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114. 묵상글 ( 연중 제1주간 수요일. - 알고 싶고 듣고 싶나이다!. - “관상과 활동의 조화와 균형”. 등 )
작성자김 루도비꼬작성시간26.01.14조회수78 목록 댓글 0260114. 묵상글 ( 연중 제1주간 수요일. - 알고 싶고 듣고 싶나이다!. - “관상과 활동의 조화와 균형”.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06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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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4. 연중 제1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14 05:02
- 알고 싶고 듣고 싶나이다!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서약식에 자주 듣는 오늘 사무엘기를 묵상하면서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였다는 얘기와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다는 말이 특히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처음 사무엘에게 들려왔을 때 그는 몇 살 소년이었을까요?
몇 살 소년이었기에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였을까요?
저는 집안 분위기로 보아 아주 일찍 하느님 얘기를 들었을 것이고,
그러니 하느님 존재를 막연하게나마 들어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하느님 존재를 적극 긍정도 적극 부정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저 계신가보다 하며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하느님을 아직 알지 못했다는 것은
하느님에 관해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어머니 한나에게 들어 알았을 것이고,
사제인 스승 엘리에게 들어서 알았을 테지만
사무엘이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다른 뜻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한 그가 이제 알아야 한다면
그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 무엇을 알아야 하는 것일까요?
하느님을 잘 알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하느님을 전부 다 알아야 하고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불가능하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만일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하느님을 전부 다 알고 속속들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기의 이어지는 말의 뜻을 잘 알아야 들어야 합니다.
사무엘기는 사무엘이 아직 주님을 알지 못했다고 한 다음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하느님께 대해 들은 말은 있고 들어 알고는 있지만
하느님 말씀을 직접 들은 적은 아직 없었다는 뜻입니다.
얘기를 들어서 아는 것은 아직 내가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을 내가 직접 들어서 알아야
다시 말해서 체험적으로 알아야 아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하느님을 제가 어렴풋이 안 것은 사춘기를 겪은 20세 무렵이고,
체험적으로 하느님을 안 것은 군 생활을 통해 제 사제 성소를 포기하고
절망 상태에서 지내다가 복음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듣고 난 25세 무렵입니다.
이렇게 체험적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기 전의 저는 절망 상태였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기 전에는 제가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었기에
하느님을 알고자 그리니까 하느님을 체험하고자 별놈의 짓을 다 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 절망이었기에
하느님을 아는 것이 절실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절망이 저를 절실하게 하였기에
한 번만이라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으며,
그 간절함을 주님께서 보시고 복음을 통해 말씀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 후에도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아 하느님 말씀 듣지 못했던 적이 있지만
이제는 하느님 말씀 귀가 어둡긴 해도 사무엘과 같은 자세는 되어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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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4.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
<외딴곳의 기도처>
“관상과 활동의 조화와 균형”
끝은 시작입니다. 피정은 끝났지만 삶의 현장에서 삶의 피정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마침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분주한 하루 삶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평생을 하루하루 이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신 주님은 실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가르침과 치유 활동을 통해 입증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요 예수님 계신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의 전 삶을 요약하면 섬김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신후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서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시자 열이 가시자 부인은 곧장 시중을 들었으니 시몬의 장모는 본격적 섬김의 활동에 돌입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이 가정교회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해가지자 병든 이들과 마귀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 왔고, 온 고을 사람들은 문앞에 모여듭니다.
이어 예수님은 질병을 앓는 많은 이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시니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요 살아 있는 교회를 보는 느낌입니다. 이처럼 모든 병든이든 마귀들린 이든 건강한 이든 모두에게 열려 있는 교회가 역동적 살아 있는 교회요 하느님 나라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은 하루를 분주하게 지내신후 다음 날 새벽 캄캄할 때 즉시 일어나, 삶의 중심 외딴곳 기도처에서 아버지와의 깊은 관상적 친교의 기도로 영육을 충전시킵니다. 바로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의 원천이 되는 외딴곳의 기도처임을 깨닫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침묵중에 귀기울여 듣는 마음으로 깊이 아버지의 뜻을 찾으려 집중했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 제1독서 사무엘 상권에서도 목격됩니다. 소년 사무엘은 엘리 사제 앞에서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며 침묵중에 깨어 있었음을 봅니다.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실 때 마다 착각한 사무엘은 엘리에게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세차례나 대답한 후, 엘리의 충고에 따라 네 번째는 주님께 올바로 대답합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얼마나 엘리 사제 앞에서 깨어 주님을 섬기는 법을 잘 배운 사무엘 제자인지 알게 됩니다.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니 얼마나 사무엘이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도 사무엘처럼 주님의 뜻을 헤아리려 침묵중에 온통 깨어 집중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는 다음 대목에서 빛나니 이 또한 기도의 은총입니다. 시몬과 그 일행이 기도를 마친 예수님을 만나자 보고하니 이는 하나의 유혹이었던 것입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Everyone is looking for you!)
