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 묵상글 들 (대림 2주 월요일-내가 진정 굳세어져야 할 것은?. 등)
*** 맨 아래 방송미사를 시청하셨습니까?, 신부님 강론에서
“이 어려운 시기 함께 하는 신앙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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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대림 2주 월요일-내가 진정 굳세어져야 할 것은?
오늘 이사야서는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불안하다는 것은 안전과 안정이 위태로운 상황을 말함입니다.
불안하다는 것은 지금 안전하지 않고 불안정하다는 말입니다.
지금 담벼락에 금이 가 있어 언제 집이 무너질지 모를 때 불안하고,
지금 암 투병 중인데 언제 죽을지 모를 때 불안합니다.
그리고 내가 죽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불안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굳세어져서 우리의 하느님을 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칼을 들고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보지 말고 하느님을 보라는 말과 같습니다.
헌데 이런 실제 상황에서 사람을 보지 않고 하느님을 보는 게 가능할까요?
인간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단한 사람이나
칼 든 사람을 제압할 힘을 지닌 사람은 혹 자기를 죽이려는 자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그래서 불안해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제가 존경하는 수사님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다.
옛날 제가 결핵환자들과 자활촌을 하기 위해 시골에 갔을 때
같이 간 환자 중에 한 분이 하루는 기도하고 있는 저희 방에
칼을 들고 들어와 저를 죽이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자매님이 다른 분들과 우리 시설에 격려차 오셨는데
공교롭게도 그 자매님과 우리 형제 두 분 다 64일 기도 끝에 만난 겁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님께서는 여자를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가 끝나는 날
그 자매님을 만났으니 하느님께서 짝지워주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그 자매님도 순진하게 그 말을 믿고 당장 결혼해주겠다고 한 것인데
제가 반대하고 나서니 그 형제님이 저를 죽이겠다고 온 것입니다.
그때 같이 기도하시던 수사님이 큰 소리로 지금 기도 중이니 썩 물러가라고
야단치셨고, 그 형제님은 놀라 돌아갔는데 그때 이후 저는 저도 수사님처럼
그렇게 담대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오늘 이사야 말씀처럼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때문에 담대할 수 있을지 생각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런 실제 상황에서 하느님을 볼지, 사람을 볼지는 우리의 선택인데
오늘 이사야서는 굳세어져서 인간을 두려워 말고 하느님을 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앞서 봤듯이 인간을 두려워 하지 않고 우습게 보게 하는 것은
인간적인 굳셈으로도 가능할 수 있지만 그 상황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은
인간적인 굳셈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신앙적인 굳셈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는 말씀처럼 대림절은 오시는 주님을 볼 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는 말씀처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수 있는 것은 주님께 대한 굳센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사야서의 "굳세어져라"는 고작 체력이나 마음이나 의지가
굳세어지라는 말씀이 아니라 믿음이 굳세어지라는 말씀인데
오늘 복음에서 그 많은 사람들의 눈총 속에서도 지붕을 뚫고 환자를
내려보내 치유받게 한 협력자들은 이런 굳센 믿음의 본보기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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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대림 2주 월)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카 5,21)
참으로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루카 5,24)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5,24-25)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일 잇습니다. 그것은 치유 받았어도 “들것”을 여전히 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치료되었다고 해서, 몸을 버려두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이요, 이미 용서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또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들것'에 메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할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할 일입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인류를 태워,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루카 5,24)
주님!
평상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평상을 들고 가게 하소서.
평상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셨듯이,
저도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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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겨울에 비가 내리고 여름에는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이스라엘 집들은 지붕이 평편하였습니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난 계단을 통하여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한낮의 열기를 피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농작물을 펼쳐 놓고 말리기도 하였습니다.
옥상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 지붕은 삼나무나 향백나무로 만든 긴 막대기를 대들보처럼 걸쳐 놓고 그 위에 짚을 깐 다음 마지막에 진흙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겨울비가 내리기 전에 돌로 만든 굴림대를 이용하여 진흙을 단단하게 다졌습니다. 이런 지붕은 마르코 복음서 2장의 중풍 병자 치유 이야기에서처럼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낼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같은 장면을 전하는 오늘 복음에서, 이방인 루카 복음사가는 이스라엘의 기후와 토양은 물론 집 구조가 낯설었기에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복음사가들은 중풍 병자를 도우려 한 이들이 예수님께 병자를 데려가려고 얼마나 노력하였고 그 마음이 얼마나 절실하였는지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눈먼 이들의 눈을 여시고, 귀먹은 이들의 귀를 여시며, 다리저는 이를 사슴처럼 뛰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의 혀가 환성을 터뜨리게 하시는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십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하여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는” 일은 중요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인 지금, 주님을 만나고자 얼마나 열성적으로 노력하고 있는지 이웃과 함께 되돌아봅시다.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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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17-26: 지붕을 벗기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웃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모습을 보고 있다. 중풍 병자는 주위의 사람들의 믿음과 노력으로, 혹은 동료들의 기도와 희생 때문에 예수께 인도되었고, 은총을 받는다. 모든 병자와 죄인들에게는 그를 주님께 데리고 갈 중재자가 필요함을 말해 준다.
