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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1 오늘 묵상글 등

251213. 묵상글 (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 나의 예언자를 알아보는 믿음의 눈,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 등 )

작성자김 루도비꼬|작성시간25.12.13|조회수170 목록 댓글 0

251213. 묵상글 (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  나의 예언자를 알아보는 믿음의 눈,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4:3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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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2.13 04:30

 

- 나의 예언자를 알아보는 믿음의 눈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그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오늘 복음을 우리는 지금 대림절에 읽지만 본래

이 복음은 수난 예고를 앞두고 있으며

타볼산에서 주님께서 변모하신 사건에 이어지는 복음입니다.

 

타볼산 위에서 주님께서 변모하시는 얘기를 보면 그때

구약의 두 예언자 곧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같이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들은 주님의 두 중요한 사건을 관련이 있는 분들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 넘어가게 함으로써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게 하신

주님의 파스카를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어떤 면에서 주님과 관련이 있습니까?

 

바로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역할을 한 분입니다.

곧 주님께서 오시도록 사람들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분이지요.

 

사실 엘리야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예언자는 본래 바로잡는 존재입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도 그래서 주님의 뜻을 알고도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의 불의와 죄를 바로잡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바로잡아주려는 예언자의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일까요?

사람들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좋아할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성인급은 돼야 기꺼이 받아들일 겁니다.

 

싫어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인정하는 것이 싫습니다.

 

너는 잘못됐어라는 말이 우선 기분 나쁩니다.

여간해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고,

인정하더라도 스스로 고치고 싶지지적받고 고치고 싶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교정의 고통 때문입니다.

바로잡아야 한다고 마음먹었어도 바로잡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관절염이 심해 수술할 경우,

수술의 고통보다도 수술 뒤 재활 치료가 더 고통스럽다고 하잖습니까?

 

그래서 스스로는 교정을 위한 재활 치료를 엄두도 내지 못하거나

결심하고 재활에 들어가지만 고통 때문에 포기하고 말기 십상인데 그래서

역설적으로 재활은 스스로 할 수 없고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영적인 교정 또는 영적인 재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전혀 상관없이 무신론자처럼 살아온 나를 바꾸는 것이니,

다시 말해서 세상 것들에 맛 들인 나의 입맛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 것이니

새로운 맛을 들이는 것도 힘들지만 기존의 입맛을 포기하는 것이 더 힘들겠지요.

 

그러니 관절의 교정과 재활처럼 이것 또한 스스로 하지 못하고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할 사람이 바로 예언자입니다.

 

문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사람들이 몰라보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다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인데 몰라본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내 주변에 나를 바로잡기 위해 쓴소리하는 사람이

바로 주님이 보내신 예언자라고 알아보는 믿음 눈 말입니다.

 

사실 내 주변에 달콤한 소리 하는 사람보다 쓴소리하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그렇지요달콤한 소리는 원래 바로잡는 소리가 아니고

훌륭하다고 그러니 계속 그렇게 살라고 하는 소리지요.

 

그러므로 달콤한 소리들 중에 쓴소리를 해대는 사람이

바로 나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주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임을 알아보는 믿음의 눈을 우리는 오늘 장착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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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루멘체치스(Lumen Caecis); 눈먼이에게 빛을!”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오늘은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이지만, 우리 요셉수도원을 비롯한 왜관수도원 및 오틸리아 연합회에 속한 모든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은 연합회의 수호자 성녀 오틸리아 대축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빛과 관련되는 두 성녀를 잠시 소개합니다. 

 

‘빛’또는 ‘광명’을 뜻하는 라틴어 룩스(Lux)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지닌 루치아 성녀는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에서 부유한 귀족 집안의 딸로 태어납니다. 일찍 스스로 하느님께 동정을 서원했고 어머니께 동정생활을 허락받은 성녀는 자신의 결혼 지참금을 모두 가난한 이에게 나눠줬고, 성녀에서 청혼했던 청년은 분개하여 성녀가 그리스도인으로 로마의 법을 어겼다고 고발합니다. 

 

마침내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당신이 황제의 뜻을 따르기 원하듯, 나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소원”이라고 거부한 성녀는 결국 순교의 죽음을 당합니다. 순교 직전 모진 고문으로 눈알이 뽑히는 형벌까지 받았으나 천사의 도움으로 뽑한 눈알을 돌려받고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전설적 일화도 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성녀는 이름 뜻대로 어둠을 밝히는 빛의 순교자가 되고, 시력이 약하거나 시력을 잃은 이, 또 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오늘 대축일은 지내는 오틸리아 성녀의 삶 역시 전설적입니다. 673-675년 무렵 프랑스 알자스의 영주의 딸로 태어났으나 눈이 멀었다는 이유로 성녀의 아버지는 잔인무도한 아달리히 공작은 그를 죽이려하나 구사일생 살아난 성녀는 수녀원에 맡겨지고 12세 무렵, 멀리서 계시를 받고 온 레겐스부르크의 에르하르트 주교에게 세례를 받게 됩니다. 

 

세례 예식중 성유를 바르는 순간 오틸리아가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후 성녀는 수녀원을 세우고 원장이 되었고 환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보살폈다 합니다. 세례 은총으로 눈을 뜬 성녀는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나 시각장애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게 됩니다. 

 

오틸리아 연합회에 속한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의 선교 모토인 “루멘체치스(Lumen Caecis); 눈먼이들에게 빛을!” 이란 말마디도 여기에 근거합니다. 참 오묘하게도 오는 축일을 지내는 성녀 오틸리아와 루치아 모두 시각장애인들의 수호성인들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눈이 열립니다. 두 성녀의 전구도 개안開眼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사람은 예외없이 무지에 눈먼 사람들이요 주님을 만날 때 마음의 눈이 열리며 날로 맑고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을 살게 되는 믿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이 참 적절합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

 

마음이 순수하여 맑고 밝으면 눈도, 몸도 맑고 밝아집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맑고 밝게 빛나는 순수한 마음이요, 이런 마음은 그대로 눈과 몸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환하니 눈도 몸도 환해져 저절로 전인적 치유의 구원입니다. 그대로 대림시기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다음의 <그때>는 대림시기의 <오늘>이 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참으로 주님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치유와 구원의 기적을 상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불편중에도 영적 건강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유는 눈빛으로 담기고 세월은 주름으로 새겨집니다. 얼굴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얼굴로 드러나는 것입니다’<다산>. 마음의 얼이 드러나 얼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영적건강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주님 말씀이 답을 줍니다.

 

첫째, “기뻐하여라!”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기쁨의 선물입니다. 고해인생이 아니라 기쁨의 축제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좋아했던 희망과 위로의 예언자인 동시에 기쁨의 예언자, <기쁨의 대가>가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전임 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기쁨이야 말로 믿는 이들의 신분증입니다. 그대로 대림시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기쁨의 빛이자 생명입니다. 이런 기쁨과 함께 가는 마음의 순수요 날로 맑고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입니다. 마음이 은총과 노력으로 맑고 밝아지면, 눈도 몸도 저절로 맑고 밝아져 온전한 치유의 구원입니다.

 

둘째, “두려워하지 마라!”

기쁨의 빛이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빛이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저절로 사라지는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심의 예수부활상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성구가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환대하며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권고도 우리에게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너희는 맥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방금 힘차게 부른 화답송 후렴도 이와 일치합니다.

