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묵상글 1차(0623. 22:30), 2차(05:10), 3차(08:20)
작성자김 루도비꼬작성시간26.06.23조회수63 목록 댓글 0
+++++++++++++++++++++++++++++++++++++++++++++++++++
26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묵상글
1차(0623. 22:30), 2차(05:10), 3차(08:20)
6월 24일 묵상글, 23일 22시 3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 어제 묵상글 아래쪽 부터 2번째 이 마르첼리노 수사님 묵상글(추모시 등)을 보십시요
프란치스칸들에게는 한 형제사 선종하여 장례미사 등을 치루었기에
오늘 김찬선 신부님은 새로 강론글도 못쓰셨는 것 같습니다.
박수종 라우렌시오 수사님께 영원한 빛을 주소서.
+++++++++++++++++++++++++++++++++++++++++++++++++++
++++++++++++++++++++++++++++++++++++
========
< 1 차 >
----------------------------------------------------
26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57-66.80
오늘 복음은
한 아기의 탄생과 이름을 둘러싼 이야기를 전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은총’, 곧 ‘하느님의 선물’을 뜻합니다.
아기의 이름을 두고 사람들이 관습을 내세울 때,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에 순종하여
‘요한’이라는 이름을 단호히 선포합니다.
그 순종의 순간, 즈카르야의 닫혔던 입이 열리고
그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순명이 침묵을 찬미로 바꾼 것입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의 시선으로 보면
세례자 요한은 ‘소리’이고, 그리스도는 ‘말씀’이십니다.
소리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 먼저 울리고,
말씀이 다다르면 조용히 사라집니다.
요한의 온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메시아로 내세우지 않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하며
오직 뒤에 오실 분을 가리켰습니다.
그레고리오는 이 낮춤에서
참된 위대함을 봅니다.
가장 큰 인물이
기꺼이 가장 작은 자리로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물음 뒤에
복음은 곧바로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다’고 답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광야로 들어가
이스라엘 앞에 나설 때까지 오래 숨어 지냅니다.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광야에서,
그는 침묵과 기다림으로 자신을 빚어 갑니다.
큰 사명일수록
더 깊은 숨음과 더 긴 인내를 통해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관점에서 보면
요한은 ‘모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둘레에 사람을 가두지 않고
모두를 한 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했습니다.
교회의 일치도 이와 같습니다.
저마다 자기 깃발을 높이 들면 갈라지지만,
함께 한 분 주님을 우러러볼 때 하나가 됩니다.
평화/인내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요한의 광야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빨리 드러나고 빨리 인정받기를 바라지만,
열매는 숨은 인내의 시간 속에서 익습니다.
작아짐과 기다림은 패배가 아니라
가장 깊은 평화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나를 내세우는가, 그분을 가리키는가?
나는 작아지는 것을 패배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숨은 광야의 시간을 인내로 견디고 있는가?
나는 사람들을 나에게가 아니라 주님께로 모으고 있는가?
주님,
세례자 요한처럼
그분은 커지시고 저는 작아지게 하소서.
저를 앞세우지 않고 당신을 가리키게 하시며,
광야의 인내 속에서 당신의 때를 기다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흩어진 이들을 당신께로 모으게 하소서.
아멘.
----------------------------------------------------
26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살면서 신기한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1983년입니다. 여름 행사를 마치고 보좌 신부님과 주일학교 교사들과 안면도로 단합대회를 갔습니다. 30명 정도가 같이 갔습니다. 안면도 해수욕장에서 잠시 쉬면서 있었습니다. 저와 교사 한 명이 돌아와 보니 버스는 떠나고 없었습니다. 저와 교사는 수박 하나를 사 먹고 아카시아 잎을 하나씩 떼어내는 게임을 하면서 걸었습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논두렁에 버스 한 대가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이 타던 버스였습니다. 바퀴가 논두렁에 빠져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와 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 주님께서는 제가 힘들까 봐서 버스를 세워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해 안면도에서는 또 다른 추억도 있었습니다. 교사들과 함께 바닷가로 랜턴 건전지를 사러 갔습니다. 오늘 길에 성가도 부르고 즐겁게 오는데 그곳 청년들과 만났습니다. 청년들이 시비를 걸어서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교사 중의 한 명이 어둠을 뚫고 민박집으로 가서 일행을 데려왔습니다. 청년들은 우리를 보호해 주려고 했다면서 조용히 물러갔습니다. 지금도 어둠을 뚫고 용감하게 탈출(?)했던 교사가 생각합니다.
