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29. 묵상글 ( 연중 34주간 토요일. - 부끄러워하며 쇄신하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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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9. 연중 34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1.29 03:50
- 부끄러워하며 쇄신하며
모든 성인의 날이 있는데
굳이 프란치스칸 모든 성인의 날을 지낼 필요가 있을까 생각도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칸 성인도 많다고 자랑삼는 축일이라면 참 유치한 축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사실은
제가 바로 자랑삼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랑삼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전혀 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하셨습니다.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를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이 우리에게는 자랑하는 날이 아니라
성인들처럼 살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하는 날입니다.
부끄러워할 줄은 모르는 사람은 이 축일을 지낼 자격이 없고
내가 프란치스칸입네 하고 얘기하지도 말 것입니다.
왜냐면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자랑만 하는 것은
프란치스칸으로 살려고 하지 않기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고
프란치스코와 성인들 이름으로 득만 보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프란치스칸 이상을 얘기하면 외려
현실의 어려움을 얘기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강변합니다.
우리는 물론 성인들처럼 특히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살지 못합니다.
진정 닮기를 원했고 닮으려고 노력하는데도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그렇게 살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그래서 지금까지보다는 더 잘 살아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니까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미래가 있고 발전의 가능성이 있지만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은 뻔뻔한 것일 뿐 아니라 미래가 없습니다.
그냥 내내 득이나 보고 덕이나 보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로 우리는 이 축일을 지내며 쇄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쇄신도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쇄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물론 개인의 쇄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앞서는 것이지만
개인의 쇄신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이 축일을 같이 지내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성인은 홀로 성인이 되지 않았고
그러므로 홀로 쇄신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프란치스코가 있었기에 클라라가 있고,
클라라가 있었기에 프란치스코가 있음을 알고 있고
이 두 분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성덕에 나아갔는지 알고 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처럼 정말 독하게 혼자 성덕을 이룬 성인들이라면 몰라도
거의 모든 성인은 같이 쇄신하고 같이 성덕을 이루어갔습니다.
이는 마치 한배를 탄 사람들과 같은 이치입니다.
배를 타면 나 혼자 갈 수 없고 내 마음대로 갈 수 없습니다.
같이 하느님께 가든지 같이 세속을 향해 가든지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같이 하느님께로 향해 가는지 돌아보고
그러하지 못하고 있다면 쇄신을 같이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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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9. 연중 34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깨어 기도하여라”
내적 힘의 원천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어제 읽은 컬럼 제목과 일부 내용을 메모해 놨습니다.
“과거를 지우니 미래가 사라졌다; 과거가 남긴 흔적은 현재의 공공이 함께 향유하고 미래 세대가 사용할 소중한 자산이다. 이는 정지된 유적이 아니라 새로운 서사와 의미가 끊임없이 솟아나는 살아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교수;장지연>
과거없이는 미래도 없습니다. 미래를 위한 발판이 살아 있는 과거임을 깨닫습니다. 니케아 공의회 1700주년을 맞이해 해외 순방 여정에 오른 레오 14세 교황입니다. 얼마전 아부타비, 카이로, 요하네스버그, 앙카라를 잇는 약 3만km 일정중, 빛의 혁명으로 탄생된 이대통령의 신정부는 ‘샤인(SHINE;빛) 이니셔티브’를 발표했습니다(조현; 외무부 장관).
1.안정(Stability)
2.조화(Harmony)
3.혁신(Innovation)
4.네트워크(Network)
5.교육(Education)
이에 앞서 <기도>를 더한다면 교회의 삶에도 좋은 참고가 될 사항들이겠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1.평화, 2.번영, 3.문화> 협력의 기반을 다지고 국제사회와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겠다는 대한민국의 비전을 재확인한 것입니다. 교회의 이상에도 일맥상통하는 비전입니다.
하느님은 늘 깨어 있는 분입니다. 대림시기와 더불어 하느님은 교회와 세상에 참 좋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레오 14세 교황께서 11.27-12.2일까지 이슬람권에 속한 튀르기에와 레바논 해외 사도적 여정에 오른 것입니다. 이미 레오 14세 교황은 니케아 공의회(325년) 1700주년을 맞아 사도적 서한도 발표했습니다. 튀르기에를 방문한 교황은 이스탄불과 니케아(현재이름lznik)도 방문했습니다. 교황 홈페이지도 온통 교황님 말씀으로 가득했습니다.
“작음의 힘”(The strength of littlenss)
이스탄불 크리스천들에게 주신 요지의 말씀입니다.
“형제애와 평화의 다리들을 건설합시다.”
튀르기에 국민들에게 주신 메시지입니다.
“작은 자매회 자매들은 노인들의 집을 방문한 교황을 영접하고 경의를 표하다.”
“니케아 공의회가 교회에 준 충격을 묵상하다.”
“니케아는 폭력과 분쟁에 직면한 상황에서 크리스천들을 일치에로 초대한다.”
오늘의 제자리를 확인하여 올바른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는 늘 살아 있는 스승임을 깨닫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영혼들이라면 하느님을 닮아 과거-현재-미래를 조망하는 깊고 넓은 시야도 배워야 함을 봅니다.
어제 마지막 피정 내용은 현대 그리스도교 명상의 거장인 트라피스트 수도승 토마스 키팅(1923-2018) 신부의 ‘신성치료’(Divine Therapy)’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일상속에서 영적침묵과 내적평화를 회복하는 수행으로 제시한 ‘향심기도’(Centering Prayer)였습니다. 우리는 향심기도의 수행을 통해 참자아와 기본적 선함을 인식하고 영적자유를 획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음의 여정을 위해 향심기도를 통한 평생 날마다 깨어 있음의 규칙적 집중적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제가 소개하는 명상기도, 비움기도, 반추기도 모든 기도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깨어 있음의 훈련을 통한 깨어 있음의 습관화, 일상화, 생활화입니다. 깨어 침묵중에 기도하는 영혼을 상징하는 겨울나무요, 역시 오래전 <나무>란 자작시를 나눕니다.
“나무는 평생
하늘만을 향해 살아 왔기에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했기에
낮에는 햇빛 사랑, 밤에는 달빛 은총
하늘 위로 속에
지금도 살고 있기에
꽃, 열매, 잎들이 다 떠난 겨울 추위에도
초연할 수 있는 거다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는 거다
늘 깨어 기도하는 나무야!”<1997.11.29.>
무려 28년전 여기 요셉수도원에서의 시가 지금도 여전히 공감을 선물합니다. 죄도 많고 특히 정신질환도 많은 시대에, 또 마음의 평화는 물론 치매 예방에도 참 좋은 향심기도, 항구하고도 한결같은 명상기도의 훈련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늘 깨어 기도하라 신신당부하십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설명이 필요없는, 주님을 기다리며 마중나가는 희망과 기쁨, 설렘의 대림시기중 삶의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최대한 삶을 재정비 단순화하여 내외적으로 책임을 다하며 홀가분한 자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갑자가 덮치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진짜 힘은 내적 믿음의 힘이요, 늘 깨어 기도함이 내적 힘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끝까지 견뎌내고 버텨낼 수 있는 인내의 힘을 얻기 위한 최상의 길은 늘 깨어 기도하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깨어 있는 기도의 대가가 제1독서의 다니엘 예언자입니다. 깨어 있는 영혼 다니엘에게, 오늘의 우리에게 하느님은 환시를 보여주며 주님의 대림시기와 더불어 어제의 진리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나라와 통치권과 온 천하 나라들의 위력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배성에게 주어지리라. 그들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되고, 모든 통치자가 그들을 섬기고 복종하리라.”
