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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1 오늘 묵상글 등

260115. 묵상글 ( 연중 제1주간 목요일. - 하늘이 두렵지 않은 나?. - 참된 믿음. 등 )

작성자김 루도비꼬|작성시간26.01.15|조회수70 목록 댓글 0

260115. 묵상글 ( 연중 제1주간 목요일. - 하늘이 두렵지 않은 나?. - 참된 믿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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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5. 연중 제1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15 03:17

 

- 하늘이 두렵지 않은 나?

 

 

 

“주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우리를 치셨을까?

실로에서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옵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합시다.”

 

오늘 사무엘기를 읽은 우리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계약 궤를 모신 이스라엘이 어떻게 전투에서 질 수 있는지.

첫 번째 전투에서 진 것은 계약 궤가 없었기에 졌을지라도

계약 궤와 함께 싸운 전투에서는 승리해야 되는 것 아닐까요?

 

오늘 독서 사무엘기 4장만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장에서 엘리의 아들들이 한 짓을 보면

그것은 백성에게 아주 못된 짓을 하였을 뿐 아니라

하늘이 도무지 무섭지 않은 자들의 짓거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교만은 안하무인(眼下無人정도가 아니라

안하무신(眼下無神)이었으며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사무엘기 2장은 이런 엘리의 아들들에 대해 이렇게 기술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한 자들로서 주님을 알아 모시지 않았고,

백성과 관련된 사제들의 규정도 무시하였다.”

 

그랬기에 첫 번째 전투에서 계약의 궤 없이 나가 전투하다가 패했을 뿐 아니라,

패하고 난 뒤에도 하느님을 두려워하지도 섬기지도 모시지도 않았던 죄에 대한

통렬한 뉘우침이 없이 두 번째 전투에 계약의 궤를 모시고 나간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계약의 궤를 모신 것은 진정 주님을 중심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 이용해 먹으려는 것에 불과하고

비 올 땐 우산을 찾았다가 비 그치면 버리거나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거였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제가 두렵습니다.

저도 이들처럼 하늘이 두렵지 않은 나인 것은 아닌지 두려운 것입니다.

 

제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비를 너무 믿어서일까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내 중심이 아니라 필요가 내 중심이고,

필요할 땐 주님을 이용해 먹고 필요가 없으면 내버리지는 않는지,

그 정도는 아니어도 등한시하지는 않는지 심히 두려워하며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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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5.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믿음

“진실함, 겸손함, 간절함” 

 

 

 

날마다 배울 것은 차고 넘칩니다. 배움과 공부에도 분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흡사 국내외 변화무쌍한 역동적 상황이 살아 있는 성경을 대하는 듯 합니다. 참으로 냉철한 믿음의 눈, 지혜의 눈으로 직시하며 공부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공부중의 공부가 믿음 공부입니다. 믿음 역시 공부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끊임없이 깊어지고 성장하고 성숙하는 믿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옛 현자의 지혜도 믿음 공부에 좋은 참고가 됩니다.

 

“공부란 높은 이상을, 누구나 접하는 흔한 일상에 겹치는 고된 과정이다.”<다산>

“아침저녁으로 배우고 익혀야 하며 삼가고 공경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유지하면서 나태해지지 않는 것을 배움이라 한다.”<관자>

 

믿음의 배움과 공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오늘 요셉수도원은 성 베네딕도의 애제자들이었던 성 마오로와 성 쁠라치도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전설적인 분들이지만 순종의 믿음으로 길이 회자되는 분들입니다. 이 수도성인들은 물론 오늘 말씀도 참된 믿음 공부에 좋은 참고가 됩니다. 참된 믿음이란 진실하고 겸손하고 간절한 믿음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의 자세가,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자세가, 참된 믿음의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와 사무엘상권의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처절한 패배를 겪는 이스라엘이 믿음에서 참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나병환자는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하고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찾았고 치유를 갈망합니다. 이미 이런 삶의 자세에는 회개가 전제되어 있는 지극히 순수한 마음입니다. 

 

순수한 마음에 순수한 믿음입니다. 그는 겸손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듯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예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기도한적이 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는 깨끗하게 치유됩니다. 나병환자의 참된 믿음에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 따뜻한 스킨십, 능력있는 말씀 셋이 하나로 응답되어 발생한 치유의 기적입니다. 나병환자의 치유후 예수님은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시니 그의 대처방식이 참 좋은 지혜의 가르침이 됩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지극히 쿨한 냉철한 지시사항입니다. 기존의 율법을 존중하면서 그 절차에 따른후 원래의 공동체에 다시 소속되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은 추호도 인기 스타가 될 마음이 없거니와 대중의 인기에 휘말릴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팬들이 아니라 참된 믿음의 제자들입니다. 

