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19.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묵상글(강론글) 1차(0618. 21:40), 2차(05:20), 3차(08:55)
작성자김 루도비꼬작성시간26.06.18조회수63 목록 댓글 0
+++++++++++++++++++++++++++++++++++++++++++++++++++
260619.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묵상글(강론글)
1차(0618. 21:40), 2차(05:20), 3차(08:55)
6월 19일 묵상글, 18일 21시 4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 3차분 이후에도 2편(안올리실 글도 1편은 있을 수 있음)은 올라오는 것 발견 할 경우 공유합니다(09:00)
+++++++++++++++++++++++++++++++++++++++++++++++++++
++++++++++++++++++++++++++++++++++++
========
< 1 차 >
----------------------------------------------------
260619.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6,19–23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거기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그리고 이어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하시며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지 돈을 많이 모으지 말라는 훈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무엇을 위해 시간과 힘을 쓰고 있는지,
그 방향이 곧 마음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보물은 단지 재물이 아니라
내가 가장 붙들고 사는 모든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마음이 늘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복음의 핵심은
“가진 것”보다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곳을 향해 살고
마음은 결국 자기가 보물로 여기는 곳에 묶이게 됩니다.
그래서 문제는
보물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그 보물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하느님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의 보물은 좀과 녹, 도둑 때문에 사라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 것이 본래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궁극적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성공, 재산, 명예, 평판,
심지어 내가 의지하던 어떤 안정감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바로 이 불안정한 것에 마음 전체를 걸 때
인간이 깊이 불안해진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라질 것 위에 삶을 세우면
마음도 함께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늘의 보물은
하느님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가치입니다.
사랑, 자비, 진실, 용서,
선행, 믿음, 하느님께 대한 충실함,
이런 것들은 세상의 평가로 다 헤아릴 수 없지만
하느님 나라 안에서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성 보니파시오의 삶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의 선교와 순교는
세상 기준으로 보면 손해와 위험, 상실이었을 수 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사라지지 않는 보물이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십니다.
눈이 맑으면 온몸이 밝고
눈이 성하지 않으면 온몸이 어둡다고 하십니다.
아우구스티노의 관점에서 보면
이 눈은 단순한 시각 기관만이 아니라
마음의 시선, 곧 내적 의도와 분별의 눈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는가?
무엇을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가?
그 눈이 맑으면 삶 전체가 밝아지고
그 눈이 흐리면 삶 전체가 어두워질 수 있습니다.
친절 / 선행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친절은
사람을 이익과 쓸모의 기준으로만 보지 않는 맑은 눈에서 시작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얼마나 유용한가보다
그 사람이 하느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보는 눈입니다.
선행도 이와 같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보상을 바라지 않고
하늘의 보물을 위해 행동하는 것입니다.
감사받지 못해도,
즉시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 앞에서 선을 택하는 것,
그것이 선행입니다.
성인의 날의 관점에서 보면
성 보니파시오의 삶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몸으로 살아 낸 증언처럼 보입니다.
그는 안전을 땅에 쌓지 않고
복음을 하늘의 보물로 삼았습니다.
순교는 잃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진짜 보물로 여겼는지 드러내는 마지막 고백이 됩니다.
보물이 하늘에 있던 사람은
삶도 죽음도 하느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내 보물은 어디에 있는가?
내 마음은 지금 무엇에 가장 묶여 있는가?
나는 사람을 존엄의 눈으로 보는가,
아니면 유용성의 눈으로 보는가?
나는 사라질 것들에 너무 많이 마음을 걸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눈을 밝히시고
보물의 자리를 다시 묻게 하십니다.
주님,
사라질 것에 제 마음을 다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하늘의 보물을 더 사랑하게 하소서.