이미 가톨릭교회를 통해 도래하고 있는 주님의 나라 현실입니다. 참으로 깨어 기도할 때 깨끗한 마음에 계속되는 깨달음의 선물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늘 깨어 기도하며 살 수 있도록 참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시편11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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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9. 연중 34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면 늘 숙연해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어, 성전에서 행하신 종말에 대한 긴 담화의 결말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4-36)
그렇습니다. 종말을 기다리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선 두 가지로 대표됩니다.
<첫째>는 “스스로 조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는 일” 입니다. 이는 먼저 자신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합니다.
“그대 자신과 그대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1티모 4,16)
<둘째>는 “늘 깨어 기도” 하는 일입니다. 곧 기도하되, ‘깨어 기도하는’ 일이요, 깨어 기도하되, ‘늘 깨어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약함과 무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주님의 능력과 선물을 믿으며, 소망하고 의탁하는 일이요,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그분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하여 마음을 경계하고, 그분을 향하여 있는 일이요, “늘 깨어 기도하다.”는 것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께 향하여 있고, 그분 안에 머무는 일입입니다.
우리는 “깨어있음”의 의미는 세 가지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지막 날에 주님을 맞이할 ‘준비로서의 깨어있음’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루카 21,36)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일상 안에서 당하는 유혹에 대한 ‘경계로서의 깨어있음’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루카 21,34)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째>는 끊임없이 멈춤이 없이 드리는 ‘기도로서의 깨어있음’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깨어남’의 종교가 아니라, ‘깨어있음’의 종교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깨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오신 주님’께 깨어있음이 바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하면 깨어있을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면 항상 그분을 향하여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주님!
제 마음이 물러지지 않게 하소서.
흔들리더라도 당신을 벗어나지 않고
넘어지더라도 당신을 붙들고 있게 하소서.
안일과 편리로 무뎌지지 않고
근심에서 벗어나 언제나 당신 사랑에 열렬하게 하소서.
늘 깨어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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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9. 연중 34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공지능의 대표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을 인공지능 사업의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한국이 인공지능 사업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국이 인공지능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조건이 4가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한국은 자체로 플랫폼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과 네이버’는 한국이 오랫동안 구축한 플랫폼입니다. 이런 플랫폼을 통해서 막대한 양의 정보를 이미 구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은 정보 처리능력이 관건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인공지능의 두뇌 역할을 하는 반도체입니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반도체 생산 국가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배터리입니다. 인공지능의 정보는 배터리가 있어야 저장할 수 있는데 한국은 세계 최고의 배터리 생산 국가라고 합니다. 네 번째는 인공지능을 산업 분야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장이라고 합니다. 한국은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는 생산 공장이 많은 나라라고 합니다. 인공지능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경제가 더욱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공지능의 발전 단계를 보면, 마치 인간의 진화를 보는 듯합니다. 처음 인공지능은 ‘햄버거를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햄버거를 그릴’ 수 있었고, 그다음에는 ‘햄버거를 주문’할 수 있었으며, 이제는 ‘직접 햄버거를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손을 빌리던 기술이, 이제는 인간을 돕는 비서가 되고, 더 나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존재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일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은사는 질문하는 능력입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은 단순한 위치의 질문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을 묻는 말입니다. “카인아,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은 관계의 책임을 묻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들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드는, 내면의 거울과 같습니다. 인공지능이 수많은 정보를 알고, 더 빠르게 답을 내놓는다 해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영혼이 묻고, 믿음이 답하는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지식의 시대’를 열어주었지만, 신앙은 여전히 ‘지혜의 시대’를 열어줍니다. 지식은 알고 이해하는 힘이지만, 지혜는 사랑하고 나누는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처럼, 깨어 있는 신앙인은 받은 은총을 세상과 나누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늘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신앙의 눈을 뜨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도 기쁨입니다. 희망의 눈을 뜨고 ‘이 모든 것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나누는 것도 행복입니다. 그러기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큰 행복입니다. 신앙인이라는 말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몸을 팔았던 여인도, 눈이 멀었던 소경도, 나병환자도, 하혈하던 여인도, 중풍병자도, 듣지 못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서 참된 행복을 느꼈고, 영원한 삶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간결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 하루, 우리가 앉은 자리가 꽃자리이기를, 그리고 하느님 앞에 늘 깨어 기도하며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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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9. 연중 34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긍정과 은총을 관상적으로 지켜내는 마음!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1월 28일 금요일- 마흔여덟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감사의 정을 수양하기!
우리는 긍정적 해답보다 부정적 문제에 더 쉽게 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우리의 정신이 본성적으로 부정적 기억과 죄의 상처에 집착하도록 형성되어 있음을 설명하며, 관상적 기도(contemplatio)를 통해 은총과 희망을 선택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은총의 비전보다 죄와 상처에 더 쉽게 매달리도록 본성적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두려움과 문제에 벨크로처럼 달라붙으며, 과거의 상처를 오래 붙잡고 미래의 불행을 미리 걱정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반대로, 긍정과 감사, 단순한 행복은 뜨거운 테플론 위의 치즈처럼 쉽게 미끄러져 사라집니다. 신경심리학자 릭 핸슨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긍정적 사고나 감정을 최소한 15초 이상 의식적으로 붙잡아야만 신경세포에 흔적을 남긴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동은 "벨크로/테플론 정신 모델"이라 불립니다. [1] 다시 말해, 우리는 구원의 해답보다 문제에 더 끌리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제 말만 믿지 말고, 여러분의 정신과 감정을 성찰해 보십시오. 곧 깨닫게 되겠지만, 인간은 부정적 현실—직장에서의 갈등, 험담이라는 죄의 언어, 혹은 가까운 이의 슬픈 사건—에 독성처럼 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에서 참된 자유를 얻는 것은 극히 드물며, 우리는 대부분 자동적 반응에 지배받습니다. 따라서 참된 영성을 성장시키는 유일한 길은 의도적으로 긍정적 응답과 감사의 마음을 기뻐하는 수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실제로 매우 깊습니다. 의식적 선택을 지속할 때, 우리의 내적 반응은 사랑, 신뢰, 인내로 새롭게 형성됩니다. 신경과학은 이를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as)"이라 부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이는 곧 자유의 지평을 넓히는 은총의 역사이며, 참된 영성의 심장박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두려움, 증오, 배척, 부정 속에 모든 위협과 타자성을 거부하며 살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피하는 실제적 가르침을 받은 이는 드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외적 행위보다 내적 동기와 의도의 절대적 중심성을 강조하시며, 산상수훈의 거의 절반을 이 주제에 할애하셨습니다 (마태 5:20–6:18 참조). 우리는 매일, 아니 매 시간마다 선과 진리, 아름다움에 마음을 두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이러한 의지의 행위에 대한 훌륭한 묘사는 필립비서 4:4–9에 나오는데,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감상적인 '긍정적 사고'로 치부하지 마십시오. 바오로는 실제로 사슬에 묶인 상태에서 이 서간을 썼습니다 (1:12–13). 그는 어떻게 이를 해낼 수 있었을까요? 어떤 이는 이를 '정신의 통제'라 부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이를 '관상(contemplatio)'이라 부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75세가 된 지금도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저는 CAC와 그 교사들에 대해 점점 더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제 아내와 저는 신앙 안에서 더욱 깊어졌고, 다양한 가르침과 자료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수년 전 핀리 박사(Dr. Finley)가 제안해 주신 ‘읽기를 천천히 하라, 그리고 본문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기록하라’는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한 줄 한 줄 읽으며 메모를 더하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 깨닫습니다!
