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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1 오늘 묵상글 등

200705. 묵상글 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등)

작성자김 루도비꼬|작성시간20.07.05|조회수80 목록 댓글 0

200705. 묵상글 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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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환난도 자랑으로 여긴다는 말을 하는데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특히 남자들은, 군대에서나 일을 추진하면서 겪은 어려움들을

 

마치 영웅담처럼 얘기하는데 그런 것과 같은 것인가요?

 

 

우리 생각에 자랑이란 성공이나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그래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면 자랑할 것이 없는 것 같은데

 

가끔 보면 아무 성취가 없는데도 어려움 겪은 그것만 가지고도

 

자랑하듯 얘기하고 특히 고생 안 한 젊은이들 앞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진정 고생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겠습니까?

 

고생만 했다면 어쩌면 비루한 인생일 텐데 그것을 어찌 자랑할까요?

 

그런 것이 분명 아닐 것이고, 아마 그 안에 숨어있는 자랑거리,

 

곧 그 모든 고통을 견뎌냈다는 그 인내를 자랑하고 싶은 걸 겁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도 환난은 인내를 자아낸다고 하는데

 

분명 우리의 인내란 환난 없이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내가 환난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닌 것도 사실이지만

 

환난을 겪으면 저절로 생기고 자라는 것이 아닌 것도 사실이지요.

 

사랑과 희망 없이 환난을 겪으면 인내가 생기거나

 

인내력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꺾이고 맙니다.

 

 

이것은 온실에서 자란 묘목이 갑자기 사막에 옮겨지거나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없이 온갖 고생을 하게 되는 것과 같고,

 

먹는 것 없이 힘든 운동을 하면 골병이 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환난과 함께 사랑과 희망이 반드시 자기 안에 있어야 하고,

 

사랑과 희망이 내 안에 있기 위해서 부모의 사랑이

 

착화탄과 마중물처럼 있어야 합니다.

 

 

실로 부모의 사랑은 내 안의 사랑에 불을 붙이는 착화탄이고,

 

또 다른 부모의 사랑이자 부모의 사랑보다 더 완전한 사랑인

 

하느님 사랑을 믿고 희망하게 하는 마중물입니다.

 

 

아무튼 사랑과 희망이 내 안에 있는 사람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환난을 겪을수록 그의 인내력이 자랄뿐 아니라

 

희망과 사랑도 덩달아 타오르고 더 뜨거워집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저 세상까지 사랑하는 것 중에서

 

어떤 희망과 어떤 사랑이 진정한 희망이고 사랑일까요?

 

그리고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과 저 세상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멀리까지 못 내다보는 희망과 멀리까지 못 가는 사랑이 있습니다.

 

희망은 시력과 같은 것이고 사랑은 바떼리와 같은 것인데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영적인 시력과 사랑이 없기에

 

이 세상 넘어 저 세상까지 바라보는 희망과 거기까지 갈 사랑이 없습니다.

 

 

마라톤을 뛰는 사람이 10Km를 목표로 두는 사람은

 

희망을 거기까지만 두고 그 정도 뛸 정도만 연습하기에 힘도 그 정도입니다.

 

그러나 전구간 마라톤이나 울트라 마라톤을 뛰려는 사람은 그 이상이겠지요.

 

 

우리의 첫 사제인 김대건 성인이 25세의 나이로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은

 

너무 아까울 뿐 아니라 너무 어리석은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더 오래 살아서 신자들을 위해 사목을 하는 것이 더 유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래서 실로 그런 선택을 한다고 해도 잘못이라 하기 어렵지요.

 

 

그러나 김대건 성인의 선택이 결코 어리석음이 아니고

 

자신에게는 지혜로움이고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움이기에

 

이런 첫 사제 성인을 주심에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저를 비롯하여

 

한국의 사제들이 성인을 닮게 되기를 희망하며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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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 고 도미니코 ofm.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20207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매년 75일은 한국천주교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가톨릭 교회들이 한국의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은 세계의 모든 가톨릭 교회들이 한국인 최초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순교 성덕을 기념하고 그의 전구(轉求)를 기원하는 미사를 지냅니다.

 

75일이 김대건 사제 순교자의 날로 정하게 된 것은, 192575일 비오 11세 교황이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79명의 한국 순교자들을 '복자'의 반열에 올린 것으로부터 유래합니다. 19491125일 비오 12세 교황은 김대건 신부를 '한국 모든 성직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고, 19845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 여의도에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103명의 한국 순교자들을 '성인'의 반열에 들게 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이날을 신심 1등급으로 정하고, 주일과 겹치더라도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성 김대건 신부는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며, 최초의 서양학문 유학자입니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사목하였지만, 교회를 사랑하는 참 목자였습니다. 25통의 옥중서한을 통해 탁월한 학문의 지혜와 신자들을 배려하는 목자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한국인으로서 전통 관습을 가장 잘 이해한 목자였습니다. 관헌들의 온갖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고, 타협을 모르는 불 같은 신앙으로 모든 후배 사제의 신앙적 귀감이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순교를 통하여 굳건한 신앙을 지켰고 자신이 흘린 피로써 한국교회에 신앙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는 순교의 참의미를 묵상하며 우리 또한 그분의 순교 신앙을 살도록 초대합니다.

 

순교의 참된 의미를 초대교회 교부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그리스도인은 말과 행동에 있어 밤낮 가릴 것 없이 어디서나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치쁘리아노는 그의 편지에서 한순간에 고통을 당하는 이는 오직 한번 승리하지만 항상 고통중에 머물고 끊임없이 고통과 투쟁하는 이는 매일 새로운 순교의 화관을 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아타나시오는 안토니오가 사막에서 시작한 금욕수련을 매일 매일 의식(意識)순교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매일매일 금욕의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는 열성은 경기장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열성과 비교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순교라는 이름의 거짓순교를 경계해야 합니다. 신흥종교의 교주들 혹은 사이비 신비체험가의 메시아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이들이 세상 고통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면서 이를 개혁하려 모이거나 자신의 체험을 말하는 것에 대해 교리적인 비판이 가해지면 박해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자신이 신앙과 생활의 잘못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에게 해주는 사랑의 충고에 대하여 과민반응을 보이면서 이러한 사랑의 충고를 마치 자기의 신앙생활을 박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멀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일상에서 만나는 고통, 오해, 시련을 자신을 단련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거듭나기 위한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십자가이며 은총의 십자가로 기쁘게 받아들일 때 여기에 영적이며 의식적인 참된 순교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순교 체험은 하느님 나라가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땅에 도래하는 징표이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구체적인 순교 행위가 될 것입니다.