예수께서는 그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 환자를 침상에 달아 당신 앞으로 내려보낸 그들의 믿음을, 즉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0절) 하신다. 예수님은 그 환자의 영을 먼저 고쳐주신다. 그냥 걷게 되면 다시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신 그분은 그의 영혼의 병을 먼저 고치신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수군거린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21절)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단죄하며 판단하고 있다. 이 판단이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나의 이웃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나의 잣대로 재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러한 마음을 보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23-24절) 예수께서는 여기서 죄를 용서하는 것과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 중 어느 것이 더 쉬운 것이냐고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다. 두 행위 모두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며,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심으로써 밝혀주고 계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려 하지 않고 그분을 죽이려고 하는 유다의 지도자들이 있었고, 군중들은 그 기적을 보고 두려움에 싸이지만, 하느님을 찬양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26절) 한다. 여기서 오늘이란 루카가 구원의 미래성이 아닌 현재성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지상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누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어야 한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예수께 갔던 친구들의 희생으로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도 받은 만큼 남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할 수 있는 자세를 갖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신앙의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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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루카 5, 26)
우리의 오늘은
어떠한가?
이웃과
이웃사이에
필요한
믿음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필요한 믿음이다.
믿음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준다.
사람을 위한
가장 존귀한
일이 바로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도
병들 때가 있다.
믿음이 병들면
믿음으로
풀어야 한다.
믿음은 주님의
것이다.
믿음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에 있다.
좌절하고
상처입은 이들이
주님을 만나도록
도와주는 데
깊은 믿음의
의미가 있다.
믿음의 가치는
오늘의 의미이다.
믿음으로
오늘을
성찰하게 된다.
믿음은 우리의
인격으로
실천하는 오늘에
참된 의미가 있다.
새날이 밝아온다.
같이 살아가며
함께하는 믿음이
필요한 시간이다.
믿음이 중심이
되어야 할
우리의 관계이다.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듯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믿음에 따른
삶을 오늘도
산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고
실천이다.
우리의
믿음과 실천이
누군가에게는
신기한 오늘이
되게할 것이다.
나와 너를
이어주는
믿음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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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새벽을 열며.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빠다킹 신부님.
어느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께서 옷차림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는 아무도 할아버지께서 자신의 외모에 신경 쓸 것으로 생각하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러자 어떤 분이 말합니다.
“할아버지! 좋아하는 분 생겼어요?”
오래전에 아내를 잃고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대학에서 정말로 마음에 드는 할머니를 만난 것입니다. 그분께 더 마음에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말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었습니다. 당연히 옷차림도 바꿨더니 사람들이 젊어진 것 같다고 말합니다.
할아버지의 모습에 ‘나이 들어 무슨 주책?’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의 큰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나이를 들면 사랑에 빠지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더 큰 실수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 늙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젊어지게 합니다. 몸에 활력을 주고, 긍정적인 마음을 줍니다. 따라서 죽기 전까지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늘 설렘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이 사랑은 이성 간의 에로스적인 사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누군가를 돕는 사랑의 실천은 사람을 젊게 만드는 것 이상의 커다란 변화가 동시에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사랑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친구들이 친구인 중풍 병자를 데리고 와서 지붕을 뜯고 주님 앞으로 내려보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했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복음에서는 특별한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서 중풍 병자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친구들은 중풍 병자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사랑했기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가질 수 있었고, 그 사랑의 마음이 놀라운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모든 병자와 죄인들에게는 그를 주님께 데리고 갈 사랑의 중재자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랑 중재자의 모습을 갖추면서 살고 계십니까?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주님의 놀라운 기적도 함께 따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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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몸도 내 몸같이 소중히 여겨라. 그리고 네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일을 네가 먼저 그에게 베풀어라(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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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언제나 3등입니다
예전에 ‘하느님은 언제나 3등입니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일을 뒤로 미루기만 했던 저 자신에 대한 반성을 많이 할 수가 있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또다시 하느님을 3등의 자리에 놓고 있습니다.
자신의 우선순위 일등은 ‘내가 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리고 우선순위 이등은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친 다음에야 하느님 만나는 일을 하는 우리일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하느님을 몇 등 자리에 올려놓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하느님을 더는 3등 자리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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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인간의 존엄성
형제애에 눈 뜨고 사회적 우애에 귀가 열리는 세상
- 사회교리주간 ⓵ 인간의 존엄성
이사 35,1-10; 루카 5,17-26
사회교리주간 첫 날인 오늘 교회는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를 기념합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340년 무렵 로마인 가문에서 태어나 지금의 독일 트리어 지방에서 자랐습니다.
일찍부터 법학을 공부한 그는 변호사로 활약하다가 로마에서 공직을 맡기도 하면서 명성을 쌓았습니다.
그 덕분에 이탈리아 밀라노 교구의 주교가 된 그는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정통 그리스도교를 옹호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전례의 개혁과 성직자들의 성화를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는데,
그 당시 아들의 회개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던 어머니 모니카의 청을 받아 들여
마니교 이단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를 훌륭한 성품과 탁월한 강론으로 감화시켜 입교시켰습니다.