“주여, 오소서. 오사 우리를 구원하소서.”

오시는 주님께 날로 가까워질수록 기쁨의 순수로 빛나는 마음에 저절로 사라지는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셋째. “초연하여라!”

이런 이탈과 초연함의 대가가 바오로 사도입니다. 기혼자든 미혼자든 상관없습니다. 참으로 품위 있고 충실히 주님을 섬기기 위한 세상 것들로부터의 이탈이요 초연함의 홀가분한 자유입니다. 세상 것들의 무시가 아니라 지혜로운 분별에 의한 거리두기, 초연함입니다.

 

“형제여러분,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처럼”의 삶은 위선이 아니라 영적 성숙을 드러내는 초연한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깊어지는 관계와 더불어 세상 것들로 부터의 자연스런 이탈에 날로 초연한 자유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베풀어 주시어 “눈먼이들에게 빛”을 선사하며, 주님과 함께 순수한 기쁨에 빛나는 축제인생을, 선교인생을 살게 해주십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복음선포의 꽃자리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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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엘리야의 재림에 대해서는 이미 <말라키서>(3,1,23)에서는 예고합니다. 거기에는 모세에게 내린 율법과 규정을 기억하라는 말(3,22)과 함께 언급됩니다.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곧 엘리야가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있느냐는 율법학자들의 주장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씀하시면서, 마찬가지로 ‘이미 와 있는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이미 와 있는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이제 당신께서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말해주는 동시에, 엘리야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한다면, 동시에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2-1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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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본당의 날’ 행사가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게임이 많아서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분은 지루해했습니다. 올해는 미리 예선전을 거쳤고, 본당의 날에는 준결승과 결승만 하였습니다. 윷놀이도 예선을 거쳐서 4강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너무 빨리 소진되었던 먹거리 장터를 다양하게 꾸몄습니다. 묵밥, 수육, 떡볶이, 어묵, 커피, 쫀드기, 아이스크림, 빙수와 같은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같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마련했습니다. 꼬마 기차도 운영했고, 동물원도 꾸몄습니다. 성서 말씀을 주제로 페이스 페인팅, 핸드 페인팅을 해 주었습니다. 저도 손등에 ‘하느님은 나를 위해서 좋은 계획을 마련하신다.’라는 말씀을 페인팅하였습니다. 야외 행사가 끝난 후에 모두가 친교실에 모여서 청백전 게임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봉사자들은 야외에 설치했던 천막과 탁자를 정리했습니다. 몇 가지 게임을 한 후에 마지막으로 ‘박 터트리기’를 했습니다. 본당의 날 행사가 잘 치러질 수 있도록 준비해 준 봉사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 독서는 ‘엘리야’ 예언자 이야기를 합니다. 구약 시대 엘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잊고 우상인 바알을 섬기던 어두운 시대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두려움 없이 아합왕과 이세벨 왕후 앞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선포했습니다. 갈멜산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 참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드러내었던 장면은 엘리야의 사명을 상징합니다. 백성을 참되신 하느님께 다시 돌려세우는 일, 회개를 촉구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광야를 떠돌며 고독 속에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고, 때로는 좌절과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께 의지하며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생각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시대의 ‘새로운 엘리야’로 불립니다. 이스라엘에 오랜 침묵과 기다림이 흐르던 때,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나타났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사람들에게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는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고, 진리를 위해 헤로데 왕에게도 바른말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시는 분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라는 고백은 요한의 겸손과 순명을 보여 줍니다.

 

이 두 인물의 공통점은 명확합니다. 세상이 영적으로 어두워질 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백성을 깨우기 위해 회개의 목소리를 보내십니다. 엘리야는 불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었고, 요한은 물을 통해 새 삶의 길을 열었습니다. 시대는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용기, 겸손과 순명의 삶을 살며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집니다. 세속의 유혹과 거짓, 편안함 속에 잠들지 말고, 마음을 곧게 하여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는 부름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각자를 작은 엘리야와 작은 요한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직장에서,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드러내고 회개의 길을 걷는 사람, 주님께 마음을 열고 빛과 정의의 길을 따르도록 이끄는 사람이 되라는 초대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더 깨어 기도하고, 겸손히 회개하며, 사랑과 진리로 세상을 비추어야 합니다.

 

‘본당의 날’ 행사가 잘 될 수 있도록 수고해 주신 분들이 엘리야요,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 일찍 나와서 천막과 탁자를 설치한 형제님들이 엘리야입니다. 전날부터 음식을 준비한 자매님들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몇 달 전부터 행사를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준비한 친교 분과 형제님들이 엘리야입니다. 구역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장터를 만들고, 식사를 준비하신 구역장님들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행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깔끔하게 하신 봉사자들이 엘리야입니다. 이 모든 행사를 마친 후에 뒤풀이 자리를 마련한 사목회장님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분들이 있었기에 2025년 본당의 날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축제의 한 마당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엘리야처럼 강하고, 요한처럼 겸손한 믿음을 주시어, 우리의 마음 안에 당신의 길이 열리게 하소서. 회개의 은총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주님의 오심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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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대림 시기는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2월 12일 금요일- 쉰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은총의 은밀한 업적

 

대림 시기는 빛이 오고 있다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저자 스테파니 던컨 스미스(Stephanie Ducan Smith)는 대림 시기에 유산(miscarriage)을 겪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합니다. 그녀는 깊은 슬픔 속에서 성탄 축제에 마음을 열 수 없었던 심정을 고백합니다:

제 생애 처음으로 성탄 대축일 밤 미사에 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당시 그와 같은 기쁨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차마 태연하게 ‘궁극의 잉태 이야기’, 곧 모든 탄생 이야기의 완성인 육화의 기억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잉태에서 첫 울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 오셨지만, 제 딸은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콜 아서 라일리(Cole Arthur Riley)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성에 있어 가식보다 더 우리를 더 지치게 하는 것은 없다.” [1] 저는 더 이상 그 가식을 유지할 힘조차 없었습니다.

던컨 스미스(Duncan Smith)는 대림 시기가 우리 삶과 세상 안에 존재하는 어둠을 존중한다고 설명합니다:

고통 속에 있을 때, 그 자체보다 더 아픈 것은 "그 고통은 별것 아니야. 네 아픔은 정당하지 않아."라는 말을 듣는 내적 상처입니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공감적 증언인데, 그것이 부정될 때 가장 큰 상처가 됩니다. 저에게 대림 시기는 바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거부했던 것은 대림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대림을 단순한 달콤함과 포장된 이야기로 축소시켜, 하느님의 육라는 복잡하고 깊은 신비를 오직 일차원적인 기쁨으로만 표현하여 다른 모든 인간적 경험을 배제해 버리는 그 왜곡된 모습이었습니다.

육화는 언제나 복된 소식을 가져오지만, 우리의 고통의 현실성을 결코 축소하지 않습니다. 대림 시기는 빛이 오고 있다는 희망을 선포하지만, 먼저 지금 세상이 매우 어둡다는 진실을 드러냅니다. 이 시기의 모든 축제 속에서 대림과 성탄의 의미가 종종 혼동됩니다. 그러나 성탄 대축일의 기쁨은 대림의 위대한 기다림과 깊은 신음을 거치지 않고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교회의 전례력도 시작됩니다.

