는지를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당신의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막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에서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닮는 완덕의 삶을 사는 한주간 되시길 빕니다.

 

----------------------------------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조롱하도록 놓아 두시지 않는다

 

이 일은 곧 널리 알려졌다. 부모들은 나를 찾아왔고, 아까도 말한 것처럼, 나는 아이들에게 개별적으로 물어보았다. 나는 맹세코 그들의 진술에 조금의 모순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다.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아이들에게 이 모든 일이 특별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곤경에 빠졌었지요.” 소녀들 중 한 명이 말했다.

 

“그 때 아기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도와 주셨어요." - 그리고 여선생은요? 노르메르트 신부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여류작가가 물었다.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게르트루트 양은 정신병원에 갔음이 분명하다. 학교당국은 이것을 비밀로 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여선생은 계속해서 “그가 왔어! 그가 왔어!” 하고 소리 쳤다. 사람들은 의당 그녀를 그냥 보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나는 그녀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내 수고는 헛되었다. 신부들이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이 완전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 곳에는 종교상의 정신병이 특히 많았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의 신성을 모독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정신이 돌아버렸다. 그러나 나는 미사 때마다 게르트루트 양을 위해 기도했다-그리고 안젤라는 학교를 졸업하여 집에서 어머니를 돕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수녀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 확실하였다. 그리고 내가 갑작스러운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그녀는 더 이상 집에서 만날 수가 없었다.

 

마리아 비노브스카(Maria Winowska)(339)

 

 

----------------------------------------------------

 

250511. 부활 제4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10,27)

 

경험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고양이나 개도 주인의 목소리를 안다고 합니다. 반려견이나 반려묘들은 특히 편할 때보다, 아플 때 잘해 준 주인의 목소리를 더 잘 기억한다고 하더군요. 이처럼 사람이나 동물이나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아픔을 함께하는 목소리의 임자를 알아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10,27)하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목자 또한 자기 양들의 목소리를 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음성의 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문과 같이 성문聲紋이 있으며, 이로써 세상에 완전히 같은 음성의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같은 노래를 어떤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노래하느냐에 따라 다른 감동을 청자에게 주듯이, 어떤 목소리의 색깔을 가진 사람이 강론이나 강연할 때도 다른 감동을 주는 겁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목소리는 아마도 항상 기도하고 감사하며 기쁘게 사셨기에 고통받은 이들에게, 슬피 우는 이들에게 말씀하실 때의 그 목소리는 분명 따뜻하고 부드러운 위로와 희망을 주는 목소리의 소유자가 아니셨을까, 상상해 봅니다. 한 사람의 목소리는 단지 소리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살아온 삶의 무게가 스며들어 있는 품성과 인격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막달레나가 그분을 눈으로 뵙고서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마리아야!’라고 부르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주님이심을 알아보았듯이 우리 또한 자신의 문제로 자기 안에 갇혀 있지만 않다면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예전 제 엄마는 저의 전화를 늘 기다렸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지만 효는 귀로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엄마는 단지 제 목소리를 알아들은 게 아니라 제 목소리를 듣고 제가 미처 표현하지 못한 내적인 갈등과 힘듦 등 세밀한 것까지, 알아 헤아리셨지요. 제가 엄마에 대한 사랑보다 엄마가 저에게 대한 사랑의 앎이 훨씬 깊고 강하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사실은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다고 오늘 아침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양들이 목자의 소리를 알고 목자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보다 목자가 양의 목소리를 알고, 지금 내 양이 무엇을 필요하며 내게 무엇을 요구할지 다 아심은 당신의 양들에 대한 사랑 곧 이해이며 관심이고 배려입니다. 착한 목자가 양들을 잘 알듯이 양들도 그 목자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을 때 목자와 양은 깊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성소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의 소리만 들어도 알고, 멀리서 양의 모습만 보아도 자기 양을 구별합니다. 목자는 양의 체질이나 습관이 어떤지 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체험적인 앎이며 곧 사랑의 앎입니다. 목자가 양을 아는 것처럼 양도 체험적으로 목자와 목자의 사랑을 압니다. 그 사랑을 알기에, 양은 목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특히 자기 목자의 음성을 기억하고 구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사랑의 체험으로 알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지적으로만 알기보다는 인격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알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역시 양처럼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를 충실히 따라가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부족한 허점투성이지만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께 의지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양인 우리는 우리의 약점으로 인해 종종 넘어질 수 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도자가 되시어 평화와 안식을 주시는 분, 삶의 모든 복을 가져다주며 우리를 돌보는 목자이심을 우리는 알고 따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 떼를 돌보는 일을 아버지 하느님한테서 위임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양들을 위해서 끝까지 돌보는 일을 감당하십니다.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이며 성소 주일입니다. 산에 오르는 길은 하나가 아닙니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고 저마다 자신에 적합한 길을 택해 오르는 겁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맞는 길이 무엇인지 아시고 그 길을 가도록 초대하고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성소라고 합니다. 성소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사랑의 길은 부부의 사랑도 있고, 교회와 교우를 사랑하는 성직자 수도자의 사랑도 있습니다. 즉, 부르심 받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생활하는 것이 바로 성소 주일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히 사제와 수도 성소를 위한 주일입니다. 사제와 수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기도하고 저를 포함하여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그 부르심과 직분에 충실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있어 제가 존재할 수 있기에 감사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0,14)