고 도미니코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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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 키엣대주교님.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연중 제14주일)

 

 

주님의 자녀라면 누구라도 그 분이 계시는 세상을 증거해야 하는 막대한 임무가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약하고 착한 주님의 자녀는 언제든지 사납고 강한 늑대의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당신께 의탁한다면 언제나 주님의 돌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곤경에 처하더라도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의 영이 말씀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순교 성인들의 굳건한 믿음은 정말 놀랍습니다. 형용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신 그 분들을 존경합니다. 저희 집안에는 세분의 순교 성인이 계십니다. 순교 성인의 8대손으로써 제 몸에 흐르는 그 분들의 순교정신을 느낍니다. 그 분들의 숭고한 삶과 죽음처럼 저도 굳건한 믿음의 삶을 살다 가기를 바랍니다. 이제 과거와 같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은 없습니다. 순교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분들의 삶의 정신을 본받아 현재의 시련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시련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시장경제에서 오는 시련일 것입니다.

 

우리가 버는 돈은 전보다 훨씬 많고, 전보다 더 좋은 차와 더 좋은 집, 더 편리한 것들로 내 주위를 채워가고 있는데도 마음은 점점 비어만 갑니다. 부족함을 채우려 남보다 나를 더 챙기야 하기에 이웃을 배려하는 여유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약한 사람은 더 약해지고, 마음의 상처를 받는 사람은 더욱 아파하고 있습니다.

 

주위를 돌아보고 나보다 덜 행복한 사람을 생각하고 도와주는 진정한 배려와 사랑의 실천이 절실합니다.

 

돈이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부를 축적하기 위해 속이고 부정을 하는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여 돈을 벌고 있습니다. 돈은 세상의 가치를 파괴시킴은 물론 인간의 본질까지도 변질시키는 유혹이 되고 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욕구와 돈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은 오직 복음의 정신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뿐입니다. 생계를 위해 잘못된 길을 가는 쉬운 방법을 택하지 말고 비록 힘들고 지치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날마다 새로운 시련, 새로운 위협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과 복음의 정신에 충실히 살기 위해서는 굳은 믿음으로 주님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 옛날 성인들은 주님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의 선택과 죽음을 맞이하셨지만, 지금 우리는 욕망을 추구하려는 마음과 포기하려는 마음의 투쟁 사이에서 매 순간 선택이 필요합니다.

 

복음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믿음을 위한 끊임없는 희생의 과정입니다. 종교를 위하여 사는 것은 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만큼 아름답고 용감한 것입니다. 이 또한 주님에 대한 복음의 증거이므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믿음의 증거가 되기 위하여 순교하신 성인들이시여!

 

저희가 생활 속에서 주님 말씀의 증거가 될 수 있게 도와 주소서. 저희가 복음의 정신으로 살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오늘날, 주님의 증거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2. 믿음의 생활에 닥친 시련은 무엇입니까?

3. 현대 사회의 순교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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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 이영근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 신심미사

 

 

이 미사는 우리나라의 첫 사제요, 한국 사제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 신심미사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여 대대로 순교자를 낸 신심 깊은 집안에서 1821년 충남 당진 솔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솔뫼는 그의 증조부(복자 김진후 비오), 부친(성 김제준 이냐시오)을 포함 411명이 순교의 꽃을 피운 곳입니다.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사위의 밀고로 체포되어, 아들을 국경을 넘겨 보낸 국사범으로서 온갖 잔악한 형벌을 받은 후에 서소문 밖에서 목 잘려 순교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술라 사이에서 3남매 중 맏아들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 진실한 신심을 드러냈던 신부님에 대해 모방 신부님은 이 아이는 아마 천주께서 선택하신 아이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1836, 열다섯 살 때에 세례를 받은 그는 모방 신부가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묻자, “남의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리하여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고국을 떠나(1836.12) 육로로 마카오 신학교에 도착(1837.6)하여 4년간 철학과 신학 공부했습니다. 만주에 들른 그는 북경으로 가던 신자 김 프란치스코로부터 기해박해로 아버지는 참수를 당하고 어머니는 교우집을 떠돌아다니며 신세를 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앵베르 주교가 기록했던 박해의 기록과 모방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편지, 그리고 목자를 보내줄 것을 청한 교우들의 편지를 받고, 그 길로 조선에 있는 메스트르 신부를 만나기 위해 변문을 향했습니다. 그 후에 여러 차례 입국하고자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장춘 소팔가자 성당에서 부제품을 받고서 선교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마침내 18451월에 온갖 고생을 겪고 압록강을 건너 입국하셨습니다. 그러나 홀로된 어머니도 뵙지도 못하고, 전교 신부님을 모셔오기 위해 몸이 불편한 중에도 온갖 고초를 겪으며 다시 상해로 갔고, 1845817일에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 후, ‘라파엘호를 타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 밤낮으로 열심히 사목하는 동시에 선교사제의 서해 입국 통로를 개척하다가, 184665일에 체포되셨습니다. 신부님은 당신의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학문을 아깝게 여긴이들이 인재로 쓰려고 수차례 회유를 하지만, “천주를 숭배해야만 한다. 이를 거절하면 죄를 면치 못한다.”고 답했으며, 교우의 이름을 대라 하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천주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거절했습니다. 신부님은 모진 문초를 받으면서도, 옥중에서 신자들에게 믿음을 잃지 말고 하느님을 섬기며 고통을 참으라고 옥중편지를 통해 이렇게 신자들을 격려했습니다.

 

천주를 알지 못하면 산 보람이 없습니다. 눈물로 씨 뿌린 농부가 추수하는 기쁨을 누리듯 신앙도 좋은 열매를 맺을 때 천국의 기쁨을 누립니다. 박해를 두려워 말고 천주를 섬기고, 순교자들을 기억합시다. 성인들의 발길을 따라 교회에 충실한 시민이 되고, 사랑의 일치로 주님 만나는 기쁨을 누리십시오.”

 

 

1846916, 사제품을 받은 지 11개월 만에 한강가의 새남터에서 26세의 나이로 참수의 거룩한 순교의 빨마를 얻으셨습니다.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그가 이 땅에 남긴 신앙의 씨앗은 여전히 한국의 신자들 안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조선대목구 제3대 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는 추도사에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그를 만나본 사람들이면 어느 누구나 그의 열렬한 신앙심과 성실한 마음에 존경심과 사랑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일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고, 늘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49년에 한국 모든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선정되셨고, 198456일에 성인으로 시성되셨습니다.

 

 

성인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예수님 때문에모진 핍박과 수난 속에서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 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임금으로부터 배교할 것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도 임금 위에 또 천주께서 계시어 당신을 공경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니 그의 배반함은 큰 죄악이라, 임금의 명령이라도 옳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용감히 증거 했습니다.

 

참으로 살 때나 죽을 때나 오로지 예수님 때문에만 살고, “예수님 때문에만 죽으셨습니다. 마치 사도 바오로의 고백에서처럼, 살아있을 이유도 핍박을 받고 죽을 이유도, 오직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성인의 옥중편지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고문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장께서 내가 천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주시니

 

관장께 감사합니다.”

