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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1 오늘 묵상글 등

260105.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 공현 시기의 죄와 회개, 회개의 여정. 등 )

작성자김 루도비꼬|작성시간26.01.05|조회수100 목록 댓글 0

260105.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  공현 시기의 죄와 회개, 회개의 여정.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4:52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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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05 04:48

 

- 공현 시기의 죄와 회개

 

 

어제 공현 대축일에 아기로서 당신을 공현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어른이 되시어 당신을 공현하신다는 것이 오늘 복음이고,

이는 이사야 예언서의 다음과 같은 예언의 실현이라는 것이 오늘 복음입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바다로 가는 길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런데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이 복음을 보면 두 부류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오늘 주님께서 치유해주신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도 어둠 속에 있는 것 맞습니다.

병과 가난에 짓눌려 암울하게 살아가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어둠은 주님께서 거기서 꺼내주시고자 하신 어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정작 거기서 꺼내주시고자 하는 어둠은 죄의 어둠입니다.

 

죄로부터 회개하는 것이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영접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공생활의 일성으로 이런 선언을 하십니다.

 

회개하여라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 지점에서 죄가 뭔지도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현 시기의 죄와 회개 말입니다.

 

공현 시기의 죄는 주님께서 빛으로 오셔서 빛을 비춰주시는데도

요한복음 1장의 말씀대로 그 빛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하고 맞아들이지도 않는 것으로서의 어둠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께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짱짱히 비춰주시는데도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악한 사람의 어둠입니다.

 

그러니까 빛을 받아들이면 선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한 사람이지요.

그리고 빛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죄이고 그러다가 받아들이면 회개한 거고요.

 

이제 공현 시기의 죄와 회개를 오늘 독서와 연결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요한의 서간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켜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하는데

주님 안에 머물지 않으면 죄이고 그러다가 머물게 되면 회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주님 안에 머물게 되기에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이 죄이고 그러다가 사랑하게 되면 그것이 회개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랑,

하느님께 머무는 사랑,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이요 회개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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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가사와 더불어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2026년 병오년 적토마의 해, 삶의 지침이 될 수 있는 각계 각층의 사자성어를 소개합니다.

 

1.자강불식(自强不息;스스로 강하게 하며 쉬지 않고 노력한다);중소기업계

2.변동불거(變動不居;세상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변한다);교수신문.

3.승풍파랑(乘風波浪;바람을 타고 물결을 헤쳐나간다);계양구

4.유지경성(有志竟成;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완주군

5.공재불사(功在不舍;성공은 중도에 그만두지 않음에 있다);양산시

6.온지성실(溫知誠實;따뜻한 마음으로 배우고 진심을 다해 행한다);충북교육청

 

오늘 다산 어른의 하루 만년일력의 가르침도 새롭습니다.

 

“새벽은 어른의 시간이다. 어제와 오늘이 교차하는 순간, 나는 새로워진다.”<다산>

“평생의 계획은 어릴 때 있고, 일년의 계획은 봄에 있으며,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명심보감>

 

이 모두들 다 좋고 유익한 가르침인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하나가 빠졌습니다. 바로 우리의 참빛이자 삶의 중심인 <주님>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문득 오래전 <새벽>이란 자작 애송시도 생각납니다. 아주 예전 수도원을 방문했던 영원한 현역의 학자 성염교수가 좋아했던 시입니다.

 

“새벽숲

 온갖 새들 맑은 소리

 임의 찬미에

 밝아오는 아침

 잠깨는 숲

 새로 시작되는 하루

 새벽을 잃으면

 하루 전부를 잃는다”<2001.5.29.>

 

어제 바티칸에서 삼종기도시 레오교황의 “성탄의 기쁨이 우리의 온 여정을 지탱시켜 주소서.”기도도 좋습니다. 새삼 성탄의 기쁨이 우리 삶의 여정에 샘솟는 힘을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성탄이 지나니 평범한 일상의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도 “세례자 요한의 설교-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광야에서 유혹을 통과하는 예수님”에 이어 마침내 갈릴래아 전도가 시작됩니다. 바야흐로 이사야서(8,23-9,1) 예언이 예수님의 공생애와 더불어 실현됨을 봅니다. 새삼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이뤄짐을 깨닫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인류의 태양, 큰 빛이 도래했으니 우리 삶의 영원한 중심인 주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첫 일성이 세례자 요한과 똑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잡히자 그대로 그를 계승하여 회개를 선포하는 예수님의 호소가 참 절박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성을 띠는 영원한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방향을 전적으로 새로이 하는 회개요, 평생 회개의 여정을,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회개하여 하늘 나라의 깨어 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 네 어부들이 “나를 따라오너라.”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회개의 구체적 실천이 뒤 따릅니다.