인기의 절정에 있는 예수님! 얼마나 달콤한 감미로운 유혹인지요. 모두가 예수님을 원하기에 그들의 요구에 응하다 보면 끝이 없어 거기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에 단호히 유혹을 떨쳐 버리는 다음 예수님의 답변에서 빛나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멀리 내다보는 넓고 깊은 영적 시야와 분별의 지혜 또한 외딴곳에서의 기도의 열매임을 봅니다. 날마다 새벽 삶의 중심인 외딴곳에서의 기도가 예수님의 하루 삶을 떠받치고 있음을 봅니다.
새삼 온갖 중독환자들이 만연된 세상에 관상과 활동의 조화와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날마다 사랑의 성체앞에 머물러 주님과 일치를 지향하는 관상적 삶의 자세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새벽 외딴곳에서의 미사전례를 통한 주님과 일치의 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를 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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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4. 연중 제1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두 가지 이야기의 은총!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성경은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시작부터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야기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한처음에
두 가지 이야기의 은총
2026년 1월 13일 화요일
성서학자 제니퍼 가르시아 바쇼와 아론 히가시는, 그리스도인들이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읽으려 할 때 생겨나는 어려움들을 지적합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성경의 첫 장, 곧 창세기 1장의 일곱 날 창조의 신비를 온전히 헤아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과학은 지구가 수십억 년에 걸쳐 형성되었다고 증언하기에, 많은 이들이 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순 앞에서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곤 합니다….
실제로 많은 성경 독자들이, 창세기 1장을 문자적·역사적 이해에 충실하려는 마음 때문에 현대 과학의 결론을 부정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의 짐은 불필요합니다. 창세기 1장부터 2장 3절까지는 문자적·역사적 기록을 주장하는 글이 아니라, 고대 신앙 전통 속에서 흔히 쓰이던 창조 신화라는 장르에 속합니다. 이는 사건의 역사적 재현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상을 빚으신 신비를 드러내는 신앙의 서사입니다.
창세기의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와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른 빛깔을 지닙니다. 그러나 가르시아 바쇼와 히가시는 두 이야기가 함께 있어야만 하느님의 신비가 온전히 드러난다고 보여줍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은 초월하신 분으로서 말씀의 행위를 통해 세상을 빚으십니다. 그 과정은 질서와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며, 매 단계는 이미 다음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사명을 완전하게 이루시어, 매일을 ‘좋다’라 부르시고, 마침내 모든 것이 뜻하신 대로 이루어졌음을 확신하시며 안식에 드십니다.
창세기 2장에서 우리는 또 다른 모습을 만납니다. 이 구절에서 하느님은 사람과 가까이 계시는 분처럼, 당신의 손으로 빚으시고 당신의 숨결로 생명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곧바로 완전하지 않고, 인간의 고독이 선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외로움을 덜어 주시려 짐승들을 지으셨으나 충분하지 않았고, 마침내 여자를 창조하시어 인간이 참된 동반자를 얻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그려내는 두 장의 모습 외에도, 창세기의 두 이야기는 창조의 순서에서 서로 다른 빛깔을 드러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식물이 먼저 창조되고, 그 다음에 짐승들이 지어지며, 마지막으로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창조됩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 4절 이후에서는 아담이 어떤 식물보다 먼저 빚어지고, 그 다음에 짐승들이 지어지며, 마침내 여자가 창조됩니다….