 

 

이처럼 성인께서는 참으로 예수님 때문에고문을 받으셨고, “예수님 때문에죽으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새남터에서의 마지막 강론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마지막 때가 왔으니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통한 건 오직 천주님과 교회를 위함입니다. 나는 죽으나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얻으시려면 천주교 신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참수될 당시, 칼로 여덟 번 목을 친 뒤에야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전해지는데, 칼을 든 열두 회자수 망나니가 목을 치기 위해 무릎의 꿇려 머리를 잡아당긴 상황에서 신부님은 말합니다.

 

이 모양으로 하고 있으면 칼로 치기가 쉽겠느냐? , 준비가 다 되었으니 쳐라.”

 

 

성인께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오로지 예수님께 희망을 거셨습니다. 참으로, 성인께서는 <2독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시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하셨습니다.’(로마 5,2-3).

 

 

이제 우리 역시, 다름 아닌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서, 매순간을 순교로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증거”, 곧 우리의 순교가 우리의 삶의 현장과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연속되는 죽음 속에 자리 잡아야 할 일입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나 자신의 뜻에는 스스로 죽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순명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내년 2021년은 세계유네스코가 정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해이고, 한국천주교회는 내년을 한국교회의 희년으로 선포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2고린 4,10-11).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주님!

고난과 시련이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소서.

그 속에서 당신의 능력과 현존을 체험하게 하소서.

오히려 굳세어지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기회의 순간이 되게 하소서.

미움 받고 거부당할 때에도, 박해 받고 배신당할 때에도

당신과 함께 받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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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한국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218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울술라 사이에서 출생하셨다. 6살 때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시 남곡리의 골배마실로 이사를 하고 1836년 은이 공소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해 12월 모방 나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오르니 16세였다. 18441215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18451월 조국에 몰래 입국하였다가 다시 4월에 주교와 신부를 영입하기 위하여 10여 일의 항해 후 상해에 도착한다.

 

 

1845817일 상해 근처 김가항에서 페레올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 되니 한국교회 최초의 사제가 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해 1012일 주교와 신부를 모시고 충청도 나바위에 무사히 입국하였다. 8개월 동안 국내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중 184665일 몰래 출항하려다 황해의 순위도 부근에서 체포되어 916일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군문 효수 형을 당하니 그의 나이 26세에 불과하였다. 1925년 비오 11세에 의해 로마에서 시복되었고 19845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에서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복음: 마태 10,17-22: 박해를 각오하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싸움을 준비시키신다. 그분 때문에 신앙 때문에 제자들은 부당한 대우와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신다. 이것은 선을 위해 악을 참고 견딜 때 승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이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인지 따져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순종하였다. 그들이 순종한 것은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그것을 견디어낼 수 있는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17)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 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처벌할 것이다. 사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9-20)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시는 말씀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셨다. 즉 사도들은 하느님의 영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 한 집안의 가족들이 서로 다툴 것이다. 이것은 꼭 가족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부모와 친척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는 사람들이 일치하고 있었지만, 이 믿음 때문에 사악한 믿음과 충돌한다는 뜻이다. 그 사악한 믿음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 앞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아마 이러한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시작은 많이 하지만 끝에까지 가는 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은총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없다.

 

 

영광스러운 것은 어떤 좋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끝맺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끝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우리의 마지막을 생각하라고 하신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신앙을 묵상하고 항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인간의 본 모습을 잘 깨닫고, 알고 사랑한 분이시며, 하느님께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한 죽기까지 효애를 드린 분이시다. 끝까지 항구한 분이시다. 우리도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같은 항구한 믿음과 온갖 박해도 이길 수 있는 주님의 은총을 청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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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박해와 유혹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마태 10,17-18).”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사람들의 박해 때문에

신앙을 잃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라는 뜻인데, 오늘날의 상황에 맞추어서,

사람들의 유혹 때문에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라고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캉스 철이라서 놀러가자는 유혹이 많을 것입니다.

놀러가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닌데,

그날이 주일이라면 죄를 짓게 만드는 유혹이 됩니다.

한 번 정도는 주일을 안 지켜도 괜찮지 않느냐는 유혹,

나중에 고해성사를 보면 된다는 유혹,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그렇게 큰 죄는 아니라는 유혹...

 

채찍질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고문하거나 협박하면서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할 것이다.” 라는 뜻인데,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신앙생활을 뒤로 미루라고

유혹하고, 그래도 신앙생활이 가장 중요하다고 방어하면

조롱하고 비웃고 모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가 오히려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는 박해를 받으면 오히려 그것을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로 삼아라.” 라는

뜻인데,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신앙생활을 뒤로 미루라는 유혹과 압박을

받을 때가 오히려 신앙생활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증언하는 기회가 된다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놀러가더라도 나는 신앙생활을 먼저 하겠다는

강한 태도를 보이면, 비웃음과 모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일에 굴복하면 안 됩니다.

신앙은 신념이기도 합니다.

그런 일에 꺾이는 신념이라면, 그 신념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신앙생활을 부정하고 비웃는 사람들은

논리적으로신앙생활을 깎아내릴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 인간적인 말재주로 대응하는 것은 함정에 빠지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유혹하는 자들은 온갖 궤변과 세속의 이론을 동원해서

신앙인들의 논리를 무너뜨리려고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세속 사람들의 거짓 이론에 말재주로 맞서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일러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이론이 아니라 으로

박해와 유혹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면 성령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론보다는 입니다.

신앙은 생활입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신앙인답게 살면, 세속의 어떤 이론도 우리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말재주로만 대응하면,

헛된 이론과 궤변들을 동원하는 세속의 공격에 금방 무너지게 됩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마태 10,21).”

 

식구들이 전부 다 모여서 함께 놀러가는 상황에서 주일을 지킨다는 이유로

혼자서만 그 모임에서 빠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주일을 지켜야 한다면서 혼자서만 빠졌을 때,

식구들에게서 받는 공격은 박해 때의 공격보다 더 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박해 때보다도 더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식구들과 함께하면서 신앙생활도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조금만 더 수고할 각오를 한다면 방법은 많습니다.

식구들보다 먼저 일어나서 새벽미사 참례를 할 수도 있고,

피서지 근처의 성당에 갈 수도 있고......

육신의 편안함을 조금만 포기하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영혼의 평화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박해 가운데에서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해가 아니라 유혹을 받더라도, 그 유혹을 끝끝내 물리치면 모든 사람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것은 사실상 박해와 같습니다.

(유혹도 일종의 박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은 내가 구원해 주겠다.” 라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끝까지죽을 때까지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이만큼 했으면 나도 할 만큼 했다.” 라고 판단하고

중간에 멈추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끝까지 가지 않은 사람은 처음부터 가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폭력적인 박해가 없는 지금이라고 해서

신앙생활을 하기가 박해시대보다 더 쉬운 것은 아닙니다.