 

큰 빛이신 예수님 자체가 하늘 나라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파스카 예수님이 함께 할 때 회개와 더불어 그대로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지자 사람들은 갖가지 질 병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고, 곳곳에서 온 많은 군중은 그분을 따릅니다.'

 

흡사 빛을 찾는 사람들이 큰 빛의 중심이신 주님을 찾고 따르는 모습입니다. 이런 빛이신 주님을 떠나, 삶의 중심인 주님을 잊어, 어둠 속에 해매기에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나 가르침과 더불어 회개요, 회개와 더불어 치유의 은총이요 하늘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 하느님은 이런 예수님을 믿고 서로 사랑함이 우선적 책무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안에 머무르십니다.”

 

회개의 구체적 표현이 주님 계명의 실천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며,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하느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일치요 치유의 구원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치유의 여정에 참 좋은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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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빛의 축제일인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입니다. 오늘도 어제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의 ‘빛의 공현’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빛을 받으며, 빛 속에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빛을 증언하러 왔던 요한은 물러가고, 참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요한 1,6-9 참조).

오늘 <복음>은 이사야가 예언한 빛이 이미 도래했음을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그 빛은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에서부터 비추어왔습니다. 질곡의 땅 갈릴래아, 이곳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장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당신 ‘사명’의 내용을 밝혀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먼저 이방인의 압박, 곧 죽음의 그늘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먼저 선포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은 어두움 속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으로 오시는 분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빛 안에서 걸어야 하는 첫걸음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밝혀줍니다. 곧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슈브,שב)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돌이키다’, ‘돌아오다’라는 뜻인데, 원래의 그림문자의 뜻은 ‘집을 무너뜨리는 것’을 뜻합니다. 곧 자신이 ‘이전에 살던 집’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에 거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전에 살던 집’이란 우리가 거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 우리가 이전에 행하던 행위나 지식까지도 포함합니다. 곧 우리의 행위와 앎으로부터 벗어나 새집으로 돌아와 하늘의 양식을 먹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옛사람의 행위와 지식(옛집)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새로운 성전을 건축하는 것)(콜로 3,9-10 참조)이라고 말합니다. 곧 ‘우상의 집’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집인 성전으로 돌아가 하느님의 양식인 말씀을 먹으며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는 죄악을 버리는 것보다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의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께서 사람과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만든 하느님의 처소(집)임과 동시에, 마지막 때에 다시 회복될 ‘새 예루살렘’(묵시 21,2)입니다.

‘회개’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호세 14,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거처를 함께 하시면 우리 안에 ‘하느님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 안으로의 전환이 곧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건설되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곧 우리의 말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이 건설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일, 곧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거처가 되는 일이 벌어져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마태 4,16)

 

 

주님!

당신께서는 어둠이 덮인 곳에 큰 빛을 비추셨습니다.

질곡의 땅, 핍박받는 이들에게 의로움의 빛줄기를 뿌리셨습니다.

오늘, 저희의 오류와 완고함을 뚫으소서.