지난 5월 11일에 ‘북미주 사제 협의회’ 모임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신기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제가 대표 사제이기에 아침 일찍 떠나는 비행기 표를 구했습니다. 떠나기 전날 비행기가 취소되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항공사에서 대체되는 항공편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달라스, 샌디에고,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노선이었습니다. 오후로 일정이 정해져서 오전에 운동도 하고, 좀 쉬다가 공항으로 갔습니다. 개막 미사도 부회장 신부님께 부탁했습니다. 샌디에고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또 비행 일정이 취소되었습니다. 탑승했던 비행기에서 내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때 출발을 알리는 전광판에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노선이 보였습니다. 저는 서비스 센터로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탈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직원은 컴퓨터를 검색하더니 딱 ‘한 자리’가 남았다고 하면서 티켓을 주었습니다. 하루에 두 번 비행기가 취소되었지만, 주님께서는 저를 위해서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길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인기를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께 향하는 것을 서운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게 만듭니다. 더 성공한 사람, 더 많이 가진 사람, 더 인정받는 사람이 부러워집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비교의 삶이 아니라 사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흔들리기보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의 십자가를 집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의 십자가를 집니다. 어떤 사람은 이민 생활의 외로움과 경제적인 부담이라는 십자가를 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의 아픔과 오해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 함께 일으켜 주시고, 길이 막힌 것 같을 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을 지내면서 세 가지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첫째, 겸손의 은총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나는 그분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 둘째, 충실함의 은총입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에게 맡겨진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충실함입니다. 셋째, 신뢰의 은총입니다. 비행기가 두 번 취소되어도 결국 길을 열어 주셨던 것처럼, 내 삶도 주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처럼 보여도, 때로는 계획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하게, 충실하게, 그리고 믿음 안에서 주어진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
26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받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막 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이로움을,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시 139,4)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이사 49,1-2)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기투성의) 존재”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친척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아기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르야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는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개입)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그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주님!
정녕 당신께서는 당신 손길로 저를 보살피셨습니다.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아오셨고
알아보지 못하여도 늘 함께 하셨습니다.
제가 응답하지 않아도 돌보아주셨고
배척할 때도 떠나지 않고 늘 품고서 기다리셨습니다.
고통과 상처를 눈물로 씻어주시고
좌절과 실망에 빠졌을 때는 바닥이 되어 떠받치셨습니다.
침묵으로 견디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제 심장에 들어와 당신 손길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는 제가 당신의 손길이 되어 맡겨진 이들을 보살피게 하소서.
----------------------------------------------------
260624.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마을의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펼쳐지지만, 그 중심에는 인간의 뜻과 하느님의 뜻이 어긋나는 긴장이 흐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말씀이 결국 이루어진다는 사실, 그것도 인간의 저항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이 긴장의 바탕이지요.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을 가진 요한이라는 이름 대신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지으라는 사회적 압력은 하느님을 향한 엘리사벳과 즈카르야의 순종 앞에서 힘을 잃고 맙니다.
즈카르야가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그는 다시 말을 하게 되고, 그가 처음으로 하는 말은 하느님을 향한 찬미가 됩니다.
즈카르야의 해방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획 앞에서 인간의 망설임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그리하여 하느님의 계획이 거침없이 펼쳐지리라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즈카르야의 이웃들은 두려움, 곧 거룩한 경외심에 사로잡힙니다.
사람들은 이를 마음에 간직하며 묻지요.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오늘 복음은 다음 말을 덧붙입니다.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1,66).
여기서 우리는 루카 복음서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역사 안에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작은 마을이 오랫동안 간직한 전통 의식과 이름 하나를 통하여 구원의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전통과 관습을 넘어서는 구원과 은총이 그렇게 인간 공동체 한가운데에 새겨집니다.
현실 논리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과학이나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정당하다고 인식하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역사하심과 그분의 섭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즈카르야의 이웃들처럼 우리도 묻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펼쳐질 것인가?”
그리고 이렇게 물음으로써 하느님을 잊지 않고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
26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희망은 수양을 통해 길러집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기쁨이 어떻게 세상의 어둠에 맞서는 신앙의 저항이자, 하느님께서 주시는 희망의 표징이 될 수 있을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고난의 때의 희망
희망은 수양을 통해 길러집니다.
2026년 6월 23일 화요일
CAC의 온라인 모임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요?"에서 그래미상을 수상한 예술가요 음악가인 존 바티스트(Jon Batiste)가 CAC 팀과의 대화에 함께했습니다. 학부 학장 카르멘 아세베도 부처는 바티스트에게, 인간성을 빼앗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인간됨을 확인하는 길로서 기쁨과 기념(joy and celebration)의 의미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지금 어디에서 그런 비인간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보십니까?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기쁨을 저항의 행위로 살아낼 수 있을까요?" 이에 바티스트는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참 많고, 바라볼 수 있는 관점도 다양합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여러 축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세상을 바라보곤 합니다. 곧, 개인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들, 우리 주변 세계를 관찰하는 시선, 그리고 궁극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동시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과 굴곡을 보며, 우리 세대와 앞선 세대들이 지나온 다양한 국면들을 함께 목격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여러분에게 참되고 의미 있는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진실한 기쁨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고통에서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고통을 변화시키고, 은총 안에서 새롭게 빚어내는 과정입니다. 설사 외적인 상황을 여러분이 바꾸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여러분에게 참되고 진실한 공간으로 옮겨집니다. 깊은 희망은 어려운 상황에 의해 억눌릴 수 없습니다. 희망은 여러분의 처지를 넘어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긍정적인 결과를 믿거나 그 증거를 보지 못할 때 희망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희망은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가장 빛나는 빛이 솟아날 수 있다는 내적 확신입니다. 그 희망을 찾으려면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희망을 주관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나의 희망은 어디에 뿌리를 고 있는가? 궁극적인 결말에 대해 나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저는 희망이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희망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언어입니다. 희망은 상황을 초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물질성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영적인 것이며,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참된 보이지 않는 영역의 언어입니다. 희망은 그 기초를 세워 나갈 때 생겨나는 깊은 내적 확신입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이 마치 "접촉 경기(contact sport)"와 같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것은 훈련하고, 노력하며, 점점 더 나아지는 것입니다. 설사 제 집이 물에 잠기고 지붕에 불이 붙는다 해도, 저는 여전히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배 안에 머물 것입니다.