그가 맞섰던 아리우스(260~336) 이단은 성부 하느님께서는 시작도 마침도 없이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성자 예수님께서는 탁월하기는 해도
피조물 중 하나이지 결코 하느님과 같은 반열로 인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요한 복음사가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 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명백히 증언한 바 있었습니다.
천지 창조 이전부터 계시던 말씀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증언하는
요한복음 서문은 강생의 신비에 대한 장엄한 고백입니다.
이러한 신적 기원을 아리우스 이단은 부인했고, 이를 니케아 공의회(381)에서 이단으로 규정하여
축출하면서 교회의 교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축출된 후에도 그 영향력이 교회 안에 만만치 않게 남아 있었기에
암브로시오가 맞서야 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떨까요? 아리우스라는 이름은 잊혀졌어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조는 여전히 막강합니다.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으로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따라서 그분의 신성을 부인한다는 것은,
강생의 신비를 부인하는 것이며 또한 그분이 보여주신
인간 사랑이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임을 역시 부인하는 것입니다.
즉,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사랑이 곧 하느님께 베푼 사랑으로 간주하여
최후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시겠다는 예수님 말씀을 진리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런 불가지론(不可知論)적이고 무신론(無神論)적인 경향에 대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형제들」이라는 사회회칙을 내놓으심으로써 응답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교리를 믿기 이전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고,
그분이 행하신 형제애와 사회적인 우애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정하고 이를 본받고자 애쓰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가톨릭 신자들이 앞장서서 모든 인류와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천명하신 것입니다.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가 인간 존엄성의 발로가 되지 못하고 있는 아리우스적 이단의 그림자는
오늘날에도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사조에 기생하여 자라난 개인주의 풍조가 그러하고,
인류의 폭넓은 협력을 가로막는 민족주의적 포퓰리즘 풍조도 그러합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만능을 우상처럼 신봉하는 경향이 있고,
민족주의는 우월한 국력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제시하는 제3의 길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타난 바,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를 앞세운 인도주의의 길입니다.
인류는 한 가족이며 형제 자매로서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세계적 보건비상사태로 말미암아 이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는데,
세계가 지구촌처럼 긴밀하게 협력하게 현대에 와서 인류는 함께 협력할 때에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고, 행복과 번영을 위한 목표는 공동의 목표가
될 때라야 비로소 달성 가능하다는 것임을 명백하게 일깨워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의 이러한 가르침은 메마른 사막을 시냇물이 흐르는 초원으로
바꾸려는 시도와도 같이 무모해보이기도 하고, 눈먼 이들의 눈을 뜨게 하고
귀 먹은 이들의 귀를 열게 하려는 시도와도 같이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대 인류는 사랑의 현실에 대하여 사지가 마비된 중풍병자와도 같고,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으며,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이 병든 인류에게 성령으로 현존하시면서,
그 병 – 사랑할 줄 모르는 병 – 을 고쳐주시고,
나아가서는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그동안 지은 죄 – 사랑을 거부한 죄 –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 용서에 따른 보속은 당연히, 이제는 사랑하라는 명령이자 당부일테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는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을 찾아올 수 없었으므로,
그의 이웃 사람들이 그를 들것에 누여서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계신 집 앞에 군중이 몰려 있었으므로, 지붕을 뜯어서 그분 앞으로 병자를 내려보내는,
기상천외한 방식을 고안해서까지 그 이웃들은 중풍병자를 도와주었습니다.
이 이웃의 사랑 모습에서 우리는 가톨릭 교회와 신자들이 해야 할 역할을 봅니다.
중풍병자처럼, 사랑하러 움직일 줄 모르는 인류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시켜 주는 그런 역할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 귀머거리 상태이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말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육성으로 듣는다 해도 영적으로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형제적 사랑에서 나온,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기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절박하게 필요로 합니다. 이 사랑으로, 인간은 존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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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대림 2주간 월요일(루카5,17-26)<좋은 이웃이 되어라>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모습이 멀리 있는 사촌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살아가면서 이웃을 잘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잘 만나 복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웃에게 복이 되어주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 되어주길 바라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복을 지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커지기를 희망합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가 천정을 벗겨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루카5,20).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육체적인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병과 허약함 뿐 아니라 그 속을 고쳐 주셨습니다. 인간은 겉모양을 보고 판단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영혼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의 뿌리를 다스리시고 부족함을 충만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명의는 원인을 치료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말씀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중풍병자는 군중이라는 장벽과 지붕이라는 걸림돌을 넘어 예수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넘어야 할 산을 넘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예수님시대에 병자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그리된 것이라 여겼으니 ‘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은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이웃을 잘 만났습니다. 그는 이웃이 있었기에 능력의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모두를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잘 만난 이웃사촌이 복덩이 입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이웃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수고와 땀이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믿음을 보고도 은총을 허락하시니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도 다 복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큰 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미심쩍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하시는데, 사람은 용서보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판단하고 심판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 마음을 아시고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을 드러내셔서 믿도록 해주셨습니다. 판단과 심판에 앞서서 용서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두려움에 차서 신기한 일을 보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용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 일은 오늘도 믿는 이들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신부님 고맙습니다. 제가 성경에 맛들이게 되었습니다.”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느 날, 몸이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안수를 받으며‘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몸이 많이 아팠지만 아픈 것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때가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밥 대신 성경을 챙겼고, 성경을 읽는데 말씀이 꿀같이 달았습니다.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던 말씀이 마음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저는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성경을 읽게 되었고 저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대단한 학자가 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날 이후로 성경을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었습니다.”