 

 

----------------------------------------------------

 

250511. 부활 제4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부르심을 받아 착한 양의 삶을 /

박윤식 [big-llight] 2025-05-10 ㅣNo.182107

 

 

 

해마다 부활 제4주일은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도 불리는 ‘성소 주일’이다. 聖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뜻한다. 그분 부르심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오늘은 특별히 사제성소의 증진을 포함한 수도자, 선교사 증진을 위해 꾸준히 기도하면서 협력하는 주일이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양은 목자의 소리를 알고 그를 따른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소리를 들어야만 하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내 양들은 내 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라 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를 이끄시는 목자이신 동시에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제는 어떠할까? 그들도 신자들을 이끄는 ‘목자’이지만, 한편으로 예수님을 ‘착한 목자’로 모시는 ‘양’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을 따르는 우리 신자들은 어떤가? 우리들 역시도 양인 동시에 가족을 이끄는 목자요, 사회를 이끄는데 앞서는 '평신도'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도 양 떼인 동시에 목자 신분을 가진다.

 

 

사실 이 성소는 ‘거룩한 부르심’이라는 뜻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충실하면서 자신들 일상생활의 외적인 틀은 변하지 않았던 봉사자들이다. 그들은 주어진 자신들의 생활에 충실하면서도 예수님 뜻과 사랑을 새기면서 실천한다. 이는 ‘넓은 의미의 성소’일 게다. 또 하나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생활과 가족까지 다 버리고 완벽히 새로운 길을 스스로 택해 다른 생활을 택한 제자들이다. 우리는 이를 ‘좁은 의미의 성소‘라고 부른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 두 가지 길은 예수님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첫째 부류는 평신도요, 둘째는 성직자, 수도자들이다. 그런데 오늘 뜻하는 성소는 좁은 의미의 성소이다. 특별히 사제직과 수도 생활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다. 따라서 성소 주일인 오늘은 사제직과 수도 생활에 투신하는 젊은이가 많아지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아울러 그들이 더욱 성화되도록 기도하고, 그들의 아픔과 고뇌를 이해하고, 또 함께 공감하는 날이다.

 

 

 

따라서 그들이 자신들의 성소를 잘 가꾸도록 사랑과 기도가 필요하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하느님에게 매달려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이다. 그들이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신뢰에 온전히 의탁해 자신을 송두리째 봉헌하여 그분의 축복이 가득히 내리기를 기도해 드리자. 성소 주일인 오늘, 사제성소의 증진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그들의 활동에 협력하는데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이에 우리도 이 혼탁한 사회의 목자로 활동해야 함을 늘 잊지 않도록 해야만 할게다.

 

 

 

착한 목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들을 제자들에게 맡기셨다. 교회 목자들이 양들을 위해 목숨 바치신 예수님을 닮을 때, 양들은 더더욱 교회 목자들을 신뢰하고 따르게 될 게다. 우리가 목자로서 합당하게 살려면, 무엇보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목소리를 잘 알아듣는, 착한 양이 되어 정의로운 사회 구현에 일조해야 하리라.

 

 

----------------------------------------------------

 

250511. 부활 제4주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성소 주일은 특별히 사제와 수도자와 선교사의 성소 증진을 위하여 교회 구성원이 모두 관심을 두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뿐만 아니라 혼인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도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성소)으로 봅니다.

요즘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만혼과 혼인 기피, 저출산, 유아 세례 기피 현상 등이 심해지고 있어 조만간 온 교회가 혼인 성소를 위하여 기도하는 주일도 제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거에는 수도자를 ‘성직자-수도자-평신도’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형태의 교회 구조 안에 놓인 중간 신원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도자는 교회의 한 신분이라기보다는 교회의 본질이요 생명입니다.

‘주님 교회의 심장’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고백이야말로 수도자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주는 표현입니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머리와, 분주히 움직이는 손발도 중요하지만 그곳으로 피를 보내 주는 심장이 없다면 온몸이 멈추듯 말입니다.

 

수도자는 현세에서 이미 하느님과 깊이 결합하여 하늘 나라를 증언하는 이들이자 하느님 사랑의 샘에서 부단히 은총과 사랑을 길어 올려 세상에 보내주는 이들입니다. 그러한 수도자들의 수가 뚜렷이 줄고 있습니다.

사랑을 깊이 맛 들인 그분들의 비춤이 없다면 누가 희생하고 봉사하려 할까요?

복사 아이들을 격려해서 사제로 키워 내고, 그들이 사랑과 열정에 불타 이역만리에 선교사로 나서게 한 데에는 수많은 수도자의 땀방울과 기도가 있습니다.

수도 성소를 위하여 우리 모두 힘껏 기도합시다.

 

 

----------------------------------------------------

 

 

 

==========================================================

 

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

 

----------------------------------------------------

 

250511. 부활 제4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슬로우 묵상] 말없이도

서하 [nansimba] 2025-05-11 ㅣNo.182124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요한 10,27)

 

성소 주일, 주님은 나를 ‘양’이라 부르십니다.