이 길이 늘 쉬운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선택하여 삶의 가장 깊고 진실한 자리, 곧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뿌리에 자신을 두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진실하게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 위에 삶을 세워 나갈 수 있으며, 그것은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어떠하든, 우리가 그것을 통제할 수 있든 없든, 그 희망은 계속해서 자라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사도행전의 장면을 묵상하노라 저는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 사랑을 친밀한 공동체의 중심에서 드러내는 사도들과 신자들의 모습이 믿기 어려울 만큼 놀랍고 또 지극히 바람직하게 느껴집니다. 이는 오늘날 세상의 분위기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결핍과 풍요, 평화·희망·사랑과 군비 증강 사이의 대비 말입니다. 행동과 관상은 모두 제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배우고 체험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 Sean K.
References
Carmen Acevedo Butcher and Drew Jackson with Cole Arthur Riley and Jon Batiste, “How Do We Find Hope in Hard Times? A Contemplative Response to Uncertainty, Loss, and Change,”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March 13, 2026). Unavailabl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yu Ha,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희망과 우리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시간에 연결되고자 하는 깊은 열망으로 손을 뻗습니다.
----------------------------------------------------
26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영근 님
■ 성모님과 사도들의 죽음
** 성모님과 사도들의 죽음
오늘은 성모님과 사도들에 대해 묵상해보려 합니다
특히 그분들이 어떻게 죽으셨는지 살펴 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12사도들과 성모님은
어떻게 죽으셨는지 인터넷 AI, 위키백과사전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
0) 성모님 - 예루살렘 또는 에베소에서 죽은것으로 추정, 몽소승천 했다는 전승
1) 베드로 -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2) 안드레아 - 그리스에서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매달교 순교, 베드로의 동생
3) 야고보(대) - 로마 헤롯 아그리파에게 참수형, 사도 요한의 형
4) 요한 - 에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가장오래 살고 자연사, 요한묵시록의 저자
5) 필립보 - 그리스에서 선교하다가 순교, 원형십자가
6) 바르톨메오 (나다니엘) - 아르메니아에서 순교
7) 토마스 (도마) - 의심많은 제자, 인도에서 선교 순교
8) 마태오 (마태) - 전직 세리, 에디오피아 또는 페르시아에서 순교
9) 야고보 (소) -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성전에서 떨어지고 돌에 맞아 죽음
10) 유다 타대오 - 페르시아에서 순교
11) 시몬 - 열심당원, 페르시아에서 순교, 톱으로 몸이 잘리워 죽음
12) 마티아 - 배신자 유다 대신에 뽑힌 사도, 악숨 (에디오피아) 에서 순교
-------------------------------------------------------------------------
거의 모든 사도들이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신 것으로 전해집니다
눈에 띄이는 점은 사도 요한과 성모님은 순교하시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요한과 성모님은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신 분들일텐데요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신 분, 있지 않으신가요?
---------------------------------------------------------------------
개인적인 생각은
사도 요한과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물과 피를 흘리며 죽으실때 직접 목격하며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은 순교한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건방진 생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사도 요한과 성모님은 예수님 십자가 수난에 함께 한것으로
말미암아 순교로서 하느님께서 인정하시는것 같다 생각합니다
========================================================================
오늘은 한발자국 나가 봅니다
지금은 21세기, 인류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문명을 발달시키고
발을 딛고있는 지구라는 행성을 벗어나 우주로 나아가려 합니다
또한 80억명의 사람들이 다양한 얼굴 처럼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다른 다양한 세계관과 사람이 있습니다
이글을 읽는 분들.. 아니 우리나라 크리스찬 중에는
예수님을 위해 생명을 바칠수도 있다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크리스트교는 지난 2000년 동안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순교하는 사람들을
계속 배출했습니다. 순교는 가장 큰 봉헌 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순교하는 것도 좋지만
살아서 예수님을 만나뵙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것 입니다
뭐.. 어느것을 선택하든지 자유이겠지요.