여러 면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시작부터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은 처음부터 이 책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곧,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신앙 공동체에 의해 모아지고 엮어진 풍요로운 신앙 전통의 모음집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고대 신앙 문학의 선집을 접하는 것이지, 교과서나 지침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연애편지나 완결된 체계신학의 저술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고대 신앙 문학의 선집이라 해서, 그것이 하느님께서 영감을 주신 책이 될 수 없거나, 하느님에 대해 참된 것을 말하지 못하거나,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선집이라는 성격은, 그 안에 담긴 참되고 영감된 말씀과 유익한 가르침이 때로는 서로 다른, 심지어 긴장된 목소리들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매일 아침 고요한 묵상을 위해 뒷마루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무와 풀들을 바라보던 중, 문득 모든 나뭇잎과 모든 풀잎이 살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고, 오직 생명의 창조주께서만 생명과 사랑의 은총을 주십니다.
—Ray P.
References
From Serving Up Scripture: How to Interpret the Bible for Yourself and Others by Jennifer Garcia Bashaw and Aaron Higashi. Copyright © 2026 Broadleaf Books. Reproduced by permission. Pages 58, 61–6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ergey Kvint, untitled (detail), 2023,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숲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한 줄기 푸른 새싹은, 창조주께서 심어주신 땅의 생성적 상상력이 고요히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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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임마누엘) "지금"이 최선입니다!
명성의 유혹은 우리 인간의 허영을 자극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늘 은수(隱修)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겸손의 덕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유명해지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쓰며, 심지어는 범죄까지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는 자기 정체성의 결핍에서 비롯된 갈망일 수 있습니다. 군중의 시선이 자신을 존재하게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이와 정반대였습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께 명성이 따르기 시작할 때마다 산이나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습니다(마르 1,35; 루카 5,16; 6,12; 요한 6,3.15). 오늘 복음에서도 사람들이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다른 고을로 가자!"고 하십니다. 잘못된 명성은 결국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의 말씀처럼, 우리의 영혼은 창조주와의 친밀한 결합 안에서만 참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막 영성은 단순히 외적 고독이 아니라, 내적 고독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작은 차원에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자기 존재가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막에서나 다른 한적한 곳에서 홀로 피정을 해 보거나 침잠의 시간을 가져본 사람은 곧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내려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초기 교회 안에서 사막의 수도자들이 은수 생활을 택한 것도 바로 이 욕구를 완전히 극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의 희망은 참된 정체성을 발견하는 데 있는데, 노리치의 율리안나가 말했듯이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내려 있고, 끝없이 소중히 간직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먼저 알아야만, 그분과 결합된 우리 영혼, 존재의 진정한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기 의식이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만으로도 관객을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의식'은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자존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감정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 감정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다른 이들의 시선과 평가일 것입니다.
그러나 페넬롱 주교(1651–1715)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것은 영혼이 자기 감정을 지나치게 분석하는 습관을 없애줍니다." 또 "완전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내가 얼마나 잘 기도하는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존재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그 안에 계신 하느님과 일치하는 기도는 외적 고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따라다니는 '보이지 않는 관객'을 떨쳐내고 내적 고독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실 때 사람들에게 온전히 현존하실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이 이미 내적 고독 속에서 하느님과 깊이 일치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페넬롱 주교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전적인 자기 포기는 영혼이 자기 감정을 지나치게 분석하려는 습관을 없애줍니다."
그러니까 참된 기도는 단순한 자기 감정의 성찰을 완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전적인 의탁과 내적 단순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들은 사무엘기 상권의 이야기를 우리는 깊이 새겨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무언가를 말하기보다 그분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먼저 듣고자 하는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로 주님 앞에 고요히 침잠하며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자그맣고 가녀린 소리로(1열왕 19,12)로 말씀하시는 내용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찾고자 한다면 이미 벌써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 교회는 은총의 우선성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벌써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너희는 기도할 때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그러니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과의 관계성 안으로 들어서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입니다. 그분의 뜻을 듣기 위해 경청의 자세로 그분 안에 들어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해 기도는 그분과 내적으로 일치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사무엘처럼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적 고독 속에서 하느님과 깊이 일치하셨기에, 산에서 내려오실 때 사람들에게 온전히 현존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같이 SNS와 대중의 인정에 목마른 시대에 오늘의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던져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처럼 내적 고독 속에서 하느님과의 친교를 찾을 때 비로소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불빛은 밤을 낮처럼 밝히고, 사람들의 손에는 늘 스마트폰이 들려 있습니다. 알림 소리와 메시지, "좋아요"의 숫자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들 속에서 정작 들리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환호보다 산 위의 고독을 선택하셨습니다. 홀로 계신 그 시간은 외로움이 아니라, 아버지와 깊이 일치하는 친교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산에서 내려오실 때,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 온전히 현존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눈빛과 말씀은 단순한 인간의 위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내적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침묵 속에서, 고요한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참된 자유와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인정은 순간이지만, 하느님과의 친교는 영원합니다.