이 기다림의 시기의 첫 언어는 종소리와 캐롤이 아니라, 상처 입은 세상의 신음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의 청각적 탄식입니다.

대림의 하느님은 무관심의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신비를 창조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곧, 서로의 감정과 고통을 읽고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가능케 하는 공감의 신비를 마련하신 분입니다. 모든 인간적 만남에서의 공감(empathia)은 고통을 증언하는 이 신비로운 작용 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전례력이 대림 시기로 시작되는 것은 참으로 합당합니다. 인간의 고통은 곧 부르심이며—모든 신경이 울부짖습니다. 이에 대한 응답은 육화화입니다—하느님의 모든 사랑이 불처럼 깨어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큰 추락과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어머니처럼 달려오십니다. 임마누엘은 시간과 공간을 뚫고 오셔서 단순히 우리의 고통 곁에 계실 뿐 아니라, 그 고통 안에서 우리와 함께 인간으로 계십니다.

제가 놓쳤던 것은 바로 대림의 본질이었습니다. 대림은 온전히 고통을 듣고, 어둠을 이름 붙이는 데에 헌신된 시기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그렇게 해도 된다고 허락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하라고 분명히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 남편은 34세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저는 가족의 삶에서 산산이 부서진 조각들을 다시 맞추려 애쓰며 깊은 슬픔 속에 있었습니다. 장례 몇 주 후, 문득 저는 흥얼거리며 다가올 하루를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멈추며 "지금 뭐 하는 거지? 상황은 여전히 힘든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느님의 은총이 제 안에 스며들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기쁜 마음은 은총의 짧은 선물, 잠시 머무는 위로였습니다. 힘든 날들은 여전히 찾아오겠지만, 기쁨의 순간 또한 함께 올 것입니다. 저는 매일, 매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껴안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Mary S.

References

[1] Cole Arthur Riley, This Here Flesh: Spirituality, Liberation, and the Stories That Make Us (Convergent Books, 2022), 186.

Stephanie Duncan Smith, Even After Everything: The Spiritual Practice of Knowing the Risks and Loving Anyway (Convergent Books, 2024), 48, 50-51.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aura Barbato, untitled (detail), 2020, photo, Italy,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문에 서린 안개를 닦아내는 작은 몸짓은 곧 ‘영혼의 어두운 밤’ 속에 있다는 우리의 작은 표징이 됩니다. 그것은 ‘나는 여기 있습니다’라는 육화된 응답으로, 알 수 없음 속에서도 선명함을 향해 나아가려는 몸짓입니다. 그 옆에서 작고 한결같이 타오르는 촛불은, 겉으로는 계절이 환히 빛나더라도 우리의 내면이 그렇지 않을 때에도 성령께서 여전히 부드럽게 타오르고 계심을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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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엘리야의 일을 한 사람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은 제자들이 성경을 얽어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율법 학자들이 늘 그들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군중 사이에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도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요한 4.25) 하고 말했고, 사람들이 요한에게 ‘당신은 엘리야요? 아니면 그 예언자요?(요한 1,21 창조) 하고 물은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리스도나 엘리야에 관한 이런 견해가 널리 퍼져 있었지만, 그것은 옳은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미 일어난 지금의 오심과 앞으로 있을 재림이 그것입니다. 바오로는 이에 대해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티토 2,11-12) 하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오심을 잘보고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으십시오. 그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3) 라고 합니다.

 

예언자들도 두 번의 오심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엘리야가 선구자로 올 것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오심의 선구자는 요한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을 엘리야라고도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엘리야라서가 아니라 그가 엘리야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두 번째 오심의 선구자일 것이듯이, 요한은 첫 번째 오심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들을 혼동하고 사람들을 나쁜 길로 이끄는 율법 학자들은 두 번째 오심에 대해서만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이자가 그리스도라면, 엘리야가 먼저 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외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5 우리의 신성

이것을 위해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고 하셨다(사도 1,4),

 

자기 내면의 자유와 일치를 맛보는 사람도 … 평화와 고요 속에서 하느님을 모셔 들였다면. 또한 그는 소음과 불안 속에서도 하느님을 모셔 들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하느님을 모셔 들이는 것만큼 떠들썩하고 불안한 상태에서도 하느님을 모셔 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엑카르트는 이와 같이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는 이 돌파와 성령 세례가 우리가 경험하는 마지막 탄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더 많은 산고와 더 많은 탄생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원천은 우리의 깊고 깊은 소용돌이다. 우리가 버림을 실천하고 탄생이 일어나게 할 때, 영은 그 소용돌이 속에서 헤엄을 치고, 우리는 그 속으로 점점 더 깊이 가라앉을 것이다.

 

성령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벙해하는 장애물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이분법적 의식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하나만을 찾아다니다가 둘을 찾았다.

 

그러한 분열과 불일치는 빈 들 경험이 일으키는 일치를 파괴하고 만다. 황홀은 분열을 용납하지 않는다. 황홀은 하나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신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때문에 “하느님이 몸소 사람이 된 것이야말로 그분이 사람과 나눈 가장 맞갖은 선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525)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종교다원론과 해석학적 이론들

 

종교 다원론에는 다양한 입장이 있다

 

포용주의적 입장이 지구촌의 종교 다원론 담론에서 문제가 되는 점은, 그 입장은 타 종교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되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의 절대적 우월성과 가치 판단의 규범성을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사실 이 점은 매우 민감한 쟁점 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인은 명시 적으로는 아닐지 모르나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자부심과 일차적 충성을 당연히 지니지 때문이다. 이런 감정은 암묵적으로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가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영성적으로 제일 우월하다는 내면적 신념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반드시 타 종교가 지기 종교보다 열등하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그러한 주체적 신념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또 그러한 태도를 나무랄 수 없는 것은 진정한 신앙적 태도란 시장에서 물건 고르듯이 하는 일과 달라 전인적 진지성을 가지고 참여하는 궁극적 관심'의 사항이기 때믄이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종교 다원주의적 태도는 이러한 포용주의적 태도가 지닌 문제점을 진지하게 문제삼는 학문적 반성 위에서 , 그리고 보다 가까워진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과 그 문화들의 역동적 실재성에 대한 심화된 이해 과정에서 태동되었다. 특히 인간의 종교 체험을 포함한 모든 인식 행위와 경험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제한받는다는 인간의 해석학적 통찰에서부터 연유한다.'(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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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을 가리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예언의 성취를 알려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눈멂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단호한 말씀을 불편하게 여겼고, 결국 그를 거부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요한을 통해 오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듯, 그 뒤에 오신 메시아 주님조차 많은 이들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곁에 오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의 눈물 속에서, 용서를 구하는 이의 마음 속에서, 혹은 매일 들려주는 복음 말씀 속에서 그분은 조용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소음과 자기 생각에 갇혀 있다면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는 엘리야를 알아보았느냐? 너희는 지금 오고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고 있느냐?” 하느님께서 주시는 표징은 언제나 거창하지 않습니다. 작은 일상의 순간 속에서도 그분의 구원 계획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길을 닦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 마음의 교만과 무관심을 치워내고, 그분의 말씀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주변에 숨어 계신 하느님의 표징을 찾아보십시오.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청하며, 하느님께서 우리 삶 속에 이미 오셨음을 믿고 기뻐합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는 반대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이제야 당신을 알아봅니다.

제 삶 속에 이미 함께하고 계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인생은 본디….