큰 믿음에 바탕을 둔 행동에 신기한 일은 여전히 일어날 것이고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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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대림 제2주간 월요일 (루카 5,17-26)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처음에 선포하신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24,47-48).
이 말씀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받는다고)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바로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는 소식’(복음)이고,
‘회개’와 ‘믿음’은 그 기쁨이 실현되는 방법,
즉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법(구원받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용서’는 ‘구원’과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용서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용서’이고 ‘구원’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이미 주신 용서를 받아들여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이미 주신 용서를 받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18-20)”
이 이야기에 나오는 중풍 병자는 ‘몸의 병’을 고치는 일도 원했겠지만,
‘죄를 용서받는 것’을 더 간절하게 원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도 그의 죄를 용서하는 일이
더 급하고 더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나는 너를 죄에서 구원한다.”) 라는 선언입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그 병자가 이미 회개했음을
인정하신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라는 말에서 ‘그들’이라는 말은,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그 병자를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라는 말은,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믿었고, 회개했고,
용서받기를 원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은,
중풍 병자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 됩니다.
(그들이 지붕으로 올라가고, 기와를 벗겨 내고, 환자를 평상에 누인 채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낸 일은, 그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 모두가 치유와 용서와 구원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단순히 바라기만 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행동으로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희망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예수님 말씀을 “나는 너를 죄에서 구원한다.”로 바로 알아들었고,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됩니다(루카 5,21).
하느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에(하느님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너를 죄에서 구원한다.” 라는 말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는 그들의 생각은(루카 5,21),
생각 자체로는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서
그렇게 생각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루카 5,22-24).”
여기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죄를 용서하는 일(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과 “중풍을 고쳐 주는 일”은
둘 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중풍은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즉 하느님의 권능으로만 고칠 수 있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표현만 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그 병자의 중풍을 고쳐 주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그 병자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그의 몸을 고쳐 주는 일은 모두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작정하신 일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문은 ‘상황 설정’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때문에 중풍을 고쳐 주신 것은 아니고, 중풍을 고쳐 주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그 권능을 통해서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권한을
깨닫게 되고 믿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시고,
한 마디 말씀만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두 죄수 가운데 한 사람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루카 23,42-43).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만으로 그 죄수는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다고(구원받았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죄수의 이야기에서 놓치면 안 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 죄수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아무런 자격도 갖추지 않고서
‘무임승차’ 하듯이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죄수는 분명히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했고(루카 23,41),
예수님께 구원을 간청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구원받기에 합당한 회개를 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죄수 모두에게 구원을 주셨지만,
오른쪽 죄수만 회개해서 그 구원을 받았고, 왼쪽 죄수는 회개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구원을 주시는데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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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0년 코로나19는 고인이 되신 분들을 위한 장례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사랑하는 남편의 손을 잡지 못하고, 창 밖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화상으로 인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저도 한국에 가지 못하고 미국에서 연도와 미사를 하였습니다. 동창신부님이 어머니 마지막 가는 길을 영상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영상으로 어머니의 입관 예절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구장님께서 집전하시는 장례미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위한 동창 신부님의 강론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와서 일상의 소중함을 함께 느끼면 좋겠습니다.
고인이 되신 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빈소에는 가지 못하지만 조의금을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빈소에 와서 고인을 위해 연도를 바치고 유족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례미사에 와서 고인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인이 묻히는 장지까지 가서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친할지라도, 사랑하는 가족일지라도 거기까지입니다. 고인과 함께 무덤에 묻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떠난 고인이 천상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겨 드립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 돌아 갈 것을 믿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하느님께서는 비록 우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하얗게 하시고,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희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절망은 희망으로, 어둠은 빛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죄인으로 멸시받고, 공동체로부터 쫓겨났던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았고, 공동체로부터 다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화려하고, 커다란 건물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어도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부님들과 함께 뉴저지에 있는 ‘Worthington State Forest Park'엘 다녀왔습니다. 델라웨어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공원입니다. 조금 무리하게 걸었더니 다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약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챙겨오지 못했습니다. 말은 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함께 했던 신부님이 어디 아픈지 물어보았습니다. 다리가 조금 아프다고 말했더니 기꺼이 약국까지 같이 가 주었습니다. 다행히 약을 구할 수 있었고, 남은 일정을 차질 없이 보낼 수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아픈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갔던 따듯한 이웃 같았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도움으로 걸을 수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이웃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걷게 해 주셨습니다.
