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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묵상글(강론글) 1차(23:30), 2차(05:30), 3차(06:45)

작성자김 루도비꼬|작성시간26.06.06|조회수5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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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묵상글(강론글)

1차(23:30), 2차(05:30), 3차(06:45)

 

7일. 묵상글, 6일 23시 3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을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 곳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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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7일 일요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날이다. 
이날 교회는 예수님께서 성목요일에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과, 
사제가 거행하는 성체성사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현존을 기념하고 묵상한다. 
보편 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목요일에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의무 축일로 
지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목적 배려로 주일로 옮겨 지낸다.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몰랐던 양식을 먹게 해주셨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8,2-3.14ㄴ-16ㄱ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2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4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15 그분은 불 뱀과 전갈이 있는 크고 무서운 광야,
물 없이 메마른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시고,
너희를 위하여 차돌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신 분이시다.
16 또 그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이 몰랐던 만나를 너희가 먹게 해 주신 분이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0,16-17

 

형제 여러분, 16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17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1-58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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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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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6,51–58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그리고 이어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듣는 이들에게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깊이

당신 자신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성 예로니모는

말씀을 사랑한 교부였지만

그 말씀은 결코 글자에만 머물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단지 생명을 설명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생명의 양식이심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울 뿐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 모셔야 합니다.

신앙은 멀리서 존경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실제로 내 안에 머물게 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 하신 말씀은

매우 깊습니다.

성체성사는 단지 외적인 종교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상호 내주,

곧 주님이 내 안에 사시고

내가 주님 안에 사는 신비를 드러냅니다.

예로니모는

주님의 말씀과 성체의 은총이

함께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킨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주님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내 안에 다른 생명의 원리가 들어오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체는

습관이 아니라 변화를 요구합니다.

오늘 복음은

영적 열매 성월의 시작과도 깊이 이어집니다.

성실은

이 생명의 빵 안에 끝까지 머무는 데서 나옵니다.

내 기분이 어떠하든,

삶이 흔들리든,

주님을 생명의 중심으로 다시 붙드는 태도,

그것이 성실입니다.

온유도 여기서 자랍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신 사람이

타인을 거칠게 대하고

자기 힘만 앞세우며 살 수는 없습니다.

절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양식을 아는 사람은

순간의 욕망과 소음에 휩쓸리지 않고

무엇이 정말 나를 살리는지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체가 단지 개인적 위로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 사이의 생명 안으로 우리를 초대한다는 뜻입니다.

곧 성체는

하느님의 생명 흐름 안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예로니모의 시선으로 보면

이것은 놀라운 강생의 연장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까닭은

인간을 당신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성체의 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우리를 아주 단순한 질문 앞으로 데려갑니다.

나는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세상의 인정인가,

습관인가,

불안한 자기 확신인가,

아니면 주님의 몸과 피가 주시는 생명인가?

성체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주일 한때의 경건이 아니라

삶 전체의 중심을 다시 정하는 일입니다.

영원한 양식을 받은 사람은

매일의 선택도 달라져야 합니다.

영적 열매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주님의 생명에 머무르는 사람 안에서

열매는 저절로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성실은 머무름에서,

온유는 친교에서,

절제는 참된 양식을 아는 데서 자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열매를 억지로 만들라는 명령이 아니라

먼저 생명의 근원 안에 머물라는 초대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정말 주님의 생명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도

여전히 다른 양식들에 더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주님 안에 머무는 성실함을 배우고 있는가?

나는 성체의 생명을 받아

온유와 절제로 살아가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oo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를 먹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주님,

당신을 멀리서 존경하는 데 머물지 않게 하시고

당신 생명을 실제로 받아 모시게 하소서.

성체 안에 머무는 성실함을 주시고

그 생명으로 이웃을 대하는 온유를 주시며

무엇이 참된 양식인지 아는 절제를 주소서.