오늘 하루,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마음의 산 위로 올라가 보십시오. 그곳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는 응답 속에서,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를 먼저 찾아오고 계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우리가 뒤늦게 깨닫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겁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뒤늦은 깨달음은 언제나 명확하고 정확하다고요. "The Hindsight is always twenty-twenty!
그러니 어찌 보면 지금 이 순간이, 현재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활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안에 일치해 있고자 한다면 이 순간은 언젠가 가장 명확하고 분명한 순간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저도 그래서 요즘은 빨리 판단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다시 마음을 먹습니다. "지금이 최선"이라고 마음을 먹으면서 말이지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혹은 누군가의 생각이나 언행이 잘못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것보다 먼저 이 상황이 '나'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를 찾고자 합니다. 물론 이런 의지마저도 잊어버릴 때가 많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한 번, 두 번, 세 번.... 이렇게 노력하다 보면 이것이 긍정적인 수양이 된다는 것과, 이 수양 안에서 현존하시며 저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바오로 사도가 하시는 말씀, 즉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하는 권고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복음서를 소설화한 [A Certain Jesus]라는 소설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강조하여 하시는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하느님은 여러분 편이십니다!"입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라도, 우리가 어떤 이유로든 잘못된 상황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상황을 어떻게든 당신의 선과 사랑 쪽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후회하기보다 여기서 또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도 생애 말년에 형제들에게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지금까지 진전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 주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합시다."(첼라노에 의한 프란치스코 전기 1생애 103항). 첼라노는 프란치스코의 이 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 그는 아직 목적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다만 삶의 거룩한 새로움을 얻으려는 뜻을 꾸준히 견지하면서 늘 다시 시작하기를 바랐다."라고요....
지금이 최선입니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까요(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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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4.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곧 ‘기도생활’과 ‘활동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활동과 치유구마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성화직)과 봉사직(왕직)으로 관련지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데,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는 장면이요, <둘째 장면>은 새벽에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며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시는 기도하시는 장면이요, <셋째 장면>은 이웃 고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첫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치유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지자 치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치 산고의 아픔이 다해야 아기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탄생하면 산고의 아픔은 사라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곧 치유가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치유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34)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고, 아는 바를 믿고 사랑하며 또 믿고 사랑하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에 당신 삶의 중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기도와 활동의 삶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곧 ‘기도’는 활동이 되고 활동은 기도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곁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라고 알려줍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기쁜 소식”, 곧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마르 16,15).
오늘 우리는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고, 먼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총과 사랑을 입은 이들로서, 예수님의 이 사랑을 우리의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명심하고, 예수님 삶, 곧 이 3중 직무를 수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주님!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이 제 삶이 되게 하소서!
당신 뜻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제 뼈 속에 갇힌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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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4.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63년에 태어난 저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현장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가난했던 대한민국은 산업화를 통해서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는 경제 발전 5개년의 시대였습니다. 월남파병, 중동 근로자 파견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와 ‘새마을 운동’은 기억에 남는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산업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기반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부고속도로입니다.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약 2년 5개월간의 공사 끝에 1970년 7월 7일에 완전히 개통되었습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이 도로는 한국의 산업화와 국토 균형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역사적인 도로입니다. 우리의 몸은 혈관을 통해서 에너지가 공급되듯이, 우리의 국토도 경부고속도로를 통해서 경제라는 에너지가 공급되었습니다. 이 국토의 혈맥은 호남 고속도로, 영동 고속도로, 88고속도로, 서해안 고속도로 등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일일생활권이 되었습니다.