수많은 소리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나를 향한 그분의 목소리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가옵니다.

“나는 너를 알고 있다.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른다.”

 

이 부르심은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성소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씨를 뿌려 주신 귀중한 선물이며,

자기 밖으로 나가 사랑과 봉사의 여정에 나서라는 부르심입니다.”

누군가는 사제로, 누군가는 수도자로,

또 누군가는 평신도로, 가정 안에서 또는 축성된 신원으로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부르심은 하나입니다.

“당신의 삶을 사랑의 선물로 내어 주어라.”

 

내 삶을 사랑으로 내어 주는 삶은

크고 화려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인내,

때로는 바쁜 하루 속에서도 보내는 짧은 안부 인사,

때로는 마음이 아픈 이에게 건네는 따뜻한 눈빛,

그 모든 것이 사랑의 선물이 됩니다.

 

사랑으로 내어주는 삶은

내가 가진 것을 억지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기꺼이 열리는 순간에 피어납니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손 안에서, 나는 누군가의 기쁨이 되고,

세상에 작은 빛 하나를 더하는 존재가 됩니다.

 

내가 쓰러졌던 자리, 외로웠던 기억,

견디며 지났던 날들마저도

이제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사랑의 씨앗이 됩니다.

그 씨앗을 조용히 심고,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사랑의 길로 걷는 것,

그것이 바로 성소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내가 이 길을

두려움보다 더 큰 믿음으로,

주저함보다 더 깊은 사랑으로 걷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의 부르심 앞에 응답하는 삶,

그 자체가 이미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시작이 됩니다.

성 요한 보스코, 복자 필립보 리날디처럼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기꺼이 “예”라고 응답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 여정을

우리 모두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 손안에서

저를 부르시고, 이끌어 주소서.”

 

하단 부분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47&id=2115063&Page=2&menu=4770

 

----------------------------------------------------

 

250511. 부활 제4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양과 목자의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알며

양들은 목자를 따릅니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누가 자기들의 목자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나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목자 또한 양들을 아는데

목자에게 양 한 마리는 많은 양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각각이 소중하며

그래서 각각의 양을 구분하고

각각의 특징을 알고 있습니다.

즉 양과 목자는 서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서로를 소중하게 대합니다.

 

목자인 예수님께 양인 우리가 소중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 영원한 생명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양들을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넘어

예수님과 끊임없이 일치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하느님과도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소중하게 대하시며

우리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당신의 종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속하는 것은

다시 말해 신앙 생활은

어떤 의무를 말하지 않습니다.

주일 미사를 지켜야 하고

착하게 살아야 하며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알고 계시기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함께해 주시고

삶의 고비들을 넘어갈 수 있게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우리도 우리의 부족함을 알기에

우리의 삶을 동반해 주시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누구보다 더 나를 지지해 주고

누구보다 더 나를 잘 아는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동반자, 그 지지자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묵묵히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의 순간마다

우리를 당신의 보호 아래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찾고

그분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250511. 부활 제4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란 존재는 과연 누군가에게 기쁨과 희망이 되고 있는가요?

 

 

 

성소 주일을 맞아 제 지난 성소 여정을 돌아봅니다.

참으로 과분하고 감지덕지한 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나처럼 나약하고 부족함 투성이인 존재, 정말이지 부당한 존재를 불러주신 하느님께 그저 감사밖에 드릴 수 없는 나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라는 존재는 과연 누군가에게 기쁨과 희망이 되고, 더 나아가, 젊은이들 마음 안에 ‘그래, 나도 저렇게 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자문해봅니다.

 

젊은 사제 돈보스코는 토리노에 있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성당 제의방에서 바르톨로메오 가렐리라는 한 가련한 아이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어딘지도 모르고 엉겁결에 제의방으로 들어온 길거리 소년은 제의방지기에 의해 강제로 쫒겨납니다.

 

그 모습을 본 돈보스코는 그 아이를 다시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유명한 돈보스코와 아이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세상 따뜻하고 자상한 목소리로 이름이 뭐냐? 어디서 왔냐, 부모님은 살아계시냐?...

 

돈보스코의 친절함 앞에 잔뜩 경직되어 있던 아이는 순식간에 무장해제가 되고, 돈보스코는 아이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 잡습니다.

촌각의 순간에 둘은 절친이 되고, 스승 제자 사이로 발전합니다.

 

교구 신부님들께 한 말씀 드릴 기회가 오면 저는 어김없이 돈보스코와 바르톨로메오 가렐리 사이에서 이루어진 대화를 소개합니다.

신부님들께 미사 직전 제의방에서 5분, 10분 동안 복사 아이들과 어떤 대화를 하시는지 물어봅니다.

 

거룩한 미사 직전이니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대침묵 속에 서 있는 것도 괜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 시간이 부담스럽고 힘든 순간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지만, 자상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안부와 근황을 물어보고, 아이의 삶에 큰 관심을 가져주고 격려해준다면, 아이 입장에서 얼마나 기쁜 일이 되겠습니까?