당신 안에 머물러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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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 중에 파티마에서 조금은 특별한 조각을 보았습니다. 광장의 한 모퉁이에 벤치가 있었고, 그 벤치에는 한 노숙자가 누워 있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낡은 담요를 덮고 있는 노숙자의 모습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발에는 못 자국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을 지닌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작품을 처음 어떤 교구에 설치하려 했을 때, ‘품위에 맞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거절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하셨습니다. 교황님은 바티칸에 노숙자들을 위한 샤워실과 쉼터를 마련하고, 성탄과 부활에는 그들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에 따라 교회는 이 작품을 받아들였습니다. 교황님은 늘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장식이 아니라, 교회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외면했던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교회는 다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벤치 앞에 서서, 우리가 미사 안에서 모시는 성체가 바로 저 자리에 계시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체와 성혈의 신비도 이와 같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그 예수님을 삶 속에서 발견하는 것, 그것이 성체성사의 핵심입니다. 성체는 단순히 받아 모시는 신심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열어 주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성체성사의 정신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꽃동네입니다. 꽃동네는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믿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세상에서 버려진 이들, 의지할 곳 없는 이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함께 살아가며, 그들의 존엄을 지켜 줍니다. 꽃동네의 봉사자들은 단순히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신앙이 성당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한 꽃동네의 사랑은 한국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꽃동네는 멕시코와 필리핀, 아이티와 페루와 같은 지역에도 공동체를 세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음식이 부족한 곳에서는 함께 밥을 나누고, 병든 이들이 많은 곳에서는 그들을 돌보며, 외로운 이들이 있는 곳에서는 가족이 되어 줍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지만, 그들이 나누는 사랑은 하나입니다. 성체성사에서 비롯된 사랑이 국경을 넘어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빵을 나누듯이, 그들도 한마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오늘날에도 살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으로 그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만나의 의미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데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다시 먹이심으로써 참된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깨달음은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신자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빵을 떼며 기도했고, 그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고,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빵을 나누며 우리는 하나의 몸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양식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미사 안에서 그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십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모신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파티마의 벤치에 누워 계신 예수님, 꽃동네의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가장 작은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성체를 제대로 모신 신앙인이 됩니다. 성체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랑이며, 그 사랑은 나눔으로 완성됩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 모신 생명의 빵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여,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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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평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과 다투기까지 하였습니다(탈출 17,2; 민수 20,3 참조). 
탈출기에 나타난 싸움의 말이 요한 복음서에서도 나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두고 서로 “말다툼”(요한 6,52)을 벌입니다. 
그들의 분노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닫힌 결과입니다. 
우리 또한 그러한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스스로의 계산과 맞지 않을 때, 
우리는 속으로 불평하며, 하느님께 따지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6,53)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저 상식과 관습을 깨뜨리는 사변적 언어 표현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행위에는 ‘이 세상에 하느님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분의 찢긴 몸과 쏟아진 피를 내 생명의 뿌리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체성사를 암시하면서도 꼭 성체성사만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성체성사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리이며, 삶이 그 믿음으로 다시 살아 꿈틀거리는 자리입니다. 
내가, 우리가 그분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드러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 현존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우리 삶의 참된 음식이며 참된 음료입니다. 
우리 삶과 생명을 이어 가게 하는 실제입니다. 
그분을 받아 모시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죽어 가는 우리의 자리, 
우리의 공허와 상처와 좌절의 자리에 그분의 살과 피를 들여놓아, 
그분의 생명이 우리 대신 살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분 없이 살아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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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 당신의 몸과 피, 그 크신 사랑과 신비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곧 이어, 우리는 곧 당신 몸과 피를 우리의 양식으로 내어준 그 크신 사랑을 먹을 것입니다. 그토록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을 마실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두 번에 걸쳐 반복해 들려줍니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신명 8,3)

 

이는 오늘날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몸과 말씀으로 우리를 양육하고 계심을 알려줍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도 형제들과도 한 몸입니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인지요! 찬미하고 찬양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참으로, 어마어마한 말마디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고 하십니다. 단지 “내려온 빵”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줄 빵”이라고 하시면서, 그 빵은 바로 “당신의 살”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이 이 빵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생명을 줄 빵은 그 빵이 되기에 앞서, 밀이 바수어져 물과 함께 반죽이 되듯, 그렇게 부서지고 쪼개지고 피 흘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빵”이 될 수 있고, “참된 양식, 참된 음료”가 될 수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양식은 결코 우리가 획득하여 얻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주셔서 받은 것입니다. 은총입니다. 당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빵”“살”“생명”입니다. 이는 같은 지평에 자리 잡은 인간 존재 자체를 의미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주목할 수 있는 단어는 51절고 58절에 나오는 “하늘에서 내려 온”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인간 존재와 그 존재양식이 가 닿을 수 없는 신적인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내려온 빵”인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 존재와 존재양식 모두를 신적차원으로 받아들이는 말씀입니다. 곧 ‘하늘의 몸’과 ‘땅의 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그 ‘몸’이 쪼개진 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당신의 신적 생명을 “먹고 마셔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세 가지로 알아들어 봅니다.

<첫째>는 당신께서 ‘생명의 밥이요, 양식’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둘째>는 ‘예수님과의 사귐’을 말해줍니다.