—Mike W.
References
[1] Rick Hanson, Hardwiring Happiness: The New Brain Science of Contentment, Calm, and Confidence (Harmony, 2013), xxvi.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Universal Christ: How a Forgotten Reality Can Change Everything We See, Hope For, and Believe (Convergent Books, 2019, 2021), 64–6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ebby Hudson, untitled (detail), 2018,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펼친 사람의 실루엣은 삶이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인식하는 감사의 자세를 시각적으로 드러냅니다. 그 모습은 은총이 안으로 흘러들고 밖으로 흘러나가며,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하느님을 하나로 이어 주는 신비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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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9. 연중 34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루카 21,34)
영혼과 육신을 약하게 하는 만취
여러분은 영원한 임금님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만취’와 ‘중독’의 비참한 최후를 압니다. ‘어떤 술이든지 너무 많이 마시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랬다가는 갑자기 목숨을 잃을 것이오.’ 지혜롭고 치료술이 뛰어난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칩시다. 자기 건강을 위해 그의 권고대로 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 지금 영혼과 육신의 의사이신 주님께서 만취와 방탕과 일상의 근심에 빠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 빠져 살면서 자기는 아무 탈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즉 만취는 모든 것을 망치는 원인입니다. 육신과 함께 영혼까지 약하게 하는 유일한 병입니다. 사도의 말에 따르면, 육신이 약할 때 영혼은 강해지고(2코린 12,10 참조)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코린 4,16). 그런데 술에 취해 살면 육신과 영혼이 파멸합니다. 육신과 영혼이 한꺼번에 타락하는 것이지요. 모든 지체가 약해지면서 손과 발이 말을 안 듣고 혀는 풀리고 눈은 어두워지지요. 정신 또한 망가져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심하면 자기가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만취는 이처럼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5 우리의 신성
이것을 위해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고 하셨다(사도 1,4),
이 영은 모든 수량을 넘어서고, 모든 다양성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럴 때만 하느님께서 그 영을 돌파하실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나를 돌파하시면, 나 역시 답례로 하느님을 돌파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영을 빈 들과 자기만의 독거로 데려가십니다. 그곳은 하느님이 순수한 하나가 되시고 자기 속에서만 분출하시는 곳입니다. 이 영은 더 이상 이유를 가지지 않습니다. 만일 이 영이 그 어떤 이유를 가지고자 했다면, 하나도 나름의 이유를 가져야 했을 테니까요. 이 영은 일치와 자유 속에 머무릅니다. 영성의 대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지는 자유롭다, 하느님 이외의 그 누구도 의지를 복종시킬 수 없다. 하지만 하느님은 의지를 복종시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의지를 해방시키십니다. 그러면 의지는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만을 바랍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의 결핍이 아니라 의지
의 본질적인 자유입니다.(515)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7. 성인글 묵상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종교다원론과 해석학적 이론들
종교 다원론에는 다양한 입장이 있다
종교다원론에서 배타주의적 입장은 '궁극적 실재'를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의 울타리 및 자기 종교의 경전 안에 제한시키는 또 다른 결정적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종교가 지녀야 할 우주적 보편성, 평화 지향적인 개방성 , 종교적 조건과 무관하게 곤궁에 처한 생명들을 살리고 돕는 윤리적 실천을 담보하기 어렵다. 흔히 배타주의적 입장이 종교 문화 제국주의 시대의 유물이거나 열광주의적인 종교 단체의 입장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배타주의적 입장은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와 타 종교간의 ‘질적 차이' 를 강조하고, ‘참 종교’ 와 ‘거짓 종교’ 라는 이분법적 독단을 신앙의 신념이라는 이름 아래 남용하고 있다.
종교 다원론에서 포용주의적 입장은,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에 대한 일차적 헌신과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확신하되 , 타 종교 안에도 철학적 . 도덕적 . 영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을 장려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포용주의적 입장이 특히 기독교권 내에서 일어난 계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후이다. 포용주의적 입장의 핵심은 진리나 로고스는 어떤 특정한 역사적 종교가 독점할 수 없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것이라는 고백에서 출발한다. 기독교적 용어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는 특수 계시인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역사를 넘어서 , 이미 ‘보편 계시' 로서 타 문화, 타 민족, 타 종교 안에 역사해 왔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입장이다. 또한 더 적극적으로 타 종교 경전과 타 종교 문화 안에 존재하는 위대한 철학적 . 윤리적 . 영적 가르침과 그 교화 능력은 ‘우주적 하나님' 의 보편적 세계 구원 경륜의 징표이기 때문에, 타 종교와 대화 및 협력 , 타 종교에 대한 관용성은 지구촌 시대의 새로운 선교 신학이 지향해 가야 마땅한 길이 라는 주장을 편다.(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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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9. 연중 34주간 토요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말씀하신 ‘깨어있음’은 단순히 밤을 새우는 육체적 깨어 있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과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세상 근심이나 유혹에 빠지면 우리는 쉽게 하늘나라의 희망을 잃고 현재의 무게에 짓눌리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늘 기도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기도는 영혼의 눈을 열어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다림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기에,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준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오늘 내가 맞이하는 작은 순간 안에서도 주님을 알아보고 환영할 준비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이웃 안에서, 내 일상의 사소한 사건 안에서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깨어 있음은 사랑과 연결됩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내 마음은 쉽게 무뎌지고 잠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눈을 밝히는 사람은 작은 일 속에서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은 사랑 안에서 날마다 깨어 있으며, 그 사랑이 세상 근심을 이기는 힘이 됩니다.
깨어 있음은 두려움 속에서 긴장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희망 안에서 기도하며 주님을 맞이하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기도로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순간, 우리 삶은 하늘나라를 향해 깨어 있는 삶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도 기도 안에서 마음을 지키고,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주님의 오심을 기쁘게 준비합시다.