 

인생은 본디 우울하기에 그림이라도 밝아야 한다.

-르누아르-

 

르누아르는 관절염 환자였습니다.

손가락이 굳어버려 마지막에는 손에 붓을 묶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럼에도 르누아르의 그림은 항상 밝았습니다.

그의 팔레트 위에는 밝은색과 흰색 물감이 많았다고 합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눈은 모두 다를 것입니다.

누군가에는 우울로 보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기쁨이자 밝음으로 보일 것입니다.

 

만약 그대의 인생이 우울과 슬픔으로 가득하다면 그대는 더욱 밝아야 합니다.

그대와 그대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반짝이는 날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 날이 오늘이길 바랍니다.

르누아르의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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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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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꽃길만 걸으려 애쓰지 말고, 자갈밭에서도 굴러 보세요.”

 

“꽃길은 누구나 원하는 길이라 경쟁이 치열하지만, 자갈밭에서는 대부분 의욕이 없어서, 조금만 의욕을 가져도 빛날 수 있어요.”

 

크게 공감 가는 말이었습니다. 저 역시 사제 생활에서 꽃길을 선택하려 했었습니다. 아니 꽃길이 나의 삶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힘든 곳에서 사목하게 되었습니다. 성지에서, 교구청에서, 빚 많은 성당에서…. 다들 제게 처음에는 “왜 그곳에 가는 거야? 주교님께 찍혔어?”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때가 저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시간으로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습니다.

 

꽃길은 그냥 꽃길일 뿐입니다. 쉽고 편할 수 있지만, 내 안에 있는 새로움을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자갈밭은 분명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런 체험이 있고 난 후, 고통과 시련이라는 마음이 들면 하느님의 은총을 그 안에서 발견하려고 애씁니다. 정말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이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꽃길보다 자갈밭에 하느님의 은총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말라키 예언서는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가 파견되어,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리게 할 것으로 예언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율법 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생각하기에 엘리야가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니, 엘리야가 와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께서는 이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임을 이야기하십니다. 사람들은 엘리야의 환생을 기대했지만, 실재는 회개를 외치며 모든 것을 바로잡으려 노력한 세례자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멋대로 다룹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인 메시아 역시 영광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고난을 받아야 함을 예고하십니다.

 

율법 학자들은 화려하고 강력한 능력으로 세상을 뒤집을 ‘영광의 엘리야’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낙타 털옷을 입은 고행자 세례자 요한을 통해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에서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작고 초라한 곳, 또 고통스러운 곳에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의 가치는 다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엘리노어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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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고통을 받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 관건입니다!

 

 

 

환상은 대개 어렵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부드럽고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물론 실제로 환상이 현실을 바꾸어 주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을 도피하려는 쿠션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현실 도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신약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절대적인 현실주의를 드러내 줍니다. 우리 대부분은 아마도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고 부를 것입다. 그러나 현실주의는 자기 방종과 결합될 수도 있고, 영웅적 비관주의와 결합될 수도 있으며, 냉소와 결합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현실주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는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제자들을 십자가의 신비에 참여시키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겪으셔야 할 수난과 고통을 겸손순명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이는 곧 겟세마니의 기도에서 “아버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고 하신 태도와 일치합니다.

고통을 말로만 떠드는 것은 진정한 참회내적 수용을 방해합니다. 고통을 허용하고 받아들일 때, 그것은 성화의 도구가 됩니다. 하지만.... 누가 고통을 온전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 고통이 참된 사랑을 이루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이만이 그리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이를 산고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 고통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사랑의 결과인 생명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곧 "사랑과 하나가 되는 것", 즉 그리스도와 신비적 일치를 의미합니다. 사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참된 복에 이르게 해 주지만,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할 고통이 반드시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사랑을 살아내면서 다가오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길로 승화해 가는 삶을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통을 받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 관건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참된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궁극적 목표이지 단순히 십자가를 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말이고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잠시나마 하느님의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여기에 머뭅시다.”라고 제안했을 때, 주님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신앙이 단순히 황홀한 체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시 현실의 길로 내려와야 함을 보여줍니다. 사랑을 살아내야 하는 현실의 길 말입니다!

제자들은 놀라움 속에서 질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먼저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준비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그 준비가 이루어졌음을 밝히십니다. 곧,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 예언된 ‘엘리야’로서 주님의 길을 마련한 것이지요.

이렇듯이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과 새로운 마음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길을 알아보고, 그분의 사자들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하려는 이조차 드물고, 실제로 살아내려는 이는 더욱 적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과 계획은 종종 주님의 뜻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 충돌은 단순한 불일치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하느님 아버지를 거부하는 투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씁해 주십니다. “고통 속에서도 멈추지 말고, 그리스도와 함께 계속 걸어가라.”라고요!

세상은 우리를 비난할 수 있고, 우리의 신앙을 조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섭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붙들고, 우리를 끝까지 인도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 고통은 참된 사랑을 살아갈 때 수반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가 상징하는 바가 바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우리 그리스도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표상으로 걸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우리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내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앞서 그 험난한 모든 것을 헤쳐 나가 주신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과 복됨을 향해 우리를 이끌어가신다는 말입니다! 이 진리를 믿는 이들이 바로 신앙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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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생명]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알아봄의 용기

 

 

(Week 02. 심장이 뛰는 시간 / 임신 5–8주 / 대림 2주)

알아봄의 용기

#알아봄의용기 #존재의존엄 #여성과생명 #만삭낙태법반대

 

산에서 내려오는 길,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는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이 질문에는 순수한 신학적 궁금증과 함께, 어딘가 기다림에 대한 집착이 묻어 있다.

아직 오지 않았다고, 아직 때가 아니라고,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바꿔 놓는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예언 해설이 아니다. 하느님의 계시는 언제나 '언젠가 도착할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역사 속에서 조용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는 선언이다.

 

문제는 오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다. 알아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알아보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거칠었고, 불편했고, 기존 질서를 흔들었으며, 삶의 방향을 다시 묻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고, 결국 그의 존재를 지워 버렸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하시며 자신의 운명까지 함께 비춘다.

"사람의 아들도 그와 같이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나쁜 의도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때로는 보이지 않아서, 때로는 익숙하지 않아서, 때로는 받아들이기에 너무 벅차서, 때로는 두려워서였다.

 

알아보지 못함은 언제나 악의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종종 깊은 두려움과 현실적 한계에서 온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알아봄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있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임신은 언제나 복잡한 사건이다. 기쁨과 축복으로 맞이하는 순간도 있지만,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마주하는 순간도 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관계의 파탄 속에서, 폭력의 상처 속에서, 건강의 위협 속에서,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삶의 단계에서.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느끼는 두려움과 고통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 첫 번째 알아봄의 용기다.

한 인간의 삶 전체가 걸린 선택이고, 그 무게는 오롯이 그 사람의 몸과 마음에 실린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것을 외면한 채 생명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 복잡함 속에서도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하나의 생명이다. 아직 이름도 없고, 아직 말도 하지 못하고, 아직 스스로를 보호할 힘도 없지만, 이미 심장이 뛰고, 이미 자라고 있으며, 이미 관계 안에 들어와 있는 생명. 이것은 추상적 가능성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이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두 번째 알아봄의 용기다.

 

그리고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한쪽에는 두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여성의 현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아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생명의 현실이 있다. 둘 다 진짜이고, 둘 다 존엄하며, 둘 다 보호받아야 한다.