박해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신앙생활은 늘 어려운 생활입니다.

신앙인을 넘어뜨리려고 시도하는 악의 힘이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몸이 따르지 못한다.’ 라는 말은, 의지가 약해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는 마음은 간절해도 의지가 약해서

실천하지 못하면, 온갖 유혹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몸이 마음을 따르게 하려면, 즉 간절한 마음 그대로,

강한 의지로 실천하기를 바란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깨어있는 것은 유혹에 대해서 경계하는 것이고,

기도는 성령의 도움을 받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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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의 묵상

 

누군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행동으로 여겨집니다.

유일한 생명의 가치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순교는, 신앙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것으로서 가장 숭고한 신앙의 증거로 받아들여집니다.

 

 

한국 교회는 이렇게 순교자들의 피로 세워졌고, 그들의 숭고한 신앙의 증거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뿌리와도 같은 순교자들은 분명 희망을 간직한 이들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순교자들을 기릴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지금 우리입니다.

 

순교자를 현양하지만 지금 우리가 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하게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겪는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극복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물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 맞고 피 흘리는 박해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는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흔드는 다른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이 우리를 미워하지 않지만, 우리 스스로 다른 이유 때문에 신앙에 충실하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순교자를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은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신앙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렬히 복음의 가치를 실천하고, 믿음을 통하여 얻는 기쁨을 위하여

 

다른 것들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 허규 베네딕토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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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 새벽을 열며.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빠다킹 신부님.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형편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우리말은 무엇일까요? 답은 철부지입니다. 이 단어를 유심히 보면 농경시대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농경시대에 계절()의 변화와 흐름을 제대로 알지 못해(부지 不知) 농사를 망치는 사람을 철부지라고 한 것입니다. 농경시대의 이 단어가 지금에까지 전해져서 삶의 변화와 흐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농경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절의 변화와 흐름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를 알지 못하면 농사를 망쳐서 쫄쫄 굶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변화와 흐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기쁘고 힘차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 삶의 변화와 흐름은 항상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과 함께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게 될 때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보다 세상을, 그분의 뜻보다는 내 욕심과 이기심이라는 뜻을 채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우리 모두 철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그 철부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억합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로 1845817일 사제서품을 받고서 그 다음해 916일 한강 새넘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당시의 나이가 서른이 되지 않았으니, 너무 젊었고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 할 수 있는 나이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 것에 뜻을 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만 뜻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의 변화와 흐름을 주님께 맡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주님 말씀에 굳은 믿음을 가지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철부지처럼 끊임없는 걱정 속에서만 살아가고, 조금이라고 어렵고 힘들면 쉽게 포기하고 좌절했던 것은 아닐까요? 더군다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지면서 주님 곁을 떠나는 것을 손바닥 뒤집듯이 했던 것이 아닐까요?

 

더는 철부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향하는 진정한 변화를 이룰 수 있도록 이 세상의 모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멀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신 철저히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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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미워하면 된다. 천국을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 된다(백범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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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마을.

 

책을 안 읽으면/ 저주 받습니다.

누군가 말했다.

?

책을 안 읽으면/ 쓰던 물건 똑같이 쓰고/

하던 생각 똑같이 하고/ 놀던 동네 못 벗어나는/

저주를 받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

 

차동엽 신부님의 유고시집에 있는 시입니다. 책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셨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책을 출판하셨나 봅니다.

 

더워서 책을 읽기 힘들다고,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기 힘들다고, 일이 많아서 책을 읽기 힘들다고. 계속해서 이유를 만듭니다. 이런 습관이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도 쉽게 만들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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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연중 제14 주일

 

 

오프라 윈프리, 스티브 잡스, 조엔 롤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우연히 이 세 사람이 대학 졸업식에서 축사하는 걸 들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방송 진행자로 우뚝 선 사람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로 우뚝 선 사람입니다. 조엔 롤링은 헤리포터라는 소설로 우뚝 선 사람입니다. 모두가 엄청난 명성과 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가 꽃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사생아였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입양아였고,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성격차이로 이혼하였고, 아이를 혼자서 키워야 했습니다. 이들은 대학 졸업식에서 축사를 한 것은 그들의 성공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실패와 고난을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졸업생들에게 인생의 선배로서 축하를 하면서 또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을 하였습니다. 미국의 졸업식은 한국의 졸업식과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졸업식이 엄숙한 반면, 미국의 졸업식은 축제와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1월에 입대한 저는 졸업식을 군 훈련소에서 지냈습니다. 졸업장은 친구가 집으로 가져다주었습니다. 축사는 아마도 주교님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 최강의 나라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습니다. 로마는 강력한 군대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로마의 문화와 로마의 제도는 로마가 지배하는 모든 지역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이스라엘도 로마의 총독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로마인에게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삶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망에 따라서 살기보다는 성령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런 새로운 기준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로마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고, 성령의 뜻에 따라 사는 신앙이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로마라는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로마가 받아들인 성령의 뜻, 교회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절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빛이 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팬데믹(대유행)이 되었고, 많은 나라가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국경의 폐쇄와 사회의 봉쇄는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는 기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은 전염병 확산을 막아내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였습니다. ‘Test, Trace, Treatment'였습니다. 진단키트의 개발과 적극적인 검사, 확진자 파악 및 격리, 신속한 치료입니다. 국경을 폐쇄하지 않고도, 사회를 봉쇄하지 않고도 연대와 협력으로 전염병의 확산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은 WHO의 국제회의에서 기조연설을 하였습니다. 개발되는 백신은 인류를 위한 공용제로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가난한 국가와 가난한 사람에게도 백신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 봉성체를 다녔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을 찾아가기도 했고, 병원에 입원하신 분들을 찾아가기도 했고, 요양 병원에 계신 분들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성체를 모시면서 기뻐하셨고, 제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분들에게 주님은 위로가 되셨고, 용기를 주셨고, 희망이 되셨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다. 청량리 성 바오로 병원으로 봉성체를 갔을 때입니다. 수술을 기다리는 자매님께서 기도를 청하셨고, 성체를 모시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분을 위해서 기도를 드렸고,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해 드렸습니다. 큰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자매님께서는 아무런 두려움과 걱정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다 잘 될 거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기준으로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이정표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율법과 계명은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단죄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율법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여인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돌아온 탕자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탕자를 위해서 잔치를 베푸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시하신 새로운 기준은 온유함과 겸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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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거룩하고 아름다운 순교적 삶

-회개, 희망, 인내-

 

 

우리는 오늘 연중 제14주일에 한국 순교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미 순교의 죽음을 당하셨지만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 것처럼 생생한 느낌을 갖게 하는 순교 성인입니다.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게’(ever old, ever new) 느껴지는 성인입니다. 마침 어제 써놓은 산나리 들꽃을 보며 써놓은 글도 생각납니다.