제 눈을 밝히시어
사람과 세상을 바르게 보게 하시고
친절과 선행을 통해
당신 안에 쌓이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260619.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게는 탁상용 일정표가 있습니다. 미국에 와서부터 매년 일정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집무실에도 있고, 사제관에도 있고, 핸드폰에도 있습니다. 작년부터는 형제님 한 분의 도움으로 구글 드라이브 일정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핸드폰이 자동으로 연결되니 어디서든지 일정을 확인할 수 있고 수정할 수도 있습니다. 참 편리한 시대입니다. 그래도 저는 아직 탁상용 일정표가 정겹습니다. 손으로 직접 적어 내려가는 그 느낌 속에 지나온 시간과 만났던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의 일정표를 보면 대부분 신문 홍보와 신문사 행사 일정이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성당 미사 일정도 많았습니다. 성지순례 일정도 있었고, 동북부 ME 지도신부로 봉사하면서 봉사자들과의 일정도 많았습니다. 코로나 시절에는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모임과 캠프 일정이 참 많았습니다. 지나고 보니 제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했던 일정들 속에서 오히려 제가 더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도 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조용히 저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와 피정의 일정은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온 지도 어느덧 2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지금의 일정표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은 미사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3달 정도의 미사표를 정리해서 주면, 제 일정표에 먼저 기록합니다. 세례성사, 견진성사, 혼인성사와 같은 전례 일정도 있습니다. 사순 특강과 대림 특강, 성모의 밤과 같은 본당 행사도 있습니다. 중남부 꾸르실료 지도신부 일정도 있고, 북미주 한인 사목 사제 협의회 대표 신부로서의 일정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미 잡혀 있던 모든 계획을 내려놓고 가장 먼저 달려가야 하는 일정도 있습니다. 병자성사와 장례미사입니다. 어떤 일정은 저를 지치게도 하지만, 어떤 일정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저를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교구 사제들과의 만남과 피정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도와준 일정도 많았지만, 사실은 제가 더 큰 위로와 힘을 받은 시간이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단순하지만 우리의 삶을 깊이 흔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일정표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학생은 공부 일정표를 만들고, 회사원은 업무 일정표를 만들고, 부모는 자녀를 위한 일정표를 만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정의 숫자가 아닙니다. 그 일정 안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가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성공, 재물,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한 일정표를 만듭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더 많은 돈, 더 높은 자리를 위해 살아갑니다. 물론 그런 노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인생의 목적이 된다면 우리의 일정표는 땅에만 기록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도 기록되는 일정표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 시간, 아픈 사람을 찾아간 시간,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준 시간, 용서하기 위해 참아낸 시간,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낮춘 시간이 바로 하늘에 기록되는 일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그런 삶을 알려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삶입니다. 욕심과 욕망의 불을 끄는 삶입니다.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위해 일하며, 옳은 일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삶입니다. 세상은 그런 삶을 손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그것이 가장 귀한 보물이 됩니다. 우주는 너무 넓어서 빛조차 수만 년을 달려야 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속도와 선행의 속도는 빛보다 빠릅니다. 누군가를 위한 작은 희생과 진심 어린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행한 작은 선행 하나도 하늘에서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매일 일정표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바쁜 삶을 살았는가가 아닙니다. 하늘에도 기록될 수 있는 삶을 살았는가입니다. 오늘 하루의 일정 속에 기도의 시간이 있었는지, 누군가를 위한 사랑의 시간이 있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행운은 성공, 재물, 명예, 권력의 다른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희생, 나눔, 헌신,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260619.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의 경건생활,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보물’과 ‘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보물’은 보석을 나타내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주님을 경외할 줄 아는 지혜’(이사 33,6)를 상징하기도 하고, ‘이스라엘’에 견주기도 합니다(탈출 19,5; 신명 7,6). 또한, ‘보물’은 획득하여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는 것으로, 찾은 이에게 발견됩니다. 그런데 발견하기만 하고 차지하지 못한 이가 있고, 아예 찾아 나서지도 않은 이도 있고, 찾았으나 악용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마라.”(마태 6,1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마태 6,20)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에 보물을 쌓아둘 수도 있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둘 수도 있습니다. ‘땅에 쌓아둔 보물’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위해 쌓아올린 보물이지만, 좀 먹고 녹슬고 도둑맞을 수 있는 보물입니다. ‘하늘에 쌓는 보물’은 하느님 앞에서 쌓아올린 보물이고, 영원히 남는 ‘의로움의 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을 보면, 자신이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곧 값진 보물이라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눈이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지금 나의 눈이 나 자신을 ‘향하여’ 있는지, 하느님을 ‘향하여’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당연히, 주님의 마음은 ‘여기 우리 안’에 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당신 마음이 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보물’인지라 당신의 눈은 우리에게 와 있을 것입니다. 당신 목숨을 내어주고 얻은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눈은 나를 ‘향하여’ 있는데, 내 마음의 눈은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와 있는 주님의 눈동자를 관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몸의 등불”인 “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마태 6,22-23)
그렇습니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해질 것입니다” 곧 편견과 고정관념이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눈이면, 환하고 투명하게 볼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마음이 깨끗하면 하느님을 볼 것”(마태 5,8 참조)이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맑아져야 할 일입니다. 여기에서, “눈이 성하지 못하면”(πονηροσ)은 직역하면 ‘악하면’으로, 곧 ‘악한 눈’을 뜻합니다. 그러니 보물의 처신이나 사용이 ‘악’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리 보물이라 할지라도 악하게 사용하면, 오히려 자신을 어둠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 21)
주님!