 

신부님 가까이에서 복사를 서는 아이들은 어쩌면 사제나 수도성소로 초대하기에 가장 적합하고 준비된 아이들입니다.

우리 사제나 수도자들이 그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큰 사랑과 관심을 갖는다면, 나머지 일들은 하느님께서 반드시 하실 것입니다.

 

아이들도 다 보는 눈이 있다는 것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 사제가 지극정성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그 미사를 충만한 기쁨으로 거행한다면, 그리고 미사의 정신을 구체적인 사목활동 안에 잘 실천한다면, 아이들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분명히 큰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성소는 그렇게 시작될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초유의 팬데믹과 탄핵 정국으로 인한 대혼란의 시대를 거쳐오며 기진맥진해있는 오늘 우리나라의 양들을 위해 더 많은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큰 부족함이나 나약함 앞에서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껄껄 웃으며 용서해줄 수 있는 착한 목자, 양들의 방황과 일탈 앞에서도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는 착한 목자를 필요로 합니다.

 

성소 주일을 맞아 많은 분들이 큰 걱정을 넘어 탄식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저도 최근 발표된 한국천주교 통계자료 예비 사제·수도자 현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최근 지망자 숫자가 현격히 감소한 것입니다.

어느 한 지표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하락세가 심각합니다.

 

안 그래도 노령화 시대, 현직에서 물러난 사제·수도자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입회자 숫자는 거의 절벽 수준이다 보니, 현상 유지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특히 대부분의 수도회·수녀회들에 있어 공동체나 사업체의 축소나 통폐합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다들 속수무책인 현실을 두려운 시선으로, 절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낙담만 하고 있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너무 비관적인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수도자들의 급감 현상은 평신도 형제자매들이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교회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선의와 열정을 지닌 훌륭한 평신도 형제자매들은 분명 우리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이런 기회에 사제·수도자들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것입니다.

더 치열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온몸과 마음으로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숫자나 외형에 연연하지 않고, 보다 내실 있는 사제 생활을 통한 증거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제의 삶, 수도자의 삶, 공동체적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줘야겠습니다.

 

 

----------------------------------------------------

 

250511. 부활 제4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성소 주일이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그 부르심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진정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는 미사가 되도록 하자.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기리는 착한 목자의 주일을 맞아 또한 교회의 목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어야 하는 날이다.

 

복음: 요한 10,27-30: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신지를 입증해 보여 달라고 한다(요한 10,2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을 탓하시면서 그들이 당신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다(10,25-26 참조). 이 유다인들의 요구는 진실하지 못하다. 예수님의 말씀이든 업적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양 떼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양 떼에 속하고 속하지 못하고는 그분의 말씀을 듣느냐 안 듣느냐에 달려있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고집이나 판단을 주님께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르는 데 달려있다. 하나의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주님 앞에 단일한 양 떼를 이루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똑같이 듣고 따르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양 떼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면, 인간이 그리스도를 향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먼저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랑으로 시작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며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 자신을 의탁하는 것은 그리스도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신자들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아무도 그것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절)는 말씀에서 기쁨과 평온을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30절). 이 말씀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은 악의 유혹이 그리스도인들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보루의 역할을 한다는 말씀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이시다. 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이다. 이 관계로 하나이시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의 진실한 양 떼가 되기 위하여 모든 분야에서 단일한 신앙, 단일한 사랑, 단일한 행동, 일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삼위일체의 모델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그들 상호간에 주님과 깊은 일치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분의 소리를 듣고 그분은 그들을 알고 그래서 그들이 그분을 따른다(27절)는 사실을 세상에 입증할 수 있겠는가? 복음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는 목자는 권력이나 힘을 가지신 분의 모습보다는 사랑을 가지신 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묵시록에서는 살해된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묵시 7,17). 이 어린양이 어떤 점에 있어서 자기 양 떼를 보호할 힘과 권능을 행사하시는 ‘목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요한 10,11)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까지 사랑과 봉사를 베푸신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4-15)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당신 양 떼를 다스리는 목자가 되신다. 인간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계신 하느님! 이것이 살해당한 어린양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그렇게 해서 그분은 당신 양 떼의 목자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모습은 세상에 목자로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어린양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교의 지름길이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전교의 성공에 대해 전하고 있다. 그들은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사도 13,49) 그리고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그들을 거슬러 주어진 박해를 당하여 이코니온으로 갔을 때 “신도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사도 13,52).

 

만일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형제들에게 사랑과 봉사의 희생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들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만한 것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시고 인도해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를 부르시는 목자에게로 항상 가까이 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

 

250511. 부활 제4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 양 떼를 전부 지켜내는 법

 

 

 

오늘 우리는 부활 제4주일, 특별히 ‘성소 주일’이며 ‘착한 목자 주일’로 기념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목자이신 예수님께로,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의 목자로서의 소명으로 깊이 초대합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목자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품고 기도하며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할 영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양들은 우리의 배우자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자녀들, 혹은 가까운 친구나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소중한 양 떼를 바로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느님은 “너희는 빈손으로 내 앞에 나와서는 안 된다.”라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인 예물을 넘어, 우리 삶의 열매, 우리가 돌본 영혼들을 주님께 봉헌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의 비유’(마태오 25:14-30)를 기억해야 합니다.