만약 살아남아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분들은
다음의 사항을 실천하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
자주 미사를 드리고 영성체를 하십시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매일 깊히 묵상하십시요
묵주기도와 하느님 자비심 기도를 매일 드리십시요
-----------------------------------------------------
=========================================
* 덧붙여서 : 예수님 십자가 수난 묵상은
1) 인류 구원을 위해 자기 생명까지 희생하시며
봉헌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 하십시요
2) 성모님의 통고 즉 아들의 십자가 수난을
바라보시는 고통을 깊히 공감 하십시요
----------------------------------------------------
++++++++++++++++++++++++++++++++++++
========
< 2차 >
----------------------------------------------------
26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24 05:02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어제와 오늘 여러 가지 일로 몸과 마음이 바빴는지
강론이 잘 나오지 않아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지워 결국 새로 쓰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강론을 올림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세례자 요한 대축일-2016 < 위인과 성인의 차이>
“나는 그분이 아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위인과 성인이 있습니다.
위인전이 있고 성인전이 있습니다.
제가 성소계발의 책임을 겸직할 때 성소자들이 오면
제가 두 가지를 꼭 물었습니다.
좌우명은 무엇이었고 지금은 무엇이냐?
닮고 싶은 위인이 누구였고 지금은 누구냐?
아무런 좌우명도 없고 닮고 싶은 위인도 없으면
그것으로 성소가 없다고 판단하고 돌려보냈습니다.
목표 없이 되는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뜻이며
지금까지 닮고 싶은 위인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고
프란치스코 성인을 닮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되는대로 살아왔고 닮고 싶은 분도 없었지만
이제 깨달아 예수님과 프란치스코를 닮는 삶을 살고자 마음먹고
저희 수도원을 찾아온 것이겠지만
지금까지 본받고 싶은 위인이 없이 살아왔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본받고 싶은 성인이 생기고
그분을 닮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것은
아주, 아주 정말 특별한 사람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게 됩니다.
위인과 성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이 성인이 되는 것일까?
위인과 성인의 차이는 제 생각에 이렇습니다.
위인은 그 인물 자신이 큰 존재입니다.
큰 뜻을 품고 있고,
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큰 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에게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앞에 있으며 그들 가운데서 뛰어난 존재일 뿐입니다.
이에 비해 성인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늘 하느님 앞에 있으며
그 자신이 큰 인물이 아니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 그러하듯
자기는 주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을 정도로 작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인들은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자기에게 몰려와도
사람들 앞에 있지 않고 자신은 늘 하느님 앞에 머물며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를 훌륭하다고 추켜세워도
자신은 하느님 앞에서 작은 자로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인들은 사람들과 담을 쌓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많은 사람 가운데 있지만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존재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이 이런 역할을 아주 충실히 하신 분입니다.
자기에게 몰려오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이 아니오.”라고 세례자 요한은 분명하게 얘기하며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고 하며 주님을 가리키고,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을 주님의 제자로 내어드립니다.
저는 위인도 못 되지만 성인은 더더욱 못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위인은 못 되도 좋지만 성인은 되어야 할 존재지요.
이것을 세례자 요한을 통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
++++++++++++++++++++++++++++++++++++
========
< 3차 >
----------------------------------------------------
26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즈카르야 노래의 작곡자는 하느님, 작사자는 성령이십니다!
가끔 수녀님들 연피정을 동반해드리는데, 저희 남자 수도자들보다 훨씬 침묵을 잘 지키십니다.
사오십 명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하는데, 정말이지 쥐죽은 듯 조용합니다.
잘 적응이 안 되는 저는 소화가 잘 안되, 끼니를 줄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은 그럭저럭 참을만한데, 일주일, 8박9일, 30일 대 침묵 피정,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큰 괴로움입니다.
특히 차 한 잔 앞에 두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술 한잔 씩 들이키며 술술 풀어놓아야 쌓인 것이 풀리는 사람들에게 있어 대 침묵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10개월간의 대 침묵 피정에 참석했습니다.
그 10개월 동안 얼마나 할 말이 많았을까요?
억울한 심정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타의에 의해서 10개월 동안 말을 못 하게 되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 즈카르야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10개월 만에 혀가 풀리고 말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10개월 만에 말을 하게 된 즈카르야가 내뱉은 첫마디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 대한 투덜거림이었을까요?
강한 분노의 표출이었을까요?
자신이 뭐 그리 큰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강한 벌칙을 주셨냐며, 하느님께 따졌을까요?
모두 아니었습니다.
즈카르야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첫 마디는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찬가 즈카르야의 노래였습니다.
저희 수도자들은 매일 아침기도 때 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바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구약을 완성하기 마지막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하느님께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동시에 메시아의 탄생을 고대하는 희망의 노래입니다.
이런 희망과 환희와 감사로 가득 찬 즈카르야의 노래와 더불어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라는 의미에서 아침마다 이 노래를 바치는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 탄생 사화의 결론입니다.
즈카르야 노래의 작곡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작사자는 성령이십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즈카르야의 신앙고백입니다.