꿈과 희망은 혼자일 때는 그대로 꿈과 희망으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함께 할 때면 꿈과 희망은 현실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함께하는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시고,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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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340-397) 기념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상에서 천국을 삽시다
- 형제적 사랑과 믿음, 주님의 용서와 치유 -
오늘은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지금도 살아있는 느낌이 드는 친밀한 성인들은 우리 가톨릭 교회의 자랑이자 보물이 됩니다. 성인들보다 더 확실히 하느님을 증거하는 분들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삶의 좌표가 되고 끊임없이 희망과 용기를 주는 성인들입니다.
만 57세 선종하기까지 참 치열히 사셨던 성인은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주교로 추천된후 세례받고 주교품에 올랐습니다. ‘로마인 이야기’ 14권 표지는 ‘그리스도의 승리’란 표제에 처음으로 로마 황제가 아닌 ‘성 암브로시오’ 초상화가 나오며 마침내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를 능가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교황 그레고리오와 함께 서방 4대 교부중 한 분입니다. 네 분 교부 하나하나가 참 불가사의한 분들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안에 이렇게 무한한 능력을 주셨는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어지러웠던 시절에 혼란에 휩싸이지 않고 세상 한복판에서 독야청청獨也靑靑 천국을 살았던 성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에 나오는 놀라운 인물, 성 암브로시오와의 만남에 관한 생생한 일화를 나눕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습니다만, 꼭 필요한 요기로 몸을 돌보거나 독서로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그가 책을 읽을 때에도 눈은 책갈피를 더듬어 나가고 마음은 터득한 바를 되씹고 있었지만 목소리와 혀는 쉬고 있었습니다. 가끔 저희가 그를 찾아 갔는데 누구든지 들어가지 못하게 금하는 법도 없었고 또 누가 찾아왔다고 자기에게 알리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소리없이 책을 묵독하고 있음을 보았고, 그럴 때면 저희도 하릴없이 소리 내지 않고 한참동안 말없이 그냥 앉아 있다가 가만히 자리를 뜨곤 하였습니다. 그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에게 누가 번거로움을 끼칠 엄두가 나겠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노의 증언입니다. 생활속의 관상가 성 암브로시오에게는 독서가 관상적 휴식시간 이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렉시오 디비나 성독을 일상화했던 성인이었습니다. 구두점과 띄어쓰기가 없어서 소리 내어 읽음으로써 단어와 문장을 구분하던 시대에 주교는 눈으로 묵독했던 것이며, 성 아우구스티노에 충격적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소리 내어 책을 낭독하였기에 눈으로 하는 묵독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지요. 성인의 마지막 임종어도 그가 얼마나 치열한 휴식없는 삶을 살았는지 보여 줍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단 말인가! 오,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하시지 마시고 저를 거절하지 마옵소서”
연옥같은 세상에서 천국을 살았던 성인들입니다. 결코 환경을 탓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천국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그 모범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이사야의 하늘 나라 꿈은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지요.
이런 꿈을 앞당겨 현실화하여 살았던 이사야 예언자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빛나는 꿈이 있었기에 엄혹한 현실에 압도되지 않고 기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한 문장 생략할 수 없을 정도로 빛과 생명이 넘치는 내용들입니다. 내면이 광야처럼 사막처럼 메말라진, 또 현실에 좌절한 우리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너희는 맥풀린 손에 힘을 불어 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굳세어저라, 두려워허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이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의 사라지리라.”
이런 아름답고 황홀한 이사야의 예언은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중풍병자 및 그 동료들간이 만남을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이어 대림시기 이 거룩한 공동체 미사전례를 통해서도 그대로 실현됩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중풍병자 동료들의 형제애와 믿음입니다. 공동체의 사랑과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켰고 치유에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중풍병자 동료들 공동체의 일련의 눈물겨운 형제적 사랑과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1차 치유가 죄의 용서 선언입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죄의 용서에 전제되는 공동체의 믿음이요, 우선 죄의 용서를 통해 영혼을 치유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충격에 빠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반응에 관계없이 중풍병자에 육신의 치유를 감행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대로 미사장면을 압축한 듯 합니다. 공동체 형제들의 사랑과 믿음 덕분에 주님을 만나 영육의 전인적 치유를 받아 구원된 중풍병자입니다. 불운의 사슬에서 벗어나 완전 부활의 새 삶을 살게 된 중풍병자입니다.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고, 놀라움과 두려움에 찬 사람들은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대로 제1독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중풍병자의 치유과정이 상징하는 바 그대로 공동미사전례의 은총입니다. 공동체 형제들의 사랑과 믿음 덕분에 주님으로부터 죄의 용서와 더불어 육신의 치유로 전인적 구원을 받는 우리들 또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고백하게 됩니다. 영성체전 사제의 기도문 역시 공동체 믿음의 결정적 역할에 대한 은혜로운 대목도 생각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공동체 형제들의 사랑과 믿음을 보시고 죄의 용서와 더불어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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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사회 교리 주간-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5,20)
'하느님이신 예수님!'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는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시대 당시 유다교 지도층에 있었던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다인들의 사고방식은 병은 죄로부터 오고, 오직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중풍 병자에게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카5,21)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암브로시오 성인'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간을 흔들었던 '아리우스 이단'과 맞서 싸우면서 정통 그리스도교를 옹호한 분이십니다. 아리우스 이단은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했습니다.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암브로시오 성인은 마니교 이단에 깊이 빠져 있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회개로 이끈 분이십니다.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분!