 

 

-“늘 거기 그 자리

 

누가 보아 주든 말든

 

알아 주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하루를 살아도

 

하늘님 가득 담고 영원을 사는

 

하늘님만으로 충만한 행복의 들꽃들인데!”-

 

 

하느님만으로 충만한 행복을 살았던 순교성인들입니다. 2세기 순교영성의 시대, 참으로 주님 사랑 때문에 순교를 갈망했던 무수한 사랑의 순교자들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의 산 햇수가 아니라 어떻게주님을 치열히 사랑하며 살았느냐가 관건임을 깨닫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고작 만25세에 순교하셨으니 얼마나 짧은 생애이셨는지요. 그러나 성인은 영원히 살아 있어 여전히 생생한 감동에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얼마전 고통중에도 깨끗한 죽음을 맞이한 어느 분을 운구한 분의 추도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몸이 너무 가벼워 나비처럼 자연의 일부가 되어 날아 가신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사주신 밥, 대략 70끼니가 넘는 것 같습니다. 밥값하는 삶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빈자리는 무엇으로 메꿔야 합니까?”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길게 살았던 짧게 살았던 얼마나의 삶의 양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 누구나의 소원은 잘 죽는 것일 겁니다. 제 간절한 단 하나의 소원 역시 병원에서가 아닌 영적전쟁터인 내 삶의 자리에서 치열히 사랑하며 주님의 전사戰士로 살다가 영적전투중에 조용히 전사戰死하여 자취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전사戰死해야 전사戰士임을 깨닫습니다.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얼마전 거룩하게 살다가 선종한 어느 수녀님에 대한 일화도 생각납니다. ‘수녀님은 누가 보고 싶어요?’라고 임종전 어느 수녀가 물었다 합니다.

 

 

하느님이 보고 싶어요!”

 

 

평생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찾고 그리워하며 사셨던 분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대로 한평생 순교적 삶을 사셨던 분입니다. 최민순 작사, 이문근 작곡의 성 안드레아 김대건 노래’(성가287)는 언제 부르고 들어도 감동입니다. 성인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순교적 삶에 순교의 죽음입니다.

 

 

-“서라벌 옛터전에 연꽃이 울어라, 선비네 흰옷자락 어둠에 짙어갈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몸에 담뿍 안고, 한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여

 

 

한강수 굽이굽이 노들이 복되도다, 열두칼 서슬아래 조찰히 흘리신 피

 

우리의 힘줄안에 벅차게 뛰노느니, 타오른 가슴마다 하늘이 푸르러라

 

 

가신님 자국자국 남긴 피 뒤를 따라, 싸우며 끊임없이 이기며 가오리니

 

김대건 수선탁덕 양떼를 돌보소서, 거룩한 주의 나라 이 땅에 펴주소서.”

 

 

간절한 기도와 같은 성가가 심금을 울리며 우리 모두 순교적 삶을 살도록 북돋아 주며 고무합니다. 성인의 순교직전 마지막 장문의 옥중서간 역시 구구절절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고작 25세에 이런 편지를 썼다니 참 경이로울 뿐입니다.

 

 

임종을 앞뒀던 어느 분의 인생무상人生無常, 이보다 진실이 없어요!”란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바로 인생무상에 대한 유일한 답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순교적 삶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거룩하고 아름다운 순교적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 회개의 삶입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순교적 삶의 첫째 조건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역대기 하권에서 착안했습니다. 요아스의 변절과 즈카르야의 살해에 관한 내용이 바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긴 죄로 인해 이들 유다와 예루살렘에 주님의 진노가 내렸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즈카르야를 죽이기까지 합니다. 즈카르야의 순교 직전의 임종어가 긴 여운으로 남아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참으로 반복되는 우상숭배의 변절의 인간들이요, 여전히 반복되는 순교의 죽음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이렇게 가다간 하나뿐이 공동의 집인 지구도 위태합니다. 어는 생태전문가의 절실한 고백도 생각납니다.

 

 

이 세계를 그냥 이대로 망해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안될 것 같습니다. 너무 아깝습니다.”

 

 

참으로 생태적 회개는 물론 전방위적 내외적 영적 혁명의 철저한 회개가 화급, 절박한 때입니다. 멀리서가 아닌 지금 여기 나부터입니다.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삶입니다.

 

 

둘째, 희망의 삶입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순교적 삶의 둘째 조건입니다. 바로 제2독서에서 착안했습니다. 회개할 때 비로소 참사람의 시작입니다. 무엇보다 사랑과 희망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회개를 통해 본래의 사랑과 희망의 회복입니다. 궁극의 하느님께 대한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이 있기에 자발적 사랑의 순교적 삶입니다. 이런 희망이 없어 혼란 복잡한 삶이요 타락에 인간성 상실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이요 사람의 내면은 날로 황폐화되어 인성도 거칠어 지고 사나워집니다. 희망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의 제2독서 말씀은 오로지 희망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이 바로 궁극의 진짜 참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이 참으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고결하고 기품있는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진 사랑에서 샘솟는 이런 희망입니다. 참으로 예언자들은 물론 성서의 모든 사람들이 희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새 이스라엘인 우리 모두를 향한 시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시편131,3).

 

 

셋째, 인내의 삶입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순교적 삶의 셋째 조건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착안했습니다. 희망이 있어 인내도 가능합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무한한 인내입니다. 참으로 희망이 있을 때 인내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걱정과 두려움중에도 좌절함이 없이, 흔들림 없이 주님의 길을 가게 합니다.

 

 

요셉수도원 초장기 때 당시 원장수사와의 대화를 잊지 못합니다. 수도생활에 필요한 덕이 저는 사랑이라 대답했을 때 당시의 원장 수사는 인내라 대답했습니다. 정말 마지막 승리는 끝까지 희망을 지니고 기다리며 인내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정주의 인내요 정주의 믿음입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의 '인내의 대가' 불암산에서 배운 것도 항구한 인내였습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다짐하며 요셉수도원에 정주한지 32년째입니다. 일희일비 반응하지 않고 담아두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주 다음 자작시를 되뇌이며 미소짓곤 합니다.

 

 

-“산이 산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산보다

 

더 좋은 깊고 고요한 산이예요”-

 

 

산같은 정주요 인내의 믿음입니다. 인내의 수련, 인내의 노고입니다. 인내하며 기다리다 보면 문제의 해결解決이 아닌 저절로 문제의 해소解消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나고 나면 별것도 아닌데 유혹에 빠져 참지 못하고 행위함으로 자초하는 화는 얼마나 많은지요. 성 베네딕도 역시 형제들의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성규72,5)는 공동체 삶의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인내로 결론을 맺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주님은 오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심기념미사 강론을 통해 거룩하고 아름다운 순교적 삶을 위한 귀한 지침을 주셨습니다. 바로 회개의 삶, 희망의 삶, 인내의 삶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아빌라 성녀의 기도의 선물로 강론을 마칩니다.