제게는 당신이 보물이오니, 제 마음이 당신께 사로잡히게 하소서.
항상 당신을 첫 자리에 두고,
그 어느 것도 당신 사랑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제 눈이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고,
제 마음이 당신께 다다라 있게 하소서.
제 마음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 안에 저를 가두소서. 아멘.
----------------------------------------------------
260619.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재물에 대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방향을 묻는 말씀입니다.
“좀과 녹”(마태 6,19)은 당시 현실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이미지였지요. ‘좀’은 값비싼 옷감을 갉아먹고, 그리스 말에서 ‘먹어 치우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녹’은, 곡식이나 금속이 썩고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 당시에는 흙벽돌로 집을 지었는데 도둑이 쉽게 뚫고 들어올 수 있었다는 사실도 덧붙여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표현에서 땅의 보화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쌓아 두는 행위 자체가 언젠가는 잃어버릴 운명을 지녔다는 것이 예수님의 판단입니다.
반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6,20)라는 표현은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성전을 재건한, 이른바 제2성전기 유다 문헌에서 자주 나타나는 사상입니다(토빗 4,8-9 참조).
선행은 하느님께 드리는 보화이며, 마지막 때에 그 보화가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라는 사상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미래의 시간을 향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 물으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보물은 다만 소유물을 뜻하기보다 삶의 중심, 곧 욕망의 방향을 뜻합니다.
마음은 자기가 쌓아 둔 것을 향하여 기울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이어지는 눈의 비유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읽힙니다. 눈이 건강하면 온몸이 밝다는 말은 도덕적 은유이기도 합니다.
유다 전통에서 ‘좋은 눈’은 관대함을, ‘악한 눈’은 인색함과 시기를 뜻하였습니다.
결국 빛과 어둠의 문제 또한 시선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재물을 향하여 고정된 눈은 어두워지고, 하느님을 향하여 열린 눈은 밝아집니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우리 삶을 송두리째 맡길 수는 없지요.
사라질 것들을 너머 마지막까지 붙들 수 있는 가치에 우리 삶을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
----------------------------------------------------
260619.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계속되는 운동!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나눔의 공동 생활 방식은 어떤 모습일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초세기 교회의 "길"(The Way)
계속되는 운동!
2026년 6월 18일 목요일
CAC(Contemplative Action Center) 교수진인 브라이언 맥라렌은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공동체적이고 공적인 삶의 방식을 살아내셨으며, 그것이 곧 하나의 사회적 운동을 드러낸 것임을 보여줍니다:
복음서 곳곳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래아, 유다, 사마리아에서 하나의 "운동의 역동성"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점령의 불의와 종교 지도층의 부패로 인해 갈릴래아에 일어난 혼란 속에서 변화의 기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나라"라는 강력한 중심 이미지를 통해 메시지를 선포하시고, 비유라는 독특한 방식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와 같은 힘 있는 구호로 사람들을 이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와 같은 공개 가르침, 치유와 마귀를 쫓아내,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같은 표징,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상징적 행위,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한 파견과 휴식이라는 "행위-성찰"의 지도자 양성 과정을 통해 복음의 메시지를 삶으로 드러내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움직이는 공동체 조직은 세 명, 열두 명, 칠십 명, 그리고 특별히 둘씩 짝지어 파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평화의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협력하도록 가르치셨고, 아직 하느님 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은 자유롭게 떠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라는 입문 성사와 성체성사라는 갱신의 성사를 통해 사람들을 첫 신앙 고백으로 부르시고, 긴 여정을 견딜 힘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공동체 문화는 독특하고 특별했으며, 잔치와 축제, 기쁨의 행렬과 야외 모임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이들과 소외된 이들이 따뜻하게 환영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성들에게도 전례 없는 책임을 맡기셨고, 요한처럼 시적인 