 

치유받은 나병환자는 곧 복음 선포자로 돌변하고 예수님은 대중에게 드러나자 즉시 외딴곳을 찾아 머무시니 이 또한 분별과 절제의 지혜입니다. 참된 믿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분별과 절제의 지혜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드니 이건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현실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사무엘 상권의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의 믿음은 너무나 허술하고 취약합니다. 필리스티아인들에 의한 2차에 걸친 무참한 패배는 그대로 자업자득입니다. 하느님 앞에는 참되고 겸손한 믿음이 있을뿐 일체의 기득권도 없음을 몰랐습니다. 이들은 경솔했고 교만했으며 하느님을 조종하려 했습니다. 

 

주님의 계약궤가 특별한 권능을 지닌 듯 착각했으니 그대로 마술적 미신적 행위였습니다. 참된 믿음이, 진실하고 겸손하고 간절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을 때 결코 주님의 계약궤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마침내 이스라엘군은 대패하여 보병이 삼만이나 쓰러졌고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파느하스도 죽었으니 그대로 인과응보, 엘리 집안의 죄악으로 인한 하느님의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내용적으로 볼 때 이런 부실한 믿음의 이스라엘이라면 하느님께서도 속수무책 도울 수 없으니 도저히 이스라엘이 이길수 없는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우리가 진실하고 겸손하고 간절한 믿음으로 매사 최선을 다할 때 주님께서도 치유와 더불어 영적승리의 삶으로 화답해 주십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시며 영육의 치유와 더불어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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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5. 연중 제1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조화로운 선!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성경은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시작부터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야기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한처음에

조화로운 선.

2026년 1월 13일 화요일 ( 2026년 1월 14일 수요일 ???)

체로키족 출신 신학자이며 CAC 객원 교수인 랜디 우들리 목사는, 창조의 선함이 다양성과 균형, 그리고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조화 안에 드러난다고 성찰합니다:

창조주께서 '좋다'고 선언하실 때,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참되고 올바른 판단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이 선하고, 바르고, 질서 안에 있으며, 그분의 뜻대로 되어 있음을 선포하심으로써, 땅 위의 정상적 상태가 마련됩니다. '좋음'은 이제 한 번으로 영원히, 지상 삶의 기준이 됩니다….

창조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모든 행위와 그 결과는 구별되어 드러납니다. 어떤 피조물도 다른 것과 동일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로 변하지 않습니다. 각 피조물은 고유한 모습으로, 제각기 특별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은 전체와 함께할 때에만 온전하며, 서로 관계 안에서 존재하고 또 되어 갑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은총의 조화와 균형의 본질입니다.

하늘의 질서는 땅의 균형을 이룹니다. 저녁의 어스름은 모든 피조물이 안식에 들도록 부드럽게 이끌고, 고요함은 세상에 새로움과 시원한 평화를 가져옵니다. 낮의 도래는 새로운 생명과 기회를 주며, 따스한 품처럼 식물과 동물, 인간을 감싸줍니다. 달은 모든 물을 다스리고, 태양은 계절을 인도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서로와, 그리고 창조주와 함께 조화와 균형 안에 있습니다. 창조의 첫 주간은 땅 위에 펼쳐진 ‘샬롬’의 장엄한 그림입니다.

하느님의 샬롬, 곧 온전한 하느님의 평화와 조화는 모든 피조물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통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창조주께서 아름답게 설계하시고 빚어내신 작품이며, 각 부분은 창조주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요소는 서로 관계 안에서 작용하며, 공통된 기원으로 이어져 우주 안에서 함께 자리합니다. 창조가 완성된 후,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멈추셨습니다. 그것은 되돌아보며 의심하는 멈춤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기뻐하며 축하하는 의도적인 멈춤이었습니다. 호주 원주민 무지개 장로들은 창조주께서 일곱째 날에 노래하셨다고 전합니다. 이는 공동체가 모여 오직 축하만을 우선으로 삼는 잔치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 축제는 모든 것이 본래 뜻대로 조화롭게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하느님의 ‘샬롬 창조 잔치’입니다. 세계 곳곳의 여러 원주민들도 이 이야기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전하며, 이 멈춤을 '조화의 길'로 인식합니다.