성장하던 대한민국 경제가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1997년에 있었던 ‘국가부도 사태’입니다. 외환보유고가 급격하게 줄어든 대한민국은 IMF로부터 구제금용을 받아야 했습니다. 핵심 원인은 대기업들의 무분별한 확장과 부실 경영, 단기 외채의 급증 및 외환보유고의 부족, 그리고 외국 자본의 급격한 유출로 요약됩니다. 한마디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고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은 많은 기업이 구조조정을 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어야 했고, 노숙자가 생겨났습니다. 저도 IMF의 냉혹한 현실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습니다. 정권을 인수한 김대중 정부는 ‘금 모으기 운동’을 펼쳤습니다.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맸습니다. 우리는 IMF 경제위기를 이른 시일에 벗어났습니다. 정부는 초고속 케이블을 전국적으로 설치하였습니다. 초고속 케이블은 인터넷 시대의 고속도로가 되었습니다. 반도체의 성장과 인터넷 시대의 등장은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 공단은 남과 북의 경제 협력을 이끌었고,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인공지능’의 시대를 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필요한 고속도로가 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은 선행학습을 통해서 발전하고 있으며 이는 막대한 양의 디지털 데이터 센터가 있어야 합니다. 정부는 이제 디지털 데이터 센터를 구축하겠다고 합니다. 지난 10월 30일에 방한한 젠슨 황은 대한민국에 GPU 25만 장을 공급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이 구축할 디지털 데이터 센터의 주춧돌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함께 살아온 저는 문득 신앙의 고속도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무엘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응답합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고속도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속도로가 아닌 낭떠러지로 갈 수 있습니다. 경제에만 ‘IMF’위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도 분명 ‘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않을 때 시작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는 너희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편 95,7) 사무엘은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온 정성을 다해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고, 주님의 말씀을 왕과 백성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위대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영화 ‘역린’에서 인용되어서 기억에 남은 중용 23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하게 하고 남을 감동하게 하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 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준비되어있다면 역경이 닥쳐도, 고난이 닥쳐도 언제든지 “예‘라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말씀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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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4. 연중 제1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마르 1,29–39
예수님께서는 병든 이들을 고치시고,
사람들이 찾기 전에 새벽 어둠 속으로 물러가 기도하십니다.
치유와 활동의 한가운데서도
그분은 먼저 아버지와의 일치로 돌아가십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교황)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 없이 행동하는 이는
쉽게 타인을 돕지만,
오래 사랑하지는 못한다.”
오늘 복음은 분명히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힘은 ‘일’에서 나오지 않고,
머무름과 기도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른 고을들에도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아낌 주간의 수요일,
우리는 배웁니다.
멈춤 없는 활동이 세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정화된 발걸음이
세상을 살린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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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4. 연중 제1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그릇이 큰 사람과 작은 사람
탕을 청소하면서 한번은 우연히 관찰한 게 있습니다. 탕청소를 하다 보면 물을 배수해야 합니다. 밑에 있는 배수구 마개에 고리가 있고 그 고리를 큰 철사 막대 같은 걸로 걸어서 잡아당겨 빼면 됩니다. 손으로 해도 되지만 냉탕 같은 경우는 깊어서 그렇게 합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무심코 어떤 현상을 관찰했습니다. 원래 보통 보면 규모가 작은 목욕탕은 그렇지 않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사우나 같으면 대개 냉탕이 온탕보다 3배 내지 4배 정도 규모가 큽니다. 제가 대체적으로 전국 다양한 곳에 일이라든지 아니면 여행 또는 순례를 할 때 경험해보면 그렇습니다. 제가 냉탕에서 발견한 건 물이 빠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거의 온탕과 냉탕을 동시에 빼곤 합니다. 온탕은 당연히 방금 말씀을 드린 것처럼 규모가 작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이걸 보고 깊은 울림을 느꼈습니다. 처음엔 특별히 차이가 나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근데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처럼 온탕에 있는 물은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는 것처럼 물결이 요동치듯 흔들림이 있습니다. 파도치는 바다를 연상하시면 될 겁니다. 근데 냉탕에 있는 물은 정말 조금의 미동도 없이 아주 고요하게 물이 배수가 되는지도 모를 정도로 잔잔합니다. 그런데다가 사우나 내부 천장에는 물방울이 크게 맺혀 있다가 이게 탕에 낙하를 하는 경우는 많이 보셨을 겁니다. 이 방울이 냉탕에 떨어지면 그냥 잔물결이 고요히 잔잔하게 퍼져나가는 모습이 연출됩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고 순간 묵상이 된 것입니다.