어둠의 갇혀 있는 저희의 속박을 풀고, 묶인 이들을 해방하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밝혀 주시어, 진리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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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가 공기가 있어 숨을 쉬듯이, 우리가 물이 있어 마시듯이 공기와 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원입니다. 다만 공기와 물이 가까이 있고, 충분하기에 우리는 그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공기처럼, 물처럼 우리와 친근한 것이 또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손만 대면 소통할 수 있는 인터넷입니다. 인터넷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와 가까이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고속도로를 통해서 우리는 원하는 것을 검색하고, 이웃과 소통합니다. 이 인터넷이라는 고속도로 위에 마치 물처럼 우리의 갈증을 채워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애플리케이션(application)'입니다. 우리말로는 응용 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제 컴퓨터와 스마트폰에도 삶에 도움이 되는 많은 ‘웹’이 있습니다. 항공권을 예약하는 항공사 웹이 있습니다. 은행 업무를 보는 은행 웹이 있습니다. 정보를 검색하는 구글 웹과 다음 웹도 있습니다. 교통수단으로 이동할 때 사용하는 우버 웹도 있습니다. 인터넷과 애플리케이션은 공기와 물처럼 제 삶에 소중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공기와 물처럼 우리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인터넷과 애플리케이션처럼 우리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전해 줍니다.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나에게 되돌아올 사랑도 아닙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워서 도망갔어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어도 ‘평화’를 빌어주는 그런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3번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는 사랑입니다. 피와 땀을 흘리면서 기도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마침내 온 세상을 구원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실천’입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은 깃대가 없는 깃발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천이 없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위선을 꾸짖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가르침은 배우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 주는 것이다.” 부자 청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잘하였다. 율법을 지켰으니 잘하였다. 하나 더 필요한 것이 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고 나를 따라라.” 그리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 주십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레위와 사제는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고, 여관에 데려다주었습니다. 여관 주인에게 돈이 필요하면 돌아오는 길에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실천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이 나가야 할 방향을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2026년 우리 공동체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간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큰 빛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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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흩어짐 속에서 다시 하나 됨!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가 치유받을 때, 우리는 그 은총 안에서 세상의 치유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산산히 쪼개진 세상을 위한 기쁜 소식(복음)

흩어짐 속에서 다시 하나 됨 READ ON CAC.ORG

2026년 1월 4일 주일Sunday, January 4, 2026

CAC(행동과 관상 센터) 교수진인 브라이언 맥라렌은 2026년 매일 묵상의 주제를 소개합니다: “산산히 쫴진 세상을 위한 기쁜 소식(복음)”

우리의 세상은 깊이 깨어져 있습니다. 그 징후를 우리는 곳곳에서 봅니다. 정치 안에서, 사회 매체 안에서, 가정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것을 봅니다. 이러한 균열은 가장 어려운 때에 찾아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하나 되어야 합니다. 환경과 기후의 위기를 함께 직면하고, 억압적인 세력들이 부와 기술, 사회 매체와 인공지능(AI)의 힘을 이용해 우리를 더 깊이 분열시키려는 움직임을 저항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과 서로, 그리고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땅과 더 조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함께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할 때, 오히려 우리는 갈라져 각자의 고립된 자리로 물러나고, 우리의 작은 메아리의 방에서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참으로 들어야 할 말씀과는 종종 반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균열은 우리를 두렵게 하고 때로는 낙심하게 하며, 반응적으로 움츠러들게 하고 마비되게 합니다. 결국 우리는 치유의 도구가 아니라 병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이들, 깊고 참된 신앙을 지닌 이들은 절망과 냉소, 분열과 반응적 태도에 자신을 내어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치유와 성령의 힘을 받아, 다른 이들을 치유하고 힘을 북돋아 주는 일에 동참하기를 갈망합니다. [1]

오늘날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생겨난 분열로 인해 실망과 혼란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러한 균열 한가운데에서도, 신실한 신앙인들은 자비와 용기를 가지고 주님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롭게 성찰하고 있습니다.

모든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교파 안에서 변화에 대한 넓은 요청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창의적인 신학자와 전례 전문가, 공동체 조직가와 네트워크를 잇는 이들, 그리고 사목자들이 새로운 은총의 열매가 태어날 수 있도록 다양한 자원과 공간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자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에 이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오순절과 주류 교단, 동방 정교회와 그 밖의 전통 안에서… 저는 그들을 압니다. 어떤 이들은 교단의 지도자, 주교, 신학교 학장과 교수로서 잘 알려진 이름을 지니고, 베스트셀러 저서와 큰 영향력을 가진 이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목회자와 교회 개척자로서 다양한 형태와 규모의 신앙 공동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수도자와 형제 수도자들(friars), 가톨릭 노동자로서 공동선을 위해 헌신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팟캐스터, 출판인, 블로거로서 전환의 길을 돕는 창의적 콘텐츠를 만들어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술가로서 필요한 진리를 아름다움과 함께 드러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조용한 사람들이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범한 사랑과 은총을 살아냅니다. 공격을 받을 때에도 겸손하고 은혜로운 확신으로 앞으로 나아가며, 낙심할 때에도 새로운 내적 힘을 발견합니다. 때로는 그리스도교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아니다. 나는 아니다." 이것이 참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아마도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일이며, 우리는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적어도 새롭게 태어나는 그리스도교는 겸손하고 배우려는 마음을 지니며, 호기심과 자기 성찰을 품고, 창조적이고 인간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다양성과 조화를 이루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임스 핀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지만, 어떤 것도 막아 주시지는 않습니다.”