하느님의 샬롬(평화와 조화)은 결코 창조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가장 초기 기록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창조는 샬롬을 이해하는 데 중심이 됩니다. 창조(하느님께서 이루시고 지금도 날마다 계속하시는 일)와 샬롬의 실천(우리가 날마다 살아내야 할 일)은 떼려야 뗄 수 없이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하느님의 샬롬의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매일 아침 고요한 묵상을 위해 뒷마루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무와 풀들을 바라보던 중, 문득 모든 나뭇잎과 모든 풀잎이 살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고, 오직 생명의 창조주께서만 생명과 사랑의 은총을 주십니다.

—Ray P.

References

Randy S. Woodley, Shalom and the Community of Creation: An Indigenous Visio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2012), 41, 42–4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ergey Kvint, untitled (detail), 2023,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숲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한 줄기 푸른 새싹은, 창조주께서 심어주신 땅의 생성적 상상력이 고요히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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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존재적 가난!

 

 

 

나병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두려운 병으로 여겨졌습니다. 랍비들은 이를 "하느님의 특별한 재앙"이자 "살아 있는 죽음"이라 불렀습니다. 다른 질병보다도 죄에 대한 벌로 인식되었고, 마르코 복음은 이를 악령의 사로잡힘으로까지 묘사합니다. 혐오스러운 외형 때문에 이러한 인식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나병을 치유한다는 것은 거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나병 환자는 율법에 따라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윗입술을 가린 채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쳐야 했습니다. 사회적·종교적·영적 차원에서 완전히 배제된 존재였던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직접 접촉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치유가 아니라, 공동체와의 화해, 인간 존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이 문둥이 같은 놈"이라는 욕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요?! 이는 육체적 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인정받지 못하며, 철저히 배제된 경험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여전히 '나병 환자들'로 가득합니다. 본당 안에도, 가정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나병환자란 손대기 꺼려지고, 치유 불가능하며, 소외된 이들을 뜻합니다. 이들은 사랑과 치유의 모든 시도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의료적 돌봄이나 치유의 기도조차 그들을 온전히 치유하지 못합니다. 나병환자는 '만져져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취약하게 만들고, 심지어 나병에 노출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단순히 나병에 걸릴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나병환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들을 만지기 시작하셨고, 곧 당신 자신이 버림받고, 소외되고, 멸시받는 존재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봉사에서 시작하여, 취약성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연대에 이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를 돕거나 당신 자신을 위험에 빠뜨림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와 하나가 되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요한 1,14). 우리의 연약함을 그대로 취하시고 우리와 같아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필리 2,7), 죄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아지셨습니다(히브 2,17; 4,15). "그분은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린 8,9).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시어,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연대는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단순히 돕는 것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하나가 됨으로써 자유롭게 됩니다. 사실 [가난]은 어쩌면 우리 존재의 본질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어떤 면에서건 연약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존재적 가난"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 때가 "내" 주변 사람들, 특히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시작하는 때이고, 그때 비로소 우리의 연약함을 취하신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강함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연약함을 강조하는 것이 어불성설인 듯 싶지만, 사실은 이 진리를 터득하는 길이 우리 삶을 완성의 길로 이끌어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어른은 이런 연약함을 포용할 수 있은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허허~" 하며 우리의 인간의 모든 약점을 사랑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자비와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온 세상 역사의 주도권을 쥐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아픔을 겪는 분들이 저에게 안수를 청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들에게 안수를 해 드리면서 저의 이 연약한 손길이 성령의 치유와 위로의 손길이 되어 달라고 청합니다.

우리는 힘없는 이들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나약함을 함께 나눔으로써 힘을 실어 주는 것입니다(2코린 13,4). 우리는 억눌린 이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의 발자취를 따름으로써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 가정을, 우리 사회를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의 육화가 제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 주소서.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마더 데레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저에게도 가르쳐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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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5.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지난 주 금요일 <복음>과 같습니다. 그때는 병행구절인 <루카복음>이었는데, 주님공현의 측면에서 함께 보았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그때 우리는 이 나병환자의 치유 사건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2열왕 5,1-27)을 완성하고, 모세가 본 호렙산의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처럼(탈출 3,2),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자신은 불결해지지 않으시면서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신성을 통해 예수님께서 당신이 구원자임심을 드러내는 공현사건임을 보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단순한 치유 받은 한 나병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치유 받은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나를 치유하신 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아는 일이고, ‘그분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나병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의 권능의 행사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기에, ‘오로지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입니다. 곧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의탁’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바람에 대해 하느님께서 응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에 대해 우리가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문드러지고 부스럼투성이인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바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을 하느님을 통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로 자신을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이 제게서 이루어지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주님!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바를 하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을 저도 바라게 하소서.