⭐지갑속 반창고
저는 지갑에 항상 반창고를 한두 개 가지고 다닙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곳을….
다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만지다가 찔리기도 하고 걷다가 까지기도 합니다.
어디에 부딪혔는지 모르는데 피가 나기도 하고 나의 부주의로 다치기도 합니다.
그때 지갑 속 반창고는 빛을 발합니다.
지갑 속에 반창고를 꺼낼 때 왜 제 마음은 뿌듯할까요?
다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상처는 내가 원한다고 생기고 그렇지 않다고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삶 안에서 상처는 늘 예고 없이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몸도 마음도….
몸에는 밴드 반창고를…. 마음에는 위로와 격려라는 반창고를 항상 지니고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상처를 피할 수 없지만…. 너무 오래가거나 덧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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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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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9. 연중 34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사람이 자기 집 정원을 단장하기 위해 전문 업체와 계약했습니다. 일주일 뒤, 이 사람은 부엌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다가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동안 오랜 친구였던 관목이 너무 많이 잘렸고, 잔디는 삐뚤삐뚤한 상태였습니다. 일주일 동안의 작업이 절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약했던 전문 업체 대표를 만나서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조용히 말을 듣던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어색하겠지만, 한 달 뒤에는 충분히 만족하실 것입니다.”
정말 한 달 뒤에 이 사람은 너무나 만족했습니다. 비용을 들인 가치가 있었고, 그의 정원은 그토록 원했던 꿈의 정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왜 이 사실을 느낄 수가 없었을까요? 이 전문 업체는 관목과 잔디의 성장에 맞춰서 작업했기 때문입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오랜 기간 만족할 방법을 따른 것입니다.
주님의 일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 순간에는 감사의 마음보다 불평불만의 마음이 더 큽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보면 주님의 일이 가장 옳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순간의 삶이 아닌 영원의 삶을 지향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영원한 삶만이 우리를 희망의 길로 인도하는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끝 날의 징조들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현재 삶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언제 그날이 올지 계산하기보다, ‘오늘을 어떻게 깨어 살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루카 21,34)라고 하시지요. 바로 자기 내면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날은 갑자기 덮쳐오고,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친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환난을 피하기 위한 도피 수단이 아닙니다. 그보다 그 환난을 견뎌낼 힘을 얻는 통로가 됩니다.
특별히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루카 21,36)이라는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서다’라는 동사는 법정 용어로, 심판관 앞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엎드리거나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죄를 선고받고 당당히 서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당당히 서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의 아들과 가까운 관계, 함께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강력하고 구체적인 행동 양식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만 주님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상처를 마주 보는 용기가 필요하다(파울로 코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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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9. 연중 34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성인들의 통공"을 되새기며....
프란치스칸 모든 성인의 축일은 매년 11월 29일에 거행되며, 프란치스칸 가족 안에서 신앙을 충실히 살아낸 수많은 형제와 자매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 축일은 그들의 모범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 마련되었으며, "세라핌 수도회의 모든 성인의 축일"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날짜가 선택된 이유는 1223년 11월 29일,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 규칙을 공식적으로 인준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날은 프란치스칸 영성을 따라 살아간 모든 성인들을 함께 기념하며, 그들의 전구(轉求, 중재 기도)를 청하는 특별한 전례적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오늘의 축일은 성 보나벤투라가 하느님께로 가는 영혼의 여정(Itinerarium Mentis in Deum)에서 제시한 여섯 단계의 길을 따라, 성령께서 우리를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로 인도하시도록 초대하는 강력한 부르심을 상기하고 살아가고자 마음을 다지는 날입니다. 곧,
1단계: 우주 안에 남겨진 하느님의 흔적을 관상하는 것,
2단계: 우리의 자연적 능력(기억, 지성, 의지)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을 관상하는 것,
3단계: 은총의 선물(믿음, 희망, 사랑)에 의해 새롭게 된 그 모상을 관상하는 것,
4단계: ‘존재’라는 가장 근본적인 이름을 통해 하느님의 일치를 관상하는 것,
5단계: ‘선’이라는 이름을 통해 지극히 복되신 삼위일체를 관상하는 것,
6단계: 영적이고 신비로운 황홀경 속에서 영혼이 안식을 찾는 것입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이 모든 단계에서, 세라핌의 여섯 날개가 곧 여섯 가지 빛의 단계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는 영혼이 그리스도인의 지혜 안에서 황홀한 상승을 통해 평화에 이르는 계단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을 통해서만 열립니다.
오늘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가는 유명, 무명 프란치스칸 성인들로부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의 15항 말씀을 듣는 듯합니다.
"세례의 은총이 거룩함의 길에서 열매를 맺게 하십시오. 모든 것을 하느님께 열어 드리고, 모든 상황에서 그분께 나아가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힘이 이를 가능하게 하며, 결국 거룩함은 여러분의 삶 안에서 성령의 열매가 됩니다(갈라 5,22-23 참조). 약함에 머물고 싶은 유혹이 올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주님, 저는 가난한 죄인이지만, 당신께서는 저를 조금 더 나아지게 하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교회는 거룩하지만 동시에 죄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여러분은 거룩함을 향해 성장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에 성경과 성사, 거룩한 장소들, 살아 있는 공동체, 성인들의 증언,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선물하셨습니다. 이는 '보석으로 단장한 신부'(이사 61,10)와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고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는 이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초대가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주님의 초대입니다.
저는 오늘 특별히 "가진 것을 팔라!"는 주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팔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지만,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조금 더 넓고 깊은 의미로 알아듣고 싶습니다. 즉 이 말씀은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말씀이며, 그것을 팔라는 것은 그것이 결국 '내' 것이 아니니 집착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내려놓으라는 말씀인 것입다. 물론 여기에는 재물도 포함되겠지만, 우리 존재 자체가 다만 '나'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해 있으며, 동시에 다른 모든 존재에 속해 있다는 근본적인 현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결국 "가진 것을 팔라는 말씀"은 '내'가 '나'라고 여기는 것들, 즉 물질적인 것이든, 비물질적인 것이든, 이 모든 "나"라는 존재, 즉 에고의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나'(에고)는 사탄과 결탁하여 계속해서 다른 이들뿐 아니라 '나'를 고발하여 '나'와 '우리'가 모두 이미 하느님 사랑(하느님 나라)의 현실 안에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하고, 이 허상 안에서 '나' 자신은 물론이고 서로를 비판하며 살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인들의 통공"에서 말하는 성인들에는 "우리"도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가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일전에(10월 31일자)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에 나오는 말씀을 상기하고 싶습니다.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위대한 전체 안에 속한 존재임을 깊이 자각하며 동시에, 그 전체의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겸손함도 함께 품는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저는 이러한 깨달음이 우리를 불필요한 개인적 죄책감에서 자유롭게 하며, 더 나아가 '하느님 승리의 행진 안에서 시간과 역사를 관통하는 은총의 동반자'(2코린토 2,14 참조)가 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여정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은총의 계획 안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주 작은 존재이지만, 아주 큰 신비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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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9. 연중 34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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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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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9. 연중 34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을 지키면
하느님께서 상으로 주시는 것 가운데 하나가
생명이었습니다.