이를 <제2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고린 10,16)

 

<셋째>는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물음’을 말해줍니다.

이를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이 모두는 ‘빵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는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양식이 되고, 우리 안에 머물며, 한 몸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그 크신 사랑으로, 당신의 ‘신적 생명’을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증여하십니다.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됩니다.

그리하여 갈라지고 패인 우리 가슴 골골에 당신의 피가 흐르게 된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의 피, 구원과 생명의 피가 흐르게 된 것입니다. 이 놀랍고 크신 사랑에, 우리의 가슴은 벅차오릅니다.

잠시 후면, 우리는 “아멘”이라는 응답과 함께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살겠다.’는 응답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몸’은 ‘인간관계’,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는 ‘생명’, 곧 ‘일치와 유대’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몸’에서 친교와 사귐으로 사랑의 관계 맺음을 배워야하고, ‘예수님의 피’에서 사랑의 유대와 일치를 배워야할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건네주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로 우리는 예수님이 지니셨던 그 사랑과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이웃과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주님!

당신은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저를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에 태워 드높게 날게 하십니다.

오늘도 당신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자신을 감추신 그 오묘함과 놀라움으로,

그 그윽한 당신 사랑의 숨결로 저를 적시오니,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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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보통 ‘손님은 왕이다’라면서 고객 중심의 운영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매장의 점원들은 손님에게 도도하고 쌀쌀맞게 대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히려 고객이 점원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구하기 힘든 유명 가수 콘서트 티켓을 주고, 여기에 비행기표까지 얹어준다고 합니다. 말이 안 되죠? 실제로 있습니다. 에르메스 벌킨 백 판매장에서는 그렇다고 합니다.

 

이 가방의 가격은 수천만 원에 달하고, 돈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살 수 있는 가방도 아닙니다. 손에 넣으려면 보통 1년 이상 기다려야 하고, 그전에 에르메스의 다른 제품 여러 개를 사야 하고, 점원에게도 잘 보여야 합니다. 이곳 점원의 불친절을 오히려 “역시 고급 매장은 달라.”라고 말합니다.

 

명품의 특별한 점은 무엇일까요? 제작 비용은 그렇게 많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제품의 기능,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품위와 자존심이 아닐까요? 이런 명품보다 더 특별한 품위와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커다란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이합니다. 성체성사의 제정과 그 신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 대축일에 교회는 요한복음의 ‘생명의 빵’을 선포합니다. 이 부분을 통해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함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라고 선포하시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라면서 거센 반발을 보입니다. 율법에서는 동물의 피조차 마시는 것을 엄격히 금지합니다. 하물며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단순히 비유이고 상징이라고 해명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강하게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라고 말씀하시지요. 반드시 우리가 주님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보통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은 소화되어 나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양식인 성체는 반대라는 것입니다. 성체가 우리 안으로 들어와 나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 안으로 흡수되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체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특별합니다. 이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특별해졌습니다. 그 특별함을 담아 고귀함과 품위를 드러내는 명품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이 세상에 잘 살려고 왔지, 오래 살려고 온 게 아니야(최윤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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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끝자락에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자기 이해의 끝자락에 서 있는 이들에게, 우리는 주님의 빛과 평화의 축복을 빌어 줍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양극적 사고를 넘어서는 길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끝자락에서...

2026년 6월 5일 금요일

시인 앨리슨 데이비스(Alisosn Davis)는, 자기 존재와 앎의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을 위한 축복을 발견합니다:

자아와 앎의 경계에 선 이들을 위한 주님의 축복

어쩌면 여러분은 걸어서 여기까지 왔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달려서 왔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돌멩이와 깃털, 꽃과 향기, 하늘의 자취를 따라왔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신비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기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도 신비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이 있는 이곳이 곧 은총의 자리요, "지금 여기"는 언제나 그 자체로 축복이며,

경계에 선 이 자리에서 축복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들의 마음의 강가,

약속으로 가득한 그 경계에 선

이들을 축복하소서.

아침의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을 축복하소서,

밝은 날의 얼굴을 노래하며 푸른 하늘 속으로 들어가는 이들을...

자신이 아는 것의 경계에 서서

옛 확신이 무너져 가는 것을 바라보는 이들을 축복하소서.

파멸의 끝자락에 선 이들을 축복하소서.

행복한 결말의 유혹이 있든 없든,

유명한 시인이 노래했듯, 그 무게를 끝까지 견뎌내는 이들을....

주님, 절망의 끝자락에 선 이들을 축복하시어, 결말이 어떠하든 그 무게를 인내로 견디게 하소서.