영성을 지닌 이, 열혈당원 시몬처럼 행동적인 이, 베드로처럼 든든한 기둥과 같은 다양한 은사와 성격을 지닌 이들을 가까이 두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이 운동 공동체 문화는 내적 삶을 기르고 긴 여정을 지탱하기 위해 관상적 고요와 물러남의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움직임 속에 있던 그들의 삶은 큰 기쁨과 큰 슬픔, 그리고 큰 사랑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저는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지중해 지역 곳곳에서 같은 역동성을 실천하며, "하느님 나라" 운동이 세상 끝까지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교회 역사 속에서 이와 유사한 패턴이 다시금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막 교부들과 교모들, 성 파트리치오와 켈트 성인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 웨슬리 형제들과 초기 오순절 신자들, 마르틴 루터 킹과 데스몬드 투투, 도로시 데이와 오스카 로메로 안에서 그러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가장 초기의 역동적인 세기들부터, 언제나 자발적으로—혹은 더 정확히 말해 성령께서 조직하신—작은 공동체들 안에서 가장 강한 활력을 얻었습니다. 이 작은 "세포"들은 씨앗처럼 공동체와 제도 안에 뿌리내리고 자라났습니다. 그곳에서 성장하고 번성하며 열매를 맺었는데, 그 열매는 정의롭고 활기찬 나눔의 공동체들, 평화롭고 기쁨에 찬 공동체들이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공동체의 탄생(The Birth of a Community)이라는 묵상글은 제 마음에 깊이 울림을 주었고 큰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몇 해 전, 우리 에큐메니컬(교회 일치) 성경 공부 모임에서 ‘탕자의 비유’를 함께 묵상하던 중, 제게는 하나의 깨달음(현현: epiphany)이 있었습니다. 저는 가톨릭 교육을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지만, 그 과정에서 제에게 주입되었던 것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끝없는 사랑을 베푸시며, 그분의 용서는 한계가 없다는 계시를 믿습니다. 아멘!
— Helen D.
References
Brian D. McLaren, The Great Spiritual Migration: How the World’s Largest Religion Is Seeking a Better Way to Be Christian (Convergent Books, 2016), 141–14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rice Xerty, untitled (detail), 2023,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나의 나이테처럼, 초대 교회는 불완전하지만 살아 있는 공동체로서 세월을 거치면서 사랑과 기쁨, 친교의 테두리를 넓혀가며 성장하였습니다.
----------------------------------------------------
++++++++++++++++++++++++++++++++++++
========
< 2차 >
----------------------------------------------------
260619.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19 05:11
- 재물인가? 보물인가? 필요한 것인가? 중요한 것인가?
“너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오늘 주님께서는 보물에 관한 가르침을 주시면서
한편으로는 우리의 보물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물을 보물로 삼음을 경계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재물은 재물로만 여겨야 하는데
참으로 많은 사람이 재물을 보물로 여기며 일생을 삽니다.
그런데 이는 마치 요강이나 돈지갑을 국보 1호라고 하는 것과 같고,
잠시 보물로 여겼다가도 웬만큼 나이를 먹고 나면 깨달아야 하는데
재물을 계속 보물로 여기며 사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러니 이것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음이고,
일생을 깡그리 망치는 안타까운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겠습니까?
돈이나 재물이 우리 삶에 있어서 너무도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돈은 필요한 것이지 중요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설사 중요하다고 해도 사람이나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보물로 여기는 사람은 돈의 비중이 사람과 사랑보다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재물을 재물 정도로 여길 줄도 알아야 하고,
지상 재물을 천상 보물로 바꿀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성인들은 이것을 안 분들인데
그 대표적인 성인들이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이며
가난 면에서는 클라라가 프란치스코보다 더 천착한 분입니다.
그래서 클라라는 지상 재물을 천상 보물로 바꾸는 아주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클라라는 하느님과 재물을 둘 다 섬김 수 없음과 복된 가난을 얘기한 다음
“이 얼마나 크고 찬양할 만한 교환인가!
영원한 것을 위해 현세적인 것을 버리고 지상의 것 대신에 천상의 것을 받으며,
하나 대신 백배를 받고 복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나니!”라고 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복된 가난은 교환이고 위대하고 찬양할 만한 교환입니다.
썩어 없어질 재물과 천국이라는 보물을 바꾸는 교환이고,
모든 것을 팔아 보물이 묻힌 밭을 사는 복된 교환입니다.
클라라가 말한 Magnum laudabile commercium(위대하고 찬양할 만한 교환)에서
Commercium은 옛날 물물교환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이 상업적인 말이
점차 뜻이 풍부해지고 교회 안에서는 마침내 영적 의미도 담게 됐지요.