 

 

-“아무것도 너를 어지럽히지 않게(Nada te turbe)

 

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마라(nada te espante)

 

모든 것이 다 지나가지만(Todo se pasa)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Dios no se muda)

 

인내가(la paciencia)

 

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todo lo alcanza)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quien a Dios tiene)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nada le falta)

 

오직 하느님으로 넉넉하도다(solo Dios basta)”-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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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1784년 최초의 영세자를 탄생시킨 한국천주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17941223일 비로소 한국 땅에 처음으로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후 1835년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님은 방인 성직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1836년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최방제는 그곳에서 병사하였고 김대건과 최양업은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은 서양학문을 정식으로 익힌 첫 조선인으로서 최고의 지성인답게 당시 조선 왕국의 국가 정세와 교회 사정 및 민생상태에 관하여 예리하게 관찰하였습니다. 두 분은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유창한 라틴어로 써서 스승 신부님들께 보고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1845817일에 상해근교의 김가항에서 사제 서품을 받으셨습니다. 이때는 서품식이 요즘처럼 성대하지 않았습니다. 쪽배를 타고 그곳까지 간 11명만이 참석한 조촐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한국천주교 사상 가장 뜻깊은 날입니다.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사제품에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진정 빛나는 이유는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될 만큼 명실 공히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사제였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서품을 받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15세에 영세 입교하시고 신학생으로 뽑혀 멀리 산 설고 물 설은 마카오로 떠난 그날부터 겪은 고초를 생각하며 감개무량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겠습니까? 우리는 상상할 뿐이지 말로써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서품을 받으면서 그날 모든 감사를 하느님께 드리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신부님이 사제가 되어 고향에 돌아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금의 환양이요. 개선장군같은 환영입니까? 아닙니다. 박해의 칼, 체포와 죽음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사제가 된다는 것은 어려움도 있지만 교회 내에서는 영광스럽고, 소중한 품위에 오르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신분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께서 사제가 되었을 때는 사회적으로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목숨을 바치는 순교정신,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없이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안겨다 주는 일이었습니다. 명실 공히 십자가를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그것을 잘 아시면서도 바로 그 믿음과 순교정신으로 사제품을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목숨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한국 신자공동체가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한국당의 복음화와 구원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당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신 분입니다.

신부님은 자신을 위해 사제가 되신 분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사제가 되신 분이 아닙니다. 동포를 위해, 조국을 위해 세상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잘 살기 위해서 사제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184510월에 배를 타고 조선의 충청도 해안에 상륙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846512일 순위도에서 잡혀 9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양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셨습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가운데 수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하였지만 아깝게도 겨우 13개월 동안만 사제로 살았습니다. 그나마 2개월은 조선에 입국하기위해 황해 바다 위에서 보냈고 또 4개월은 감옥에서 지내다가 순교하셨으니 사목활동은 거의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한국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1784, 지금부터 약 229년 전입니다. 당시 사회는 유교 사회였고 양반과 상놈이 구별되는 철저한 계급사회였습니다. 그리고 조상 제사에 대한 관습과 예절이 철저했던 시절입니다. 이때 천주교회의 기본 교리는 신분 계급과 조상제사라는 두 부분에 큰 충돌을 가져왔습니다.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양반 상놈 구분을 거부하며 우상 숭배의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03년 동안

(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 산발적인 박해 속에 살아야 했고 그 와중에 한국인 첫 사제가 나왔지만 13개월 만에 목자를 잃고 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은 분명 다릅니다. 지나고 보니 신부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신앙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출생하신 솔뫼, 순교하신 새남터, 묻히신 미리내는 오늘도 우리에게 신앙의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신부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몫을 여전히 하고 계십니다. 신부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상에 대한 희망이 신부님을 지켜주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2년부터 1846년까지 21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중 한문과 한글로 쓴 편지가 각각 한 통씩이고 그 외에는 모두 라틴어로 썼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1842년부터 1860년까지 19통의 편지를 전부 라틴어로 썼습니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님의 편지는 대부분 사제 서품 전에 쓴 것입니다. 반면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는 사제 서품 후에 쓴 것입니다.

오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편지를 한 통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그분의 믿음과 하느님과 그 백성을 위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 묵상하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스물한 번째 편지는 옥중에서 쓴 것입니다.

 

옥중에서 쓰신 마지막 회유문(18468월말)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님의 은총으로 세상에 나고 주님의 은총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님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을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은혜를 배반하니 주님의 은혜만 입고 주님께 죄를 더하면 아니 남만 못하리.

 

이러한 어려운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 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공덕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성녀의 자취를 가르쳐 성교회의 영광을 더하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의로운 아들)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다) 하실 때를 기다리라.” 하시며 주님께 대한 믿음을 더하기를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큰 어려움도 역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너희가 감수 인내하여 주님을 위하고 오직 주님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하느님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큰 사랑과 믿음을 지키라는 간곡한 호소를 담았습니다. 혹 우리에게도 힘에 겨운 일이 생긴다면 더 큰 믿음으로 주님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농부가 수확을 기다리며 온갖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듯이 우리도 참고 견디며 천상 것에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 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10,17-2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1-4).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의 여정을 보면,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어려운 일이 생기기도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실망과 좌절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고 그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따라서 다가오는 예기치 않은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주님의 안배와 섭리를 찾기 위해 기도하고 간구할 때 새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김 대건 신부님의 삶은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일이 서로를 거스를 때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 속에서, 억울함 안에서, 생각하지 못한 난관 앞에서 끝까지 견디며 하느님을 먼저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더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만하면 됐지’ ‘나도 사람인데’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는 이에게는 이것이 유혹입니다. 사실 천상을 바라보고 사는 이에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견디는인내가 행복입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흘리는 수고의 땀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도 눈물과 피로써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면서 걸어가셨는데 우리가 아무런 수고 없이 공짜로 천국을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인내에 인내를 더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기뻐하는 한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어떤 신자분이 성경을 읽으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억지로라도 하루에 한 줄이라도 읽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매일 아침 성경을 펴서 첫눈에 들어오는 한 줄을 읽고 말씀대로 실천하기로 결심하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 말씀이 마태오 복음 27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그러니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다시 찾아 읽겠다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루카복음 1037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중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너무 기가 막혀 삼세번이다 하면서 다시 성경을 펼쳤습니다. 요한복음 1327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우리 신자분들 중에는 오늘의 운세를 보듯, 점을 치듯 성경을 읽는 분이 계십니다. 말씀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되는대로 눈이 가는 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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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한국인 첫 사제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기리는 날입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때문에""덕분에"에 대해 묻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마태 10,18).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의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제자의 앞날을 솔직히 밝히십니다 설교하고 치유해 주면서 환호받는 꽃길만 있지 않다는 걸 명백히 하시는 겁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모든 예언자의 운명이었고 예수님 앞에 펼쳐진 길이기도 하지요. 이제 제자들도 그 운명으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나 때문에, 내 이름 때문에."