그 계약은 모세의 시대에 와서
구체적으로 십계명으로 이야기됩니다.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십계명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당신을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소개하십니다.
그러면서 지금 주시는 십계명을 지키면
그 생명과 구원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음을 암시하십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켜왔다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노력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일방적인, 혹은 혼자만의 행동이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계약을 지키는 것인데
계약은 항상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내가 할 도리만 하면 끝난다는 생각이 있다보니
상호적이라기보다
혼자만의 행동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을 남에세 줄 때
나는 무엇인가 필요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서 돌려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을 얻고자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가난은 철저한 의존을
다시 말해 더 가까운 관계를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원하는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의 노력으로 죽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생명을 주시는 그분과 함께
영원하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 생명을 계속해서 받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에서는 오래 사는 방식으로 그것을 이야기했다면
신약에서는 육체의 죽음으로 그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방식으로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그것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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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9. 연중 34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21,34-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2025년 다해의 마지막 주간 내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종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그 종말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종말 메시지’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결론 부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것을 이야기하시기보다, 일상적이고 원론적인 내용을 말씀하신다는 점이 인상적이지요.
먼저 종말을 준비하는 우리 마음을 해이해지게 만드는, 그렇기에 특히 조심해야 할 요소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방탕’은 뭔가를 누리고 싶고 갖고 싶은 욕망이 내 마음에 가득 들어차 이리저리 휘둘리는 상태입니다. ‘만취’는 마음을 무방비로 비워두고 내버려두는 안일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자신이 죄 중에 있음을 알면서도 ‘에라 모르겠다’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죄의 어둠 한가운데에 방치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는 그 죄가 주는 순간의 쾌락에 잔뜩 취해서 정말 중요한 하느님 뜻을 잊어버리게 되지요. ‘일상의 근심’은 내가 바라는대로, 내 뜻대로 하려는 교만이 내 마음을 쥐고 흔드는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혹시 내 기대, 내 바람대로 안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커지지요. 이 세 가지 요소의 공통점은 우리 마음을 해로운 것들로 가득 채워 하느님이 계실 자리, 그분 뜻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다는데에 있습니다. 그로 인해 하느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멀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그분의 사랑에 소홀해지면, 마음이 ‘물러’집니다. 마음이 물러진다는건 ‘예’라고 답해야 할 때 ‘예’라고 하지 못하고, ‘아니오’라고 답해야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것이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인지 잘 알면서도 단호하게 배격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고, 하느님 뜻에 맞는 일을 과감하게 실천하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끌려다니듯 사는 것이지요. 이처럼 용기도, 결단도 없는 나약한 마음으로는 종말의 때를 제대로 준비할 수 없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려면 절박한 심정으로, 치열하게 지금 이 순간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데, 엉뚱한 것들에 한눈이 팔려있으니 나에게 오시는 주님이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오는 ‘재앙’으로, 나를 옭아매어 멸망의 수렁에 빠뜨리는 ‘덫’으로 느껴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나를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으려면 ‘늘 깨어 있어야’합니다. 깨어 있는다는 건 지금 당장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하더라도 당당하게, 기쁘게 설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종말론적인 삶’이지요.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 기쁨이 되려면 늘 죽음을, 그 이후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엉뚱한 것을 찾다가 생명을 잃지 않도록 먼저 하느님 뜻을 따르기 위해 나 자신을, 내 탐욕과 고집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즉시 행할 수 있도록 나의 나태함과 안일함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죽이고 다스릴 수 있는 힘은 기도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니 늘 기도 중에 하느님 뜻을 찾으며, 그 뜻을 올바르게 식별할 지혜와 기꺼이 선택할 용기와 꾸준히 실행할 끈기를 주시기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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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9. 연중 34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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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박윤식”님을 찿아 들어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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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22
11월29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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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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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작은형제회 김명경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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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또 다시 한해의 끝자락에서!>
또 다시 교회 전례력으로 우리는 한해의 끝자락에 서있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총의 선물인 ‘새해’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민할 때입니다.
마지막 날에 저희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메시지도 오늘따라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바오로 사도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합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 13, 12-13)
우리가 전혀 준비하고 있지 않은 순간에 마치 섬광처럼 다가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몸과 마음으로 준비해야겠습니다. 지나온 한 해 동안의 내 삶을 진지하게 한번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진흙탕처럼 흐려진 영혼의 상태를 진정시켜야겠습니다.
아직도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나 사건이 있다면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맡겨드려야겠습니다. 좀 더 영적이고 좀 더 단정하고 품위 있는 하루를 살아가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좀 더 자주 성체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올해도 참으로 많은 시간들을 헛되고 의미없이 보냈습니다. 내 인생 여정에서 앞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금쪽 같은 시간들을 흥청망청 놀고 먹고 마시는 데 소모했습니다. 모든 것 하느님 자비하신 손길에 맡겨드리지 못하고 부끄럽게도 오랜 시간 근심하고 걱정했습니다.
곰곰히 성찰해보니 놀고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한치 앞만 내다보게 되니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듭니다.
남아있는 시간들, 남아있는 인생을 주님 권고에 따라 살아가야겠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깨어있음은 언제나 기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란 깨어있는 상태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일정 시간은 잠을 자야 하는 인간이기에 항상 깨어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하루의 많은 시간을 생업에 몰두해야 하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그러나 잠드는 순간, 잠자는 순간조차도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할 때 역시 주님께서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시고 나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고 일을 하면 그 역시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깨어 기도함을 통해 우리는 주님 재림의 날에도 굳건하고 기쁘게 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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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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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때 그리스도 앞에 설 힘은 기도로 얻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
오늘 복음에서 종말의 긴 말씀 가운데 마지막 당부가 나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우리 대부분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 앞에 설 힘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힘은 곧 그분의 뜻을 따랐느냐에 의해 생겨납니다.
중동에서 남편들이 나가 돈을 보내줄 때 아내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아껴 쓰면서 자녀를 잘 키워 몇 년 만에 남편이 돌아올 때 기쁘게 김포공항에 나가는가 하면, 어떤 자매들은 남편이 돌아올 때 도망을 치거나 자살을 했습니다. 그 돈을 제비에게 다 가져다 바치고 빚까지 졌기에 남편을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했다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야곱은 장자권을 받아 구원에 이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20년 동안 많은 고생을 했음에도 감히 에사우 앞에 나설 힘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세상에서 자신이 낳은 자녀들과 모은 재물들을 먼저 선물로 보냈지만, 여전히 에사우 앞에 설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남아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천사와의 씨름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천사는 축복을 청하며 밤새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야곱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리고 그의 이름을 바꿔주었습니다. 이름을 바꾸었다는 말은 새롭게 태어났다는 말이고 새 정체성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정강이뼈가 부러졌다는 말은 더는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서는 힘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산다”라는 믿음입니다.