그리고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매일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하느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러 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 병자를 죄의 사슬에서 그리고 육의 사슬에서 풀어주십니다.
자주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짓는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살리러 오시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굳게 믿고, 이 믿음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루카5,26)
날마다 우리 안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신기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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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2주간 월요일]
누군가 약하면 약할수록, 문제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사랑으로, 더 큰 자비심으로 그를 공동체의 중심에 둬야겠습니다.
중증 중풍병자를 향한 이웃들의 지극정성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그들은 치유자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중풍병자를 위한 평상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중풍이 깊어지면서 온 몸이 마비되어 하루 온종일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중풍병자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며, 평상에 들어옮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곳으로 옮겨오는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환자가 누워있는 무거운 평상을 들고 보조를 맞추어 ‘하나 둘 하나 둘’ 하면서 조심스럽게
먼길을 걸어왔을 것입니다.
막상 현장에 도착한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셀수도 없이 많은 환자들이 이스라엘 전역에서 몰려온 것입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다보니 사도들은 질서를 유지시키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대기 번호표를 받았는데, 기다리다가는 밤을 지새워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난감했던 이웃들은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을 어떡하지? 환자 상태는 심각한데, 순번대로라면 이틀 밤을 꼬박 지새워야겠고,
환자에게 밤이슬을 맞게 할수도 없고...’
마침내 그들은 묘안을 짜냈습니다.
상황이 하도 다급하다보니 편법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개폐가 가능했던 지붕을 벗겨내고, 위에서 아래로 중풍병자를 내려보내기로!
중풍병자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던 이웃들이었습니다.
어떻게든 한번 살려보려는 그들의 마음, 어떻게든 새 삶을 살게 도와주려는 마음,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백방으로 노력하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돋보입니다.
참으로 인간미 넘치는 이웃들입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가장 약한 지체였던 중풍병자를 가장 중심에 두었습니다.
어찌 보면 공동체의 가장 큰 약점이자 수치꺼리인 중풍병자를 가장 귀중히 여겼습니다.
그를 위해 공동체 모두가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 중풍병자 이웃들의 정성, 따뜻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높이 평가하십니다.
기상천외한 그들의 방법이 예의가 아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으시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공동체 안에 가장 중심에 둬야할 대상, 가장 배려 받아야 할 대상, 가장 사랑이 필요한 대상이 어디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약하면 약할수록, 문제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사랑으로, 더 큰 자비심으로 그를 공동체의 중심에 두고, 그를 꼭 안아주고, 결국 그를 구원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중풍병자를 향한 그 지극 정성, 그 간절한 마음이 하늘조차 움직였습니다.
하느님 마음조차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가장 나약한 존재를 향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각별한 마음, 환자 중심주의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중풍병자 입장에서는 또 얼마나 감동적이고 감격적이었겠습니까?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습에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쉼없이 흘렸을 것입니다.
나를 들것에 싣고 그 먼길을 뛰어온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습, 나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습에, 반드시 치유받아 백배 천배로 갚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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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전삼용 요셉 신부님. [대림 제2주간 월요일]
고해성사가 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과정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내용은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시며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십니다.
당시 ‘병’과 ‘죄’는 하나였습니다. 병이 죄에서 기인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낫게 하는 것이나 죄를 용서하는 것이나 매한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병을 고칠 기적을 할 수 있음은 믿어도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없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사람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것일까요?
그러면 너무 쉽게 죄를 용서받기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용서받으면 자신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핑계가 없어집니다.
용서받으면 용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더는 죄를 짓지 못할 것을 압니다.
죄를 짓는 것 안에는 반드시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근저에 깔려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가서 운전병 훈련을 받을 때 어떤 바람둥이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는 수십 명의 여자와 잠자리한 것을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온 저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이 스물이 갓 넘어서 50명 넘는 여자와 사귄 것입니다.
그의 집은 꽤 부자였고 부모는 커다란 식당을 몇 개 하고 있었으므로 밤늦게까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자들을 집에 데려와서 그런 삶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어 보였습니다.
제가 그러면 첫 경험은 언제냐고 물으니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마구 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가 당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누나가 자신을 데리고 가서 첫 경험을 했는데 그 누나는 아무 남자나 데리고 가서 잠자리하는 평판이 아주 안 좋은 그런 여자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첫 경험이 그런 여자에게 빼앗긴 것이 그의 마음속에 큰 분노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 누나와 똑같은, 아니면 더 나쁜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언젠가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야 할까요?