즈카르야의 깨어남은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미하는 즈카르야의 노래로 연결됩니다.
즈카르야가 찬미가를 부르는 순간은 그간 지니고 있었던 모든 불신과 의혹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입니다.
즈카르야가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자기중심적 삶을 넘어 참된 하느님의 사제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눈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은 또 다른 즈카르야의 노래를 부를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다시금 자비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새 출발의 순간입니다.
----------------------------------------------------
26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루카 1,57-66.80)>
1)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표징과 같은 일입니다.
여기서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라는 말은,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한 말을 이웃과 친척들이 아직 전해 듣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한 이 말은, 겉으로는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을 예고한
말인데, 실제로는 ‘메시아 강생 예고’입니다.
‘메시아 강생’은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웃과 친척들이 ‘메시아 강생 예고’를 알고 있었다면,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만 큰 자비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바로 그것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66절의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라는 말도, ‘메시아 강생 예고’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기록한 것입니다.
‘메시아 강생 예고’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녕 주님의 손길이 모든 사람을(또는 ‘나’를) 보살피고
계신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 64절에 즈카르야가 말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자
하느님을 찬미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찬미는
68절-79절의 ‘즈카르야의 노래’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은 76절-79절입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6-79).”
이 찬미는,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이 아니라
메시아께서 하시게 될 일에 초점을 맞춘 찬미이고, 이 찬미도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말입니다.
3) 이처럼 ‘세례자 요한의 출생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하느님과 메시아’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바로 내가’ 진짜 주인공입니다.
메시아는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라는 말과 ‘우리’ 라는 말 때문에 ‘내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못하거나 그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은데, 하느님과 메시아께서 하시는 일은 항상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나의 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신앙생활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대신할 수 없는, 내가 스스로 해야 하는 나의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잔치로 비유할 때가 많은데, 잔치 초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따로 합니다.
다른 사람이 잔치 음식을 먹는 것을 구경만 하는 것은 초대에 응답하는 것도 아니고, 참석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직접 먹어야 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 다섯이 빠졌어도 혼인 잔치는 예정대로 진행되었습니다(마태 25,10).
다섯 처녀가 없다고 혼인 잔치가 연기된 것도 아니고, 그들을 기다려 준 것도 아닙니다.
다섯 명이 잔치에 못 들어간 것은, 그들만의 문제로 끝나버렸습니다.
이 말은,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해도 ‘우리’ 라는 공동체에 묻혀서 그냥 넘어가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구원 문제는 철저하게 메시아와 나의 ‘일대일의 문제’입니다.
내가 구원받으려는 노력을 하나도 안 했는데도
남의 덕으로 대충 구원을 받는 일도 없고, 열심히 했는데도 다른 사람 때문에 억울하게 손해를 보는 일도 없습니다.
지금 이 말은 개인주의가 아닙니다.
구원은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고, 생명이란 원래 개별적인 일입니다.
물론 탈락자가 생기지 않도록 서로 도와주는 형제애가 있어야 하지만, 탈락의 책임은 탈락자 자신에게 있습니다.
----------------------------------------------------
26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성 요한 세례자 대축일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
예전에 읽었던 이야기 하나를 나누며 오늘 복음 묵상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어느 큰 도시의 학교에는 병으로 입원한 아이들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특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 프로그램에 배정된 한 교사가 병원에 입원한 한 아이를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이의 이름과 병실 번호를 받아 적고, 담임 교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그 임시 교사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지금 우리 반은 '단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특별히 명사와 부사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아이가 병원에 입원해 있어도 학업에 뒤처지지 않도록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요...
그날 오후, 그 임시 교사는 병원으로 아이를 찾아갔습니다. 그 아이는 큰 사고로 심하게 화상을 입어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교사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너네 학교에서 보내서, 너에게 명사와 부사를 가르쳐 주려고 왔단다."
…
그러고는 아이에게 어떻게 명사와 부사에 대해 가르쳐 주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 없이 수업을 마쳤는데, 병실에서 나와 돌아가는 길에, 그 교사는 그 아이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아이를 담당하던 간호사가 그 임시 교사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을 하셨나요?"
교사는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싶어 사과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간호사가 말을 끊으며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그 아이가 회복 의지를 잃을까 걱정했었는데, 선생님이 다녀가신 뒤로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치료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마치 '살기로 결심한 것처럼' 변했답니다."
두 주 후, 아이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완전히 희망을 잃고 있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오셔서 '명사와 부사'를 가르쳐 주셨을 때 깨달았어요. 죽어가는 아이에게 그저 단순히 단어 공부를 시키기 위해 선생님을 보내지는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던 거예요. 그 순간, 저는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작은 '단어 공부'의 행위가, 죽음의 문턱에 있던 아이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은 것입니다.
희망은 현재의 고통을 견디게 하는 힘입니다. 그 희망은 오지 않은 미래에 있을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 고통을 이겨낼 힘이 부여되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는 훈련, 혹은 수행을 통해서 더욱 깊어지고 강해지는 것입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 아이에게는 그 임시 교사가 바로 그런 희망의 불씨였던 것입니다.