저는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뵐 때에만, 비로소 사랑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게 만드는 두려움에서 참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사랑을 선택하지 않을 때, 하느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고, 버리실 수도 없으며, 결코 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안전하신 분은 아니지만, 선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곧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은 안전하지 않지만, 현실은 선합니다.

— Heather C.

References

[1] Adapted from Brian D. McLaren, 2026 Daily Meditations Theme: Good News for a Fractured World,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video, 6:38.

[2] Brian D. McLaren, Do I Stay Christian? A Guide for the Doubters, the Disappointed, and the Disillusioned (St. Martin’s Essentials, 2022), 138, 139–14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ul Macallan,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밝은 꽃처럼, 관상과 실천의 은총은 고통스러운 현실 한가운데서도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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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요한의 체포 소식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시며, 드디어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했던 그 말씀을, 주님께서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의 첫 선언으로 삼으십니다.

 

이 장면은 요한이 준비한 길 위에서, 주님께서 직접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러 오셨음을 드러냅니다. 요한이 예비한 말씀은 이제 주님의 삶과 기적, 가르침 안에서 현실이 되고 희망이 됩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갈릴래아 전역을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늘나라는 단지 미래에 올 어떤 영적 상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인간의 고통 가운데로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현존임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하늘나라를 선포하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멀리서 지켜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상처를 만지고,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시며,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첫 메시지 “회개하라”는 단순한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기쁨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 가까이에 오셨으니 이제 우리도 그분께 마음을 돌리라는 부르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여라. 마음을 돌려라. 내가 너와 함께하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기록은 기억보다 선명하다.

 

 

학창 시절 소풍을 가거나 여행을 가게 되면 꼭 챙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카메라입니다.

카메라도 챙기고 필름도 챙기고….

카메라가 집에 있는 친구는 카메라를, 없는 친구들은 필름을 사기도 했습니다. 일회용 카메라가 나왔을 때는 세상의 빠른 발전에 감탄했던 기억도 납니다.

 

왜 사진을 찍었을까요?

기록이 기억보다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장롱 깊숙한 곳 먼지와 함께 잠들어 있는 앨범을 볼 때마다 기록은 기억을 되살려줍니다. 아주 생생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말입니다.

 

오늘은 사진 한 장 찍어보세요.

나의 가장 젊은 오늘을 남겨보세요.

기록이 기억보다 선명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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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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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대한민국 고등학생은 살인적인 공부량에 짓눌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뒤에는 학원으로, 그리고 집에 와서도 공부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곤 합니다. 많은 학생이 책만 펼쳐놓은 상태로 딴짓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는 것도 아니고, 공부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가 요즘 고등학생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저 때를 떠올려 봅니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과 다를 것 같지만 그때도 밤 10시 넘어서까지 학교에서 공부했지만, 모두가 열심히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이나 3~40년 전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지금의 자기 삶과 미래의 자기 삶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그냥 살면 별 차이가 없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을 의미 있게 사는 것이 미래의 삶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느님 뜻과 정반대로 살아간다면 미래에는 어떨까요? 저절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삶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으로 거처를 옮기시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시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은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고 복음은 강조합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5.16)

 