당신이 하시고자 한 바를 저도 하게 하소서.

저를 만지시어 고치소서.

저의 바람과 하는 일을 깨끗하게 하시어 새롭게 하소서.

저를 새롭게 하시고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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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5.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특강 중에 ‘대림은 말씀을 준비하는 시기’라는 주제가 있었습니다. 성서는 사실(fact)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true)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은 보는 관점에서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사진을 보면 전쟁의 참상이 느껴집니다. 반면에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물을 주는 사진을 보면 상처를 입은 사람을 도와주는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진은 총을 멘 사람이 상처를 입은 사람을 부축하고 있었고, 다른 군인이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물을 주는 사진이었습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사실은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사실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진실이 가려질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는 율법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님을 보았고,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단죄하였습니다. 사실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안식일을 위해서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진실의 관점에서 보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성서는 과학책이 아닙니다. 성서는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전하는 책입니다.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 한 민족이 왕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었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입니다. 단군 신화의 곰과 호랑이 역시 사실 여부를 따지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뿌리와 가치관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설명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 의미를 발견하라는 초대입니다. 신화의 이야기는 연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신화를 통해서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성서의 이야기에서 과학적인 원리를 찾으려 한다면 지동설을 주장했던 과학자를 단죄했던 오류를 다시 반복하는 것입니다. 과학이 존재 이유를 찾는다면 성서는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음악이 소리로 마음을 흔들고, 미술이 색으로 말하듯, 성서는 이야기와 상징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성서는 성령의 감도를 받은 이들이 자기 시대의 언어와 문화, 사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래된 말씀을 오늘의 삶에 아무 고민 없이 그대로 적용하려 하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우리를 옥죄게 됩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어떤 이들은 성서를 근거로 노예제를 정당화했습니다. 문자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마음, 곧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살리는 진실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해석의 기준은 교회와 교도권의 지침을 따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해석의 중심을 이미 분명히 제시하셨습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하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규칙이 사람 위에 군림하는 순간, 그 규칙은 생명을 잃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세 편 만들어졌습니다. ‘명량, 한산, 노량’입니다. 같은 장군, 같은 역사이지만 영화마다 이순신의 얼굴은 다릅니다. 어떤 영화에서는 결단의 장군으로, 어떤 영화에서는 고뇌하는 인간으로, 또 어떤 영화에서는 조용히 책임을 짊어진 지도자로 그려집니다.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전하는 복음서도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네 복음서는 서로 다른 시선으로 같은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교부들은 이를 상징으로 설명했습니다. 마태오는 사람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마르코는 사자로, 죽음을 이기신 왕의 권능을 전합니다. 루카는 소로,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신 희생을 강조합니다. 요한은 독수리로, 가장 높은 곳에서 진리를 꿰뚫어 보는 신비를 노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권능만을 기대하는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나를 살려 주시는 예수님입니까?

 

이러한 눈으로 오늘의 말씀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계약의 궤 안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사람을 쓰러뜨리는 힘이 아니라,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은 궤를 앞세웠지만 패배합니다. 하느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복음에서 예수님의 권능은 한 사람의 삶을 살려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 한마디에 병든 몸뿐 아니라, 고립되었던 마음과 무너졌던 삶이 함께 치유됩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한 사람만이라도 규칙이 아니라 자비로, 판단이 아니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권능이 머무는 곳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 안에는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진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사실에 머무르지 않고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소서. 규범에 갇히지 않고 사랑으로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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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5. 연중 제1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마르 1,40–45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어 손을 대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한다. 깨끗해져라.”

초대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병보다 먼저

인간의 두려움을 만지셨다.”

치유는 명령만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치유는 접촉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율법이 금지한 손길이었지만,

그 손길 안에서 사람은

두려움에서 풀려나

다시 공동체로 돌아옵니다.