 

주인은 각자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잘 활용하여 이윤을 남기기를 기대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빈손으로 당신 앞에 오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그분께 무엇인가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야곱과 에사우’의 이야기에서처럼, 야곱이 마지막에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에사우 앞에 설 힘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맡겨진 양 떼를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 참 주인이신 분께로 이끌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남아메리카의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다섯 명의 젊은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수년 후, 그 순교자들의 가족과 동료들은 다시 그 부족을 찾아갔고, 그들의 용서와 사랑에 감동한 아우카족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그 부족 출신의 목회자들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왜 젊은 부인들은 자신들의 남편을 인정사정없이 죽인 그 부족을 다시 찾아갔을까요?

다른 곳에, 그들을 받아들이는 곳에 가서 선교하면 안 되었을까요? 그들이 그만큼 특별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남편과 친구들이 그들에게 피를 쏟았습니다.

그 피가 그들에게 묻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왜 사랑하게 될까요? 자녀들 안에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의 피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집의 자녀들 안에는 다른 집 부모의 피가 들어있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피와 희생이 들어있는 자녀를 남편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내와 남편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과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당신이 양 떼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양 떼는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있습니다.

누군가 그 양 떼 중 한 마리라도 위협한다면 하느님께서 가만히 있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뛰쳐나가는 가리옷 유다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예수님은 이런 방식으로 당신 양 떼를 다 지키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탈리아 카시아에서 일어났던 성체 기적과도 같습니다.

1300년경, 어느 날 한 사제가 위중한 병자에게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급히 가던 중, 축성된 성체를 성합이 아닌 자신의 성무일도 책갈피에 끼워 넣었습니다.

병자에게 성체를 영해주기 위해 책을 펼쳤을 때, 성체는 온데간데없고 양쪽 페이지에 선명한 핏자국만 남아 있었는데, 그 핏자국은 성체의 둥근 모양이었고 심지어 한쪽에는 그리스도의 옆모습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 성체가 스며든 종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실에 모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맡겨진 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그들에게 발라야 합니다.

성녀 모니카를 본받읍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께 이끄시기 위해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것을 하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피를 뿌리기 위해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지만, 살려고 하면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

 

 

----------------------------------------------------

 

250511. 부활 제4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27-30).”

 

1) ‘성소 주일’은, 일꾼이 적다고 안타까워하시면서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아버지께 청하라고 제자들에게 지시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정해진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5-3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적다.

(2)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을 하는 일꾼이 적다.

따라서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도,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기도하여라.

(2)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 선포에 동참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하여라.

 

2) 여기서 ‘일꾼’이라는 말은, 좁은 뜻으로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과 복음 선포 사업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넓은 뜻으로는 ‘모든 신앙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실 맡고 있는 직책과 상관없이, 또 아무런 직책이 없더라도,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일꾼인’ 신앙인과 ‘일꾼이 아닌’ 신앙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아버지의 집은 곧 자녀의 집이고, 아버지의 일은 곧 자녀의 일이기 때문에,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일꾼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이 ‘일곱 봉사자’를 뽑을 때처럼(사도 7장) 효율성과 전문성 등의 이유 때문에 특별히 따로 직책을 정해 놓을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생긴 것이고, 전문 선교사도 생겼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모든 신앙인이 하느님의 일꾼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전문 선교사들만의 직무가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사명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3)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과 다스리심을 걸고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2티모 4,1-5).”

성소자 수가 급감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때,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 때’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권고한 대로,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복음을 선포해야 하고, 또 성소자 모집과 양성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신앙인들의 기도가 부족해서 성소자 수가 급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극복해야 할 ‘시대의 흐름’인지도 모릅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법입니다.

모든 신앙인이 흔들림 없이 기쁨 가득한 모습으로 살면, 자연스럽게 성소자 수가 다시 증가할 때가 올 것입니다.

 

4) 예수님 말씀에서,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내 양이라면 내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한다.”이고, “나를 따른다.”는, “나를 따라야 한다.”입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도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예수님보다 앞에서 가면 안 되고, 예수님의 뒤에서 예수님만 잘 따라가야 합니다.

 

<만일에 자기 자신도 양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맨 앞에서 목자 행세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만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앞장서서 걸어가시는 것은 뒤따르는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도 ‘자기 자신’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직무 수행의 일차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3).”>

 

살아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구원의 길을 잘 걷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

 