갈릴래아 북부 지역인 즈불론 땅과 납탈리 땅은 기원전 732년 아시리아에 의해 점령당하고 파괴된 곳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먼저 불행을 맛본 땅이고, 이방인들이 섞여 살아 정통 유다인들에게 멸시받던 변방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이 아닌, 가장 소외되고 어두운 곳에서부터 빛을 비추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빛은 어둠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희망을 얻게 됩니다. 그 희망은 과거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또 삶의 영역 안에서 ‘즈불룬과 납탈리’처럼 황폐하고 어둡게 느껴지는 순간에 희망으로 다가오십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곳에서 가장 먼저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 선포를 따라야 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지금 우리가 해야 할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도덕적 반성을 넘어, 삶의 방향을 완전히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희망의 주님과 함께하면서 우리의 미래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행복해 질 필요는 없다(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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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진정한 치유를 이루는 영적 여정을 위해 물러섬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이 시간이 바로 동반자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을 떠나 다시는 그곳에 머물지 않으시게 된 이야기를 전합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리 마음을 잡수신 것이 나자렛 사람들의 거부 경험 때문임을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루카 4,30-31). 다 알고 계시듯이, 나자렛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을 하셨다는 이유로 그분을 벼랑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저는 가끔 루카 복음의 이 장면을 묵상할 때마다 "왜, 하필이면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리에서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루카 4,23).

필시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향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기적들을 자기들이 직접 보고 증명해 내고 싶어 했을 것이고, 또한 그래야 자기들이 잘 아는 예수라는 존재를 예언자나 하느님의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겠지요!

사실 이 장면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가 자주 겪는 유혹을 그려 주는 장면입니다. 우리도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주시길 늘 바랍니만, 실제는 그렇지가 않을 때가 자주 있지 않습니까?! 아니 오히려 심지어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할 때 더 큰 고통이나 시련을 겪게 될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면 우리도 역시 무의식적으로라도 '하느님이 정말 계신 것인가?' '하느님은 정말 사랑이신가?' '하느님을 내 삶의 아픔에 정말로 함께해 주시는 분인가?' '왜 나에게는 특별한 기적을 보여주시지 않는 것일까?' 등등의 의구심을 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일로 당신 마음에 원한을 품거나 쓰라린 마음을 지니지 않으셨습니다. 원한을 품은 사람은 나쁜 소식을 전하게 되어 있고, 또 좋은 소식을 전할 때에도 그 안에 원한과 냉소적인 마음의 울림을 담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마음에 들어있는 것이 쓰라리고 상처받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손해를 본 것은 나자렛 사람들이었지, 예수님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놀라며 말했습니다. "나자렛에서? 거기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작은 고장의 원한 깊은 마음만큼 깊은 상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작고도 친밀하여 뿌리까지 파고듭니다. 그러나 그들의 쓰디쓰고 원한 깊은 마음은 예수님에게 악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만이 그 원한 깊은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일부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마르 6,5). 나자렛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도 모두 생명의 샘을 독하게 만들고, 기적을 막아 버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가장 가까운 자리, 어쩌면 가정과 친밀한 관계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내곤 합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신앙인이 겪는 배신감, 수치, 원한, 자기혐오가 어떻게 '쓰라리고 원한 깊은 마음'으로 굳어지며, 그 마음이 어떤 길을 통해 풀리고 치유로 향하는지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치유는 단번의 승리가 아니라, 무너짐과 깨달음, 은총의 수용을 거듭 거치는 내적 여정으로 그려집니다.

그 상처의 뿌리 공동체의 배교, 동료의 고통, 하느님 침묵의 체험에서 옵니다. 이런 경험은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라는 근원적 의심을 일으키며 마음의 쓰라라림과 깊은 어둠을 자아냅니다.

이러한 원한은 타인을 향한 분노뿐 아니라, "왜 나는 이런 선택을 했는가?"라는 자기혐오와 수치로 엉겨 붙습니다. 여기서 바로 영적 고립이 생겨나게 되고, 기도에도 응답이 없다고 느낄 때, 신앙인은 외적 탄압보다 더 깊은 내적 단절(하느님과의 친교 상실감)을 겪습니다. 이 고립이 냉소를 낳고, 냉소가 다시 고립을 강화합니다.

그러나 동료 신자들의 고통과 희생을 마주하는 순간, 주인공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영웅적 서사보다 "타인의 고통을 줄이는 선택"이 사랑의 본질일 수 있음을 직면합니다. 자기 신앙의 체면보다 이웃의 생명을 먼저 두는 결단(설령 외형상 배교로 보일지라도)은, "사랑이 율법과 표지보다 앞선다"는 복음의 급진성을 환기합니다. 이 깨달음이 쓴 마음의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나는 실패했다"는 내적 낙인이, "나는 타인을 위해 낮아졌다"는 사랑의 언어로 이해되면서 수치가 연민으로 변모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응답 없는 침묵을 처벌로 해석하던 시선이, "고통 속 동행"으로 서서히 바뀝니다. 하느님 구출의 전능으로만 오시는 분이 아니라, 상처의 자리에서 함께 계시는 분으로 인식되는 것이지요.