 

문제는 이것을 대립의 구도로만 보는 순간,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는 것이다. 여성의 권리 대 태아의 생명, 자기결정권 대 생명권.

 

그러나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선택의 논리가 아니라 돌봄의 논리다. 예수님은 요한이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그 거부를 정당화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동시에, 거부한 사람들을 단죄하지도 않으신다.

 

대신 그분은 물으신다. "너희는 알아보겠느냐?"

 

그리고 여기서 세 번째 용기가 필요해진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지 않고, 둘 다를 돌볼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용기.

 

진정한 자기결정은 충분한 지지와 자원이 있을 때 가능하다. 두려움만 있고, 외로움만 있고, 경제적 막막함만 있고, 사회적 낙인만 있을 때,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결정이다.

 

우리가 정말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면, 그 결정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사회가 지지해야 한다. 안전한 주거와 경제적 지원과 의료적 돌봄과 정서적 지지와 직장에서의 보호와 공동체의 환대가 있을 때, 비로소 여성은 두려움이 아닌 자유 속에서 생명을 바라볼 수 있다.

 

태아의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여성을 비난하거나 그의 고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여성과 생명, 둘 다를 돌보기 위해 우리 사회가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고백이다.

 

임신한 여성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의 두려움을 함께 나눌 공동체가 있다는 것, 생명을 환대하는 것이 삶의 파탄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만들어 가는 것이 생명 존중의 진정한 의미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다. 개인의 선택을 비난하기보다, 그 선택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

 

복음은 오늘도 조용히 묻는다.

우리는 지금, 두려움 속에 있는 여성을 알아보고 있는가. 그를 지지하고 돌보고 있는가. 그리고 동시에,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생명을 알아보고 있는가.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돌보는 것은 그와 연결된 모든 생명을 함께 돌보는 것이다.

 

이것이 알아봄의 용기다.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복잡한 딜레마 앞에서 쉬운 답을 찾지 않으며, 판단 대신 돌봄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임을 인정하는 것.

 

작은 이의 기도

 

주님,

불편한 것을 알아보는 용기를 주소서.

두려움 속에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그들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진정으로 함께 지고 나르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크지 않아도, 말하지 못해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생명을 알아보는 용기를 주소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강요하지 않고

둘 다를 돌볼 수 있는 더 나은 길을 찾는 용기를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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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하늘로 들어 올려진 엘리야는
 다시 이 세상에 올 것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오늘 1독서는 엘리야가 다시 와서
 주님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서는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을 전해줍니다.
 즉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것은
 세상의 회복을 가리키고
 그것으로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주님의 분노로 멸망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잡는다는 표현이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엘리야만의 노력으로
 엘리야가 다시 오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노력하는만큼 그것에 동참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안에서 엘리야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통해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 돌리려고 했습니다.
 많은 이가
 심지어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도
 세례를 받으려 왔지만
 요한은 결국 한 여인의 불편한 마음 때문에 죽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가 당신께 돌아설 기회를 주시지만
 그것에 응답하지 않는 인간은
 초대를 거부하는 것을 넘어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멈추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삶을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삶도 비슷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그리고 꾸준히
 우리에게 당신께 돌아설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을 알아듣지 못해서
 아니면 듣고도 하기 싫어서
 외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세상이 당신의 분노로 멸망에 이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당신께 돌아서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서야겠다고 느끼는 시점이
 회개의 시점입니다.
 늦어도 괜찮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내를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만큼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분이십니다.
 그 사랑과 자비를 믿고
 회개의 시점을 놓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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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공통적으로 이스라엘의 대예언자인 엘리야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엘리야’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나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대로 엘리야는 오직 하느님만을 자기 주님으로 모시며 이교의 신들을 받아들인 배반자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모두가 두려워 벌벌 떠는 권력자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하느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불호령’ 같은 말씀들을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예언’뿐만이 아니었지요.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키서를 보면 구세주를 예비하는 ‘선구자’로서의 역할이 이렇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유다인들은 이런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하여, 구세주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먼저 엘리야가 이 땅에 재림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받을 준비를 하도록 이끌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엘리야의 현현이라고 믿었던 세례자 요한은 그 임무를 제대로 끝마치기 전에 감옥에 갇혀 죽음을 맞이했지요. 그로 인해 그의 신원에 대해, 그리고 그가 예고한 구세주 그리스도의 신원에 대해 사람들 사이에서 논란이 생겼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시켜 하느님께로 이끌어야 할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죽은 걸 보면 세례자 요한은 성경에 기록된 ‘엘리야’가 아니며, 따라서 그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던 예수님 역시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한 겁니다. 논리적, 이성적으로 보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이는 주장이지요.

 

하지만 세례자 요한이 자기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죽은 것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드러나는 시대의 징표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때가 임박했으니 어서 빨리 회개하여 하느님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라는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탐욕과 집착에 휘둘려 잘못된 길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목숨을 직접 빼앗은 것은 권력자인 헤로데였지만, 그의 말을 외면하고 배척함으로써 헤로데로 하여금 그를 제거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군중들 모두에게도 그 책임이 있는 것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표징들을 보고도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잘못된 길을 고집했습니다. 그 결과 자기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바라던 메시아를 자기들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게 됩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내 뜻을 이루려는 교만을 버리지 않으면,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고집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 가운데에 함께 계시는 주님을 또 다시 내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이 되고 마는 겁니다. 신앙은 편안함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내 삶의 참된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세상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험난하고 괴로울지라도, 주님과 복음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과 박해를 받을지라도, 주님의 가르침과 계명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 길의 끝에서 비로소 만나게 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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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03.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박윤식”님을 찿아 들어 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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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김건태 신부님_엘리야와 세례자 요한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 특별히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와 같은 지도층은, 구약시대의 전승에 따라,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파견하시기에 앞서 엘리야를 먼저 보내실 것이라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 여겨지는 말라키는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 3,23-24) 하고 전언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유형의 예언을 근거로,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에 대해 자주 이의를 제기하곤 했습니다. 엘리야가 먼저 파견되었어야 하는데, 그런 적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돌려놓았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은, 모든 예언자에게 그렇게 했듯이, 그를 제멋대로 대했다고 질타하십니다. 나아가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고 이르시자, 비로소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닫습니다.”