사람 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누구의 앞에도 설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으로만 죽는데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이들은 자아가 강해서 남들 앞에 잘 서지 못합니다.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는 자아가 상처받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대 공포증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자아가 살아 있어서 잃을 것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알게 되면 하느님의 사랑으로 부모가 죽여주지 못한 자아까지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누군가의 앞에 설 힘이 생깁니다. 나 대신 그리스도께서 나서주신다고 믿으면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고 하느님 앞에도 설 수 있습니다.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원’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소원이네 문방구, 그리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 이들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이는 늦게 학교에 가게 되고 아저씨가 우산을 씌워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소원이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소원이는 우산을 씌워준 것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고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세상과 담을 쌓습니다. 아빠가 들어와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빠도 세상에 속한 한 남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호스를 낀 옆구리로 변이 새어 나와서 그것을 닦아주기 위해 바지를 벗기려는 아빠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아빠 말고는 아이의 상처를 치유해 주어 세상과 소통하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빠는 소원이가 냉장고 나라 코코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코코몽 인형 안으로 들어가 소원이와 친해지려 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을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소원이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코코몽 인형 속에서 소원이를 응원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보이면 그 무시무시한 학교 앞길도 힘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지켜주기에 학교도 갈 수 있고 남자친구들과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그것으로 만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이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 코코몽이 아빠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원이는 아빠를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세상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빠의 희생 덕분으로 잃어버렸던 말도 되찾아 말을 하게 되고 아이들과도 이전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소원이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코코몽에게 다가와 인형 얼굴을 벗기고 아빠의 땀을 닦아줍니다. 아빠는 눈물을 흘립니다.
사실 우리도 같은 상황입니다. 상처받아 자아가 커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동행해주심을 믿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동행해주시는 하느님의 땀과 피를 봅니다. 그리고는 그분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과정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아갈수록 상처받은 나는 사라집니다. 죽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주님께 다가갈 때 나는 타버립니다. 그렇게 나도 하느님의 인형 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에게 다가갑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시는 것이기에 타인이 나를 모욕하고 상처 주어도 크게 두렵지 않습니다.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받아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이 믿음을 증가시켜 줍니다. 결국, 야곱이 에사우 앞에 서는 힘은 기도로 내가 죽고 에사우에게 속한 사람임을 고백할 수 있을 때 가능했습니다. 야곱은 에사우에게 일곱 번 절하며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며 하느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과 같음을 고백합니다. 마치 마지막 만찬상에서 요한이 예수님께 그랬던 것처럼 에사우에게 안기고 그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소원이가 아버지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처럼, 하늘나라에서도 하느님 품에서 살 수 있게 될 때 하늘나라 백성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도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나를 죽이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분 품에 안겨있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마지막 때에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십자가를 거친 요한이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숨는 일 없이 기쁘게 그분께 엎드려 그분 품으로 달려들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이 있다면 바로 그분 앞에서 설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하여 자기를 죽이는 것뿐입니다.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해야 합니다. 소원이가 아빠의 사랑을 인정했듯이. 이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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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공지능의 대표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을 인공지능 사업의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한국이 인공지능 사업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국이 인공지능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조건이 4가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한국은 자체로 플랫폼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과 네이버’는 한국이 오랫동안 구축한 플랫폼입니다. 이런 플랫폼을 통해서 막대한 양의 정보를 이미 구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은 정보 처리능력이 관건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인공지능의 두뇌 역할을 하는 반도체입니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반도체 생산 국가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배터리입니다. 인공지능의 정보는 배터리가 있어야 저장할 수 있는데 한국은 세계 최고의 배터리 생산 국가라고 합니다. 네 번째는 인공지능을 산업 분야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장이라고 합니다. 한국은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는 생산 공장이 많은 나라라고 합니다. 인공지능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경제가 더욱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공지능의 발전 단계를 보면, 마치 인간의 진화를 보는 듯합니다. 처음 인공지능은 ‘햄버거를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햄버거를 그릴’ 수 있었고, 그다음에는 ‘햄버거를 주문’할 수 있었으며, 이제는 ‘직접 햄버거를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손을 빌리던 기술이, 이제는 인간을 돕는 비서가 되고, 더 나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존재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일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은사는 질문하는 능력입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은 단순한 위치의 질문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을 묻는 말입니다. “카인아,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은 관계의 책임을 묻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들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드는, 내면의 거울과 같습니다. 인공지능이 수많은 정보를 알고, 더 빠르게 답을 내놓는다 해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영혼이 묻고, 믿음이 답하는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지식의 시대’를 열어주었지만, 신앙은 여전히 ‘지혜의 시대’를 열어줍니다. 지식은 알고 이해하는 힘이지만, 지혜는 사랑하고 나누는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처럼, 깨어 있는 신앙인은 받은 은총을 세상과 나누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늘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신앙의 눈을 뜨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도 기쁨입니다. 희망의 눈을 뜨고 ‘이 모든 것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나누는 것도 행복입니다. 그러기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큰 행복입니다. 신앙인이라는 말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몸을 팔았던 여인도, 눈이 멀었던 소경도, 나병환자도, 하혈하던 여인도, 중풍병자도, 듣지 못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서 참된 행복을 느꼈고, 영원한 삶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간결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 하루, 우리가 앉은 자리가 꽃자리이기를, 그리고 하느님 앞에 늘 깨어 기도하며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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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루카 21,34). 그리고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21,36)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이라는 말은 우리가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듯이 예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연습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신앙인이 사랑을 실천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말과 행동을 삼가는 마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으로서의 노력일 뿐만 아니라 믿는 이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가꾸고 지켜 나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우리 모습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이는 ‘늘 깨어 기도하여라.’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고여 있지 않고 흐르며 출렁이는 물이라야 썩지 않고 바다까지 흘러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은 과거의 것이 아닙니다.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샘을 벗어난 그 힘으로 계곡을 겁 없이 흘러내려야 하고, 계곡에서 쏟아져 내린 힘으로 구불구불 강줄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을 새롭게 할 기회인 ‘대림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용기를 내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과 새롭게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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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34-36: “늘 깨어 기도하라.”
한 해의 전례력 마지막 날을 맞이하는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권고를 주신다. “너희 마음이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늘 깨어 기도하여라.”(34-36 참조)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없는 자에게 종말은 두려움이지만, 준비된 자에게는 영광과 해방의 순간이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깨어있는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묵상해 보자.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세 가지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신앙을 약화하는 유혹이다. 방탕: 하느님 대신 쾌락을 추구하며 순간적 만족에 묶이는 삶이다. 만취: 육신을 넘어 영혼마저 마비시켜 주님을 향한 감각을 잃게 만드는 삶이다.