학교에서 그 임시 교사를 보낸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그 아이는 그 선생님의 파견을 희망의 메시지요 희망 그 자체로 받아들였던 겁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시기 위해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활용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강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례자 성 요한 탄생 대축일은 바로 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복음은 성 요한의 탄생과 이름을 붙여주는 아름다운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성 요한의 탄생은 신앙의 역사가 전환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자, 신약의 첫 예언자였습니다.
성 요한의 탄생에서 두드러지는 메시지 중 하나는, "극심한 불모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루카 1,7)라고요...
엘리사벳의 불임은 단순한 개인의 상황을 넘어, 우리 인간과 세상의 열매 맺지 못하는 상황을 상징합니다. 죄와 악으로 인해 세상은 생명을 키워낼 수 없는 땅이 되었고, 인간은 은총을 받아 거룩하게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 희망의 하느님이시며,
… 모든 약속을 이루시는 하느님이시고,
…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 개인과 인간 세상에 분명한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 순간 이 사실을, 이 진리를 마음 깊이 품고 새기는 삶을 살기 위해 "일신우일신"해야 하겠지요?!!
이런 의미에서... 특별히 어제 CAC(리처드 로어의 '활동과 관상을 위한 센터') 매일 묵상의 한 부분이 참 깊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희망은 그 기초를 세워 나갈 때 생겨나는 깊은 내적 확신입니다. … 그것은 훈련하고, 노력하며, 점점 더 나아지는 것입니다. 설사 제 집이 물에 잠기고 지붕에 불이 붙는다 해도, 저는 여전히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배 안에 머물 것입니다."
희망은 그냥 마음에 한 번 떠올리는 것으로 커지는 것이 아니라 수양과 수행처럼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에 다시 한번 결심해 보도록 합시다.
매 순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피조물들, 여러 상황들이 우리로 하여금 희망을 키워가도록 해 주시는 자극제들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희망을 키워가는 수양에 조금 더 에너지와 시간을 할애해 보겠다고 말입니다!
앤써니 드 멜로의 "Taking Flight"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느 마을에 신심이 아주 깊은 랍비가 살고 있었는데, 그 마을에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다 대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랍비는 그런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거라는 생각으로 기도에만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함께 대피하자고 하는데도 그 랍비는 그 제안을 거절했고, 그 다음에는 집이 물에 차자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대피하자고 했지만 그것도 거절했다고 합니다. 집이 물에 다 차자 그 랍비는 지붕 위에 올라가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헬리콥터를 보내어 구조해 주고자 했지만 그 랍비는 그것마저도 거절했고, 결국은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죽어서 하느님을 만나 그가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제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저에게 도움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도와주기 위해 사람들을 두 번이나 보냈고, 나중에는 헬리콥터까지 보냈는데, 왜 그 도움을 마다하였느냐?"라고요....
----------------------------------------------------
260624.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걱정과 통제의 경계
걱정이 지나치면 통제가 되고, 통제가 지나치면 관계는 숨이 막히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상대를 살리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어느 순간 상대를 내 뜻 안에 가두려는 소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통제의 반대는 무관심이 아닙니다. 통제의 반대는 신뢰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걱정하고, 배우자가 배우자를 걱정하고, 형제가 형제를 걱정하고, 수도자가 공동체의 형제를 걱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걱정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걱정 속에 숨어 있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과도한 부담감과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집착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원초적으로 두려워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적으로 우리의 통제권 너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두려움을 뚫고 예수 안에서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하지 말아라, 괜찮다, 나를 겁내며 살지 않아도 된다." 자기 앞에 나타난 천사를 보고 몸을 떠는 마리아에게 하느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실제로 이 말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위로의 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마리아가 특별히 거룩하고 영웅적인 무언가를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 자리에 온전히 머무르는 것, 나의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놓는 것, 마리아가 그렇게 그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을 활짝 열어놓았을 때, 그는 세상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잉태한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도 마음을 열 때, 우리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상실을 두려워하고, 타인의 마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모든 두려움의 가장 깊은 자리에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계산 안에 갇히지 않으시고, 우리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시며, 우리의 통제권 너머에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하느님마저도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기도를 거래로 바꾸고, 신앙을 안전장치로 만들고, 하느님의 뜻보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복음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그 자리로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무한하신 분이 유한한 인간이 되셨고, 전능하신 분이 연약한 아기가 되셨으며,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앞에 나타난 천사를 통해 인류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신 말씀은 명령도 아니고 심판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복음은 두려움의 종교가 아니라 신뢰의 초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의 현존을 선언하십니다. 마리아가 먼저 하느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마리아가 먼저 자신을 준비한 것도 아닙니다. 은총이 먼저 왔습니다. 사랑이 먼저 왔습니다. 성령이 먼저 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장 아름다운 진실입니다.