그리스도의 육화로 인해 주님의 신성과 우리의 인성이 교환되는 뜻으로도 쓰였고
미사의 물과 포도주를 섞는 예식을 할 때는 사제가 “이 술과 물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케 하소서”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클라라도 같은 맥락에서 지상 것과 천상의 것의 Commercium(교환)이
복되고 찬양할 만한 가난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고 어떤 교환을 하며 삽니까?
재물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까? 중요한 것입니까?
머리로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임을 아는데 마음과 실제는 어떻습니까?
이런 성찰과 함께 욕심을 채우는 데 쓰이던 재물이 이웃 사랑을 위해 쓰이게 되면
이것도 재물이 보물로 바뀌는 복된 교환이 됨을 묵상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
++++++++++++++++++++++++++++++++++++
========
< 3차 >
----------------------------------------------------
260619.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는 방법!
연세가 점점 들어가시는 형제자매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얼마나 참된 진리인지를 뼈져리게 실감하게 됩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곰곰이 따지고 보니 도둑들, 날강도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천신만고 끝에 출산해서, 그 오랜 세월 애지중지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그 숱한 투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세드신 부모에게 돌아오는 것은 너무나 참담함이었습니다.
아직도 멀쩡히 살아 숨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도둑들이 목청을 높이고 활개를 칩니다.
그들은 아들, 딸이요, 며느리, 사위에다 손주, 손녀들입니다.
그들의 행태는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기다리다 보면 세월이 흐르고 자연스레 유산에 대한 분배가 이루어질 텐데, 그걸 못 견디고 조속한 분배를 요구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챙겨가려고 기를 씁니다.
굶주린 하이에나 떼가 따로 없습니다.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보물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대체 그 보물은 어떤 것일까요?
엄청난 은행 잔고? 잘 나가는 주식?
목 좋은 곳의 부동산? 아파트? 남부럽지 않은 건강, 사랑하는 사람? 재능? 자리?
사실 우리가 보물로 생각하는 대상들은 진정한 보물이 아니라는 것,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보물의 특징은 영원성, 불멸성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썩어 내려앉고, 허물어질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진정한 보물은 영혼과 관련된 것입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다가가 따뜻함과 친절함을 보이셨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께로 인도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참된 보물을 얻은 것입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군가에게 내 선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건넸습니까?
그로 인해 그가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도 나로 인해 미소를 되찾고,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갑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보물을 하늘나라에 쌓은 것입니다.
----------------------------------------------------
260619.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19-23)”
1) 여기서 ‘자신을 위하여’는 ‘자신만을 위하여’이기도 하고, ‘현세만을 위하여’이기도 합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다.”는, 지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만 추구하는 삶을 뜻합니다.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는, 세속의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 같은 것들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위하여’를 ‘자신만을 위하여’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기적인 인생을 살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현세만을 위하여’로 생각하면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만 찾다가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인생을 살지 마라.”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과 사랑 실천을 잘하라는 뜻입니다.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는, 신앙생활과 사랑 실천으로 얻는 열매인 ‘구원’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허무한 것들은 버리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 없이 세속의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 등만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 6,17-19).”
예수님의 말씀은 ‘저축’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축을 하고 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세에서의 일’일 뿐입니다.
내세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한다면,
영원히 하느님 나라에 남아 있게 되는 저축을 해야 합니다.
충실한 신앙생활과 사랑 실천이 바로 ‘진정한 저축’이고, 진짜 ‘보험 가입’입니다.
2)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라는 말씀은, “지금 네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냐?
잘 반성해 보아라.” 라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코헬렛’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 12,1-2.5-7).”
3)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서 실천하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을 향해서 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라는 말씀은, 주님의 은총이 아닌 것을 은총이라고 착각하면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빠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루카 16,14).”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현세에서 누리는 부유함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복이라고 생각했고, ‘가난함’은 하느님께서 내리신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오해와 착각에 빠져 있으면,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놓아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종교와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왜 그렇게 살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
260619.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지금 '나'를 은총 속에 있게 하는 것에 시선을 둡시다.~~~
재물보다 우리 영의 시력을 더 흐리게 흐리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루카 복음 16장 19-31절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보면 그 부자는 라자로를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그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눈"이란 사람의 지향 혹은 의도라고 이해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만일 우리의 눈, 즉 우리의 지향이나 의도가 오직 재물이나 다른 에고의 욕망에만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재물이나 그 에고의 욕망밖에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지향이나 의도에 집착하며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모른 채 그것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버나드 쇼의 희극, [바바라 소령(Major Barbara)]에 나오는 극중 인물 앤드류 언더샤프트(Andrew Undershaft)는 무기 제조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인물이며, 돈과 권력을 통해 사회를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인데,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백만장자다. 그것이 나의 종교다!" 그는 이 대사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냅니다.