아낌 주간의 목요일,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안전한 거리에서 선을 말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 손을 내미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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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5. 연중 제1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생활묵상 : 부끄럼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우리는 살면서 부끄럼을 경험하며 살 때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는 단순히 부끄럽기만 할 뿐이지 이게 세상에서는 죄가 되지도 않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시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엄밀한 의미에서는 죄는 아니지만 부끄러움을 알면 죄를 덜 짓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주 미묘한 느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미묘한 차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의 차이는 실로 신앙 안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이런 걸 한번 묵상해보는 것도 신앙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어 한번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것도 제가 한 달 동안 목욕탕 청소를 하면서 느낀 경험입니다. 다시는 하고는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한 달만 했는데도 참으로 느낀 인생의 교훈 아닌 교훈 같은 걸 경험하고 배워서 좋게 생각하면 좋은 경험을 했긴 했습니다. 

 

다른 건 다 제가 하는데 여탕 화장실 청소는 주인 아주머니께서 하십니다. 아주머니가 저를 위해 배려해 주신 것입니다. 배려를 하고 싶어서 배려를 한 게 아니고 같은 여자 입장에서 여자의 치부를 남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정도는 남자라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하지만 충분한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이건 아주머니의 생각이라고 제가 추측할 따름입니다. 정황상 보면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분명 남자와 여자는 성별도 다르기 때문에 어떤 특수성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도무지 아직 이해가 안 되는 그런 부분도 있습니다. 어떤 건 정말 궁금한 것도 있습니다. 그걸 안다고 해서 또 모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지만 제가 만약 아내가 있다면 바로 물어보고 싶을 정도이니까요? 

 

지금 제가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내용도 청소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청소는 안 해도 혹시라도 점검은 다 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이 하다 보니 주인 아주머니가 못 하실 때도 있긴 합니다. 그럴 경우는 제가 합니다. 또 공식적으로 아주머니가 청소는 아니더라도 변기가 막히면 그건 부끄럽지만 부탁을 합니다. 조금 지저분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좋게만 생각해보면 정말 유익이 되는 내용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땐 약간은 불쾌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너번 막힌 변기를 뚫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기술 정도만 요할 정도입니다. 소위 말하는 '뚤어뻥' 같은 걸로 뚫습니다. 이게 실제 하는 방법은 간단한데 이것도 약간의 요령이 필요합니다. 그냥 무식하게 푹푹 눌러서 될 때도 있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 머리를 잘 사용해야 뚫을 수 있습니다. 보통 보면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주인 아주머니께서 퇴근하실 때 변기가 막혔으니 좀 부탁한다고 요구하십니다. 그 말을 들으면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또 그것도 넓게 생각하면 청소하는 사람이 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에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 번은 분명히 주인 아주머니께서 분명 청소를 하기 때문에 아실 텐데 그냥 아무런 말도 않고 모르는 척하고 퇴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로서도 감당이 안 될 정도의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순서는 없지만 제일 먼저 파우더 룸에 있는 수건을 정리한 후에 화장실 체크를 하고 탕 청소를 하는 방식으로 청소를 합니다. 화장실을 점검을 하는데 변기가 막혀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사실 살면서 군에서 해보고 또 학생 때 하숙집에서 여자 화장실 같은 곳이나 여자 후배 자취방 같은 곳에서 여자들이 할 수 없는 그런 경우 아는 사람 집에서 해결해 준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완전 생판 모르는 사람이 한 걸 뒷수습을 한 건 처음입니다. 이걸 하면서 두 가지 배운 게 있습니다. 원래는 이걸 분리해서 언제 한번 공유를 하려고 했는데 이왕 나온김에 내용이 길고 좋은 내용이 아니라서 이번에 한꺼번에 다 설명을 하겠습니다. 

 

첫번째 배운 교훈은 일어난 건 다 똑같은 상황인데 어떤 경우는 조금 불쾌만 할 뿐이지 짜증은 나지 않는데 어떤 경우는 하면서도 짜증이 폭발할 것 같은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사람이 같은 현상이 일어났는데도 말입니다. 먼저는 짜증을 낼 수가 없는 상황의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다 용변을 보는 건 생리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단순 그 생리현상 때문에 일어난 것은 그렇게 불쾌하지 않습니다. 약간은 어어억 하면서 얼굴이 굳어지긴 해도 조금만 참으면 남자가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변비가 있었는지 크기도 크고 딱딱하기 때문에 막혔던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입니다. 이건 당연히 사람이면 그럴 수 있다고 인정이 되고 이해가 되기 때문에 짜증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근데 다음 경우는 정말 화가 나긴 납니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고 짜증은 나죠. 분명히 화장실에 경고 문구가 있습니다. 변기가 막힐 수 있으니 뭐 뭐 뭐 넣지 말라고 말입니다. 