자기 자신과 타인, 세상에 대한 사랑의 끝자락에 선 이들을 축복하소서.

앞으로의 길이 더욱 미묘해지고 덜 확실해지는 그 자리에 머무는 이들을.

언어의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을 축복하소서.

그들의 혀와 이야기와 이름이 보증이라기보다 서약이 되는 이들을.

삶이 경계 위에서도 살아질 수 있음을 믿으려는 끝자락에 선 이들을 축복하소서.

References

Alison Davis, Italics:Poems (Wildhouse Poetry, 2026), 1. Used with permission.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eth Macdonald,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강의 하구(河口)는 땅도 물도 아닌, 그 둘을 모두 넘어서는 세계를 드러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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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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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07 05:03

 

- 쉬운 믿음과 어려운 믿음

 

 

 

오늘 우리가 지내는 축일은 성체와 성혈 대축일이 아니라 사랑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먹는 것은 주님의 살과 피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에 우리는 성체와 성혈을 내어주시는

그러므로 당신 전부를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먼저 보겠습니다.

그런데 성체와 성혈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즉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우리가 미물이라고 하는 동물들의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 두꺼비는 새끼가 날 때 뱀에게 가서 약을 올린다고 하지요.

이 얘기가 사실인지 모르지만 그래서 뱀이 잡아먹으면 어미 두꺼비는 죽지만

두꺼비의 독에 뱀도 죽어 배 속에 있던 새끼들이 그 살을 먹고 자란다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살모사나 연어와 같은 동물들도 자기를 먹이로 주면서

새끼를 살리는 무화적(無化的) 사랑의 동물들입니다.

 

동물들이 왜 이러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의 본성이 자기 무화와 희생이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이 무화적 사랑의 본성을 지니고 생겨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성체와 성혈이 이 무화적 사랑의 모범이지만

관건은 우리가 그것을 믿느냐 또 그것을 먹느냐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축일에 주님의 그 큰 무화적 사랑을 알아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어주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라고 하시며, 제발 당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시는데 아무리 그러셔도 우리가 먹고 마시지 않으면 다 헛것이지요.

 

이 약을 먹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들어도

먹어야 낫지 먹지 않으면 다 헛것인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안 먹는 사람은 왜 안 먹는 것일까요?

필요 없어서일까요? 믿지 않거나 못해서일까요?

 

영원히 살 생각이 없는 사람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 맛을 모르는 사람도 먹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못해서 그러는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매일 먹을 것으로 주신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서,

먹을 것으로 주신다는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라는 것을 믿기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사실 믿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믿기 쉬었으면 개신교 신자들처럼 실제가 아니라 상징이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성체와 성혈은 실제가 아니라

전부를 내어주시는 주님 사랑의 상징이라고 믿지요.

 

그런데 그것은 쉬운 믿음이고 그들은 쉬운 믿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운 믿음을 선택하고 성체와 성혈이 실제라고 믿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인간이 되어 오신 최초의 육화를 믿는 것이 힘들지

한 번 내려오신 분이 매일 빵과 포도주로 오시는 것을 믿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믿기 어렵지 않고 믿을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 빵과 포도주가 되시는 것은 믿기 어렵고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하느님께서 빵과 포도주로 오시는 것이, 인간이 되어 오시는 것보다

더 낮추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믿기 어려운 것입니까?

 

아무튼 저는 쉬운 믿음이 아니라 어려운 믿음을 선택했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는 최후 만찬 때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여기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배반했어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뜻도 있고,

당신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뜻도 있고,

제자들이 이 세상 삶을 마칠 때까지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뜻도 있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성체와 성혈의 성사가 이 ‘끝까지 사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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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체성사의 생활화

“기억하라, 거행하라, 실천하라”

 

 

 

 

6월 예수성심 성월에는 유난히 대축일이 많습니다. 지난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으로 자신을 활짝 개방하신 후, 오늘은 사랑의 절정인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로 우리와 온전히 하나 되기 위해 오십니다. 

 

1989년 37년전 바로 여기 요셉수도원에서 <부제>로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미사 강론시 “밥으로 오시는 하느님”이라는 제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먹고 사는 우리 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세상에 이런 하느님 사랑을 능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때 인용한 김지하 시인의 그 유명한 감동적인 시, 한국의 세계적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가 극찬한 <밥이 하늘입니다>입니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불가의 스님들은 식사 때 이런 기도를 바칩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보리菩提를 이루고자 공양供養을 받습니다.”