일상의 근심: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세속적 걱정에 사로잡혀 마음이 무거워지는 삶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영적 무감각을 불러오며, 그 결과 마지막 때에 덫처럼 갑자기 우리를 붙잡을 수 있다고 경고하신다. 그러므로 깨어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는 삶을 의미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을 만날 준비가 된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살기에, 죽음은 그에게 영광의 시작일 뿐이다.”(Homilia in Matthaeum 77,2) 성 아우구스티노도 권고한다: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오늘을 당신의 마지막 날처럼 살라. 그러면 언제 종말이 와도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 가운데 주님을 맞을 수 있다.”(Sermo 38,4)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나는 과연 오늘 지금 주님을 만나도 기쁘게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는가? 이제는 이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죽는 연습: 내 뜻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매일의 작은 선택이 곧 종말의 준비이다. 기도의 삶: “늘 깨어 기도하라.”(36절)는 말씀처럼,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께 드려지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종말론적 삶: 종말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지금 내가 어떻게 사느냐 안에 이미 시작되어 있다.
전례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깨어있는 삶과 끊임없는 기도의 삶으로 초대한다. 세상 근심이나 방탕, 만취로 마음을 무겁게 하지 말고, 주님을 언제라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된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두려움 없이, 오히려 기쁨과 희망으로 주님을 맞이하며,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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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이 맞이할 그날이다>
루카 21,34-36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이 맞이할 그날이다>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루카 21,34ㄷ-35)
어둠 가운데
빛을 사는
그대에게
오늘이
맞이할 그날
빛이다
불신 가운데
믿음을 사는
그대에게
오늘이
맞이할 그날
믿음이다
체념 가운데
희망을 사는
그대에게
오늘이
맞이할 그날
희망이다
미움 가운데
사랑을 사는
그대에게
오늘이
맞이할 그날
사랑이다
홀로 가운데
함께를 사는
그대에게
오늘이
맞이할 그날
함께이다
탐욕 가운데
평화를 사는
그대에게
오늘이
맞이할 그날
평화이다
죽임 가운데
살림을 사는
그대에게
오늘이
맞이할 그날
살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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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심판대에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4-36)
1) 여기서 “사람의 아들 앞에 서다.”는, “예수님의 ‘심판대’에 서다.”이고,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은, “심판대에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즉 “최후의 심판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이라는 뜻입니다. <충실한 신앙인에게는, 그 심판은 ‘구원의 심판’입니다. 즉 최종적으로 구원을 확인 받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는, 멸망이 선고되는 심판이 될 것입니다.>
‘방탕’은 무질서한 생활과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생활을 뜻합니다. ‘만취’는 술에 취하든지 다른 무엇에 취하든지 간에 정신을 놓아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일상의 근심’은 쓸데없는 걱정에 사로잡혀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이 물러지다.’는 믿음과 희망이 흔들리는 것을 뜻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는 말씀과 “늘 깨어 기도하여라.” 라는 말씀은 서로 연결됩니다. 조심하라는 말씀은, 사탄이 계속 노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인데,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은 ‘늘 깨어 기도하는 것’뿐입니다.(마르 9,29) ‘덫’은, 여기서는 ‘갑작스러움’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무방비 상태로 종말의 날을 맞이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덫’은 ‘멸망의 구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종말과 심판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만 대상으로 하는 심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종말과 심판은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런 말은 바로 마귀들이 이미 했던 말입니다.(마르 1,24)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방해하는 온갖 걸림돌들을 극복하고”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잠자는 이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이들은 밤에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1테살 5,7-9)
예수님의 재림은, 심판을 하려고 오시는 일이 아니라, 구원을 완성하려고 오시는 일입니다. 벌을 주려고 오시는 일이 아니라 상을 주려고 오시는 일, 죽이려고 오시는 일이 아니라 살리려고 오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종말과 재림을 ‘시상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상을 받을 자격이 있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시상식에 참석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상’을 받게 될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 상을 못 받는 것 자체가 벌일지도 모릅니다. 따로 무슨 벌이 있다고 하더라도......>
3) “늘 깨어 기도하여라.”라는 말씀에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말씀이 연상됩니다. “그때에 그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26,38)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하시고, .....".(마태 26,40-41)
제자들이 무심해서 자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루카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슬픔에 지쳐서’ 그랬었다고 기록했습니다.(루카 22,45)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겪었던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도 겪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따르지 못하는 상황...... 그런 때에는 더욱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그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몸이 따르지 않는데 어떻게 기도하란 말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기도는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합니다. 그리고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해 보지도 않고서 못한다고 미리 포기하지 말고,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겟세마니에서 ‘슬픔에 지쳐’ 잠들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에는 완전히 변화되어서, 성령강림을 기다릴 때에는 기쁨으로 가득 차서 ‘깨어 기도하는’ 신앙인들이 되었습니다.(루카 24,52-53; 사도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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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강의를 시작하기 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사람들 앞에 서면 처음에는 언제나 긴장이 됩니다. 강의 준비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처음 강의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 긴장감과 떨림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성호를 긋습니다.
그런데 긴장감 없이 어떤 일을 하다 보면 꼭 실수를 연발합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주 작은 실수 때문에 그 일을 완전히 망쳐 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긴장감은 어쩌면 더 많이 준비하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고민하였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더 많이 준비하였기에, 세밀한 부분까지 알고 있기에,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도 평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방탕과 만취, 일상의 근심도 날마다 반복되면 습관이 됩니다. 습관이 되면 실수하는 것 또한 일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 습관 때문에 누군가 상처받고 아파하지만, 그 상처와 아픔조차 평범한 일이 되어 버립니다.
한 번의 실수에도 고민하고 반성한다면, 긴장하며 일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또한 그 긴장감은 나의 약함을 바라보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많은 준비를 하고 반성을 하며 완벽해지려고 하지만, 결과를 돌아보면 언제나 부족함이 보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실상 그리 많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도를 할 때, 주님께서 함께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일을 시작하며 바치는 기도는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라고 시작합니다.
맡겨 드린다는 것은 우리 안에 열정을 키우는 일입니다. 사랑의 불, 일에 대한 열정, 그 열정을 통하여 실수가 있더라도 내가 하는 일이 하느님의 가치를 전하는 당신의 일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늘 그렇게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깨어 바라보고 준비하고 기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긴장감을 오늘도 즐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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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사람이 자기 집 정원을 단장하기 위해 전문 업체와 계약했습니다. 일주일 뒤, 이 사람은 부엌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다가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동안 오랜 친구였던 관목이 너무 많이 잘렸고, 잔디는 삐뚤삐뚤한 상태였습니다. 일주일 동안의 작업이 절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약했던 전문 업체 대표를 만나서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조용히 말을 듣던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어색하겠지만, 한 달 뒤에는 충분히 만족하실 것입니다.”
정말 한 달 뒤에 이 사람은 너무나 만족했습니다. 비용을 들인 가치가 있었고, 그의 정원은 그토록 원했던 꿈의 정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왜 이 사실을 느낄 수가 없었을까요? 이 전문 업체는 관목과 잔디의 성장에 맞춰서 작업했기 때문입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오랜 기간 만족할 방법을 따른 것입니다.