 

근데 이걸 무시하고 해서 막힌 경우는 정말 짜증이 납니다. 제가 좋은 사람이 아님에도 욕은 하지 않았습니다. 미친 미친 이 두 글자만 반복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결과가 동일해도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을 해 볼 게 무엇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결과는 동일하지만 하나는 그렇게 불쾌하지 않고 그냥 이해를 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는 그렇지 못 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저도 생각처럼은 되지는 않지만 노력을 해보려고 합니다. 뭐냐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비단 신앙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사례를 적용하면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뭔가 좋은 일이라든지 아니면 본당에서 봉사를 할 때도 그렇고 그런 일을 하면서도 성가시고 짜증나게 하는 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례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이와 같은 경우를 적용해보면 좋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가능하면 그 사람 입장에서 그가 설령 이해를 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고 가정을 해도 그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는가 하고 이처럼 생각을 달리 하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화가 날 일이면 화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실제 마음이 넓어야 하는 것처럼 해아 한다기보다는 그보다 더 선결과제가 그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게 이해가 될 때 대인의 면모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걸 대인처럼 생각하기엔 어렵습니다. 

 

두 번째 느끼고 배운 점이 있습니다. 묵상 제목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며칠 후에 한 아주머니가 탕 출입문 입구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냥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저에게 "혹시 청소하시는 분이냐"고 해서 "제가 그렇다"고 말하니 정말 부끄럽지만 며칠 전에 화장실에 변기를 막히게 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얼굴을 정면으로 바로 보지 못하고 숙이며 정말 미안하고 죄송했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저라도 그 입장이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고 순간 그냥 누가 했는지도 모르는데 왜 며칠 지나서 그걸 자신이 했다고 밝히지 하고 약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냥 "괜찮습니다. 뭐 살다가 보면 그럴 수도 있고 또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하는 그런 생리현상이라 그럴 수도 있죠" 하면서 제가 "왜 그걸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누가 했는지 모르면 그냥 넘어가시면 되시지 왜 그렇게 하세요?" 하니 다음날 변기를 뚫은 사람이 주인 아주머니가 아니고 제가 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남자라도 말 안 하면 모르긴 하지만 아주머니 마음속에는 그때 일어난 상황이 보통의 상황과도 달랐기 때문에 물론 자신이 했다는 걸 제가 모르지만 그래도 자기의 흉물을 모르는 남자가 뒷처리를 했다고 생각하니 최소한의 부끄러움 같은 것이 있었고 이게 자꾸 신경이 쓰여 안 되겠다 싶어 그냥 부끄럽지만 "미안하다"고 해야 조금 자기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제과점에 들러 고급샌드위치랑 음료를 사서 주시면서 미안함을 표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 아이고! 괜찮습니다" 하고 또 "정 그러하시다면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하고 저는 "그때 그 상황 다 잊었으니 마음 편하게 가지시고 편히 돌아가세요"라고 말씀드리고 헤어졌습니다. 

 