사실 이 연극은 1905년에 초연된 것이지만, 그때 이미 자본주의적 부와 종교적 신념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버나드 쇼는 이 희곡을 통해 당시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고자 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런 모순은 회복되지 못한 채 여전히 계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더욱 악화의 길을 걷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렇듯이 우리는 외적으로는 다른 종교를 고백할지라도 실제로는 재물이나 다른 에고의 욕망이 우리의 참된 신앙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돈의 매혹은 그것이 '셈할 수 있는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정확히 얼마나 부유한지, 얼마나 가난한지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덕행은 그와 달리 수치로 환산할 수 없기에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덕은 그 자체로 보상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조언이 재물에 집착하는 이들에게는 절대 위로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의 마음은 쉽게 '더 많이'라는 욕망에 중독됩니다. 가장 단순한 수준에서는 더 많은 돈, 그러나 그것은 곧 더 많은 재산, 더 많은 지식, 더 많은 권력, 더 많이 인정받음, 더 많은 자기-만족 등등… 끝없는 '더 많이'로 이어집니다.
사실 우리가 자그마한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인격적으로나 영적으로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자그만 은총들을 찾고자 마음을 모은다면 우리는 우리 삶에서 이미 감사할 수 있는 자그만 은총들이 널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틱낫한 스님이 말하듯이, 치통을 앓고 난 다음에야 우리는 이가 아프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 이가 아프지 않다는 것도 사실은 감사할 일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에고는 이런 작은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를 향해 달려가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더 많이'가 채워지지 않을 때는 물론이고, 우리 에고가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많은 반대에 부딪치게 될 때 우리의 에고는 좌절이라는 늪 속에 빠져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좌절이 아니라 우리의 에고를 의식하게 하는 자명종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좌절의 늪이 아닌 은총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네 안에 빛이 어둠이면..."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 말씀이지요?! 빛이 어떻게 어둠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말씀은 우리가 어둠을 빛으로 착각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어둠인데도 그것이 빛인 양 끝없이 추구하려는 우리 에고의 기만적인 경향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에고의 경향을 의식하여 자그만 기쁨에 행복을 찾으려는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런 시련과 아픔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미소를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자그만 행복들이 널려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은 것에 우리의 눈을 둔다면 절대 볼 수 없는 자그만 행복들 말입니다.
그러나 이 채워지지 않은 것에 시선을 두지 않고 지금 '나'를 은총 속에 있게 하는 것에 시선을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자그만 행복들 안에서 하늘 나라를 향해 가는 여정을 용기 있게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현 상태가 어떻든 그 상황에서 우리를 당신의 선으로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주 이 진리를 마음에 간직하고 새겨야 할 것입니다.
재물이나 우리 에고의 욕망이 채워진다 해도 그것은 우리를 참으로 부유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것은 단지 대체물, 하나의 기호에 불과합니다. 참된 부요함은 관대한 영혼, 곧 사랑과 나눔의 영 안에 있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영적인 성숙]이라는 묵상글로 오늘 복음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 성숙 –
자기-포기의 힘은 우리 영혼이 그 자체에 폐쇄되어서 끔찍이도 게으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참으로 의식하게 될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두려움의 체험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영적인 삶의 완전한 성숙은 우리가 두려움과 고뇌, 시련 그리고 무서움을 먼저 겪기 전까지는 이를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감정들은 우리가 마침내 외적인 자아에 매달리려는 경향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께 완전히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영적인 죽음인 내면적 위기를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 전적인 내맡김이 진정으로 이루어지게 될 때, 거기에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낄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완전하고 결정적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기에게 바라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추구하거나 행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의 마음에는 더 이상 의혹이나 주저함이 존재할 수 없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두려움 그 자체가 바로 사랑과 신념과 희망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하면, 이 어두운 밤의 목적은 사람의 마음에 벌을 주거나 해를 입히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완전한 사랑으로 해방시켜 주고 정화시켜 주며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다. 두려움을 통해서 가는 길은 좌절(실망)에 이르지 않고, 완전한 사랑에 이르게 된다. 지옥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 20:55 추가.