양쪽 탕 속에 있는 물의 양이 사람의 그릇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릇은 그릇인데 이 물의 속성은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해봤습니다. 그럼 이렇게 비유를 해볼 수 있겠습니다. 냉탕에 있는 물은 하느님의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온탕에 있는 물은 물론 하느님의 속성을 가지고는 있긴 하지만 조금 적게 가진 사람처럼 대입해 묵상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을 배수하기 위해 마개를 뺀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하는 게 관건입니다. 이건 우리가 살면서 생각지도 못한 사고 아니면 사건입니다.
좀 더 의미를 확장해서는 인생사에 있어서 고난과 시련 같은 것처럼 대입하면 좋을 것입니다. 사물을 보고 묵상한 것이지만 확실히 사람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대인과 소인배의 차이입니다. 신앙인도 그렇습니다. 대인과 같은 신앙인이 있고 소인배와 같은 신앙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가 중요한 게 아닐 것입니다. 이래도 한평생 저래도 한평생 살다 가는 인생인데 이왕이면 대인과 같은 삶을 살다가 가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같은 신앙인에게는 이 한평생 생이 다 끝나면 정말 말 그대로 생이 그걸로 끝이면 이것도 별 의미가 없다면 없을 수 있는데 실제 우리 신앙인에게는 또 다른 생이 펼쳐지기 때문에 그래서 더더욱 이게 중요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대인과 같은 삶을 사는 게 바로 어떤 삶이 되겠습니까? 바로 신앙적인 관점으로 말하면 의인과 같은 삶을 사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굳이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알아주면 알아주는 대로 괜찮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대인이라면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되어야 그래야 대인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남의 평가에 의해 대인인 것처럼 행동을 하는 그 정도의 마음이라면 그건 대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걸 초월해야 진짜 대인 중에 대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그냥 대인이라고 하지 않고 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많은 성인이 있습니다. 성인이 되는 기준은 많이 있습니다. 세분해보면 다양할 수 있습니다. 큰 틀에서 보면 일정한 기준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성인들의 삶을 이야기한 책에서 느낀 점이 있다면 그분들은 어떻게 해서 성인이 된 것인가를 많이 나름 분석해봤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처럼은 못 살아도 그래도 흉내는 내보려고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제가 묵상한 것은 이렇습니다. 성인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다 성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엔 우리와 같은 범인이었습니다. 그럼 평범한 범인이 어떻게 해서 성인이 된 것인지 단 몇 줄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아주 기본적이고 원론적이고 공통적인 점이 있습니다. 그분들도 죄를 짓고 실수를 해 넘어지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계속 그런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와 똑같습니다. 그다음이 다릅니다. 어떤 것일까요? 어느 시점부터는 계속 이와 같은 게 반복이 되지 않고 차차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범인에서 성인으로 변화가 차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어떤 마음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딸이라는 자녀가 됐는데 그냥 형식적인 아들, 딸로만 살다가 이름 없는 들에 핀 꽃처럼 이 세상에 왔다 허무하게 지는 꽃이 되어 살다가 갈 것이냐 아니면 이왕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을 받았으면 좀 더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맞게 살다가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마음가짐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변함없이 가지면서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하다 보면 자기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어느듯 범인에서 성인으로 변화가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성인들의 삶을 잘 살펴보면 그들은 또한 성인이 되고자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떻게 삶을 살려고 노력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본 성인들의 삶은 그것도 물론 없지 않아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그런 고상한 것을 지향하기보다는 그저 하루 하루 주어진 삶 속에서 하루 하루를 충실하게 살려고 하는 소박한 마음이 밑바탕에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큰 목표를 세우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게 해서 살게 되면 그 목표치와 많이 떨어지게 되면 실망을 하거나 아니면 좌절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더 성인과 같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보다는 하루 하루 열심히 살다보면 그 삶 자체를 충실하게 내실을 기하면 그게 한 사람의 일생이 되고 그 일생이 바로 알찬 삶이 돼 우리가 말하는 성인의 삶을 살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다가 하느님 품으로 가면 좋을지는 당연한 결론이 나옵니다. 성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왕 한평생 사는 인생 그저 평범한 한 범인으로 살다가 가는 소인배의 삶보다는 대인으로 살다가 가면 좋겠다는 묵상을 해봅니다.