주님의 일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 순간에는 감사의 마음보다 불평불만의 마음이 더 큽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보면 주님의 일이 가장 옳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순간의 삶이 아닌 영원의 삶을 지향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영원한 삶만이 우리를 희망의 길로 인도하는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끝 날의 징조들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현재 삶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언제 그날이 올지 계산하기보다, ‘오늘을 어떻게 깨어 살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루카 21,34)라고 하시지요. 바로 자기 내면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날은 갑자기 덮쳐오고,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친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환난을 피하기 위한 도피 수단이 아닙니다. 그보다 그 환난을 견뎌낼 힘을 얻는 통로가 됩니다.
특별히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루카 21,36)이라는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서다’라는 동사는 법정 용어로, 심판관 앞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엎드리거나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죄를 선고받고 당당히 서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당당히 서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의 아들과 가까운 관계, 함께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강력하고 구체적인 행동 양식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만 주님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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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부끄러워하며 쇄신하며>
모든 성인의 날이 있는데 굳이 프란치스칸 모든 성인의 날을 지낼 필요가 있을까 생각도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칸 성인도 많다고 자랑삼는 축일이라면 참 유치한 축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사실은 제가 바로 자랑삼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랑삼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전혀 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하셨습니다.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를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이 우리에게는 자랑하는 날이 아니라
성인들처럼 살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하는 날입니다. 부끄러워할 줄은 모르는 사람은 이 축일을 지낼 자격이 없고 내가 프란치스칸입네 하고 얘기하지도 말 것입니다.
왜냐면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자랑만 하는 것은 프란치스칸으로 살려고 하지 않기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고 프란치스코와 성인들 이름으로 득만 보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프란치스칸 이상을 얘기하면 외려 현실의 어려움을 얘기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강변합니다.
우리는 물론 성인들처럼 특히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살지 못합니다. 진정 닮기를 원했고 닮으려고 노력하는데도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그렇게 살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그래서 지금까지보다는 더 잘 살아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니까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미래가 있고 발전의 가능성이 있지만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은 뻔뻔한 것일 뿐 아니라 미래가 없습니다. 그냥 내내 득이나 보고 덕이나 보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로 우리는 이 축일을 지내며 쇄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쇄신도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쇄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물론 개인의 쇄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앞서는 것이지만 개인의 쇄신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이 축일을 같이 지내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성인은 홀로 성인이 되지 않았고 그러므로 홀로 쇄신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프란치스코가 있었기에 클라라가 있고, 클라라가 있었기에 프란치스코가 있음을 알고 있고 이 두 분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성덕에 나아갔는지 알고 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처럼 정말 독하게 혼자 성덕을 이룬 성인들이라면 몰라도 거의 모든 성인은 같이 쇄신하고 같이 성덕을 이루어갔습니다. 이는 마치 한배를 탄 사람들과 같은 이치입니다.
배를 타면 나 혼자 갈 수 없고 내 마음대로 갈 수 없습니다. 같이 하느님께 가든지 같이 세속을 향해 가든지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같이 하느님께로 향해 가는지 돌아보고 그러하지 못하고 있다면 쇄신을 같이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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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신 차리는 것부터>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기 위해 적극적으로는 기도하라고 하시고, 소극적으로는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하시며 마음이 물러지게 하는 것으로서 특별히 세 가지를 꼬집어 말씀하십니다.
방탕과 만취와 근심 세 가지입니다. 그런데 방탕과 만취가 기도를 방해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근심이 기도를 방해한다는 것은 설명이 좀 필요할 것입니다.
근심한다는 것은, 우리 신자들에게는 기도할 것을 근심한다는 말이지요. 근심거리를 하느님 앞에 내놓지 않고 자기 안에서 끙끙거리는 것이요. 근심거리를 기도 거리로 만들어 하느님 앞에 내놓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관련해서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근심이나 걱정을 별로 하지 않는 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조심하라고 하신 세 가지 가운데 제게 문제가 되는 것은 술입니다. 그러나 술도 제가 먹되 만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그렇기에 오히려 문제가 된다는 점입니다. 많이 먹지 않으니 괜찮다고 합리화하고 그래서 경계심을 품지 않으니 말입니다.
사실 술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만 제가 존경하는 어르신들이 계셨는데, 그분들은 신앙적으로 아주 열심하고 매일 말술을 드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이유는 그렇게 술을 드시고도 꼭 성당에 들러 잠깐이라도 조배하고 집에 가시고, 같이 술을 마시고 같이 성당에 들러 집에 가신다는 점 때문입니다. 술 안 마시고 성당에 매일 들르는 분들보다 더 존경스러운 것이고, 술 마시는 제 입장에서는 더욱 존경스러웠지요. 그러니 술 자체가 아니라 술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것이 문제이고, 경계심 없이 술을 마시고 저처럼 기도하지 않고 자는 것이 문제지요.
그러므로 술을 마시건 마시지 않건 관건은 오늘 마지막 말씀처럼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 기도하게 하는 것은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끄지 않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는 가르칩니다. 그러니 썩어빠진 정신은 버리고 정신을 차리는 것, 곧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주님 오실 날이 한 달도 안 남았고,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하려는 의지와 마음이 물러지고 기도 정신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질락 말락 한다면 이제 경각심을 갖고 정신을 차리는 것부터 당장 시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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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34주간 토요일>(11.29) -성서 주간-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오늘은 마지막 날!'
오늘 복음(루카21,34-36)은 '깨어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연중시기의 마지막 날'이자,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부터는, 정확하게는 오늘 저녁부터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한 해인 '가해'가 시작됩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들려오는 짧은 복음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4-36)
마지막 날에 들려오는 복음이 우리를 일깨웁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인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늘 깨어 있으면, 깨어 기도하고 있으면 이제와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 안에 들게 될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늘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부활을 위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하고도 극진한 십자가 사랑을 언제 어디서나 늘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생업을 다 제쳐놓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겠지요. 각자의 성소(일과 생업)에 충실하고, 그 충실함 속에 기억과 머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시작과 마침과 짬짬이 시간에 깨어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넘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를 향해 쏟아진 십자가 사랑 안에서 한 해를 되돌아보며, 자비를 청하고, 그리고 기쁘게 새해를 맞이하도록 합시다!
(~ 2역대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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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흐리게 하는
방탕과 만취와
근심을
경계하십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힘이기에,
우리 마음을
지키는
실제적 지침을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길은
마음의 청결입니다.
마음이 흐려지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보다
세상의 소리에
쉽게 휩쓸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깨어 있음은
하느님 앞에서
지금을
진실하게 사는
태도이며,
깨어 있음은
선택이 아닌
구원을 지키는
필수적 자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은총 없이는
정화될 수 없고,
기도 없이는
깨어 있을 수 없으며,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근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흐르는 세상 속에서
방탕과 만취와 근심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지 못하도록,
오늘도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며
중심을 지키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물러지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삶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마음의 중심을 지키는
참된 신앙입니다.
지난 한 해의
모든 순간을
하느님 손에 맡기며,
흘러간 시간 속에서
배운 감사와 사랑을
마음에 담고,
새해를
깨어 있는 마음으로
기쁘게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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