자신의 결심으로 그런 삶에서 되돌아올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먼저 죄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가 그런 문란한 삶을 사는 힘은 자신을 더럽혔다고 믿는 그 누나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리고 그 분노가 자신이 지금 짓는 죄들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누나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항상 그 분노가 또 다른 죄를 쉽게 짓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누나를 용서하면 그런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먼저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그 죄의 원인인 누나를 용서하겠다는 말은, 마치 속옷이 더러워서 겉옷으로 그것이 나타나는데 겉옷을 벗지 않고 속옷을 갈아입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겉옷을 벗어야 속옷도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여자에게 다 찾아다니며 용서를 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 찾지도 못할뿐더러 모두에게 용서를 얻어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가서 용서를 청해야 할까요?
이때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표징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하였을 때 용서를 청할 용기를 내려면 그 사람이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지 그 표징을 먼저 찾습니다.
아내와 다투었다면 남편은 장인·장모에게 먼저 용돈을 드리고 옵니다.
그러면 그 소식을 들은 아내는 남편이 들어올 때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맞이합니다.
그때 남편은 자신이 잘못한 것의 용서를 청합니다.
아내의 용서 사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거절당할 수도 있기에 그러한 사인이 없이 무조건 용서를 청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라면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신다는 표징은 바로 ‘병이 치유되는 기적’입니다.
그런 기적을 인간에게 맡겼다면 인간을 통해서도 죄를 용서해주시겠다는 표징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병을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고 그것을 믿으라고 기적을 행하는 권한도 주셨습니다.
자녀가 부모가 주는 밥은 매일 먹으면서 부모가 자신은 용서하지 않는 분이시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를 보면 둘을 알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었어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인간에게 주실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의 힘으로 기적도 일으키고 죄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는 분께서 그 안에 앙꼬와 같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빼고 주셨다고 말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깎아내리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개신교도 하느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병을 치유하는 기적의 능력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쉬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주시지 않으셨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사실 기적을 행하기보다 더 쉬움을 압니다.
우리는 기적은 못 해도 이웃의 잘못을 많이도 용서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더 쉬운 것은 안 주시고 더 어려운 기적의 능력만 주셨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다 주시지 못하는 자비롭지 못한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자비롭지 못한 분으로 여기며 직접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청합니다.
이런 오류를 통해 진짜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지금 지은 죄를 분명히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또 누군가를 용서하는 힘이 됩니다.
대부분 우리가 짓는 죄의 근저에는 부모가 마땅히 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랑을 받지 못한 분노가 있습니다.
결국, 그 분노의 불을 끄기 전까지는 지금 짓는 죄들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 분노 때문에 지은 죄들부터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뿌리도 용서할 힘이 생깁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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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과 찬양의 연관성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 대목에는 여러 관전 포인트가 숨어 있습니다. 지붕까지 올라가 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보낸 이웃들의 헌신과 믿음, 용서의 권한, 치유와 용서의 연관성,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의심 등등 그런데 오늘 말씀은 제게 치유된 이의 태도를 더 확대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
당시 병을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병에 걸린 것도 힘든데, 거기에 더해 죄인이라는 주홍글씨까지 떠안아야 했지요. 환자에게는 병으로 인한 고통에 부끄러움이라는 가중처벌까지 주어진 것이니 참 안타깝지요.
중풍에 걸려 고통 받던 그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받았다."는 예수님 말씀이 참 놀랍고 감사했을 터입니다.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원래의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마음 속에서 일기 시작합니다. 이 희망의 실현은 그리 머지 않은 듯 보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루카 5,24)
기대에 찬 그의 앞에서 잠시 신학적 논쟁이 오갑니다. 소위 배운 이들, 제도와 학식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의 불편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알아차리신 것입니다.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인듯 하네요. 하지만 병자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자신의 죄가 사해진다면 곧 이 지긋지긋한 병마도 떨어지게 될 것이니까요. 그런 일은 하느님의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분을 그저 믿으면 됩니다.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5,25)
그는 죄의 용서와 육신의 치유, 모든 것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그분은 별로 개의치 않으시는 듯 보입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치유된 이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느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어나 평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지요. 찬양은 명령한다고 튀어나오는 태도가 아닙니다. 감사와 찬미가 내면에서 솟구쳐 오를 때 흘러나오는 기도가 찬양입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할 때, 누가 권하지 않다도 기쁨에 찬 찬양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기도를 무척 좋아하십니다. '내 마음을, 내 사랑을 네가 알아들었구나. 용서와 구원을 깨달았구나.' 하시며 어린아이처럼 흡족해하실 겁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의 대목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 환호와 환성이 가득합니다. 구원의 날, 모든 피조물이 주님 앞에서 흥겨워하며 한껏 행복을 누리리라는 예언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는 우리의 입꼬리까지 살며시 올라갈 정도로 생기와 축복이 넘치는 광경이지요.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이사 35,9)
온갖 질병과 장애로 고통 받던 이들이 치유되고, 사막과 광야는 꽃을 피웁니다. 무너져가던 이들이 힘을 얻고 해를 끼치던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거룩한 길"(이사 35,8)에는 구원받은 이들과 해방된 이들만 들어서서 걷는다고 하십니다. 육신의 치유와 생명이 구원으로까지 이어진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빈곤과 억압에서 벗어났다고, 곤란한 지경에서 빠져나왔다고, 앓던 질병이 떨어져 나갔다고 모두가 다 구원자 하느님을 떠올리며 감사와 찬양을 올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물리적이고 환경적인 곤란의 해소가 구원이 되려면, 곧 주님의 거룩한 길에 들어서려면 이 일을 베푸신 주권자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게 첫째입니다. 이 감사와 찬양은 하느님께 이득이 되는 게 아니라, 바치는 이에게 구원을 각인시켜 주지요.