 

성체성사적 삶을 사는 신자들이라면, 성체성사가 생활화된 신자들이라면 이런 자각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밥은 바로 하늘이자 성체를 상징합니다. 무수히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 이 또한 성체모독의 큰 죄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밥으로 오시는 하느님>인 생명의 빵 예수님께 감동에 벅차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우리의 근원적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그리스도의 성체성혈의 은총입니다.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정화하고 성화하여 날로 생명의 빵 주님을 닮게 하는 주님의 성체성혈,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바로 이 생명의 빵을 모셔야 살기에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주님과 상호내주의 일치를 이뤄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성체성사의 은총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요 힘인지 깨닫습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바로 주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주님의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성무일도시 흥겹게 노래한 다음 내용은 얼마나 은혜로웠는지요!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이로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리라.”<즈카르야의 노래 후렴>

“오 거룩한 잔치여, 예수의 몸은 음식이 되었도다. 수난의 기념, 은총의 충만, 장차 영광의 보증이로다. 알렐루야.”<마리아의 노래 후렴>

 

오늘 복음 선포전 24절까지 계속된 성체송가는 또 얼마나 깊고 풍요롭고 아름다웠는지요. 23절만 인용합니다.

 

“참된음식 착한목자 주예수님 저희에게 크신자비 베푸소서.

 저희먹여 기르시고 생명의땅 이끄시어 영생행복 보이소서.”

 

저는 피정지도시 영성체시 성가는 감격에 눈물 나는 177장을 꼭 부르도록 부탁합니다. 어제 <방학동 성당 글로리아 성가대> 미사 때도 그러했습니다. 후반부 후렴은 늘 감동에 젖게 합니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 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주의 몸이라.”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 우리의 밥으로 오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말 그대로 기억과 감사, 일치의 성사가 성체성사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은 광야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너희는 이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여라.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우리 각자 살아 온 고유의 광야인생여정을 잊지 않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 감사의 여정, 성화의 여정을 살아 낼 수 있습니다. 새삼 인생 광야 여정 중 기억과 감사, 일치의 훈련과 습관화가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망각의 동물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기억하고 감사하라>에 이어 <거행하라>입니다. 평생 자주 성사 성체성사 거행에 온힘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일치의 성체성사의 은총이 참으로 큽니다. 미사거행시 영성체 예식중, “그리스도의 몸”하면 하나하나 “아멘”하며 가난한 빈손으로 겸손히 성체를 받아 모시는 아름다운 모습은 언제 봐도 감동입니다. 그러니 미사거행으로 성사의 은총을 오늘 지금 여기서 <현재화>하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 중요성을 지니는 지요! 

 

그러나 성체성사의 거행만으로는 반쪽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먹이시고 살리시는, 나눔과 섬김의 전 삶>의 압축이자 요약이 성체성사입니다. 하루하루 일상은 미사로 수렴收斂되고 미사는 일상으로 확산擴散되어야 합니다. 수렴과 확산이 영적 삶의 리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따름과 나눔, 섬김의 사랑의 삶이 일상화 되어야합니다. 말 그대로 성체성사의 생활화입니다. 주님의 살아 있는 성체의 사랑이 되어 살아야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이런 소망을 노래한 <온 세상 제대祭臺로 삼아>란 자작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임께서도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신다

 

 불암산 가슴 활짝 열고 

 온 세상 제대로 삼아 

 모든 피조물 품에 안고 미사를 드리신다

 

 하늘 높이 들어 올리신 찬란한 태양 성체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가슴마다 태양 성체 모시고

 태양 성체 되어 

 하느님의 아들, 딸로 살아가는 우리들이다.”<2006.6.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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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1) ‘먹는 일’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중요한 말입니다. 죽은 사람은 먹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성체성사에도 적용됩니다.

 

성체를 받아먹는 일은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고,

그 일은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아먹을 수 없습니다.

 

물론 성체를 받아먹는 행위는 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 받아먹는 성체는 성체가 아닙니다. 좋은 예가 배반자 유다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다음에(루카 22,14-20),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예고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루카 22,21).

 

루카복음을 기준으로 하면,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뒤에(루카 22,3-6),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고, 성체를 받아먹고 나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겟세마니로 가기 전에 먼저 떠나간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이미 배반한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왜 그에게 성체를 주셨을까?

 

<요한복음에는 성체성사 제정 이야기가 없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만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이미 배반한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왜 그의 발을 씻어 주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답은, “유다도 사랑했기 때문에”, 또 “유다가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입니다.