우리가 바뀌어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이미 하느님은 문 앞에 와 계십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보여 준 위대함은 어떤 영웅적인 업적에 있지 않습니다. 그녀의 위대함은 열려 있음에 있습니다. 붙들지 않음에 있습니다. 통제하려 하지 않음에 있습니다. 이해한 뒤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앞에서도 자신을 열어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한마디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신앙 고백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이것을 내적 가난이라고 부릅니다. 내적 가난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내 뜻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강박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마음 안에 빈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자궁이 말씀을 품은 공간이 되었듯이, 가난해진 우리의 마음도 하느님을 품는 공간이 됩니다. 그래서 수태고지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 안에 오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오늘도 우리 삶 안에서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성취도 아닙니다. 거룩함을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열어놓음입니다. 침묵 속에 머무는 것, 기다리는 것, 받아들이는 것,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것임을. 그리스도는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태어나시는 분임을. 그래서 신앙의 가장 깊은 자리는 애쓰는 자리가 아니라 머무는 자리이며, 붙잡는 자리가 아니라 내어 맡기는 자리입니다. 마리아처럼 마음의 문을 열어 놓는 사람 안에서 성령은 오늘도 조용히 속삭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이미 여기 와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삶은 또 하나의 수태고지가 되고, 우리의 존재는 또 하나의 베들레헴이 되며, 우리의 일상은 그리스도께서 세상 안으로 태어나시는 거룩한 자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지만 통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부자 청년이 떠나갈 때도 붙잡지 않으셨고, 베드로가 넘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자유를 허락하셨으며, 유다의 배신마저도 억지로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강요하는 사랑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랑이었습니다. 붙드는 사랑이 아니라 허용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역시 형제들을 자신의 작품처럼 만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제들이 실패할 자유와 성장할 시간을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만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적 가난은 "당신은 내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상대를 소유하지 않고, 상대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려 하지 않고, 상대 안에 이미 일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사랑은 점점 조용해집니다. 어릴 때의 사랑은 붙잡으려 하고, 불안한 사랑은 간섭하려 하고, 두려운 사랑은 통제하려 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기다려 줍니다. 성숙한 사랑은 물러서 줄 줄 압니다. 성숙한 사랑은 상대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 드립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걱정 때문에 우리의 삶을 강제로 조종하지 않으십니다. 실패와 눈물과 방황 속에서도 끝까지 곁에 머물며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완성은 상대를 내 뜻대로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상대를 믿고 기다려 주는 능력입니다. 걱정이 신뢰를 잃으면 통제가 되고, 사랑이 자유를 잃으면 소유가 되지만, 걱정이 신뢰를 만나면 기도가 되고, 사랑이 자유를 만나면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믿으며 기다려 줄 수는 있습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지휘관이 아니라 동반자가 되고, 통제자가 아니라 형제가 되며,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작은 도구가 됩니다.
----------------------------------------------------
2606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 18:40 추가
루카 1,57-66.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을 때 받은 이름입니다. 보통은 그 집안의 전통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가문의 이름’을 받곤 했지요.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지어준다는 건 그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식이 그 이름을 받아들이는 건 부모가 자신에게 바라는 뜻에 순명하며 그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자식은 아버지 어머니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렇게 하여 부모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런데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은 ‘요한’이라는, 하느님께서 특별히 지어주신 완전히 새로운 이름으로 할례를 받습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전통에서 본다면 세속의 이름 없이 ‘세례명’만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나지르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런 요한과 우리 사이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께 봉헌되었고, 그분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세례명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의 기도 때 청하듯이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거룩히 빛나시도록’, ‘하느님의 뜻이 그저 하늘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가에 따라, 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얼마나 합당한 사람인지가 드러나게 되지요. 한편,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는 세례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요한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요한이 광야에서 살았다는 건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기 위해 세속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 ‘거리두기’를 통해 그는 탐욕과 집착에 휘둘리지 않고 굳센 정신을 지닐 수 있었지요.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비의 손길로 그런 요한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십니다. 요한이라는 이름 안에 담긴 ‘하느님의 자비’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세상과 거리두기를 하기는 커녕 ‘세상에 속한’ 모습으로, 과도한 탐욕과 집착에 휘둘리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의 부르심에 두 귀를 막은 채, ‘당신께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며 그분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이, 신앙생활이 밥 먹여주느냐’는 배은망덕한 소리로 하느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상태로는 나를 보살펴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나를 좋은 길로 이끄시는 그분의 섭리가 보이지 않기에 슬픔과 절망의 어둠 속을 헤매게 될 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주보로 삼은 성인의 모범을 본받아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겠습니다.
----------------------------------------------------
260624.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 23:55 추가.