 

메시아를 준비하기 위해 하느님이 먼저 보내신 엘리야, 곧 세례자 요한은, 복음서에 의하면, “길을 곧게 내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낮게 할” 사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임을 선포할 사람,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며, 알곡을 하느님의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메시아를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존재입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전승 속의 엘리야가 수행했어야 했던 사명을 그대로 완수한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이 시대의 표징을 알아볼 능력이 없다면, 당신이 메시아임을 알아볼 능력과 자격이 없음을 천명하시는 듯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을 것이며, 그것도 바로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이 알아보지 않기를 고집한다면, 새 율법 학자들, 곧 제자들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파악하고, 십자가 예고를 해독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에 앞서 엘리야를 기다려 왔지만, 구약시대의 예언자 엘리야와 똑같은 인물, 외적으로 똑같은 인물을 품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왜 엘리야를 파견하실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메시아를 준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임을 간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온 새로운 엘리야로서의 요한 세례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던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스스로 요한 세례자가 되어, 나와 하느님,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시간, 기도가 필요하다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 실천이 필요하다면 더욱 정성을 기울이며, 잘못이 있다면 곧은 회개의 길을 찾는 가운데,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정성껏 맞이해 나가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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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36

12월13일 [성녀 루치아 동정순교자 기념일/대림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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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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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cKB2cGIvPU

[서울대교구 윤호진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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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엘리야 예언자의 역할을 더욱 완벽하게 재현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 못지않게 역사에 길이 족적을 남긴 대 예언자가 있었으니,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그는 BC 9세기경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라는 이름이 지닌 의미는 ‘나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입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성격은 활활 타오르는 불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불처럼 일어섰고,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하늘을 닫아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 보냈습니다.(집회서 48장 1~3절)

 

엘리야 예언자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서 설설 기던 절대 권력자 임금 앞에서도, 난다긴다 하던 고관대작들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전했고, 철퇴 같은 불호령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계약을 재건했습니다. 또한 그는 “율법에 대한 불타는 열성 덕분에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1 마카베오 2장 58절)

 

“그는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집회서 48장 9절)

 

엘리야 예언자는 예전에 모세가 하느님의 뒷모습을 보았던 바로 그 장소에서 하느님을 목격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그는 모세와 같은 역할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북왕국의 아합 임금은 페니키아 공주이자 시돈 임금의 딸 이제벨과 정략 결혼을 하고 이제벨의 종교인 가나안의 종교를 장려했습니다. 이제벨은 상아궁에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계획들만을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제벨은 바알 신전에서 바알 예언자들 수백 명을 먹여 살리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세적 번영과 풍요를 보증하는 가나안 신들과 정의와 검소한 생활을 요구하는 하느님 사이에서 가나안 신들 쪽에 훨씬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천둥처럼, 벼락처럼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시골 출신의 기인(奇人), 길르앗의 엘리야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 하느님을 저버리고 가나안의 바알을 섬기는 모습을 목격하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와 격정을 느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멜 산에서 하느님의 신비로운 도움에 힘입어 우상 숭배에 푹 빠져 살아가는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존엄성과 권리가 침해받을 때마다 불꽃처럼 일어섰습니다. 날카로운 비난을 퍼부으며 강력히 도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 예언자는 언제나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 편에 서서 사회 정의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는 비옥한 땅을 강탈하기 위해 나봇을 살해한 아합 임금을 통렬히 비난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역할을 더욱 완벽하게 재현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부여받은 사명을 엘리야의 사명과 연관시킵니다. 나인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기적은 사렙타에서 일어난 엘리야의 기적을 상기시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에게 보복의 불을 하늘로부터 내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불타게 하는 성령의 새로운 불을 가져오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또 다른 엘리야 예언자를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불꽃같이 자신의 삶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멋진 예언자, 거짓과 불의 앞에 참지 못하고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는 예언자,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 사람 앞이라 할지라도 부패한 권력 앞에서는 할 말 제대로 하는 예언자를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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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이해 못 할 때; 부모도 자녀에게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다>

 

오늘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변모하시고 내려오는 중에 제자들이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면 당신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율법 학자(모세) – 엘리야 – 메시아’에 관한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타볼산에서 만난 모세이고 모세는 율법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다음 엘리야가 필요하고 마침내 이 두 단계를 거치면 메시아가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종교 안에서도 하나에 지나치게 집중하거나 약간 교리를 바꾸어 돈벌이하는 사이비들을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은 모세-엘리야-메시아의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우리 종교 안에 스며들어있는

사이비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자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어렸을 때 받은 상처에 대한 탓을 너무 부모에게만 돌린다는 이유였습니다. 물론 부모로서 키우면서 딸에게 부족한 사랑을 준 것은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힘든 이유를 지나치게 부모 탓만 하니 더는 견디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년 동안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영성 심리 학회에서 교육도 받고 피정도 하고 상담을 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당연히 지금 상태가 좋지 못한 이유는 어렸을 때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영향이 가장 크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도 모든 심리적 문제는 사랑을 부족하게 받아서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방법에 머물게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는 사랑하지 못하는 탓을 남에게 돌리게 하지 않습니다. 자아와 삼구에 돌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방법을 따라야 하며 부모에게 용서를 받게 하고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역할이 강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모세입니다. 그러나 이것에만 머물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이제 초점을 나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용서를 청해서 그 상처가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그 상처 받은 자아를 죽이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엘리야의 역할입니다. 

 

왜 이미 성인이 되었으면서도 그래도 할 만큼 한 부모 탓을 하게 만듭니까? 부모가 부족했어도 부모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완벽합니까? 엘리야는 우리 시선을 자아로 이끌고 그 자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음을 깨닫게 만드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엘리야는 가르멜산에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이끄는 예언자들의 목을 쳤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시합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우리 문제가 그리스도의 피, 곧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음을 명확히 일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들은 무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자아와 삼구를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자신들이 하는 기도회나 상담, 피정,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어떤 방법들을 통해서 어렸을 때의 상처를 치유하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피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자신들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치장합니다. 그렇게 돈을 버는 것입니다. 혹은 자기 존재감을 느끼는 것을 즐깁니다. 

 

모든 것은 나의 문제고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알리는 엘리야의 역할을 본인들이 하려고 하는 이들이 사이비입니다. 자신들의 역할을 강화하며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소시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대부분의 사이비는 이렇게 엘이야가 와야만 하는 필요성을 무시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사이비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라고 말하는 사이비들을 조심하십시오. 엘리야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표지판과 같은 존재입니다. 요한은 자신 안에 사람들을 잡아놓지 않습니다. 어린양께 자기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었고 요한은 그들이 예수님께 떠나는 것을 기뻐합니다.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이비는 자기가 커지며 예수님의 역할을 줄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이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합니다. 

 

영화 ‘새크라멘트’(2014)는 마약에 빠진 누나가 어느 종교단체에 들어가는데 친동생에게 이곳이 너무 좋다고 한번 오라고 초대장이 와서 친구 두 명과 함께 누나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이는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곳의 교주 짐 존스는 900여 명의 신도에게 에덴동산과 같은 그곳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런데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동생과 기자들이 떠나는 날이 되자 그곳에서 소란이 일어납니다. 행복하기만 하다고 말하던 그들이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고 청하는 이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자 짐 존스는 무장한 부하들에게 그곳을 떠나려는 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고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 당연시되자 남아있는 이들 또한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수백 명의 아이와 함께 900여 명이 자살하거나 피살된 이 사건은 911 테러 이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왜 9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된 것일까요? 그들이 엘리야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모든 문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십자가 희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인도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마치 자기를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하면 그것은 사이비입니다. 

 

엄마도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는데 자녀의 종교적 자유를 주지 않는 부모도 어느 정도는 사이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영성체를 했다면 이제 자녀와 부모는 하느님 앞에서 같은 형제·자매들입니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선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여기서까지 부모가 자녀들에게 종교를 강요한다면 부모가 사이비 교주가 됩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데 본인도 구원에 들지 못했으면서 본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니?”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어쩔 뻔했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본인이 예수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항상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게 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커지면 그것이 곧 사이비가 되는 것입니다.