어떻든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유다는 회개하기를 거부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성체를 주신 일도, 그의 발을 씻어 주신 일도 모두 다 그 자신이 스스로 헛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믿음을 버리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받아먹는 성체는 더 이상 성체가 아니게 되는 것은,

성체 쪽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먹는 사람 쪽의 문제, 즉 자신에게 주어지는 생명력을 스스로 차단하는 문제입니다. 오늘날에는 성체 모독의 위험성 때문에 비신자들의 영성체가 금지되어 있는데, 신자라고 해도 마음과 믿음이 이미 예수님을 떠났으면서도 안 그런 척 하면서 영성체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2) “나를 먹는 사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먹는다.’ 라는 말은,

‘믿는다.’를 강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신다.”는 “나를 먹는다.”를 더욱 강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단순히 상징적인 말로만 그치지 않고, 성체성사를 통해서 ‘실제 일’로 이루어지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또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은, 당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요한 6,60),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듣기 거북한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누가 들어도 듣기가 거북한 표현을 사용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나타내는 말이고,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당신과 완전한 하나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실, 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거북한 말은 아닙니다. 엄마의 태중에 있는 태아는 엄마의 생명력을 받아먹는데, 사실상 엄마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의 젖을 받아먹는 갓난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엄마는 아기에게 자기 자신을 먹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엄마들처럼 당신 자신을 먹이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성체성사는 ‘예수님을 먹는’ 성사입니다.

 

인간이 땅에서 생산되는 온갖 곡식과 채소와 과일 등을 먹는 것은, 땅의 생명력을 받아먹는 일이고, 땅을 먹는 일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먹는 일은 다 그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아먹는 일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먹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는 생명력입니다. 우리는 그 힘으로 살아가고, 그 힘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우리를 살게 하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예수님의 생명력을 제대로 받아먹으려면 우리 쪽에서도 능동적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을 힘도 없고,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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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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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품에 안아 길러 주시는 어머니이십니다!~~~

 

 

 

이번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가 첫 영성체를 한지 54년이 되었습니다.

4년 전 성체 성혈 대축일에 어느 수녀원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첫 영성체 금경축을 맞이했다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저는 54년 동안 내내 주님께서 주시는 양식, 즉 그분의 온전한 내어 주심을 받아 먹으며 자라왔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아름다운 주님의 기르심입니까?! 당신 자신의 몸과 피를 온전히 저에게 내어 주시면서 저를 지금까지 길러 주셨으니 말입니다....

첫 영성체를 했을 그 당시에 성체 성사의 참된 의미는 제대로 모른 채 처음으로 영성체를 모시는 날을 기다리며 교리를 받았던 기억이 납다. 그렇지만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었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왔고 첫영성체를 하게 되었을 때,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동안 내내 제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물론 당시 교리를 가르쳐 주셨던 수녀님이 성체는 진짜 예수님의 몸이니 함부로 영해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많이 주셨기 때문에 어린 마음에도 어느 정도의 경외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그때는 성체를 씹어 먹을 수 없었기에 혀로 영해서 입안에서 녹여 영하곤 했었기에 그런 경외심이 더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은 참된 경외심과 감탄과 감사의 정으로가 아니라 미사에 참여하면 어련히 영성체를 하니까 그저 타성에 젖어 성체를 영해오지 않았나 하는 성찰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의 옳고 그름의 상태와는 아무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당신을 매번 온전히 내어 주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감사의 마음을 드리게 됩니다. 제가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주님께서는 저에게 크나큰 은총을 계속 베풀어 오셨던 겁니다!

시편 127편 2절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에게는 잘 때에(도) 그만큼을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깨어 있을 때뿐 아니라, 잠들어 있을 때에도 은총을 부어주신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시편 앞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일찍 일어남도 늦게 자리에 듦도 고난의 빵을 먹음도 너희에게 헛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는 일이 헛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다 하느님의 은총이지 우리의 수고가 이루어내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현존(하느님 나라)을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로 설명하시며, 농부가 자는 동안에도 씨앗은 자라난다고 하십니다.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우리 자신도 그렇게 자라났습니다. 모태 안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밤낮으로 어머니가 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머니가 곁에 계시다는 확신 속에서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어머니처럼" 돌보십니다. 우리는 처음에 어머니를 음식의 근원으로 경험했고, 그 눈에 보이는 통로를 통해 사랑의 근원으로도 경험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먹이시며, 두려움 많은 우리를 길들이고 신뢰하도록 이끄십니다. 동물을 길들이는 방법은 먹이는 것입니다. 점차 동물은 우리에게서 먹이를 받아 먹으며 우리를 신뢰하기 시작하고, 우리의 선의를 믿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도 (어쩌면 지금도) 두려움 많은 존재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인간 사회 안으로 길들여져야 합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눈에 보이는 통로가 필요합니다. 그 통로가 처음에는 음식이었습니다. 몸의 지혜가 성체성사 안에서 드높여집니다. 성체라는 음식은 가장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관계, 곧 우리의 존재가 나온 궁극적 "모태"인 것입니다.