저는 사실 이 상황을 생각하며 청소하면서 가슴 한켠에는 미소가 스며들어왔습니다. 그 아주머니께서 제가 그런 걸 처리했다는 걸 아시고 난 후에 마음속에 가지셨던 부끄러움 같은 걸 생각해보니 마음이 정말 순결하시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 아주머니의 용기도 그렇고 사람이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도 마음이 순결하지 않으면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아주머니라 한편으로는 감사했습니다. 이걸 통해서 제가 묵상한 것은 우리가 고해를 하는 그 상황입니다. 비유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느낌만 이해를 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제가 마치 사제나 아니면 예수님은 아니지만 고해성사에 이 상황을 매치시켜봤습니다. 하느님도 그러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약 죄를 짓고 양심이 깨끗한 사람이면 고백을 합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한편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부끄럽다고 안 하는 것과 부끄러움을 알고 그걸 무릅쓰고 하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그 아주머니께서는 부끄러움을 아셨기에 저한테 최소한의 그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야기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이건 제 상상입니다. "청소하는 남자분이 기분 아주 안 좋았을 거" 라며 어쩌면 그게 오랜 시간 트라우마로 작용할 것 같으니 그러면 너무 안 될 것 같아 그렇게 하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냥 부끄럽다고 고백을 하지 않고 그냥 쌩까는 식으로 숨기면, 숨기긴 하지만 실제는 그게 마치 앙금처럼 가라앉아 언제 슬금슬금 올라올지 모르니 언제나 개운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차라리 그럴바에야 순간은 부끄럽지만 깨끗하게 마음을 돈독하게 먹고 고백하면 정신과 영혼에 있어서도 더 홀가분하지 않을까 하는 묵상을 해 본 것입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과의 차이는 우리가 봤을 땐 단순한 이 사실만 놓고 봤을 땐 별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난 먼 시점에서 역으로 되돌아보게 되면 그때 제대로 고백하는 건데 하고 후회를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현명한 방법인지는 이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면 그 해답은 스스로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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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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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5. 연중 제1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1,40-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오늘 제1독서인 사무엘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필리스티아인들과 벌인 두번의 전투에서 계속 패했습니다. 심지어 두번째 패배는 거의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한 수준이었지요. 그 결과 수만명의 목숨이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던 ‘계약의 궤’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패배라는 결과보다 더 아팠던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이었습니다. 수만명이나 되는 당신 백성들이 죽어가는데도, 그들이 당신과 맺은 언약의 징표인 ‘계약의 궤’를 적들이 빼앗아가는데도, 하느님은 그런 상황을 그저 지켜보시기만 할 뿐 나서지 않으셨던 겁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거두신 걸까요?

 

자비와 신의가 넘치시는 하느님이 그러실 리가 없지요. 사랑을 거둔 건 하느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사랑해야 할 ‘주님’으로 섬기지 않고, 자기들이 필요할 때 쓰는 ‘도구’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했다면 애초에 전쟁을 벌이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뜻을 물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혹시 그분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준비하신 다른 계획은 없는지를 말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제멋대로 전쟁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계약의 궤를 전장에 투입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싸우시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 교만과 독선으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결과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잃고만 겁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에게서도 그런 모습이 드러납니다. 나병이 낫기 전에 그는 주님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걸 그분께 청할 때도 “~하게 해 주십시오”라며 주도권을 자신이 쥐려고 하지 않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요. 꼭 자신이 바라는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자신에게는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순명과 의탁으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라고 청하셨던 예수님처럼, 주님을 온전히 믿고 그분께 자신을 의탁하며 그분의 뜻에 순명하고자 했던 겁니다. 그 결과 주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을 입어 나병이 낫게 되지요.

 

그런 마음가짐을 끝까지 잘 유지했다면 참 좋았을텐데,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입고 나자 그만 마음이 교만해졌나봅니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나병에서 나은 것과 관련하여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가 겪은 일을 널리 알리고 퍼뜨렸지요. 물론 주님께 해악을 끼치려는 나쁜 의도로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자신에게 큰 은총을 베풀어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에, 주님의 놀라운 업적이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그분이 더 큰 영광을 받으시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랬겠지요. 그러나 주님의 뜻을 거슬렀다면 그건 이미 선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앞세운다면 그건 배려가 아니라 교만과 독선일 뿐이지요. 그 결과 베드로처럼 주님의 앞을 가로막는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주님 말씀을 잘 듣고 그분 뜻에 철저히 순명해야겠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주님과 나 모두가 참으로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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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5. 연중 제1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예수님께 치유를 청합니다.
 나병은 구약에서
 인간의 힘으로 치유할 수 없는 병이라 생각했기에
 나병 환자의 이 청원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비록 스승님이라고 불렀지만
 마음으로는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청원의 응답을 얻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다고 해서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기다려온 것처럼
 그도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가 병으로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점점 더 커졌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기만 하면
 자기가 겪고 있는 육체적, 사회적 고통에서 벗어나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붙잡고 살아왔습니다.
 그 희망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믿음의 고백으로 표현되었고
 결국 그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힘에 부친 일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절망하기 쉽습니다.
 절망을 넘어 때로는 자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시기에
 어려움이 클수록 우리의 희망도 커질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 자책하기보다는
 하느님을 보면서 희망을 키워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그 어려움을 딛고 나아갈
 힘과 지혜를 줄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오늘 하루도 희망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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