260619.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 10:52 현재 작은형제회 홈페이지에 게재되지 아니함.>
++++++++++++++++++++++ 20:55 추가.
하느님 나라를 보물로 여기는 사람
마음이 머무는 곳, 보물 (21절)“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우리가 시간과 재정, 그리고 에너지를 가장 많이 쏟는 곳이 곧 우리의 '보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그 보물을 향해 움직이지요. 내가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드는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삶을 밝히는 창, 눈 (22~23절)
눈은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여기서 '눈'은 단순히 시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가치관, 그리고 영적인 시선을 의미합니다. 맑은 눈은 세상을 따뜻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본질을 꿰뚫어 보는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입니다. 이 눈이 맑으면 우리의 삶 전체가 밝은 빛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성하지 못한 눈은 탐욕이나 시기, 원망으로 흐려진 시선입니다. 세상을 왜곡해서 보기 시작하면, 아무리 주변 환경이 좋아도 내면은 늘 어둡고 그늘질 수밖에 없습니다.결국 이 말씀은 "네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바르게 정하고, 세상을 맑고 선한 시선으로 바라보라"는 다정한 권고와 같습니다.
이 말씀을 프란치스칸 영성과 연결해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물과 눈은 결국 관계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내 보물이 성공이라면 마음은 성공을 향해 달려갈 것이고, 내 보물이 인정이라면 마음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평가를 살피게 될 것이며, 내 보물이 나 자신이라면 세상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보물이 하느님이라면, 내 보물이 형제자매라면, 내 보물이 공동선이라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사랑이 있는 곳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에게 가장 큰 보물은 돈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며 명예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보물은 가난하신 그리스도였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사랑이었습니다. 보물이 거기에 있었기에 그의 마음도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맑은 눈은 단순히 착한 마음이 아니라, 세상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맑은 눈은 다른 사람 안에서 경쟁자를 보지 않고 형제를 봅니다. 맑은 눈은 상대방의 약점보다 아픔을 먼저 봅니다. 맑은 눈은 실수 뒤에 숨은 선의를 발견합니다. 맑은 눈은 누군가의 성공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고 함께 기뻐할 이유로 받아들입니다. 반대로 성하지 못한 눈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다른 사람의 재능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다른 사람의 성공은 비교의 근거가 되며, 다른 사람의 행복은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는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눈이 어두우면 세상도 어두워집니다. 세상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바라보는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보물이 되면 기쁨은 늘 불안합니다. 누군가가 나보다 더 빛나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보물이 되면, 그리고 형제자매의 행복이 보물이 되면, 상대방이 빛날수록 나의 기쁨도 커집니다. 그래서 진정한 리더는 자신이 빛나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을 빛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부모는 자녀의 성장을 자신의 영광처럼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형제는 형제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처럼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자신은 작아지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세례자 세례자 요한의 고백처럼,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이것이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 눈은 모든 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축복하려 합니다. 그 눈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창문이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로 인해 행복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참 좋다." 하고 미소 짓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보물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보물이 있는 곳에 머물고, 우리의 눈은 맑아지며, 우리의 온 삶은 하느님의 빛으로 환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 5장은 인간이 가장 쉽게 빠지는 유혹, 곧 자기 자랑과 자기 영광에 대한 깊은 경고입니다.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자랑할 것이 있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합시다." 이 말씀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갈라 6,14)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를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는 자신을 높이는 곳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소유하는 힘이 아니라 내어주는 사랑의 힘입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깃발처럼 보이지 않지만, 사실은 사랑이 이기고 용서가 이기고 겸손이 이기는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행한 선행도 자랑하지 않았고, 기적도 자랑하지 않았으며, 가난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알았기에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하느님의 자비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의 관계 안에서 묵상해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내가 빛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빛나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칭찬받기보다 형제가 칭찬받는 것을 기뻐하고, 내가 인정받기보다 공동체가 살아나는 것을 기뻐하며, 내 이름이 알려지기보다 하느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꽃피는 것을 보는 기쁨,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기쁨, 내가 작은 도구가 되어 누군가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는 기쁨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은 바로 여기에서 완성됩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겸손,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고통 자체를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 나를 비우고 사랑으로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방식을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높아지기보다 상대를 높여 주는 것, 내가 영광 받기보다 하느님의 이름이 빛나는 것, 내가 기억되기보다 사랑이 기억되는 것, 바로 그곳에 복음적 가난과 겸손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통치 곧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여 관계 안에 선이흐르도록 하는 삶이 보물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보물이 될 때 나의 왕국은 사라지고 맙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21) 라는 말씀은 결국 어느 나라를 선택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보물이 하느님 나라라면 마음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흐르고, 보물이 내 왕국이라면 마음은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굽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란 죽어서 가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통치, 곧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말씀이 내 생각보다 앞서고, 말씀이 내 판단보다 앞서고, 말씀이 내 욕망보다 앞서며, 말씀이 관계를 이끌어 가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때 관계 안에 선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용서가 흐르고, 이해가 흐르고, 인내가 흐르고, 자비가 흐르고, 서로를 살리는 생명이 흐릅니다.