250511. 부활 제4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0,27-30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전래동화 <햇님달님>을 보면 어머니를 잡아먹은 호랑이가 그 자식들까지 잡아먹기 위해 집으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마치 자기가 그들의 어머니인것처럼 목소리까지 흉내내며 방문을 열어달라고 하지요. 그러나 그 안에 있던 오누이는 호랑이의 목소리에 쉽사리 속아넘어가지 않습니다. 평소에 들었던 어머니의 목소리와 어떤 점이 다른지 꼼꼼히 비교해봤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틈으로 손을 내밀어보라고 하는 등 자기 어머니를 제대로 식별하기 위한 다른 증거들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뻔한 첫번째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랑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오누이를 쫓아갔고 막다른 길에 몰린 오누이는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 구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그들에게 동아줄을 내려주었는데, 그 줄을 붙잡고 하늘로 올라간 오누이 중에 동생은 해가 되었고 오빠는 달이 되었지요. 이 이야기는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목소리가 멸망으로 이끄는 목소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제대로 식별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나를 참된 행복과 완성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오롯한 마음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준비하는 ‘성소주일’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어야 나를 부르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아볼 수 있고, 그분 말씀을 순명과 실천으로 따라야 그 말씀 안에 담아주신 은총과 복을 누릴 수 있는 법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을 보면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있는 회당에 방문하여 그곳에 있던 유다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이 바로 유다인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이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생각만 옳다는 교만과 독선으로 인해 마음이 닫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교회 공동체가 자기들이 믿는 유다교 공동체보다 더 융성하는 모습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은총과 축복을 베푸시는데,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보며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자기 고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그러질 않으니 문제입니다. 그릇을 뒤집어 놓으면 빗물을 받을 수 없듯이, 마음이 하느님을 향해 열려있지 않으면 그분께서 주시는 사랑과 은총을 받아 누릴 수 없는 법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지 말 지는 각자의 자유지만, 그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굴러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차는 꼴이니 결국 자기만 손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온 마음을 기울이며 귀를 활짝 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소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돈이 최고라는 목소리, 명예를 쫓으라는 목소리, 높은 자리에 올라 남들 위에 군림하라는 목소리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목소리는 당장 우리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겠다고 달콤하게 속삭이며 우리의 정신을 쏙 빼놓기에 하느님의 목소리에 신경쓰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한 내 안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소음도 문제입니다. 나를 좀 알아봐주고 인정해달라고 부르짖는 관심과 인정의 목소리, 상처받고 무시 당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펄펄 끓는 분노의 목소리,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낮은 자존감의 목소리 등이 마음 속에 가득차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우리 마음 깊은데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소음들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제대로 식별하여 들으려면 먼저 자기 생각이나 고집을 내려놓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또한 평소에 꾸준한 기도와 성실한 신앙생활 그리고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조금씩 알게되고, 그분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하나씩 깨닫게 되며, 그렇게 알고 깨닫는만큼 하느님과 나 사이에 사랑과 신뢰도 점점 더 깊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그분을 따르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과 서로를 알아감으로써 깊은 친교를 맺은 이들이 당신을 따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한 현실은 그분 말씀과는 좀 다릅니다. 예수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분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많은 겁니다. 그건 그 말씀에 담긴 뜻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기름진 고기를 배불리 먹고 단술을 양껏 마시며 즐겁게 살고 싶은데, 별로 맛도 없고 심심한 천상의 음식을 먹으라고 주시고, 세속적인 즐거움을 포기한 채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만 하는 답답하고 힘든 삶을 살라고 하시니 그런 어려운 요구를 하시는 주님을 굳이 따르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러나 양은 자신을 이끌어주는 목자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시력이 안좋아서 눈앞에 있는 장애물조차 피하지 못하고, 몸이 둔해서 실수로 넘어지기라도 하면 누가 일으켜주기 전에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부족하고 약한 존재이기에 옆에서 이끌어주고 지켜주는 목자가 꼭 필요하지요. 그러니 양은 말 그대로 “죽기살기로” 목자를 따라다녀야 합니다. 그런 점은 참된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진리의 빛을 비춰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조차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악의 수렁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구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이끄는 악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지요. 그러니 ‘난 주님 없으면 안된다’는 간절함으로, ‘주님에게서 멀어지면 죽는다’는 비장한 각오로 주님 뒤를 열심히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보살핌과 보호 속에서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고 참된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또한 그 어떤 악의 세력도 우리를 주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에게서 떨어져나가지 않고 그분 품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 따로 시간을 내어 ‘외딴 곳’을 찾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깊이 머무르며 그분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귀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가는 이 길이 그분 뜻에 맞는지를 올바르게 식별하여 엉뚱한 길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기 전에 단 몇 분이라도 성경을 읽으며 그 안에 담긴 하느님 말씀이 내 마음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깊이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깨달은 말씀의 의미를 다음 날 하루 동안 삶 속에서 실천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며 그분께서 내 삶에 일으키시는 놀라운 변화를, 그분 사랑의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250511. 부활 제4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주님은 나의 목자”

 

 

 

예수님께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포도나무와 가지로 그리고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우리가 쉽게 이해가 가는데, 왜 하필이면

 

양과 목자 관계로 설명하실까요?

 

 

 

우선 우리의 삶에서 양이 그렇게 쉽게 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차라리 우리에게는 ‘주인과 개’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면 더 이해하기가 쉽고

 

그 정서가 더욱 친밀감으로 다가 올 수 있을 텐데요.

 

 

 

율리우스 체사르, 케사르, 시이저라고 불리는 로마의 유명한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요?