 

주님과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으려 기꺼이 죽음을 택한 예언자들과 순교자들은 세속의 눈으로 보면 몽상가고 실패자입니다. 세상 사람들 입장에서야 배우고 벌고 희생하고 즐기는 모든 일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신앙과 사랑을 위해 죽자고 나선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이처럼 세속의 견지에서 허망한 패배가, 믿는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2의 그리스도로서 받은 특권입니다. 세상 눈에는 "때문에"지만 우리 마음에는 "덕분에"인 것이지요.

 

1독서에서는 즈카르야 예언자의 죽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2역대 24,19).

 

예언자는 경보음과 같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거나 방향을 잃었을 때 제 자리로 돌아가라는 신호의 역할이지요. 주님은 당신 백성이 당신에게서 멀어지거나 등지려 할 때 그들을 돌려세우기 위해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 주님의 집 뜰에서 돌을 던져 죽였다"(2역대 24,21).

 

다른 우상들과 사랑에 빠져 한창 풍요와 쾌락에 몰두한 이들에게 주님의 계약과 신의를 일깨우는 예언자가 고울 리 없겠지요. 결국 즈카르야 예언자도 여느 예언자들과 같은 죽음을 겪습니다. 정의나 진리에 귀를 닫은 이들에게는 주님의 말씀보다 폭력이 더 쉽고 가깝기 아련이지요.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런 우리의 운명을 "덕분에"로 표현합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5,2).

 

바오로는 하느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과 우리가 겪을 환난을 동급으로 봅니다. 둘 중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피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자랑합니다. 주님과 운명을 같이하는 일치의 길에서는 둘 다 중요하고 가치있고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영광스럽게 기리는 예언자들, 순교자들, 성인들은 신앙의 길에서 맞닥뜨린 모든 환난을 "주님 덕분에"로 승화시킨 분들이지요.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김대건 신부님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더 당당히 거리낌없이 오히려 기뻐하며 그 고난을 겪어내고 증거자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순교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오히려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증거의 갈림길을 매순간 접합니다. 세상은 풍요와 쾌락의 패를 보여주며 자기를 따르라고 속삭이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닮겠다고 진리와 정의, 양보와 희생, 나눔과 베품, 비움과 가난의 길을 기웃거리지요. 썩 잘 하지도 못 한다는 부끄러움을 안고서 그래도 애를 씁니다.

 

이런 우리 모습에 세상은 "때문에"라며 혀를 끌끌 찰 겁니다. 그러길래 자기 쪽으로 더 확실히 오지 그랬냐고 채근하면서요. 하지만 우리는 "덕분에"라고 기뻐합니다. 우리가 "주님 덕분에" 선택한 이 삶이 비록 세상이 좇는 풍요와 쾌락을 보장하진 않지만, 괜찮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과 그 과정에서 겪는 "환난"을 함께 자랑하는 순교자들의 후예니까요.

 

오늘의 나의 모습, 나의 자리, 나의 처지를 원망하고 후회합니까, 아니면 충만하고 감사합니까? "주님 때문에"입니까, 아니면 "주님 덕분에"입니까?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함께 우리가 들어선 제자의 길을 깊이 숙고하는 오늘 되시길 기도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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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오늘은 연중 제14주일이면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75일인 오늘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1925년 복자품에 오르신 날입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 사제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45817일 사제서품을 받으시고, 이듬해인 1846916일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참혹한 형인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사도들의 '파견사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박해와 환난 앞에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굳게 먹은 마음이 사흘을 못 가 흐지부지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일에서나 하느님의 일에서나 우리는 너무나도 종종 '작심삼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잘 따라가겠다고 약속하고 다짐하지만, 그 믿음과 삶이 작심삼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나도 빨리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을 배반합니다.

 

특히 고통과 시련 앞에서 종종 나의 믿음과 삶이 흔들리거나 무너지기도 합니다. 코로나가 어느 정도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사제품을 받으시고,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18466월에 체포되셔서 순교하시기까지 3개월 동안 심한 문초를 겪으셨습니다.

마지막 순교하실 때에는 목에 칼을 여덟 번 받으셨다고 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심한 박해 앞에서 배교하지 않으시고, 모든 박해와 환난을 끝까지 견뎌내셨습니다.

 

우리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처럼,

끝까지 믿고,

끝까지 희망하고,

끝까지 사랑합시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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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2역대기 24,18-22

로마 5,1-5

마태오 10,17-22

 

비우면 채워지고, 채우면 비워진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그런데 요즘 많이 드는 생각은 요즘 현대의 청소년들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의

삶을 보며 자신도 그 삶을 따르고 싶어 할까?’입니다.

 

사제가 되어서 순교하는 삶이 정말 인기스타가 되는 것처럼 선망의 대상일까?’

저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저에게 어떤 분이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세요. 그래야 청소년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사제가 되고 싶어 하지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사제가 되고 싶어 하는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선망하는 사제의 삶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같은 순교의 삶인지, 아니면 좋은 차 타고 고급 운동을 하러 다니는 사제의 모습인지 궁금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부모님도 자녀가 사제나 수녀가 되어 순교의 길을 가기를 원하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만약 나의 자녀들은 김대건 신부님처럼 젊은 나이에 고생만 하다가 순교를 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오늘 이 성인을 기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인들을 기념하는 이유는 그분들의 삶이 부럽고 본받고 싶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인생 성공의 의미를 순교와 연결해 이해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식이나 저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준비하는 순교의 삶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말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입니다.

일본 최고 납세자 사이토 히토리씨는

운은 힘이 셉니다. 실력보다 힘이 셉니다. 그러니 운을 키운다면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단지 운 있는 사람은 부자가 되고 운 없는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을 운을 담는 그릇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공의 운이 모이게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절제입니다.

모든 성공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다 이 절제를 말합니다.

 

미즈노 남보쿠는 대일본이란 칭호를 받았듯이,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은 사람입니다.

이분은 비워야 채워진다.’라는 신념으로 절제의 성공학이란 책을 썼습니다.

 

자신이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술과 도박과 싸움을 일삼고 살다가 그렇게 수천 명의 제자까지 둔

인물이 되기까지 이끌어준 것이 바로 절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특별히 몸에 음식을 다 채우면 성공의 운이 다한다고 말합니다.