2026.06.24 09:01
길을 내는 사람이 태어난 날에
길을 내는 요한, 길이신 예수님, 그리고 길이 되어 가는 사람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던 빈 들판에서 그는 길을 닦았습니다. 왕이 지나갈 길도 아니고, 군대가 행진할 길도 아니었습니다. 상처 입은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길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쳤지만 사실은 돌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교만이라는 돌, 탐욕이라는 돌, 두려움이라는 돌, 자기 확신과 자기 의로움이라는 돌들을 걷어내며 주님께서 지나가실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삶은 비움의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그는 길을 만들었지만 자신은 그 길의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을 자기에게 묶어 두지 않고 언제나 오시는 분을 가리켰습니다. 참된 영성은 사람을 자신에게 이끌지 않고 하느님께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길이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길이 되셨습니다. 병든 이를 품어 주시는 손길이 길이었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자비가 길이었으며,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랑이 길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어주시는 그 사랑은 길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 길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지배하는 길이 아니라 섬기는 길이었고, 소유하는 길이 아니라 내어주는 길이었으며, 승리하는 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기꺼이 져 주는 길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바로 그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유함에서 가난으로,
권력에서 작음으로, 소유에서 형제성으로 걸어 내려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어떤 교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길 자체가 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각자의 길을 걷습니다. 어떤 이는 병상에서 걷고, 어떤 이는 실패와 상실 속에서 걷고, 어떤 이는 외로움과 침묵의 긴 터널을 지나며 걷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깨닫습니다. 내가 길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길이신 분이 나를 찾아오고 계셨다는 것을. 내가 하느님께 다가가는 줄 알았는데 그분이 먼저 내 삶 속으로 들어와 계셨다는 것을.
그 만남이 일어나면 사람은 달라집니다. 이제 더 이상 "어떻게 구원받을까?"만 묻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묻기 시작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작은 길이 될 수는 없을까?" 절망하는 이에게 희망으로 다가가는 길, 상처 입은 이에게 위로가 되는 길, 외로운 이에게 함께 걸어 주는 길, 하느님을 잊어버린 이에게 그분의 따뜻함을 전하는 길이 되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길에서 길을 만나 마침내 길이 되어 가는 삶. 내가 만난 사랑이 나를 통하여 흘러가고, 내가 받은 자비가 또 다른 이에게 전달되며, 내가 경험한 하느님의 현존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표지가 되는 삶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얼마나 많은 것을 아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길이 되어 주었는가에 있습니다. 길을 내는 요한처럼 자신을 비우고, 길이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주며, 성 프란치스코처럼 작고 가난한 형제가 되어, 누군가의 삶 한가운데 놓인 작은 다리가 되고, 한 줄기 오솔길이 되고, 한 줌의 빛이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하느님 나라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관계 안에서 서로를 살리고 품어 주는 사랑의 흐름 자체가 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이 서 계십니다.
성경에서 길은 관계의 방식이며, 존재의 방향이고, 삶이 흘러가는 질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나를 따라오면 천국에 간다"는 의미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곧 하느님께 이르는 방식이다." 라는 선언입니다. 길이 말하는 가장 구체적인 진실은 관계 안에서 드러납니다. 길은 혼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길은 언제나 누군가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 줄 때 길이 생깁니다. 내가 먼저 사과할 때 길이 생깁니다. 내가 이해받기보다 이해하려고 할 때 길이 생깁니다. 내 고집을 조금 내려놓고 상대를 위한 공간을 내어줄 때 길이 생깁니다. 용서가 시작되는 곳에 막혔던 길이 다시 열립니다. 감사가 시작되는 곳에 굳게 닫혔던 길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부부가 서로를 기다려 주는 순간, 부모가 자녀의 실수를 품어 주는 순간, 형제가 형제의 아픔을 대신 짊어져 주는 순간,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의 부족함을 비난하기보다 덮어 주는 순간,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는 길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프란치스칸적으로 말하면 길의 가장 깊은 진실은 내려감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기에 길을 만들고,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기에 길이 되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높아지려 하지 않고, 소유하려 하지 않고, 증명하려 하지 않고, 이기려 하지 않고, 작은 형제가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길이 되었습니다. 길은 결국 사랑의 흐름입니다. 사랑이 흐르면 길이 열리고, 사랑이 멈추면 길도 막힙니다. 그래서 길의 반대말은 길 없음이 아니라 막힘과 단절입니다. 자존심이 막고, 비교가 막고, 소유욕이 막고, 두려움이 막고, 판단과 단죄가 막습니다. 반대로 겸손은 길을 열고, 자비는 길을 열고, 경청은 길을 열고, 기다림은 길을 열고, 감사는 길을 엽니다.
길이 말하는 가장 구체적인 진실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과 사람에게 가는 길은 하나라는 것.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앞의 형제에게 가는 길을 막아 놓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관계라는 길 위에서 우리를 만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길에서 길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의 길이 되어 줍니다. 지친 사람에게는 쉼의 길이 되고, 방황하는 사람에게는 방향의 길이 되고, 상처 입은 사람에게는 위로의 길이 되고, 외로운 사람에게는 동행의 길이 됩니다. 이것이 길의 마지막 진실입니다. 길의 목적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선이 흐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선이 흐르는 곳마다 광야는 길이 되고, 길은 관계가 되며, 관계는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