 

시이저가 오랜 세월 전쟁터에 나가 있다가 돌아왔는데, 다른 사람, 특히 원로인들도 그

 

의 초라한 행색은 몰라보았는데, 그의 집의 개는 알아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도 유럽에 있을 때 푸른 풀밭에 한가롭게 있는 양떼를 멀리서만 보았지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한 번 있다면 그 보다 훨씬 전, 그러니까 사제서품을 앞두고

 

부제시절 때에 한림 피정의 집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에 갇혀 있는

 

양들인데, 가까이 가니까 자기들 히프를 일제히 제 쪽으로 돌리고 쳐다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 보는 양이라 반갑고 신기해서 정다운 소리까지 하며 인사를 하는데,

 

건방진 놈들이 엉덩이를 돌리고 딴전만 피우데요. 뭐 그런 놈들이 다 있지요?

 

 

 

그러다가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시나이 사막에서 왜 예수님께서 당신과 제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를 양과 목자 사이로 비유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사막에서 드믄 드믄 샘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물 줄기를 빙빙 돌려서 흐르게 했느데,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도 그 물을 마시고 그 사이에서 양들도 마시는 것입니다.

 

 

 

목자들이 자기 양들 몇 백 마리를 데리고 물 있는데로 와서 제각기 물을 마시게 합니다.

 

쉽게 말하면 가 라는 목자가 양떼를 몰고 오고 또 다른 나 라는 목자가 또 양 떼를 몰고 오고

 

그래서 그 물터에는 사람들 양떼가 서로 엉겨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자가 자기 양들이 물을 다 마셨다 싶으면 뭐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똑 같이 않지만

 

흉내를 내 볼까요? ‘우이우이휴, 우이우이휴’ 제 귀에는 그렇게 들렸습니다. 그리고는 휘파람

 

처럼 몇차례 또 이상한 소리를 냅니다.

 

 

 

그러면 물을 다 마신 양들은 그 목자를 줄레줄레 따라갑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나 라는

 

목자가 또 다른 소리를 냅니다. 그러면 또 다른 방향으로 그 목자를 따라 갑니다.

 

 

 

그곳 교수님이 단 한 마리도 다른 목자를 따라가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목자는 그 사막에서 풀 밭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면 때로는 들판에서 그 양떼와 함께

 

지낸다고 합니다. 짐승이 못 오고 지키며 밤을 새우는데, 운 좋으면 바위나 이슬을 피할 수 있는

 

동굴 같은 곳이 있으면 양들과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양들은 자기 주인을 알아보고 마음 놓고 잠도 자고 풀도 뜯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목자들은 양들을 자기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 아침에 세어 본다는 것입니다.

 

 

 

유목사회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별히 양과는 친밀감을 갖습니다. 자기 식구나

 

다른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 묵시록 저자는 그 양중에 종말론적인 의미의 어린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피로 구원하였듯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피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속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묵시록의 표현은 어린양이 피로 옷을 빨아 희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양의 친밀감도

 

있지만 탈출기의 파스카의 양처럼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여서라도 창에 찔린 당신

 

옆구리의 그 피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복음 선포를 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주님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기뻐하지만 오히려 동포인 유다인들은 닫힌 마음입니다.

 

그들은 두 사도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사람들을 선동해서 그 지방에서 쫒겨납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홍보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특별히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젊은 이들을 위한 것인데,

 

성직자 수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백성이지만 특히 교회를 위해

 

복음선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 특별히 부름을 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신학교를 못가게 하셨으니 할 말은 없습니다. 다른 집 아들이 성직자 되는 것,

 

수도자 되는 것은 좋은 내 자식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 신자들

 

마음입니다.

 

 

 

언젠가 한 어머니가 찾아와 자기 딸이 수녀가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려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왜 안 된다는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그 부인이

 

하는 말, ‘하여튼 안 됩니다.’ 내 딸이 얼마나 이쁘고 공부도 많이 했는데, 수녀가 된다니

 

말이 됩니까?

 

 

 

아니 그러면 성직자 수도자는 다 찌그리만 가는 것인가요? 여러분 그래요?

 

본당신부 모지리, 보좌신부 찌그리, 본당 수녀 못난이 그러면 좋겠어요?

 

 

 

정 자기 자식이 아까우면 후원회라도 가입해서 열심히 기도해주세요. 오늘 주보 사이에도

 

성소 후원회 안내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 모두 미래 교회의 일꾼인 성직자 수도자의 성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길 잃은 양, 뛰쳐나간 양들을 찾아 헤메시는 목자이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이 미사에 참여합시다.

 

 

---------------------------------------------------

 

250511. 부활 제4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250511. 부활 제4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말씀사랑

 

 

 

유목(遊牧) 문화에 익숙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목자의 비유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목자가 어떤 존재인지, 목자와 양의 관계가 어떠한지 이미 삶으로 체득해 아는 이들에게 이 비유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에 대해 잘 압니다. 성향과 특이점, 건강상태 · 식성 · 약점 · 성질머리까지 샅샅이 알기에 잘 다독이며 돌볼 수 있습니다. 양들은 그런 목자의 목소리를 알기에 그를 따릅니다. 그를 따라가면 물가도 나오고 풀밭도 나온다는 걸 본능으로 또 체험으로 아니까 믿고 따릅니다.