 

사이비에 빠지지 않도록 ‘율법 – 엘리야 – 메시아의 고리’를 명확히 이해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모두 엘리야고 요한입니다. 우리는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합니다. 구원은 내가 아니라 그분에게서 옵니다. 그리스도 앞에 서 있으면서 나의 역할을 줄여가지 않는 사람은 사이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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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본당의 날’ 행사가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게임이 많아서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분은 지루해했습니다. 올해는 미리 예선전을 거쳤고, 본당의 날에는 준결승과 결승만 하였습니다. 윷놀이도 예선을 거쳐서 4강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너무 빨리 소진되었던 먹거리 장터를 다양하게 꾸몄습니다. 묵밥, 수육, 떡볶이, 어묵, 커피, 쫀드기, 아이스크림, 빙수와 같은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같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마련했습니다. 꼬마 기차도 운영했고, 동물원도 꾸몄습니다. 성서 말씀을 주제로 페이스 페인팅, 핸드 페인팅을 해 주었습니다. 저도 손등에 ‘하느님은 나를 위해서 좋은 계획을 마련하신다.’라는 말씀을 페인팅하였습니다. 야외 행사가 끝난 후에 모두가 친교실에 모여서 청백전 게임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봉사자들은 야외에 설치했던 천막과 탁자를 정리했습니다. 몇 가지 게임을 한 후에 마지막으로 ‘박 터트리기’를 했습니다. 본당의 날 행사가 잘 치러질 수 있도록 준비해 준 봉사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 독서는 ‘엘리야’ 예언자 이야기를 합니다. 구약 시대 엘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잊고 우상인 바알을 섬기던 어두운 시대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두려움 없이 아합왕과 이세벨 왕후 앞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선포했습니다. 갈멜산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 참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드러내었던 장면은 엘리야의 사명을 상징합니다. 백성을 참되신 하느님께 다시 돌려세우는 일, 회개를 촉구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광야를 떠돌며 고독 속에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고, 때로는 좌절과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께 의지하며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생각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시대의 ‘새로운 엘리야’로 불립니다. 이스라엘에 오랜 침묵과 기다림이 흐르던 때,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나타났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사람들에게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는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고, 진리를 위해 헤로데 왕에게도 바른말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시는 분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라는 고백은 요한의 겸손과 순명을 보여 줍니다.

 

이 두 인물의 공통점은 명확합니다. 세상이 영적으로 어두워질 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백성을 깨우기 위해 회개의 목소리를 보내십니다. 엘리야는 불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었고, 요한은 물을 통해 새 삶의 길을 열었습니다. 시대는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용기, 겸손과 순명의 삶을 살며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집니다. 세속의 유혹과 거짓, 편안함 속에 잠들지 말고, 마음을 곧게 하여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는 부름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각자를 작은 엘리야와 작은 요한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직장에서,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드러내고 회개의 길을 걷는 사람, 주님께 마음을 열고 빛과 정의의 길을 따르도록 이끄는 사람이 되라는 초대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더 깨어 기도하고, 겸손히 회개하며, 사랑과 진리로 세상을 비추어야 합니다.

 

‘본당의 날’ 행사가 잘 될 수 있도록 수고해 주신 분들이 엘리야요,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 일찍 나와서 천막과 탁자를 설치한 형제님들이 엘리야입니다. 전날부터 음식을 준비한 자매님들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몇 달 전부터 행사를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준비한 친교 분과 형제님들이 엘리야입니다. 구역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장터를 만들고, 식사를 준비하신 구역장님들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행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깔끔하게 하신 봉사자들이 엘리야입니다. 이 모든 행사를 마친 후에 뒤풀이 자리를 마련한 사목회장님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분들이 있었기에 2025년 본당의 날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축제의 한 마당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엘리야처럼 강하고, 요한처럼 겸손한 믿음을 주시어, 우리의 마음 안에 당신의 길이 열리게 하소서. 회개의 은총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주님의 오심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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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키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3,23-24) 그래서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에 앞서 엘리야가 와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답은 명확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엘리야를 기다린다는 것은 곧 엘리야 예언자가 예고하고 준비하는 약속된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예언자의 말을 자기네 방식대로 받아들이면서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의 중요성을, 이미 때가 지난 뒤에야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려 주는 ‘특별한 무엇인가’를 바랄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둘러싼 익숙하고 평범한 것들 안에 얼마나 많은 진리와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 작고 평범한 것들은 조용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진리와 하느님의 뜻은 먼 훗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겸손한 인내심과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삶을 채워 주시는 작고 평범하며 익숙한 것들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알아차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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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 직후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그들은 메시아 도래 전에 엘리야가 다시 와야 한다는 말라키 예언(말라 3,23-24)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키시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말씀하신다. 이는 곧 하느님의 예언은 이미 성취되었으나,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 알아보지 못했다는 경고이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길을 예비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준비해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능력을 갖추고 왔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멸시하였으니, 이는 그리스도 자신을 거부할 징표였다.”(In Matthaeum Homiliae 57,1) 세례자 요한을 거부한 이스라엘은 결국 메시아를 거부할 준비를 스스로 한 것이었다. 성 예로니모는 “요한은 외모로는 엘리야가 아니지만, 엘리야의 정신과 힘으로 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Commentarium in Matthaeum 2,17) 교부들은 요한을 ‘영적인 엘리야’로 보았으며, 그의 사명은 메시아의 길을 여는 것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님은 오시기 전에 당신의 길을 준비하도록 엘리야를 보내셨다. 그러나 그 길을 준비하는 사람은 박해를 받았고, 그 길을 걷는 분 역시 박해받으셨다.”(Sermo 293,3) 엘리야적 사명은 언제나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계획을 드러내는 길이었다.

 

교회는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이해한다.(교리서 719항) 그는 엘리야처럼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하며 메시아의 길을 닦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배척했고, 결국 주님 자신도 같은 운명을 겪으셨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세속적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한 구원임을 보여준다.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깨어있음과 증언의 소명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느님께 충실한 삶을 살았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티토 2,11-13), 우리는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야 하며, 복된 희망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지금 세상 안에서 ‘작은 엘리야’가 되어,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다면, 그분의 다시 오심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이 될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오셨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주님께서도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맞아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았다(요한 1,12). 우리도 엘리야와 요한처럼, 세상의 무관심과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작은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대림의 이 시기는 바로 그분을 알아보고 영접할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은총의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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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사람>

 

마태오 17,10-13 (엘리야의 재림)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사람>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1-12)

 

하느님 앞에

하느님의 사람

 

그 사람 알아보는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 곁에

하느님의 사람

 

그 사람 알아보는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 뒤에

하느님의 사람

 

그 사람 알아보는

하느님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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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는다면 회개할 것이고, 회개한다면 믿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마태 17,10-13)

 

1)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높은 산’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고,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마태 17,1-9) 그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는데, 백 퍼센트 확신은 아니었고,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메시아보다 먼저 온다는 엘리야는 누구인가? 엘리야가 정말 왔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메시아보다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예언은 말라키서 3장 23절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던(믿기를 거부했던) 율법학자들은 그 예언을 근거로 해서, “엘리야가 아직 안 왔으니,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표현만 보면 율법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질문으로 보이지만, 뜻으로는 말라키서의 예언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다.” 라고 대답하십니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라는 말씀은, 박해받고 순교한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 중에는, “세례자 요한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엘리야가 아니다.”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한이 정말로 엘리야라면 사람들을 모두 회개시켰을 것이고, 그러면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요한은 회개를 선포한 것만으로도 임무를 완수했다. 그의 순교는 임무 실패가 아니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요한의 순교는 회개하기를 거부한 자들의 범죄일 뿐입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엘리야가) 박해받고 죽었으니 나도 그렇게 박해받고 죽을 것이다.”가 아니라, “그의 고난과 죽음은 나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한 일이다.”입니다.