하느님 부재감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부재감 한가운데서 "미세한 내재"를 경험합니다. 이 미세한 임재가 쓴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첫 은총입니다.

승리·기적 중심의 표징에서 "약자의 하느님, 동반자 예수님"으로 이해가 이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동이 내적 독설을 녹여내고, 자기와 타인을 향한 판단을 완화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하느님 현존과 그분의 동반이 "침묵" 속에서 깊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가해자·배신자로만 규정하던 엄혹함이 완화되고, 불완전성을 받아들이는 겸손이 자라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진정한 하느님의 은총을 수용하게 되면서 용서가 "도덕적 성취"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공짜의 선물"임을 깨달으며, 스스로를 벌주던 심판의 목소리가 잦아듭니다.

침묵 속에서 싹트는 치유는, 외형적 승정이나 도덕적 완벽이 아니라 상처와 함께 살며 사랑을 택하는 능력입니다. 하느님의 침묵을 부재로만 규정하던 마음이, 그 침묵을 동행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쓴 마음은 서서히 풀립니다. 상처는 남아 있으나, 그 상처가 더 이상 자신과 타인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침묵을 통해 드러내 주시는 치유의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향인 나자렛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가 이 이 진리를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셨을 것이고, 또 지금도 우리에게 이런 깨달음에 이르도록 은총을 내려주고 계실 것입니다!!

이 진정한 현실을 참으로 깊이 의식하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간혹 예수님처럼 물러서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장기나 바둑을 둘 때 잠시 물러서는 작전을 쓸 때가 있습니다. 이는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공격을 위한 준비인 것이지요.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 영성과 신앙의 여정은 삼보전진 이보후퇴의 여정이라고요. 이보 후퇴의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참된 영적 발전을 이룰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물러섬은 뒤로 물러나 다시 바라보고 더 나은 길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피정이 될 수도 있고, 자기만의 자그만 성찰의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우리가 잠시 멈추어 물러서는 것이 하느님의 뜨슬 식별하는 지혜의 시간이요 자리라고 말합니다.

우리 삶과 신앙의 여정에도 분명히 이런 시간과 장소가 꼭 필요한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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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세례를 받기 위해 요르단으로 가셨던 예수님께서는
 다시 갈릴래아로 돌아오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래아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도
 비록 유다 지방이긴 하지만
 수도 예루살렘이 아니라고 전하며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곳도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유다가 아니라
 변방인 갈릴래아라고 전합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중심 혹은 위가 아니라
 바깥쪽 혹은 아래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만나신 사람들은
 왕도 아니고 사제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군중들, 그것도 병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데
 빠르고 큰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로 행동하십니다.
 당신께서 알려지시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당신을 만나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기에
 하느님 나라를 원하는 사람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먼저 가신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신 이유도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받아들이라고
 유다인의 왕으로 떠받들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하느님 나라를 원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고
 그렇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의 모든 초점이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어려움을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어둠이나 죽음의 그림자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은 이제 빛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통해
 기쁨과 희망으로 바뀔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향해 오시는 하느님께
 우리도 마중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어려움, 우리의 약함을 고백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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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4,12-17.23-25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어제 주님 공현 대축일에는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봉헌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이심이 공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이어지는 한 주간의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구체적인 면모가 하나씩 드러나지요. 어제 복음에서는 제 발로 주님을 찾아간 동방박사들이 주님의 진면목을 알아보았던 소극적 의미의 공현이었다면, 이번 주간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직접 사람들을 찾아가시어 말씀과 표징으로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시는 적극적 의미의 공현이 실현되는 겁니다. 그중 오늘 복음에서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에게 잡히고 난 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나고 자란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이라는 고을에 자리를 잡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시지요. 본격적인 ‘공생활’의 시작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예수님께서 소외되고 낙후된 ‘변두리’ 지역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것은 ‘병든 이들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죄악의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그리하여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그들에게 당신께서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 희망의 빛, 생명의 빛이 필요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당신 사명과도 연결되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유다지방 주민들을 상대적으로 차별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다윗의 고을’ 중 하나인 베들레헴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유다지방에 살던 이들은 마찬가지로 죄악의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으로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지요. 그들은 베들레헴에서 구세주가 태어나실 것을 알면서도 그분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던 겁니다. 말로는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이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께서 지금 오시지는 않겠지’하는 안일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여기는 교만과 무지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활을 여는 첫 메시지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회개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은 “집을 무너뜨리다”라는 뜻입니다. 곧 자기 뜻과 고집으로 세운 세속의 집을 무너뜨리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순명으로 새로운 집을 세우라는 것이지요. 탐욕이라는 모래성 위에 지은 집은 태풍이 몰아치면 금새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영원토록 지낼 거처는 믿음이라는 단단한 반석 위에 순명과 실천이라는 벽돌로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 품 안에서 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참된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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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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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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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 /