채워지면 비워지는 것만 남고, 가장 높이 뜬 태양은 떨어지는 일만 남기 때문입니다.

 

그가 18세 때 도둑질을 하다 감옥이 간 일이 있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감옥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인상이 밖에 있는 사람들의 인상과 차이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옥살이하고 관상가를 찾은 그는

“1년 안에 칼에 맞아 죽을 운명이니 속히 절로 가서 출가를 청하시오.”라고 말해줍니다.

출가하기 위해 절에 갔더니 절의 주지 스님은 1년 동안 보리와 흰콩만으로 식사하고 오면

받아주겠다고 합니다.

 

1년 동안의 그렇게 절제된 식사를 마치고 절로 가는 길에 전의 그 관상가를 다시 찾았습니다.

남보쿠를 알아본 관상가는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군요. 어디서 큰 덕을 쌓았소, 아니면 사람의 목숨을 구했소?”

생명을 구한 일은 없지만, 보리와 흰콩만 먹고 1년을 살았습니다.”

식사를 절제한 것이 큰 음덕을 쌓았구려. 그것이 당신을 구했소!”

 

남보쿠는 출가보다는 운명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 처음 3년은 머리 만지는 일 하며, 그다음 3년은 목욕탕에서 일하며, 마지막 3년은 화장터에서 인부로 일하며 얼굴과 몸과 골격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렇게 관상을 보니 처음엔 틀리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곧 죽을 운명이면서도 죽지 않고, 망할 운명이면서도 망하지 않는 사람들이 간혹 생겨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음식을 절제하며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병에 걸려 죽을 운명도 음식을 절제하니 그 빈 곳에 없던 운도 깃든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3년 동안 음식을 절제하고도 성공하지 못하면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취급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비워져야 하늘의 기운이 그 안에 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보쿠는 노년에 거대한 저택에 큰 창고만 7동이 되었으나, 쌀은 물론 쌀로 만든 떡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3천 명이 넘는 제자들이 따랐고, 일본 조정에서 대일본이라는 파격적인 칭호까지 받았습니다.

 

어차피 먹고 살자고 일하는 것인데 평생 배고픈 삶을 산 남보쿠가 부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공한 것처럼 좋은 차를 타고 술과 고기를 배부르게 먹는다면 그 사람의 운명은 거기서 끝나고 맙니다.

다 채워졌기 때문에 이제 비워지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어느 나라나 망할 때는 다 배부르게 먹고 마십니다.

이것이 국운도 좌우하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연 매출 1조 원이 넘는 세계 최대 음식 가맹점을 성공시킨 김승호 회장도 같은 말을 합니다. 성공하려면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음식을 적게 먹고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라고 합니다.

꼭 필요하지 않은 것에 돈을 절대 쓰지 말라고 합니다.

사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월세나 전세 살면서 비싼 외제차 타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앞으로 성공할 것 같나요? 샴페인을 미리 터뜨리면 거기까지입니다.

성공한 이들을 부러워하여 자신을 절제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성공할 것이고, 이미 성공한 것처럼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사람들은 항상 부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함께 넣어주신 법칙입니다.

 

이런 절제의 삶이 극에 달하면 순교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비우는 삶, 절제의 삶이 순교의 시작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신자들에게 쓴 유일한 편지에서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하는 신자 여러분, 이런 환난의 때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헛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돌보심을 빌어 삼구(三仇: 세속, 육신,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박해를 참아 받아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한 큰일을 도모하십시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순교는 한순간의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돈과 쾌락과 교만을 죽여가며 사셨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도 의연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비워졌다면 이 세상에서 비우는 사람들을 채워주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주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비워가던 이들이 받게 될 보상입니다.

비우면 채워지는 것이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충만한 생명을 채우려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산다면 저승에서는 어떻게 될까요?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진시왕이나 카다피는 어떤 상을 받았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죽지 않으려고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생명으로 다 채워졌으니 죽음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의 삶은 조금 비우는 삶입니다.

조금 비우니 이 세상에서조차 걱정거리도 없고 편안하고 심지어 존경도 받습니다.

그러면 많이 비우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의 명예를 모욕으로, 배부름을 배고픔으로, 소유를 가난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하늘의 모든 운을 끌어오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운은 이 세상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늘이 영원한 것처럼 그 운도 영원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채우는 삶이 아니라 비우고 비워서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은총의 공간을 넓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부터 이것을 받아들일 때 김대건 신부님을 따르겠다는 더 많은 지원자가 생겨날 것입니다.

재물이든, 명예든, 생명이든, 비워야 채워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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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2역대기 24,18-22

로마 5,1-5

마태오 10,17-22

 

이 시대 순교

 

 

순교의 영예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니 엄청 웃기는 일인데...

 

젊은 시절, 신앙생활에 푹 빠져 살던 때,

저는 어디 순교할 기회가 없나?’하며 여기저기 샅샅이 살피고 다녔습니다.

ㅋㅋㅋ

 

순교의 기회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내가 병인박해 때 태어나지 않았는가?’하며 아쉬워했습니다.

순교의 영예를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시대가 협조를 해줘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인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입니다.

순교는 작고 나약한 한 인간이 크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하는 축복입니다.

 

순교는 보잘 것 없는 인간 존재이지만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순교는 인간의 극점이 하느님임을 엄숙이 선포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결국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완벽히 모방하는 일, 완전한 그분의 제자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신앙은 얼마나 확고했는지 주변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스물다섯, 참으로 꽃다운 나이이며 아까운 나이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요즘 스물다섯들은 아직도 제대로 서지도, 아직 제 앞가림도 하기 힘든 실정입니다.

그런데 스물다섯의 신부님께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남기신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의 부활신앙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게 이런 형벌을 주신 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관장님께서 제게 내리시는 이 형벌을 통해서 저는 더욱 하느님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관장 나리를 더 높은 관직에 올려주시기를 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저는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기에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이제 곧 영원한 생명이 제 안에서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하느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보기만 해도 끔찍한 휘광이의 칼날 앞에서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담대히 하느님의 신앙을 증거하신 김대건 신부님의 신앙 앞에 참으로 큰 부끄러움을 느끼는 하루입니다.

아주 작은 시련의 파도 앞에서도 이리저리 갈대처럼 흔들리는 제 나약한 신앙을 크게 반성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비롯한 수많은 한국 순교자들의 피가 우리 안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놀랍고도 위대한 순교 영성이 우리 한국 교회 역사 안에 자리 잡고 있음에 큰 자부심을 지녀야겠습니다.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영예로운 순교영성을 오늘 내 삶의 자리에서 실천해야겠습니다.

오늘 이 시대, 내 삶 안에서 순교자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이 시대 순교는 죽을 각오로 현실의 고통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적당히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 살기로, 목숨 걸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일상의 비루함과 나 자신의 한계와 작은 고민거리들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는 일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매일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더없이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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