그래서 구원받은 이는 찬양을 멈추지 않고, 찬양하는 이는 구원받은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찬양은 강요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지만, 구원은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오늘 치유받은 중풍병자처럼, 신기한 일을 보고 놀란 군중처럼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앓는 내외적 고통과 결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싶어하십니다. 문제는 이를 구원으로 연결시키는 우리의 능력이지요. '나는 구원받은 존재인가?' 의문이 든다면, 내가 감사하고 찬양하는 사람인지를 성찰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고 찬양하는 능력이 출중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구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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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 김용원 토마스 신부님. - 대림 제2주간 월요일
◉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공동체)이다. ◉
네덜란드의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요하네스 에른스트 딩거(Johannes Ernst Dinger) 박사는 친구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친구는 세 종류가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유순함을 가르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에게 조심성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나에게 자립심을 가르쳐 준다.” 친구가 모두 내게 도움만을 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피해를 주는 친구도 얼마나 많습니까? 딩거의 말처럼 사랑도 또 미움도 또 무관심도 주는 것이 친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주는 친구만 친구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미움을 주고 또 무관심한 사람 역시 친구이며, 이들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사랑만 주는 친구만을 원하고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내 친구의 2/3를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친구와의 만남도 내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모든 이와 함께 어우러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요 ‘공동체’입니다.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랑과 친교를 나누며, 이웃과 더불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의 어느 후미진 곳에 선교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여인들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문명의 첨단을 사는 오늘날 그들이 너무나 미개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본국 친구들에게 협조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은 곧바로 그 마을에 수도 시설을 해 주었습니다. 마을은 집집마다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물이 콸콸 쏟아져 내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며 문명국에서 온 이 선교사에게 감사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물동이를 이고 힘겹게 물을 나르는 일도, 빨래 더미를 들고 우물터에 갈 일도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점점 생기를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삶이 편리해진 사람들은 만남이 뜸해지면서 개인적이거나 이기적으로 변해 갔고, 마을은 점차 삭막해져 갔습니다. 그제야 자신들의 변화를 알아채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원흉이 수도 시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우물터에서 물뿐만 아니라 삶의 사연들을 나누면서 가슴속에 하나 가득 삶의 생수도 길어 왔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수도 시설을 부수고 우물터를 복원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다시 그리로 몰려들었고 마을은 다시 옛날의 생기를 찾았습니다. (『신앙인의 사색』)
인간의 만남과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전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웃 사람들이 함께 모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의 정과 삶의 사연을 나누는 것은 우리를 영적으로 살아 있게 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라고 했듯, 이웃과 사랑과 친교를 나누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영적인 생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의 삶은 참으로 기구한 것이었습니다. ‘평상에 누인 채로’(루카 5,18)란 표현을 통해서 중풍이 이미 많이 진전되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발병된 후, 한번 나아보겠다고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러던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한 가지 희소식이 전해집니다. 예수님이란 분이 이 마을, 저 마을 전도를 다니는데, 그의 능력이 신통해서 죽어가는 사람들도 낫게 한다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계신 곳까지 가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요즘처럼 휠체어도, 자가용도, 구급차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참으로 곤란했습니다.
그런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이웃들이 나섰습니다. 이웃들은 병자를 옮겨가기 위해 간이침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무막대를 달았습니다. 들것을 만들어서 환자 눕혔습니다. 이웃들은 교대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병자를 예수님이 계신 집 앞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도착해보니 더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 앞에서는 치유를 받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웃들은 편법이지만 한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지붕으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지붕을 통해 병자를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방으로 내려보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웃들의 병자를 향한 극진한 마음을 눈여겨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향한 이웃들의 극진한 사랑과 정성에 탄복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 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근거는 ‘그들의 믿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교회로, 하느님의 백성으로, 공동체로 부르시고, 우리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신학자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장 큰 업적은 교회의 본질을 ‘교계제도’가 아닌 친교의 ‘공동체’로 새롭게 인식하여 성직자와 일반신도 모두 동등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정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이웃과 더불어 사랑과 친교를 나누며 하느님께 나아가야 할 공동체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한 사람의 동료를 낫게 하고자 하는 마을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을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참여와 사랑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행위로 병자는 낫고 구원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지금 이런 사랑과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런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지금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의 절박한 사정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듯이 이웃과 애틋한 친교와 사랑을 나누며 산다면, 그때 비로소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요, 하느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 해남성당 김용원 토마스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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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7일 월요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매일미사
_박성수 사도요한 신부 집전
https://youtu.be/NmykHJPa2Pw ( 31:11)
•2020. 12. 7.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박성수 사도요한 신부 (인천교구 인천가톨릭사회복지회 부회장) 집전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26
*** 신부님 강론 10분 32초부터 16분 17초까지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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