관계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일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위대한 14세기 신비가 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는 하느님을 "어머니"라 불렀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우리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낯설고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녀는 언제나 빛나는 의미를 담아 그렇게 말했고, 거기에는 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성녀는 예수님이 어머니와 같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가 예수님을 닮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몸으로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어머니의 돌봄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이미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성체성혈 대축일에, 너무 어른스럽게 굴지 말고 엄마 품을 그리워하는 어린 아기처럼 성체의 "모태적 이미지"가 마음속에서 자유롭게 울려 퍼지도록 어머니이신 예수님의 가슴에 안겨 봅시다!

마지막 만찬 때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었던 요한 사도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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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완전한 사랑의 여정, 성체성사 

 

 

 

성체성사를 묵상할 때마다 우리는 깊은 감동과 행복에 젖어듭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사랑에 감동하고, 그 사랑의 대상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에 행복을 느낍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체성사가 단순한 한 순간의 사랑이 아니라, 완전한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그 사랑을 함께 묵상해 봅시다.

 

성체성사, 자신을 낮추신 사랑입니다.

성체성사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성육신의 신비에서 시작됩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어떤 장벽도 뛰어넘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올라갈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셨고 죄인이 거룩함에 이를 수 없기에 거룩하신 분이 죄인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과 권능을 내려놓으시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첫걸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단순히 우리 곁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르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성체성사, 자신을 내어 주신 사랑입니다.

더 깊은 일치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당신의 몸과 피를 담아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가 우리의 생명 안으로 들어와 우리와 하나가 되는 신비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아무리 깊어도 서로 곁에 머무는 데 그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 머무르며 우리와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육체적 일치에 머물지 않으십니다. 마음과 생각까지 하나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체성사, 자신을 비우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완전한 일치를 갈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를 받아 모시는 이들의 모범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생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일치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듯이, 우리도 자신을 비우고 주님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생각으로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주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성 바오로가 가르친 삶입니다.

성체성사, 참된 자신을 찾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비울수록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실 때 우리는 잃어버렸던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참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전한 모습입니다.

천국이 삼위일체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 되는 곳이라면, 성체성사는 이 땅에서 미리 천국을 맛보게 하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성체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며, 하느님의 모습을 되찾게 됩니다.

성인 카를로 아쿠티스는 성체성사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비결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고속도로입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완전한 사랑과 행복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성체 안에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머무십니다. 나는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깊이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너무 익숙해져 그 사랑의 크기를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해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내 안에 머무실 수 있도록 마음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 마음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셨습니다. 나는 주님과 더 깊이 하나 되기 위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합니까? 아직도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나의 뜻’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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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우리 조상들은 가을이 되어 나무에 열린 과일을 거둘 때, 위 쪽에 달린 몇 개는 따지 않고 그냥 남겨두었습니다. ‘까치밥’이라고 부르는 전통으로, 추운 겨울이 되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새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그들을 위한 양식을 남겨둔 넉넉한 마음 씀씀이였지요. 그러면 새들은 배고플 때 그 과일을 쪼아먹으며 혹독한 겨울에도 삶을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산행길에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를 재미 삼아 줍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차피 도토리 몇 개를 줍는다고 묵을 쒀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재미’로 줍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재미’ 때문에 그 도토리 몇 개를 열심히 모아 겨울을 나야하는 다람쥐들은 굶게 됩니다. 누군가를 위해 ‘밥을 남기는 삶’ 과 누군가에게서 ‘밥을 빼앗는 삶’. 어쩌면 사소해보이는 선택이지만 그 결과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게 됩니다. 
 