이와는 반대로 내 왕국은 끊임없이 나를 중심에 세우려 합니다. 내가 옳아야 하고, 내가 인정받아야 하며, 내 뜻이 이루어져야 하고, 내가 주인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와 내 왕국은 함께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커질수록 내 왕국은 작아지고, 내 왕국이 커질수록 하느님 나라는 설 자리를 잃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바로 이 내 왕국을 내려놓는 가난이었습니다. 그는 재산만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이 되려는 욕망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보물이 된 사람은 상대를 이겨야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상대가 살아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됩니다. 상대를 지배하려 하지 않고, 상대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존중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빛나는가"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흐르는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보물이 된 사람의 눈은 맑아집니다. 형제를 경쟁자가 아니라 선물로 보고, 공동체를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자리로 보며, 세상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이 머무는 장소로 봅니다. 그 눈이 맑기에 온몸이 환합니다.
결국 보물은 단순히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보물은 내 삶을 움직이는 중심입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보물이 될 때, 말씀의 통치가 보물이 될 때, 관계 안에 선이 흐르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보물이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왕국을 세우느라 애쓰지 않습니다. 내 왕국이 무너지는 것을 슬퍼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가 우리 사이에 자라나는 것을 기뻐하는 것. 그것이 가장 값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삶이며, 복음적 가난과 겸손이 열매 맺는 자리입니다.
----------------------------------------------------
260619.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 10:50 추가
마태 6,19-23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만큼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은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들에게 땅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특별히 내려주신 ‘선물’이자 ‘유산’이지요.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이 변변한 터전도 없이 남의 나라에서 서럽고 힘든 ‘종살이’를 하고, 주변 강대국에게 나라를 점령당하고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향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등 땅 없는 설움을 겪다보니 ‘내 땅’에 대한 애착이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은 언제나 ‘땅’, 즉 세상을 향해 있었습니다.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도, 삶이 주는 참된 기쁨과 행복도 다 땅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온통 땅만 바라보고 있는 그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땅에서 많은 소출을 얻어 누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 여기던 그들에게, 땅이 주는 행복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낡거나 사라지는 것은 물론, 누가 나에게서 훔쳐가거나 억지로 빼앗아가기도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런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행복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을 주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 행복은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다른 이의 손에 빼앗길 일도 없다고,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완전한 행복을 놓치지 않고 잘 받아 누릴 수 있도록 항상 하늘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인 사랑과 자비를 충실히 실천하는 삶을 통해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어야 하는 이유는 ‘나의 보물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면 내가 소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곧 내가 값진 ‘보물’로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지금 나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즉 나의 눈이 하느님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을 향하고 있는지, 나의 보물이 하느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인지를 제대로 식별해야 하는 겁니다. 내 마음이 머무르는 곳에 내 영혼이, 그리고 내 행복이 있는 법입니다. 내 마음이 하느님 나라에 머무르지 못한다면 ‘나’라는 존재도 거기에 참으로 머무르지 못하고,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상태로는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이 하늘을 향하도록, 하늘에서 나의 보물을 찾도록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편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욕망과 집착을 투영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다른 쓸 데 없는 것으로 가려지지 않은 맑고 또렷한 눈으로 세상과 삶을 바라보면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나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깊은 뜻을 알아보게 되지요. 호수가 산을 제 안에 품을 수 있는 것은 깊어서가 아니라 맑아서이듯, 내 눈이 맑아지고 그렇게 내 영혼이 깨끗해지면 내 마음과 영혼 안에 주님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참된 행복이라는 보물이 참으로 내 것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