 

2) 혹시라도, “엘리야는 엘리야고, 세례자 요한은 세례자 요한이다. 세례자 요한이 어떻게 엘리야일 수가 있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루카복음 1장에 있습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엘리야가 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 일을 요한이 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이 말은, 요한이 곧 엘리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의 모습으로 ‘환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선택하고 보내신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와서, ‘엘리야의 일’을 한 것입니다.>

 

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라는 말은,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그 ‘확신’은 믿음의 마지막 단계도 아니었고, ‘믿음의 완성’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의 믿음을 기록해 놓은 구절들을 보면, 제자들은 ‘머리로 믿는’ 단계에서 시작해서 ‘마음으로 믿는’ 단계를 거쳐서, ‘온 삶을 다 바쳐서 믿는’ 단계에 도달하면서 믿음이 ‘완성’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대부분 그렇게 여러 단계를 거칩니다. 물론 처음부터 한 번에 ‘완성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고, 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머리로만 믿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든 믿음이 한 단계씩 나아가거나 그렇지 않은 차이는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노력’의 차이일 것입니다.

 

4) 사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는 믿음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계속 읽는 것은, 요한의 ‘회개 선포’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의 회개가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메시아보다 먼저 엘리야를, 즉 세례자 요한을 보내신 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우선 먼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래 믿음과 회개 사이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고, 믿음과 회개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는다면 회개할 것이고, 회개한다면 믿을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만일에 회개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안 믿는다면, 그 회개는 구원에 연결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회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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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 신앙의 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본 것이다.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1,23). 하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고, 헤로데는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6,26).

 

우리는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고집이 있을 수 있다.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요한을 죽인 공범자가 되고 만다. 따라서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을 박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악하기보다도 자기 안에 갇힌 무지의 탓이 크다 할 것이다.

 

물론,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는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다.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예수님께서 살아간 삶을 살아가는 기회가 됩니다.”(함께야)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십자가의 성 요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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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는 엘리야가 언급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꼽는 대표적 예언자 중 한 사람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 이후 산을 내려오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니다. 그들은 방금 엘리야와 모세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지요. 엘리야의 출현으로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예언자적 소명의 정통성과 연속성을 확인합니다.

 

제1독서는 엘리야 예언자에 대한 집회서의 대목입니다. 길지 않은 내용 중 "불"이란 말씀이 다섯 차례나 등장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집회 48,1).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집회 48,1).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집회 48,3).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집회 48,9).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집회 48,9).

 

엘리야의 표상인 "불"은 정화와 열정, 사랑을 상징합니다. 죄와 악습을 태우고 살라 버려 정화시키고, 마음을 뜨겁게 하여 주님을 향하게 만들며, 성령 안에서 사랑이 되게 합니다. 그 자신이 곧 "불"인 엘리야의 사명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집회 48,10) 백성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엘리야의 그 사명을 부여받은 이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아합 왕의 아내인 바알 숭배자 이제벨의 손아귀를 벗어나 불마차에 태워져 승천한 것과 달리(1열왕 17장 -2열왕 2장 참조),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가 취한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부추김과 그 딸의 춤값으로 목이 베어져 순교하지요.(마태 14,1-12 참조)

 

'아는 것'과 '알아보는 것'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요! 율법 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사실은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메시아에 앞서 길을 준비하러 온 세례자 요한에게서 엘리야를 알아보지는 (관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세례자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분"(마태 3,11)에 대해 아무리 증언하고 선포해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볼 눈이 열릴 수 없었지요.

 

하느님께서 때에 맞춰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성인들을 통해 우리는 정화되고 열정을 되찾아 열렬한 사랑으로 주님께 뛰어들게 됩니다. 이들은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도록 눈을 열어 주는 불꽃입니다.

 

대림 제3주일을 앞두고 다시금 사랑의 불을 지피는 하루 되시길 빕니다. 여러분이 불타는 사랑으로 불이신 주님을 맞이하여 하나의 불길로 함께 타오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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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꽃길만 걸으려 애쓰지 말고, 자갈밭에서도 굴러 보세요.”

 

“꽃길은 누구나 원하는 길이라 경쟁이 치열하지만, 자갈밭에서는 대부분 의욕이 없어서, 조금만 의욕을 가져도 빛날 수 있어요.”

 

크게 공감 가는 말이었습니다. 저 역시 사제 생활에서 꽃길을 선택하려 했었습니다. 아니 꽃길이 나의 삶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힘든 곳에서 사목하게 되었습니다. 성지에서, 교구청에서, 빚 많은 성당에서…. 다들 제게 처음에는 “왜 그곳에 가는 거야? 주교님께 찍혔어?”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때가 저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시간으로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습니다.

 

꽃길은 그냥 꽃길일 뿐입니다. 쉽고 편할 수 있지만, 내 안에 있는 새로움을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자갈밭은 분명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런 체험이 있고 난 후, 고통과 시련이라는 마음이 들면 하느님의 은총을 그 안에서 발견하려고 애씁니다. 정말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이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꽃길보다 자갈밭에 하느님의 은총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말라키 예언서는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가 파견되어,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리게 할 것으로 예언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율법 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생각하기에 엘리야가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니, 엘리야가 와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께서는 이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임을 이야기하십니다. 사람들은 엘리야의 환생을 기대했지만, 실재는 회개를 외치며 모든 것을 바로잡으려 노력한 세례자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멋대로 다룹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인 메시아 역시 영광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고난을 받아야 함을 예고하십니다.

 

율법 학자들은 화려하고 강력한 능력으로 세상을 뒤집을 ‘영광의 엘리야’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낙타 털옷을 입은 고행자 세례자 요한을 통해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에서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작고 초라한 곳, 또 고통스러운 곳에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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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삶 안에

오셨지만,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외형만 보고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인간의 잣대로

평가하고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교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틀을 깨시고,

기대하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요한을 알아보지

못한 이스라엘은

결국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작은 은총을

못 알아보면

큰 은총도

못 알아봅니다.

 

깨달음은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것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왔고,

하느님의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은총은

알아보는

사람에게만

은총이 됩니다.

 

은총은

존중해 줄 때

자라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은총을 주십니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은총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은총은

알아보는 이에게만

은총이 되고,

소중히 다루는

이에게서 비로소

선물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 곁에 보내주신

사람과 은총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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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오 복음 17장 12절)

 

수난과 고난은 어렵고 힘들기에 길을 찾아줍니다. 버려진 역사 뒤에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교만함이 있습니다. 제멋대로 다루는 이 마음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신앙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십니다. 분명하게 회개의 길을 제시하는 예언자의 말도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이들을 핍박합니다. 신앙은 개혁을 필요로 합니다.

 

고난을 감수(甘受)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주님의 기다림을 만나는 대림입니다.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는 세례자 요한의 피흘림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십자가와 함께 선포됩니다. 아직도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십자가로 전달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보지 않고 제멋대로 다루는 교만함에서 벗어나 참된 사랑을 겸손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길을 닦는 십자가의 시간을 겸손되이 받아들이는 대림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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