보잘 것 없는 과일 몇 개를 남겨주는 것이 작은 동물들의 목숨을 살린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생명의 양식’은 얼마나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릴까요? 오늘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참된 양식으로 내어주신 것을 기념하며 감사를 드리는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는 양식의 정체를 ‘나의 살’이라고 밝히십니다. 여기서 ‘살’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사륵스’(sarx)는 인간의 육신 전체를 가리킵니다. 즉 주님은 필요 없어서 빼버리고 싶은 당신 몸의 일부를 떼주시는게 아니라, 생명을 포함한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받아모심으로써, 그분께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 누리시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도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런 주님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려면 그분의 살 한 점 피 한 방울도 헛되이 흘리지 말고 온전히 받아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님을 온전히 받아먹을 수 있을까요? 그분의 몸을 ‘음식’이 아니라 ‘양식’으로 받아먹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주신 것이지, 당장의 배부름이나 미각적 쾌락을 위한 ‘음식’으로 내어주신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음식과 양식은 어떻게 다를까요? 어린 아이들은 부모가 주는 음식을 당연한 듯 먹습니다. 이렇게 먹으면 말 그대로 ‘음식’이 됩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를 먹고 철이 들어갈수록 부모가 주는 음식을 먹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습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을 지니며 무엇으로든, 어떻게든 보답하려는 마음을 품지요. 이렇게 먹으면 내가 먹은 음식이 나를 위한 부모님의 사랑과 정성 그리고 희생이 담긴 ‘양식’이 됩니다.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미사 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성체를 영하면 그 성체는 나에게 몇 시간 뒤면 빠져나가는 음식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나를 위한 주님의 사랑과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영하고, 그 보답으로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면 내가 모신 성체는 나를 주님과 일치시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 되지요.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당신을 참된 ‘양식’으로 영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받아먹는 두번째 방법은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셨고, 우리와 똑같은 부족함과 약함, 슬픔과 아픔을 끌어 안으셨으며, 죽음마저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 머무르기 위해 고통과 시련, 의무와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처럼 믿고 순명하며 용서와 포용,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면, 우리는 주님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닮은 거룩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지요. 그래야 내가 받아모신 주님의 몸이 ‘영적 거부반응’ 없이 온전히 나의 몸이 되고, 내가 받아모신 주님의 피가 온전히 나의 피가 됩니다. 그렇게 내 영혼 구석구석에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스며들어 메마르고 상처 가득한 내 마음에 따스한 온기와 생명력을 불어넣게 됩니다. 
 
주님을 온전히 받아모심으로써 그분 안에 머무르고, 주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룬 사람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갈라 2,20)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이유이자 최종 목표이지요. 주님께서도 아버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사셨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철저히 하느님 뜻에 따르며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분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그분과 함께 영광을 누리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주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그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내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면, 다시 말해 주님 뜻을 따르는 것이 내가 사는 이유이자 의미가 되면, 나는 언제까지나 주님과 함께 하면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몸을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 먹은 이들만 누리는 특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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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1:15 추가.

열정과 사랑으로 성체성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께서 당신께서 담당하시던 교구 내 가장 오지 본당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워낙 시골인데다, 오랫동안 본당 사제도 없어 신자들의 어려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제 부족으로 인해 교구청에는 파견할 사제가 없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그 지역의 젊은 농부 한 사람을 뽑아 속성과정으로 사제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사제로 서품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 본당 주임으로 발령을 냈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의 마음이 영 껄끄러웠습니다.
괜한 짓을 했나 후회도 되었습니다.
속성으로 교육시킨데다, 실습조차 하지 않은 상태로 파견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주교님은 평복 차림으로 그 본당을 찾아가 그 사제가 미사 드리는 모습을 몰래 지켜봤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교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주교님은 그동안 수많은 사제들이 봉헌하는 미사를 봐왔지만, 그 사제처럼 세상 경건하고 진지하게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는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미사 드릴 때 그 사제의 눈은 별처럼 빛났고, 열정과 사랑이 가득 담긴 강론을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에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그 사제 앞에 무릎을 꿇고 강복을 청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이 주교님이란 것을 알게 된 사제는 깜짝 놀라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습니다. 
 
“주교님께서 제게 강복해주셔야지, 어떻게 제가 주교님을 강복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주교님은 다시 무릎을 꿇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신부님이 나를 강복해주십시오.
저는 신부님처럼 열정과 사랑으로 미사를 드리는 사제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아니, 주교님, 한 사제가 어떻게 열정과 사랑 없이 미사성제를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저만해도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열정 없이, 사랑 없이, 미사를 집전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저 습관처럼 타성에 빠져 앵무새처럼 경문을 외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성체성사에서 무슨 기적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겠지요.
사제가 열정이나 사랑 없이 미사를 집전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신자들도 열정과 사랑 없이 미사성제에 참여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벨의 정성스러운 제사는 기쁘게 받아 들이셨지만 건성으로 바친 카인의 제사는 거부하셨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봉헌인 성체성사에 온몸과 마음, 모든 에너지와 정성을 기울이는 성체 성혈 대축일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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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badaking/LgBn

박 베로니카님이 올리심

 

또는 

 

https://story.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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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

 

 

21:17 안 올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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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이기승님 이 올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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