사실 이런 대인은 형식상은 대인이지만 실제는 성인과 거의 같은 급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해서 다 대인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대인처럼 살려고는 노력을 하면 좋을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느님 눈에만 드는 사람이 되면 그 이상 더 좋은 게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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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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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4. 연중 제1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1,29-39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 ‘하루’라는 시간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내셨는지 그 단면을 보게 됩니다. 모두가 쉬는 안식일에도 그분은 당신께서 하셔야 할 ‘하느님의 일’을 멈추지 않으셨지요. 안식일 오전에 회당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여하시고 난 다음, 곧바로 당신 제자인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십니다. 시몬의 장모가 중병에 걸려 누워있다는 소식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그녀는 병에서 치유되어 주님을 사랑으로 섬기는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한편, 해가 지고 안식일이 끝나자 안식일 규정을 어길까 두려워 종교 지도자들의 눈치를 보던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듭니다. 질병을 고쳐달라고, 마귀를 쫓아달라고 그분께 청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시느라 밤 늦게 겨우 잠자리에 드신 예수님은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캄캄한 새벽 일찍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고을에도 말씀과 기적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힘든 일정을 3년 내내 계속하실 수 있었던 것은 당신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그분과 일치하기 위해 노력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노력은 크게 ‘기도’와 ‘사랑의 실천’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동시에 진행되었지요.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따로 시간을 내어 외딴 곳을 찾아 하느님께 기도하심으로써, 당신 뜻을 하느님 뜻과 일치시키셨습니다. 또한 복음선포가 그저 말로 그치거나 관념 속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실천’에 최선을 다 하셨습니다. 당신을 찾아오는 이들을 물리치지 않으시는 모습에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만나시고 따뜻하게 돌보시는 모습에서 그런 예수님의 마음이 드러나지요. 이처럼 예수님은 기도와 사랑의 실천을 당신 삶의 두 ‘중심축’으로 삼고 걸으셨기에, 한쪽 방향으로 기울어져 길을 잃거나 넘어지지 않고 당신께서 걸으셔야 할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으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기도와 사랑의 실천을 내 삶의 중심축으로 삼고 주님의 뒤를 따라 걸어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사랑을 실천해도 주님께 대한 믿음과 그분 뜻을 따르려는 순명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금새 균형을 잃고 넘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나의 신앙생활은 보람을 느끼지 못해 공허함에 빠집니다. 주님을 믿고 그분 말씀을 듣지 않으면 내가 실천한 사랑은 의미를 찾지 못해 길을 잃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기도하여 헤아린 하느님 뜻을 실천해야겠습니다. 열심히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만난 하느님을 내 마음 속 깊이 모셔야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내 삶 속에서 ‘하느님 나라’가 조금씩 참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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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4. 연중 제1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시몬의 장모를 시작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저녁이 되고 밤이 늦어져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급기야 기도하러 새벽에 잠깐 자리를 비우셨을 때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들은 치유와 구마로 하느님 나라를 경험했기에
다른 사람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게
초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자기들 곁에 머무시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이 원해도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지는 않으십니다.
그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복음을 듣고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찾아
또다른 고을로 발길을 옮기십니다.
어느 특정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당신을 원하기만 하면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마음이 있으십니다.
그렇게 온 세상이 하느님 나라가 되는 것을
꿈꾸십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 우리도 초대받았습니다.
우리가 부족하기에
하느님께 다가갈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부족하기에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기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우리의 아픈 몸과 마음을 치유해 주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 초대에 우리도 기꺼이 응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닌 것처럼
우리도 어려움의 순간에
하느님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얼굴을 향하기만 하면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신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우리를 맞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초대를 발견하고
기쁨으로 그 초대에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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