 

 

 

예수님의 본격적인 복음 선포활동은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에게 

나를 따라라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하신 후였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마치 혼이 빠진 것처럼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그 바닷가 생활에서 회개할 것이 얼마나 많아 

모든 것을 그곳에다 죄다 던져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갔을까!

회개하여라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간 각종 유혹을 받으신 후 갈릴래아에서 전도한 최초의 복음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 호숫가를 두루두루 다니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분의 으뜸가는 과제는 죄의 반성과 철저한 회개였다.

하늘나라가 이미 가까이 다가와 있기에 바로 들어가려면 지금 여기서 회개하라는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바다로 가는 길요르단 건너편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큰 빛이 떠올랐다.”

 

갈릴래아는 젖과 꿀이 있는 땅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모든 것을 빼앗기며 살아왔다.

로마 제국에예루살렘에도 빼앗겼다.

정치적으로 소외되었고종교적으로는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라며 무시당했다.

그래서 민초들의 분노는 물론이고 폭동도 많았다.

예컨대 약속의 땅임에도도무지 그게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어쩌면 하느님 은총이 자연 가득하였다지만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하여 무시당하였고

가진 것이 없다고 업신여김을 감내해야 하였던 곳이었다.

 

어디 이뿐인가?

살다 살다 힘들면 동네 밖 도적 떼라도 되어야 입에 풀칠할 수 있었던 이들이 넘쳐 났고

이렇게 살 바에야 그냥 소리나 한번 지르고 죽자.’라는 심정과 태도가 낯설지 않았다나.

아무튼 그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신다.

물질적 빈곤을 뛰어넘는 연민에 찬 하느님 자비를 그곳에 알리셨다.

버림의 땅인 갈릴래아를 약속의 땅으로 느껴지게끔.

그렇다.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당신의 전유물인 큰 자비를 만천하에 드러내신 것이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느님 능력이 바로 곁에 있단다.

그러니 아예 송두리째 바꾸란다.

정말 주님의 힘이 내 곁에 머물고 있을까?’라는 생각부터 바꾸라는 거다.

그러면 하느님을 작게나마 느끼리라.

그분의 힘이 함께하시면 우리 곁을 어정거리던 악한 기운은 멀리 물러가리라.

그토록 성체를 많이 모셨으면서도 우리가 바뀌지 않은 것은

그분의 그 힘을 못 느꼈기에.

 

이렇게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하늘나라는 그분 말씀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늘나라는 결코 멀리에 있지 않다.

가까이 와 있으니 회개하라는 뜻은

회개를 통해서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시각 우리가 그분 말씀에 따라 참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하늘나라에서 산다고 할 수 있을 게다.

회개를 통해서우리는 참 행복을 얻을 수가 있으리라.

 

하늘나라는 그분 부르심을 받아야만 들어간다.

그 부르심은 지금 이 시각에도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습관화된 나쁜 것을 모두 버리고 철저한 회개로 그분을 따르자.

그 옛날 예수님 제자들도 이리저리 따지지 않고 곧장 따랐다.

회개하여라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것이 예수님의 첫 설교 테마였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서 전도하신 최초의 복음이다.

우리는 이 회개를 통해 지상에서의 참행복을 얻고

그분 부르심으로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누릴 믿음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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