 

 

 

또 목자 곁에 바싹 붙어 있어야 사나운 들짐승의 공격도 도둑의 손길도 피할 수 있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귀를 쫑긋 세우고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움직입니다. 그에게 목자는 생존과 직결됩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성실하고 책임 있는 목자, 양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목자는 절대 제 목숨 하나 구하려고 양을 맹수 앞에 버려두고 줄행랑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숨을 걸고 양을 지키지요. 양 한마리가 곧 재산이라서가 아닙니다. 계산으로 따지자면 줄행랑쳐서 제 안위를 지키는 게 훨씬 남는 장사니까요.

 

그런데 이 말씀에 이어 예수님은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요한 10,29)고 덧붙이십니다. 그동안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아드님을 보내셨고, 또 동시에 우리를 아드님께로 이끄셨음을 깨달았지요.

 

 

 

절대로 우리를 놓치지 않는 목자 예수님의 손이 곧 아버지의 손과 동일시 됩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고 하시네요.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이 참 듣기 거북해하는 문제적 발언을 하신 것입니다.

 

 

 

양에 대한 목자 예수님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다르지 않듯, 당신과 아버지는 하나라고 밝히신 것인데, 이 말씀은 당신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시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당신이 양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생명"(요한 10,28)의 약속을 확인시켜 주시려는 것입니다.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선교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사도 13,48)고 하지요. 지역과 민족, 인종과 언어, 문화와 역사가 달라도 양떼는 제 목자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복음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지요. 하지만 사도들은 실망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아직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구석구석 숨어 있는 잠재적 주님의 양떼를 찾아서 멈추거나 주저앉지 않고 걸음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사도 13,52) 주님의 양떼를 찾아나서는 마음은 성령의 불로 타오르고 기쁨이 넘칩니다. 거부와 박해도 이를 꺽지 못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묵시 7,9) 구원받은 이들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그들은 이 지상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묵시 7,14)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양떼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특권으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묵시 7,15)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이들은 평생을 믿고 추구하고 사랑해온 분 앞에 머물며 그분만을 섬기는 복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묵시록의 대목이 어찌나 아름답고 또 지상 순례길에 지친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는지 그대로 옮겨봅니다.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7)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미 목자의 품 안에 들어 있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앞당겨 살고 있는 복된 존재들입니다. 주님 앞에 머물며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은 무겁고 성가신 의무가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도처에 문이 활짝 열린 성당이 있고,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감실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고해성사를 집전할 사제와, 나를 위해 기도하는 숨은 이들이 있는 세상, 아직은 아니지만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아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일을 계속할 사제들과 수도자, 선교사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마음모아 기도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250511. 부활 제4주일.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성도의 삶

<2025.5.11>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19:161~176절)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성도의 삶❞

 

❚ 말씀 안에서 평안의 복을 누리는 성도의 삶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61~168절).

시인은 힘 있는 권력자들에게 이유 없이 핍박을 받고 있다고 탄식합니다(161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태도는 매우 담대합니다. 그는 핍박을 받을 때에도 주의 말씀만 경외했고,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주의 말씀을 즐거워했다고 고백합니다(162절). 또한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인해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한다고 고백합니다(163~164절). ‘일곱’은 완전 수로 단순히 하루에 정확하게 일곱 번 찬양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온종일 그리고 평생에 찬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시인의 행위가 자신이 누리는 평안과 형통함의 비결이라고 노래합니다(165절). 시인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확고하게 의지했는지를 시사합니다.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며 살았음을 강조합니다(166~168절).

인생을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재산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재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으로 선포되고, 실천 되어질 때 실재화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할 때, 모든 지혜가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말씀의 빛이 비추되 우리의 모든 인생의 길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에 우리의 생각이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에 우리의 입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사모하는 삶을 통해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69~174절).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안과 기쁨을 누린다고 해서 세상의 공격과 혼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또한 하나님이 이 혼란한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시기를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169~170절). 즉,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한 옳고, 그름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간구입니다. 시인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율례와 계명을 따라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노래하겠노라는 다짐을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171~172절). 오직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기억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173~174절).

우리 인생이 한계 시점에 도달하여 힘들어 하고 있을 때, 그 시점의 시간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영적 사역을 감당하는 사역자라는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때론 실패하고, 길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금 거룩한 길과 방향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까지 현실에서 경험하는 고통으로 인한 탄식이 섞여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기쁨과 소망과 평화를 노래하는 찬양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끝까지 도움을 호소하는 삶을 통해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75~176절).

시인은 현재 자신의 형편이 ‘잃은 양같이 방황한다’고 표현하고 있고,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노래를 마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119편의 긴 노래가 끝나도록 시인은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현실의 삶은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대적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방황 가운데서도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영혼이 시인처럼 길 잃은 양같이 헤맬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놓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찾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입술과 혀로 찬양을 올려드리는 삶이 되길 결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기쁨의 찬양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찬양받기를 기뻐하시며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그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삶을 통해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영원토록 그분이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찬양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고난의 이기는 신앙, 말씀만을 붙잡고 주님께 간구하는 신앙을 회복하여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의지하여 악한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영원토록 찬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시 119:161~17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